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 옆 마룻바닥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시엔, 1882년 4월, 연필 검은색 분필 잉크와 붓
테오에게...
오늘 모베를 만나 아주 유감스러운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그와는 만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와 이야기라도 나눌 겸 내 그림을 보러 오라고 했는데, "다시는 자네를 보러 가지 않겠네. 다 끝났어" 라고 딱 잘라 거절하더군. 모래언덕에서 헤어지기 직전에 그가 "자네는 타락했어" 라고 했다. 나는 돌아서서 혼자 집까지 걸어왔다.
모베는 내가 "나는 예술가입니다" 라고 말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취소할 마음은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 말은 무엇인가를 온전하게 찾아낼 때까지 늘 노력하는 걸 의미하거든. 그건 "난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걸 찾아냈지요" 라는 이야기와는 정반대 되는 말이다. 나에게는 그 말이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아주 열중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테오야, 나도 귀가 있다. 누군가 "넌 정말 타락했어" 라고 말할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그냥 돌아서서 혼자 집까지 걸어왔다. 모베가 그 말을 미리 준비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에게 설명을 요구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을 작정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모베가 약간의 가책이라도 느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어떤 일 때문에 의심을 받고 있다....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어떤 것을 비밀로 하고 있다.
글쎄, 예절과 교양을 숭배하는 너희 신사들에게 물어보고 싶구나.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 어떤 쪽이 더 교양 있고, 더 자상하고, 더 남자다운 자세냐?
지난겨울, 임신한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 남자한테서 버림받은 여자지. 겨울에 길을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그걸 어떻게 얻었는지는 상상할 수 있겠지. 하루치 모델료를 다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주어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
처음 그 여자를 만났을 때는 병색이 짙어 보여서 눈길이 갔다. 목욕을 시키고 여러모로 보살펴주자 그녀는 훨씬 더 건강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해산하게 될 산부인과 병원이 있는 레이덴까지 동행했다.
도대체 어떤 무능한 남자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했기에 혼자만 알고 있으려 했다.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 게 힘들었지만 조금씩 배우게 되었고, 나는 좋은 모델을 가진 덕분에 데생에 진전이 있었다. 이제 그녀는 순하게 길들여진 비둘기처럼 나를 따른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때에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녀를 계속 도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 과거의 길, 그녀를 구렁텅이로 내몰 것이 분명한 그 길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녀는 돈이 없지만, 내가 그림을 그려 돈을 벌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요즘은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다. 잠시 유화와 수채화를 제쳐둔 것은 모베가 떠난 것이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한 말을 진심으로 철회한다면, 나도 용기를 내어 새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는 붓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날카로워졌거든.
너라면 모베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겠니? 우선 상황을 설명해 주마. 너는 내 동생이니 나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의논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러나 누군가에게 "넌 타락했다" 라고 말한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고, 잘해 나갔다.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다른 여자가 내 가슴을 뛰게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멀리 떠나버렸고,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이지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
모베, 테오, 테르스테이흐, 바로 너희가 내 생계를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를 거지로 만들 것이냐? 내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어떤 말을 듣게 될지 기다리고 있겠다.
1882년 5월 3일
첫댓글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마도 고흐의 생전에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가 아니였을까 짐작됩니다
유리처럼 맑고 섬세했던 영혼이 세상의
조롱과 맞서야 했을테니까요~
고흐가 견뎌야햇던 외로움의 심연까지
보이는듯해 마음이 괴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