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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제국(BC 206~9)은 「초한지」와 「삼국지」 사이에 낀 나라다. 즉, 「초한지」의 내용대로 유방과 항우가 건곤일척(乾坤一擲) 끝에 유방이 승리를 거두는 동안 진시황이 세운 秦 제국이 멸망하고 수립된 나라가 漢 제국이며, 漢 제국이 멸망한 뒤 촉‧오‧위 세 나라가 천하를 다투는 내용을 담은 소설이 「삼국지」인 것이다. 두 소설 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막상 중간에 낀 漢 제국의 통치 얘기는 없었다. 그런데 漢 제국은 우리 역사와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으므로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유방(BC 247~BC 195)은 변방의 면서기 출신으로 중국 역사상 출신성분이 가장 미천한 제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하‧장량‧한신 등 훌륭한 참모들을 둔 덕분에 모든 조건에서 우위에 있던 항우를 물리치고 BC 206년 漢 제국을 수립했다. 유방이 미천한 신분 출신임을 알고 있는 각 제후국의 귀족들이나 백성들은 새 황제를 오히려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금세 제국이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진시황이 다져놓은 법령과 제도가 완벽하여 漢 제국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중앙의 관료기구도 시황제가 구축해놓은 삼공구경(三公九卿) 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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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 제국은 군국제(郡國制)라 하여 도읍을 중심으로 중앙 일대는 중앙집권제로 통치하고 그 바깥 지역은 옛 봉건제를 적용했다. 군국제 결정에는 개국공신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한신‧영포‧팽월 등 항우를 물리치는 데 공이 큰 개국공신들이 그 대가로 각 지역의 제후 자리를 원했던 것이다. 유방은 지방 제후에 자신의 친인척도 함께 배치한 뒤 의심스러운 제후는 하나씩 제거해나갔다. 유방의 오른팔이었던 책사 장량은 이런 꼬라지를 예상하고 일찌감치 토사구팽을 자청하여 장가계에 숨어들어 여생을 편히 보냈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도운 최측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유방도 황위에 오른 지 겨우 7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漢 제국의 최대 적은 북방의 흉노족이었다. 항우를 물리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던 유방은 여세를 몰아 흉노족을 제거하기 위해 손수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그들의 본거지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백전노장인 흉노족의 지도자 묵돌선우의 계략에 빠져 자칫 목숨을 잃을 번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왔다. 도저히 적수가 되지 못함을 통감한 유방은 전략을 바꿨다. 사신을 파견하여 묵돌선우와 화친을 맺고 해마다 흉노족에게 거액의 조공을 바치기로 한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변방의 오랑캐에게 조공을 바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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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가 역전된 것은 제7대 황제인 무제 때였다. 무제(BC 156~BC 87. 재위 BC 141~BC 87)는 무려 54년 동안 보위에 있으면서 漢 제국을 진정한 대제국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용맹하던 무제는 즉위하자마자 연호를 건원(建元)으로 정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연호였다. 漢 제국은 남북으로 빠르게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무제는 정복하지 않은 주변국에게도 漢 제국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복속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무제는 역법(曆法)도 만들어 주변국에도 함께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은 새해가 되면 달력을 만들어 본국은 물론 주변국에도 하사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여 사상적 통일을 기하기도 했다. 漢 제국은 개국 60여 년이 지난 그때까지 진 제국의 통치이념인 법가사상을 따르고 있었으며, 일부 학자들은 도가의 이념을 추종하기도 하는 등 사상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법가사상은 너무 독선적이어서 대제국의 통치이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충과 효를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유학은 황제에게 충성하여 권력을 집중시키고 효를 통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후 유학은 2000년 동안 동아시아 각국의 이념적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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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의 다음 목표는 흉노 정벌이었다. 고조 때부터 변방 오랑캐에게 조공을 바쳐오고 있는 현실은 중화의 자존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제는 위청 장군을 정북대원수로 삼아 흉노족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위청은 군사를 이끌고 고비사막을 넘어 흉노족의 근거지인 몽골을 공격했다. 漢 제국에 패한 흉노족은 무리를 이끌고 중앙아시아로 도망갔다. 흉노족이 들이닥치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 자리잡고 있던 대월씨국은 남쪽으로 달아나 인도를 정복한 뒤, 인도 북부지역에 쿠샨왕조를 개창했다.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족의 일부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를 거쳐 중부유럽으로 진출했다. 중부유럽을 차지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흉노족을 훈족이라고 불렀는데, 빠른 기동성과 용맹성을 지닌 훈족에게 백전백패하여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다. 유럽 전설에 나오는 마왕들의 이야기는 모두 훈족을 모델로 하고 있다.
흉노족에게 쫓긴 게르만족 일파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476년 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 다른 일파는 이베리아반도까지 쳐내려가 서고트왕국을 건설했으며, 게르만족의 또 다른 일파인 반달족은 서고트왕국에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중부유럽에 터를 잡은 흉노족은 훗날 헝가리제국을 건설했다. 명칭이 흉노-훈-헝가리로 변한 것이다. 결국 한 무제의 흉노족 정벌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세계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때 개척된 비단길은 이후 중국과 서역을 잇는 교역로로서 오랜 세월 동서무역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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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초부터 최대의 적이었던 흉노족을 물리친 무제는 내친 김에 남으로 월남을, 북으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자리에 낙랑‧임둔‧진번‧현도 등 한사군을 설치했다. 무제는 중화를 벗어난 지역은 군을 설치하여 다스리는 간접 통치방식을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놈들은 조선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해 19세기 중반부터 저거 멋대로 조선사를 편찬하면서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왜곡했지만, 최근 소위 ‘동북공정’을 앞세운 중국 측의 유적 발굴에서 한사군이 만주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강호동 왕자와 낙랑공주의 로맨스도 만주에 있던 고구려성과 낙랑성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한사군은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던 무제가 죽자 승상부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친인척 위주로 설치했던 내조(內朝)가 오랜 세월 동안 부작용을 양산했다. 황실의 외척인 왕씨 가문의 왕망(BC 45~AD 25)은 자신을 가황제(假皇帝)라 칭하면서, 원제(재위 BC 48~BC 32)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황제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국정을 농단했다. AD 8년, 왕망은 원제로부터 강제로 양위를 받아 국호를 신(新)으로 고친 뒤, 전국의 토지를 국유화하고 새 화폐를 발행하는 등 닥치는 대로 개혁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모든 정책은 즉흥적이었고 후속대책이 없었다. 왕망은 자신의 이름대로 불과 15년 만에 왕창 망했다. 역사는 왕망 이전의 장안 시대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왕망 이후의 낙양 시대를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첫댓글 민족대이동이 그때 그렇게 시작됐었구나.
베니스라는 도시도 바로 그 민족대이동과 관련되어 생겼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