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지팡이로 서다/김남수-
등성이 외진 곳, 두두메산*이 지팡이 한 그루 짚고 서있다. 가을을 건너가던 숨찬 바람에 휘청, 긴 목이 위태롭다.
저 가느다란 꽃대로도 누군가의 지팡이가 될 수 있다니! 비닐끈으로 묶어 아카시나무 가지에 걸어주는 내 까치발을 쑥
부쟁이가 받쳐준다. 여름내 산은 해바라기를 짚고 계곡마다 번져가는 연보랏빛 적막을 달랬을까 바람소리 길어 올려 상
수리 여문 생각을 궁굴렸을까 해지는 줄 모르고 우쭐거리는 환삼덩굴 거친 손목을 잡아주는 산지팡이. 절뚝거리는 하루
를 서산 너머로 배웅한다. 까맣게 타 들어가는 심지,
아직 한 됫박 기름이 고여 있어 저녁산을 환하게 켤 것이다.
*고향, 부여 가는 들녘에 서있는 산.
-산 그늘에 마음 베인다/이기철-
햇빛과 그늘 사이로 오늘 하루도 지나왔다
일찍 저무는 날 일수록 산 그늘에 마음 베인다
손 헤도 별은 내려오지 않고
언덕을 넘어가지 못하는 나무들만
내 곁에 서 있다
가꾼 삶이 진흙이 되기에는
저녁 놀이 너무 아름답다
매만져 고통이 반짝이는 날은
손수건 만한 꿈을 헹구어 햇빛에 늘고
덕석 편 자리만큼 희망도 펴 놓는다
바람부는 날은 내 하루도 숨가빠
꿈 혼자 나부끼는 이 쓸쓸함
풀 뿌리가 다칠까 봐
흙도 골라 딛는 이 고요함
어느 날 내 눈물 따뜻해지는날 오면
나는 내 일생 써 온 말씨로 편지를 쓰고
이름 부르면 어디든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릴 사람 만나러 가리라
써도 써도 미진한 시처럼
가도 가도 닿지 못한 햇볕같은 그리움
풀잎만이 꿈의 빛깔임을 깨닫는 저녁
산 그늘에 고요히 마음 베인다
-산처럼 슬픈 사람에 대한 보고서/백상웅-
산처럼 슬픈 사람은 동굴같이 텅 빈 혀를 갖고 있습니다.
혓속에서 사람들은 불을 지핍니다.
어떤 이는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어떤 이는 이삿집센터 전화번호를 고무도장으로 찍습니다.
산처럼 슬픈 사람은 슬픈 사람들을 가둡니다.
슬픈 사람들도 겨울이 와서 동굴 입구를 닫습니다.
슬픈 사람들은 산처럼 슬픈 사람의 동굴을 쩍쩍, 넓히고 있습니다.
목구멍을 파고, 위장을 파고, 내장을 팝니다.
오늘 내장에는 눈이 날립니다. 슬픈 사람들은 눈을 굴리고 놉니다.
산처럼 슬픈 사람은 간지러운 곳이 어디인지 모릅니다.
얼어붙은 내장이 녹는 봄입니다.
내장의 모서리에 쌓여 있던 눈도 스멀스멀 녹아 흘러갑니다.
이제 슬픈 사람들은 쟁기를 끌고 트랙터를 몰 줄 압니다.
밭을 일궈 씨를 뿌려서, 산처럼 슬픈 사람은 따갑습니다.
태양이 이글거립니다.
슬픈 사람들은 산처럼 슬픈 사람의 그늘에서 햇볕을 피합니다.
땅이 갈라집니다.
태양이 멀어지면 슬픈 사람들은 열매를 거둡니다.
산처럼 슬픈 사람의 혀에 나무가 제법 깊게 박혔습니다.
나무가 구부러지면 슬픔도 구부러집니다.
잎사귀가 떨어지면 슬픈 사람들은 낙엽을 긁어모아 다시 불을 지핍니다.
슬픈 사람들은 텅 빈 산처럼 슬픈 사람을 보고 산처럼 슬픈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동굴 같이 긴 혀를 갖게 됩니다.
산처럼 슬픈 사람들이 말이 없는 이유입니다.
혓속에 돌탑을 쌓거나, 크레인으로 건물을 세우는 이유입니다.
그러다가 우르르 무너집니다. 산사태입니다.
산처럼 슬픈 사람들이 진화를 하는 순간입니다. 쓸 때가 없는데도.
-산에 가서 시를 읽다/이성선-
시집을 사들고 산으로 간다
구름 아래로 간다
배낭에 넣고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가슴은 뛴다
오솔길에 들어서 발은 시 쓰듯 간다
나뭇잎을 밟고 샘물을 밟고 바람의 말을 밟는다
줄기 하얀 자작나무 아래 시집을 편다
내 눈이 읽기 전에 나무가 먼저 읽게 한다
바위틈에서 나온 다람쥐가 읽게 한다
날아가는 새가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싸리꽃이 읽고 나서 내가 읽는다
그들의 눈빛이 밝고 간 시
그들의 깨끗한 발자국이 남은 시
물 방울이 된 시를
놀빛이 밟고 나서 내가 읽는다.
-산 속에서는 나도/허형만-
나무로 서서
온몸으로 우주와 내통해보지만
산딸나무처럼
하이얀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멍석딸기처럼
곰붉은 열매도 맺어보지 못하고
그래, 산 속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네
욜그랑살그랑 산안개에 녹아들 수밖에.
-흐르는 산/임동윤-
내 마음의 산 하나 있다
다가서면 멀리 달아나는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산
그 산으로 달려가면
내 속엔 늘 새로움이 하나
또 다른 마음이 하나
그 속의 크고 높다란 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술과 계곡
그 속에서 나는 흔들렸다
흔들리면서 바람이 되었다
눈먼 별이 되어 반짝거렸다
반짝거리면서 허공을 달려갔다
다가설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산, 강물 같은 산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내 마음 속의 산 하나 있다
-산/함민복-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항아리에 바친 산/손진은-
저것은 숲의 요약
수천수만 나무들이 그들 생애를 티로 재로 소진시키면서
저 빛나는 맨살을 만들었던 것
일어서다 쿵 쓰러지고 또 일어서는 교목의 관절들
마침내 물기 고이고 떨리며 스며 나오는 숨들
괴롭게 삼키면서 아궁이는 또 알처럼 저 살들을 낳았던 것
박물관 북적이는 인파들 사이
유리칸 위 몇 줄씩 우아하게 전시된 저 항아리들 지나칠 때마다 내 마음은
나무들의 푸른 눈동자와 설레는 잎들
어슬렁거리는 멧돼지와 일어서는 여우
계곡의 물소리와 저무는 노을을 다 가진
선사 이래 첩첩의 산들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청이처럼
저 작은 자루 속에 첨벙첨벙 몸 적시고 살 녹여 잔잔하게 요약되는 걸 보는 것이다
가끔 항아리 잘 칠해진 유약 앞에서
귀를 내밀어
그 애잔한 산의 몇 움큼이라도 뽑아보려 하지만
한번 걸린 산은 저 촘촘한 올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인가
수백수천 년 이 땅의 산과 계곡을 다 삼키고도
시침 떼며 저 연한 자태만을 뽐내는
주둥이 좁고 동그란 자루들 앞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영 떼먹기로 작정한 빚쟁이 앞에서처럼
-겨울산/문현미-
절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달을 정수리에 이고 가부좌 틀면
수묵화 한 점 덩그러니
영하의 묵언수행!
폭포는 성대를 절단하고
무욕의 은빛 기둥을 곧추세운다
온몸이 빈 몸의 만월이다
-산 1/이성부-
더 높이 오르려는 뜻은
맑게 눈 씻어
더 멀리를 바라보기 위함이다
멀리 첩첩 산 굽이에서라야
나는 내가 잘 보인다
-빈 산이 젖고 있다/이성선-
등잔 앞에서
하늘의 목소리를 듣는다.
누가 하늘까지
아픈 지상의 일을 시로 옮겨
새벽 눈동자를 젖게 하는가
너무나 무거운 허공
산과 산이 눈뜨는 밤
핏물처럼 젖물처럼
내 육신을 적시며 뿌려지는
별의 무리
죽음의 눈동자보다 골짜기 깊다.
한 강물이 내려눕고
흔들리는 등잔 뒤에
빈 산이 젖고 있다.
-침묵하는 산/신승근-
오랫동안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산도 자주 내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침묵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입니다.
구름 한 점이 이마를 툭 치며 지나갑니다.
하늘이 산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입니다.
지느러미 붉은 물고기 하나가
물에 빠진 산 그림자를 뚫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가슴 밑바닥부터
환하게 밝아옵니다.
그 경계에
오랫동안 머물렀습니다.
-논 속의 산그림자/함민복-
물 잡아 논 논배미에 산그림자 드리워져
낮은 물 깊어지네
산그림자 산 높이의 열 배쯤
한 십여 리
어떻게 와서 저리 몸 담그고 있는지
거꾸로 박힌 산그림자 속
바위는 굴러 떨어지지 않고
나무는 움트네
개구리 울음소리 산그림자
깜깜하게 풀어놓던 며칠 밤 지나
흙을 향해 허리 굽히는 게 모든 일의 시작인
농부들 푸른 모춤을 지고
산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네
뒷걸음치며 산에 모를 심네
바위 위에도 모를 꽂아 놓았네
산그림자 속에서 백로 한 마리 날아 나와
편 목 다시 구부리며
젖지 않은 발 적시며
산그림자 위로 내려앉네
-고향, 산/김진학-
날마다 골짜기 가득
싣고 오는 물소리 있고
오래 살아도 그리운 사람들의
추억 있는 산을 만난다
양지바른 곳에
햇님 다가와 화롯불 피우던
옛날 이야기 있는 산마을
속이 텅빈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는
마을 어귀 느티나무의 아픈 마음을
무심히 보고 가는
겨울새
또 누가 왔나 보다
고향에 오면 울고 가는
느티나무 닮은 사람
바람부는
고향 산 아래
종일토록 서성이다
돌아서서
울고 가는 사람
-여름 산/장석남-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잠자리의 투명
투명 위에 앉은 여름산
비 온 뒤
이목구비 뚜렷한
여름산 메아리 속으로
먼 훗날 살 집을
걸린다
둥글게 흰 풀잎의 둥금
둥금 위에 앉은
이슬과 해와,
발자국
-모래의 산/김수영-
돌아보면 모래 먼지가 보여주는
바람의 길
어떻게 저 모래의 산이 이루어지고
또 어떻게 날려 모래 먼지가 되는지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은
저 흐르는 것들
낙타처럼 눈을 감고 본다
그 모래의 산 옆으로
언젠가는 한줄기 맑은 물이 흐를 것이라는
저 메마름이 고여 만들어내는 신기루
묻어둔 추억들을 밟으며
누가 저 사막을 건너가나
저 멈추지 않을 바람
그들이 부려놓은 흐르는 것들은
또 어디엔가 쌓여
모래의 산이 될 것이다
결코 줄어들지 않을 그 쓸쓸하고 장엄한 무게
-겨울 산(山)에 피는 꽃/유창섭-
나무는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홀로 남은 것도 그렇거니
지나 온 세월 억울해서 홀로 울었다
별빛 초롱초롱 적막한 山등성이를
먼 길 내달려 와 쉬어 넘던 바람
함께 울더니
世上에 존재하던 모든 것들
소란한 그들의 언어(言語) 침묵시켜
저 발 아래 무릎 꿇려 놓고
산사(山寺)의 처마 끝
풍경소리 한 두름
독경소리 한 두름
묶어,
나무마다 걸어놓고
아득한 불빛 몇 올 받아
너울너울 생령(生靈)의 춤사위로
밤새워 꽃을 피웠다
새 하얗게 꽃을 피웠다
모두 버리고 선 채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피워낸 꽃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제서야 흔드는 몸짓마다
영혼을 깨우는 노래가 되었다
생명의 노래가 되었다
-겨울산/최승호-
문을 열자
바다코끼리의 긴 이빨처럼
고드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눈 쌓인 아침 숲속에서
고요의 해일이
귀 속으로 차갑게 밀려 들어왔다
꽝꽝하다 이 겨울
묵은 눈 덮힌 산들은 빙산만큼씩한 흰 봉우리들을
치켜들고 우뚝 솟아오르고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장을 깨고 항아리에
마을 아낙네들이 물을 긷는다
꽝꽝하다 이 겨울
산들은 문을 닫고
다람쥐는 빙산 깊이 잠들어 있다
무너지듯 산비탈을 미끄러지며
녹아내리는 눈더미와 덩치 큰 얼음장들이
화강암덩어리의 이 산 저 산을 치받을 때
골짜기 가득 쩌렁쩌렁한 산의 울음 소리 울려퍼질 그 때까지
-귀머거리개들이 사는 산/손택수-
개들의 메아리가 컹 컹 컹 산을 울렸다.
산중에 들어와서 개장수가 된 선배는
두툼한 장갑을 건네주며
쫑긋해진 귀 깊숙이 자전거 펌프를 꽂았다.
신경이 너무 예민하면 이것들이 자주 짖어대거든,
그럼 근수가 덜 나가게 되지,
바람이 새어나가지 않게 귓구멍을 잘 막아야 해.
숨을 급하게 몰아쉬며
고막을 풍선처럼 단숨에 터뜨려 버렸다.
저러다가 제풀에 지치고 만다 하였지만
고막이 터진 개들은 밤을 새워 요란하게 짖어댔다.
들리지 않는 제 목소리를 찾아 입을 벌렸다 다물고.
벌렸다 다물고, 벌린 입이 쩍
그대로 굳어진 채
다물어질 줄 모르는 계곡
산중에 들어와서 세상 같은 건 잊어버렸다고
오랫동안 덧나던 꿈도 이제는 아물어버렸다고
개장국에 말없이 술잔만 부딪는 밤
이 슬픈 꿈이 끝나면 더욱 슬픈 꿈을 꾸게 될까
컹 컹 컹 개들의 메아리가 유령처럼 산을 떠돌았다.
잃어버린 주인을 찾아 아가리가 얼얼해질 때까지
잠든 개들의 메아리가 마구 문을 두드렸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