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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서창록 고대 국제대학원 교수 한국인으론 처음 유엔 시민적·정치적 권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됨
2019년 경기도 파주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첫 발병, 돼지 38만 마리 살처분
2016년 마지막 프로씨름단 현대삼호 해체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북.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정상회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9월17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평양 백화원초대소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정상화 문제를 비롯한 현안들을 논의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김위원장이 "핵과 관련해 제반 국제협약을 모두 준수하고 미사일은 기간제한없이 발사를 동결하겠다"고 약속했음을 분명히 했다. 양국 정상회담 성사로 북한은 양국간 수교시 일본에 대해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과 戰後(전후) 적대행위에 대한 배상금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고, 일본은 自國(자국)이 동북아 문제의 主役(주역)임을 세계에 알리게 됐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괴선박 공작에 대해 전면 인정하고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對日관계 회복 의지를 보여주려 했는데, 피랍된 14명의 일본인 중 8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내 분위기가 분노로 돌변, 북일(北日)관계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고이즈미는 여론의 반발이 예상했던 것보다 커지자,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북한에 납치돼 사망한 8명의 일본인들에 대한 타살 의혹이 확산되면서 `사망자 진상규명`이 북일간의 또 다른 쟁점으로 떠올랐다. 생존자 5명은 10월15일 일본에 일시 귀국, 기다리던 가족들과 24년 만에 재회했지만 영구귀국에 대한 북일간의 입장차이로 해결에 난항을 거듭했다.
2000년 중국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복원 끝내고 개관
중국 중경(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2000년 9월 17일 한국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중수복원을 마치고 새로 문을 열었다.
독립기념관과 중경 임시정부 구지(舊址) 진열관은 5월 청사 개보수를 위한 협의서를 체결하고 18만 달러의 공사비를 들여,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마쳤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5개동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지 1034평방미터에 연건평이 1322평방미터(약 400평)이다.
한때 중경시의 도시개발 계획에 따라 철거될 위기에 놓였던 임시정부 청사는 1991년 국내 학술조사단의 보고로 보존책이 적극 강구되어, 1994년 양국간에 복원협정서가 체결되고 1995년 8월 11일 1차 복원식을 거행한 바 있다.
1998년 김대거 원불교 3대 종법사 열반
원불교 3대 종법사를 지낸 대산 김대거(84)종사가 1998년 9월 17일 전북 익산 원불교 중앙총부에서 열반했다. 1914년 전북 진안군에서 출생한 대산 종사는 원불교 교세를 확장하고 운영을 체계화하여 오늘날의 원불교로 만든 종교지도자다.
본명은 영호로 11살 때인 1924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에 귀의, 시봉으로서 교리를 연마하다가 1962년 정산 송규 종사에 이어 교단운영을 맡았다. 이후 교화 교육 자선의 3대사업을 더욱 발전시켰다. 천석꾼의 아들로 한시를 잘 지었던 대산 종사는 1946년 해방 직후 서울출장소장 때 이승만, 김구 등과 교분을 쌓기도 했다.
1995년까지 33년 동안 국내외에 수많은 원불교 교당을 개설하고, 교도들을 훈련시켰다. 대산 종사는 원불교를 13개 교구 5백여 교당에 신자수 1백30만명의 국내 4대 교단으로 교세를 확장시켰으며, 특히 심전(心田)개발, 인류공동시장 개척, 종교연합운동에 앞장섰다. 교리해설서 `정전대의`를 저술하기도 했으며,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 가족, 세계는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1997년 소설가 정한숙씨 별세
소설가 정한숙 씨가 1997년 9월 17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정씨는 평북 영변출신으로 문단과 학계 그리고 예술행정분야에서 골고루 큰 업적을 남긴 우리 현대문학의 기둥이었다.
평북 영변출신으로 공산치하를 피해 월남한 그는 1947년 정한모 전광용씨와 `시탑` `주막` 동인으로 참여하며 작가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단편소설 `흉가`로 데뷔한 정씨는 많은 작품을 남기진 않았지만 `전황당인보기` `고가` `금당벽화` 등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주옥같은 작품으로 현대문학사의 한 축을 차지했다. 남북분단의 현실을 닭장에 비유해 우화소설 `닭장관리`를 쓰는 등 창작기법의 실험을 다양하게 시도했으며 `잠든 숲속 걸으면` 등의 시집도 펴냈다.
1954년부터 1988년 정년퇴직 할 때까지 모교인 고려대에서 봉직하며 수많은 문인후배들을 길러냈다. 이후 정씨는 문예진흥원장 등을 역임하며 예술행정에서도 의욕을 보였으며 이같은 활동으로 대한민국예술문학상, 3ㆍ1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4년 재미 원로시인 박남수씨 별세
유신시절인 지난 1975년 홀연히 미국 이민 길에 올랐던 원로 시인 박남수(76)씨가 미국 뉴저지주 자택에서 1994년 9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난 박 시인은 평양숭실상고를 졸업한 다음해인 1939년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 1941년 일본 중앙대 졸업, 1·4후퇴 때 월남했다. 박 시인은 1940년 첫 시집인 ‘초롱불’을 낸 이후 ‘갈매기 소묘’(1958년), ‘새의 암장’(1970년) 등 정갈하면서도 의식 깊은 곳에 서있는 시를 써왔다. ‘새’로 상징되던 그의 긴장과 절제의 시세계에는 이민 후 삶의 깊이와 무게가 수사없이 진솔하게 쌓여 통곡하며 떠난 미국 삶의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락을 함께 했던 부인을 떠나보낸 후 1년 만인 1993년 4월에 낸 시집 ‘그리고 그 이후’(문학수첩)는 이국에서 홀로 황혼을 맞게 된 노시인의 외로움과 죽음의 세계를 초월하려는 자세를 담담히 그려냈다. 박 시인은 1957년 유치환, 박목월, 조지훈, 장만영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를 창립했으며 아세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대시를 통해 발표한 ‘꿈의 물감’으로 1994년 6월 제5회 공초문학상을 수상했다.
1992년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평양). 화해,불가침,교류,협력 등 3개분야 부속합의서 공식발효
1991년 시위현장을 지나가던 서울대 대학원생 한국원 시위 해산하라며 경찰이 쏜 권총에 사망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9월 17일 오후 3시20분, 미국 뉴욕시에 자리잡은 유엔본부에서 제46차 유엔총회가 열렸다. 의장으로 선출된 사우디아라비아의 쉬하비 유엔대사는 의안번호 제20호 신규회원국 가입안을 상정, 안전보장이사회의 권고안을 총회가 채택하여 A/46/L.1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의결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유엔회원국으로 가입하였음을 선포했다.
1949년 1월 19일 우리 정부가 가입신청을 낸 지 42년 만에 이루어진 유엔가입의 순간이었다. 이로써 북한은 160번째, 한국은 161번째 유엔가입국이 됐다.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고착화라고 주장하며 단일의석 공동가입안 만을 고집해 온 북한이 중국과 쿠바를 포함한 국제적 지지가 확실치 않은데다 1990년 4월 제주도 한소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유엔보편성 원칙에 대한 이해를 표시하자 기존의 주장을 포기하고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이루어졌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 서울평화상 제정 발표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개막
`벽을 넘어서-화합과 전진`을 캐치프레이즈로 한 제24회 서울올림픽이 1988년 9월 17일 개막됐다.
10월 2일까지 16일간 열린 이 대회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동서 양진영 160개국 1만3천3백3명이 참가한 사상최대의 올림픽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1984년 LA올림픽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참가거부로 반쪽자리 올림픽이 됐던 데 반해 서울올림픽은 동서가 모두 참가한 지구촌의 대결장이었다.
메달 경쟁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여 5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2위는 금메달 37개의 동독, 3위는 금메달 36개의 미국이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로 부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또한, 이 대회는 세계신기록 33개, 올림픽신기록 227개가 쏟아져 나오는 등 풍성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100m 육상선수 벤 존슨의 약물복용으로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창립
1974년 11월 결성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출범했다. 자유실천문인협회는 처음 고은, 백낙천 등이 주축이 되어 김지하 시인 석방운동을 위한 모임을 몇차례 갖던 중 문인전체의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문인의 자발적 결사체가 필요해 탄생됐다.
1987년 6.29선언이후 시대적 변혁에 보다 긴밀히 대응하면서 민족문제를 폭넓게 수렴한다는 취지하에 범문단적인 문인단체로 새롭게 확대개편한 것이다. 초대회장은 김정한씨였다. 1994년에는 창립 20돌을 맞아 문학의 예술성을 강조하는 `민족문학인 선언`을 채택하기도 했다.
1983년 미스아메리카 최초로 흑인여성 선발
미국의 미인대회에 있어 재능, 두뇌, 미모 등에 중점을 두는 미스 아메리카에 사상최초로 1983년 9월 17일 흑인여성이 선발됐다.
이날 미스아메리카에 선발된 윌리엄즈는 스페인계의 혼혈흑인으로 시라큐스대에서 음악과 춤을 전공하는 20세의 학생으로 키 168cm에 균형잡힌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1921년 시작당시에는 미스아메리카에 흑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참가가 허용되었고 이제까지 최고성적은 1980년의 5위였다. 이날 대회에는 2위 선발자도 흑인이었다. 이로써 흑인도 아름다움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가 됐다
1982년 국무회의, 인구 및 각종 산업시설 배치 등을 조정하기 위한 수도권정비계획법안의결
1982년 레바논 민병대, 서(西)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800명 대량학살
1980년 최초로 어린이가 이해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 사망
1980년 계엄보통군법회의, 내란음모혐의로 김대중에 사형선고
1980년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출범
1980년 미국-중국, 4개협정 조인. 관계 전면 정상화
1980년 독재자 소모사 피살
1980년 9월17일,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의 시가지를 지나는 한 승용차에 바주카포와 기관총이 무차별로 발사돼 차에 타고 있던 소모사가(家)의 마지막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가 형체를 알아 볼수 없는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를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니카라과의 장기독재 가문 소모사가(家)가 43년 만에 종말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소모사는 1년 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에게 ?i겨나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파라과이에서 권토중래를 꿈꾸던 중이었다.
소모사가(家)의 악명은 1937년 아버지 소모사의 쿠데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군부 실력자로, 때로는 대통령으로 1956년 피살될 때까지 20년간 니카라과를 주무르며 철권통치를 행사해왔다. 그의 사후 대통령직을 물려받은 큰아들 소모사가 7년 만인 1963년에 재출마를 거부하면서 니카라과에도 한때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기회가 있었지만 이미 떡고물 맛을 본 측근들이 더 난리였다. 그들은 국가수비대 사령관으로 군권을 장악한 동생 소모사에게 1967년 정권을 내주며 신변안전을 위탁했다. 아버지를 빼닮은 소모사 역시 정계·재계·군부를 한 손에 틀어쥐고 폭압정치를 펼쳤으나 이미 운이 다했다.
1978년 중동평화안, 캠프 데이비드 회담서 조인
1978년 한국-아프가니스탄, 단교
1971년 통혁당 조직 및 사회혼란사건 발표
1971년 김포 무장공비사건 발생
1968년 박정희대통령, 한국-호주 정상회담
1965년 작곡가 안익태 사망
애국가를 작곡한(1936년) 안익태가 1964년 9월 1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평양 숭실학교를 거쳐 일본 국립음악학교서 첼로를 전공한 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대와 신시내티 음대서 첼로와 작곡을 배웠다. 1936년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서 사사했다. 1940~1950년대 유럽과 미주 각 지역의 200여개 오케스트라를 지휘, 명성을 떨쳤다.
스페인 여성과 결혼해 스페인 국적을 얻어 말년에는 주로 스페인에서 생활했다. 1957년 귀국해 마지막 작품 `애(哀) 강상(江上)의 논개`를 지휘했고 1961~63년 3회에 걸쳐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했다. 오늘날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안익태거리가 있다.
1963년 말레이시아연방정부, 인도네시아-필리핀과 단교 성명
1963년 111개국 유엔총회 18차회의 개막
1963년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 발생
1963년 9월 17일 부산에서 콜레라 환자가 발생한 이래 10월 25일까지 전국에서 1천여명이 넘는 환자가 발생, 이중 70여명이 사망했다. 이 콜레라는 날이 갈수록 더욱 번져, 9월 하순에는 서울과 경기도 부평, 경북 포항, 경남 양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 때문에 전국 초중고교는 학교장 재량으로 휴교 조치했다. 정부는 9월 23일 긴급임시각의를 소집, 보사부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콜레라 방역 중앙대책위원회를 구성, 이에 대비토록 하는 한편 국고예비비에서 1천3백50만원을 지급, 7백35만5천5백명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했다. 또 외국에서 4백20만cc의 예방약을 긴급히 얻어왔다. 이와 함께 방역대책본부는 이번 국내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오가와 형중 `엘톨`형에 속하며 1946년 중국 상하이에서 귀환한 교포가 퍼뜨린 클라시칼 콜레라와는 다른 것이라고 발표했다.
1961년 남산 케이블카 착공
1961년 하마슐드 유엔 사무총장 사망
1961년 9월 17일 전쟁으로 찢겨진 콩고에 평화를 안겨주려는 다그 하마슐드 유엔사무총장의 힘든 노력이 그가 북부 로디지아에서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끝이 났다. 세명의 미국인을 포함한 12명의 승무원과 승객이 사무총장과 함께 사망했다.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미국인 경호원은 북부 로디지아의 돌라 공항 근처에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에 몇 차례의 폭발음을 들었다고 전했다. 비행기는 폭파되기 전 공항을 몇 차례 선회하고 있었다.
하마슐드는 카탕가의 모제 촘베를 만나러 가고 있던 중이었다. 촘베는 UN군이 자신의 군대를 격파하여 카탕가의 통치권이 콩고 정부에 넘어간 뒤 북로디지아로 도주했었다. 촘베는 하마슐드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마슐드가 카탕가를 해방시킬 방법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11월 3일에는 하마슐드의 뒤를 이어 미얀마의 우 탄트 대사를 만장일치로 UN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1959년 태풍 사라호 참사(사망-실종 924명, 수재민 98만5천명)
초특급 태풍 사라호가 추석 하루 전인 1959년 9월 17일 새벽부터 당일 밤 12시까지 전남-경남 지역은 물론, 중부내륙지역을 강타했다.
중심기압이 905밀리바인 이 태풍으로 9백2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고, 98만 5천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건물 12만1천37동과 선박 6천6백19척이 파괴됐고, 경작지 12만8천25정보가 침수됐다. 사라호 피해는 그전까지 최고의 홍수피해로 기록된 이른바 `을축년 대수해`(647명 사망-실종)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중앙관상대가 그 전날까지도 "이번 태풍은 대륙까지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17일에는 대체로 날씨가 갤 것"이라고 예보, 국민들을 무방비상태에 빠뜨린 것도 피해가 커진 원인 중 하나였다.
1957년 태국에 군사쿠데타 사리트장군 정권 장악
1953년 미국 국방성, 핵탄두 낙하예상 70개지구 발표
1951년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5개국위원회 설치를 결의
1947년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정식 상정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가 결렬되어 全조선통일임시정부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정식 상정했다. 미국은 또 10월 17일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 1948년 3월까지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에 자유선거를 실시, 국회와 정부를 수립한 다음 90일 이내에 미소 양국군을 철수한다"는 결의안도 제출했다. 이에 앞서 미국은 8월 25일 유엔감시와 인구에 비례한 남북입법관선거 실시, 통일임시정부 수립, 미-소-영-중 4개국 회의안을 소련에 제의했으나 소련이 거부한 바 있다. 11월 14일 제2차 유엔 정기총회 전체회의는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의 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 통일안`을 만장일치로 결의, 마침내 한국 총선거안을 가결시켰다.
1946년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1945년 조선프로문학동맹 결성
1944년 사상 처음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봉우리 모두 오른 이탈리아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태어남
1940년 광복군 창설
1940년 9월17일 새벽 6시. 임시정부 간부들과 한ㆍ중(韓ㆍ中) 양측 인사 200여명이 중국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 모여들었다.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 암흑기였던 1940년 9월17일 새벽6시 중국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 광복군’창설식이 비장한 분위기에 치러지고 있었다
한,중 국기가 힘차게 나부끼는 가운데 김구 주석이 연단위로 올라와 사자후를 토했다
광복군의 얼굴엔 진한 감회가 솟구쳤다
이윽고 김구 주석이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직구성이 발표됨으로써 마침내 임시정부도 21년 만에 무장군대를 갖게 됐다. 광복군이 첫 발을 내 디딘 것이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33년 만에 맞는 감격이었다.
12명의 장교에 병력이라곤 30여명에 불과한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부대원들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1년뒤 300명, 2년뒤 340명으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에서도 광복군은 눈부신 활약을 펼쳐 대일 선전포고(1941년)를 하고, 영국군에 파견돼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1943년)됐으며, 미국 전략정보기구(OSS)와 합작해 국내진공을 위한 특수훈련(1945년)을 받았다.
그러나 조국이 없는 군대의 현실은 언제나 설움뿐이었다. 창설 2개월 만에 본부를 시안(西安), 2년 뒤에는 다시 충칭으로 옮겨야했고, 1941년 11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5년 4월에 이르러서야 중국군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곧 광복을 맞았다.
1939년 소련군 폴란드 진주
1937년 루스벨트 미대통령 뉴딜정책 공포
1935년 필리핀, 케손 초대대통령에 당선
1922년 제1회 조선변호사시험 실시. 4명 합격
1919년 강우규 의사 피체
1917년 프랑스 화가 드가 사망
1917년 작곡가 윤이상 출생
1894년 압록강 해전
1894년 9월17일, 압록강 입구 서해. 청의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맞붙었다.
낮12시50분부터 5시간 동안 이어진 함대 결전에서 일본은 완승을 거뒀다.
청은 군함 14척 중 5척이 격침ㆍ좌초되고 3척이 파손된 반면 일본은 군함 12척 중 3척이 파손되는 데 그쳤다.
인명피해도 청이 전사 850명, 부상 500명으로 일본의 전사 90명, 부상 200명에 비해 훨씬 컸다.
서구 열강은 해전 결과에 경악했다.
외형적인 전력에서 청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청의 해군력은 군함 64척, 어뢰정 24척으로 총 8만4,000여톤. 일본(군함 28척, 어뢰정 24척, 5만9,069톤)을 훨씬 앞섰다.
청의 해군이 4개 함대로 갈라졌지만 북양함대는 가장 강력했다. 1891년 북양함대가 독일에서 사들인 7,335톤급 자매함 진원과 정원을 이끌고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본이 공포에 떤 적도 있다.
막강한 북양함대가 왜 완패했을까.
거대한 덩치로 들이받아 적함을 침몰시킨다는 작전이 일본의 벌떼 전법에 막혔다는 전술적인 패착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총체적 부패. 해군 예산의 절반인 3,000만량이 서태후 별장(이화원) 건립과 환갑잔치에 전용되고 포탄 관리부서는 화약을 빼돌렸다. 일본을 떨게 했던 전함 진원과 정원은 단 3발의 주포 포탄을 갖고 싸웠다.
다른 함정에서도 포탄에 들어갈 화약이 규정보다 적어 사정거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압록강 해전의 결과는 청일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외국 군대가 조선의 땅과 바다에서 혈투를 벌이는 동안 우리의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청과 러시아ㆍ일본 사이를 오가다 망국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1862년 미국 메릴랜드주 안티탬크리크서 남북전쟁중 최대 혈전
1857년 우주 비행이론 선구자 치올코프스키 출생
1826년 독일의 수학자 리만 출생
1787년 미국 헌법 제정
14년 제2대 로마제국 황제 티베리우스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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