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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조선 궁궐 탐방 후기 [덕수궁과 환구단] <1>
<2024년 7월 6일>
조선의 5대 궁궐 탐방 마지막 날,
소서(小暑)인 오늘,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
장맛비 예보가 있어 염려했지만 다행히 하늘이 도와
탐방하기 좋은 날씨다. 5대 궁궐 탐방 유종의 미를 거두며,
감사에 무한 감사를 더한다. 두루두루 고마울 뿐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알고 보면 느낌이 다르다.
옛일을 돌아보며 우리들의 오늘을 본다.
자랑스럽거나 부끄러운 역사까지도
우리가 결코 외면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귀한 교훈이 있기 때문이다.
♣ 1, 2, 3편으로 나누어 게재합니다. 사전답사 및 퍼온 사진 일부를 포함하였습니다.
서울특별시청 서소문청사 13층 [정동전망대]에서 조망한 덕수궁 전경
♣ 탐방 코스
<시청역(1호선, 2호선)> ~ 덕수궁(대한문 ~ 중화전 석조전 즉조당 석어당 함녕전 돈덕전 등 궁내 전각) ~
평성문 ~ 고종의 길 ~ 선원전 터 ~ 조선저축은행 중역사택 ~ 구 러시아공사관/정동공원 <휴식/간식> ~
정동길 ~ 중명전 ~ 정동길 ~ 환구단 ~ <점심/자유 매식/정동 북창동 무교동 맛집> ~ 시청역(1호선 2호선)
※ [한국 근현대 자수] 전시회는 점심 식사 후 개별 자유 관람.
새벽까지도 비 예보가 있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천만다행이다.
[대한문(大漢門)]
*** 원래 경운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大安門)]이 대한제국(1897년)이후 정문이 되고, 1906년 [대한문]이 된다.
[대한문(大漢門)]은 덕수궁의 정문으로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라는 뜻이다.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주변이 환구단을 비롯하여
새로운 중심으로 바뀌면서 정문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1906년 문을 수리하면서 [대한문]으로 변경하였다.
원래 대한문의 위치는 약 33m 앞에 있었으나 1970년대 태평로(세종대로)를 확장 때 대한문은 그대로 두고
담장만 안쪽으로 옮겨, 한때는 도로 가운데 섬처럼 있다가 그뒤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대한문 안쪽의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하여 복원하였으며, 대한문이 안으로 옮겨지면서 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금천교를 만난다.
<< 1970년 대 한동안, 대한문은 도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훼손 염려로 33m 뒤로 이동, 현재 위치로. >>
<< 대안문 당시의 사진 >>
[인화문(仁化門)] 경운궁의 정문인 인화문의 건립 시기는 불분명하나, <대조선국 관보>에 의하면
1896년 11월 민병석을 [인화문현판서사관]으로 임명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쯤이 아닌가 한다.
덕수궁 입장료 1,000원. 만 24세 이하 및 만 65세 이상의 내국인은 무료.
오늘 모임의 장소, 연못 옆 파고라 쉼터.
지난번 버스도보 때 받지 못한 회원님께 카페 명찰도 나누어 주고 ~~~,
[복지지원금]도 자진 납부하고 ~~~.
모과나무엔 열매가 주렁주렁
반갑고 즐거운 만남에 웃음꽃 만발.
<< 탐방에 앞서 덕수궁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
[덕수궁(德壽宮)]은 조선 제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후에 왕궁이 되었다가, 뒤에 황궁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들, 즉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1593년(선조 26) 의주 피란길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월산대군의 후손들이 살고 있던 사저 등을
1608년 승하할 때까지, 임시 궁궐로 사용하며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렀다.
1608년 즉조당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1611년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을 정하며 궁궐이 되었으나,
같은 해에 광해군이 창덕궁(1610년 재건)으로 이어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모되어 경운궁에 유폐되면서 경운궁은 궁궐이 아닌 [서궁]으로 격하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이은 인조는 즉조당에서 즉위 후, 경운궁의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대부분 건물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 이리하여 경운궁은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된다.
다만, 국난 극복의 상징으로 숙종이 찾기도 하고, 선조가 피란길에서 돌아온 180주년에 영조 임금이,
300주년에 고종이 각각 찾기도 하였다.
1986년, 고종은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270여 년간 거의 잊혀진 궁으로 명맥만 이어오던
경운궁의 보수를 추진한다.
1897년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돌아와 환구단을 마련, 천제를 지내고 즉조당에서 대한제국을
선포,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궁]이 된다. 황궁의 격식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1902년 정전인 중화전을 지어 격을 높였으며, 서양식 건물들을 지어 전통과 근대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고종은 이어(移御)하지 않고
수옥헌(중명전)에 머물며 1906년 소실된 전각을 재건하고, 1897년에 착수한 석조전까지 1910년에 준공한다.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 빌미로 일제에 의해 고종은 황위에서 물러나고 궁궐의 이름은 [덕수궁]으로 바뀐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으며, 공원화 추진으로
궁궐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해방 후, 1946~19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7년부터 덕수궁의 복원이 진행되어 작년에는 돈덕전까지 복원, 점차 궁궐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다.
* 정동 일대는 태조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었으나, 태종 때 성북구 정릉동으로 천장하였고,
세조는 의경세자가 일찍 승하하자, 세자빈(후에 인수대비)과 두 아들(월산대군/자을산군)을 위한 사저를 정동에
마련하여 주었는데, 후에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등극하여 궁궐로 들어가고 사저는 월산대군 소유가 된다.
연 도 | 내 용 |
1593년(선조 26 ~ 광해군 즉위년) | 월산대군 후손들의 사저를 정릉동 행궁으로 삼음 |
1608년(선조 41/광해군 즉위년) | 광해군 즉조당에서 즉위 |
1611년(광해군 3) | 경운궁으로 승격 |
1618년(광해군 10) |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서궁이라 낮추어 부름 |
1623년(인조 1) | 경운궁의 대부분 건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줌 |
1897년(건양 2) | 러시아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 |
1897년(광무 1) | 대한제국 선포, 경운궁을 황궁으로 삼음 |
1902년(광무 6) | 중화전 준공으로 함녕전 등 주요 전각 마련 |
1904년(광무 8) | 대화재로 소실 |
1905년(광무 9) | 중명전에서 을사늑약 체결(을사오적) |
1906년(광무 10) | 주요 전각 복원공사 |
1907년(융희 1) | 고종 폐위, 순종 즉위 |
1907년(융희 1) | 순종 창덕궁으로 이어 / 궁의 이름을 덕수궁으로 바꿈 |
1910년 | 한일병합(8월 29일 국치일) / 석조전 준공 |
2007년~ | 덕수궁 복원공사 시작, 복원공사 계속 진행 중 |
고종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주독립국과 중립국을 꿈꾸며 선포한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경운궁을 고집한 이유 중 하나는 1800년대 말 서구 열강의 공사관들이 경운궁 주변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1904년 대화재로 주요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음에도 끝까지 수옥헌(중명전)에서 버티며 경운궁을 재건하였다.
(일본은 남산 왜성대에, 중국은 명동에 있었다)
카페지기 님의 향후 도보 계획 등 공지 사항 전달
우수회원으로의 등업 공지, <인사 및 축하>
[금천교]를 건너 [중화전]으로 ~~~,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 ~~~ ~~~. 도라지 타령.
[도라지]는 초롱꽃과로 꽃말은 '영원한 사랑' 백색꽃도 예쁘지만 보라색 꽃의 빛깔은 참으로 오묘하다.
꽃망울은 5각형 풍선 모양, 꽃잎도 5갈래, 꽃받침도 5조각. 수술, 씨방, 암술머리도 각각 5개씩이다.
<<도라지 타령>>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 / 한두 뿌리만 캐어도 / 대바구니 철철철 다 넘는다.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어여라 난다 지화자 좋다 네가 내 간장을 스리살살 다 녹인다
어쩜 여름철은 어사화로도 불리는 [능소화]의 계절이기도 하다.
[중화문]
[중화전]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으로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치르던 곳,
‘중화’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이라는 뜻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중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고종이 이곳에 환궁한 후 5년 정도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 중층* 구조의 중화전을 지었으나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1층 규모로 중건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지어진 중화전은 창문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을 칠하고,
천정과 답도에는 봉황이 아닌 용 두 마리를 새겨넣어 황제국임을 분명하게 상징하고 있다.
[중화문(中和門)]은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전과 함께 지어진 문이다. 중화전과 마찬가지로 답도에는 용으로
장식하였고, 문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현재는 동남쪽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화전과 중화문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1902년 건립한 중층 중화문, 1904년 대화재로 소실. >>
닫집 아래 어좌, 일월오봉병, 천정의 용 조각까지 1906년 재건 당시 그대로 보존되고 있어 색이 다소 바랜 느낌.
[ 황궁으로 지어진 중화전의 드므] 5대 궁궐 드므 중 유일하게 '萬歲"라고 새겨져 있다.
*** 황제국은 '만세', 제후국은 '천세'
조선시대는 '천세 천세 천천세!'였다. 우리가 행사 때 만세 삼창하는 것도 대한제국 이후의 일이다.
[석어당] 2층 건물로 월산대군 후손이 살던 주택을 선조가 의주 피난길에서 돌아와 거처로 사용하였으며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 살구꽃 피는 시기, 이곳 석어정 살구나무(우측)와 경복궁 자경전 살구나무를 한번쯤은 찾아 보시길 강추.
[석어당(昔御堂)]은 즉조당과 함께 덕수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다.
‘석어’는 ‘옛날에 임어(왕이 왕림)하다’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가 15년간(1593 ~ 1608) 거처하다
승하한 곳으로.덕수궁에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2층 건물이자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되어 재건하였으며, 석어당 이름은 영조가 짓고, 안쪽에 고종의 어필 현판이 있다.
고종 황제의 어필 현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좌측에 놓여 있다.
[즉조당과 준명당] 우측 건물이 1607년 선조 때 건립한 즉조당, 좌측 건물은 고종 때 건립한 준명당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과 함께 경운궁의 모태가 되는 건물로, ‘즉조’는 ‘왕의 즉위’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왕위에 올랐고, 1897년 대한제국 이후에는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이때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다가 1902년 중화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렸다.
광해군은 즉위 후 창덕궁을 재건하고 1611년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선조의 왕비 인목대비가 5년간(1618년 ~ 1623년) 이곳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인목왕후는 창덕궁으로 가지 않고 인조와 폐위된 광해군을 이곳으로 불러,
광해군을 무릎 꿇리고 광해군의 죄명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문책 후 유배를 보낸다..
이곳 즉조당에서 즉위한 인조는 석어당과 즉조당만 남기고 전각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1613년 인목대비는 석어당 2층 마루에서 강화도 유배길을 떠나는 어린 아들 영창대군이
돈화문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피눈물을 흘렸다는데, 10년 후에는 광해군을 ~~~, 역사는 이렇게 돌고 돈다.
준명당(浚眀堂)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건물로, ‘준명’은 ‘다스려 밝힌다’라는 뜻이다.
고종의 편전으로 이용되었으나, 1907년 폐위 후 침울하던 고종에게 1912년 덕혜옹주가 탄생,
60세에 얻은 손주를 위해 1916년에는 준명당을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유치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유치원이랄까, 혹여 다칠세라 난간을 설치한 구멍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즉조당과 함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복원하였다.
[즉조당]
고종 황제의 어필 현판
[준명당]
준명당의 '명' 또한 중명전의 '명' 字처럼 '밝은 명(明)'이 아닌 '눈 밝을 명(眀)'을 쓰고 있다.
*** 당시에는 가급적 '날 일(日) '字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일본이 싫어서 ~~~.
이 대목에서 덕혜옹주의 준명당 유치원 시절 사진을 포함, 덕혜옹주 관련 사진을 모아 본다.
*** 아버지 회갑 때 태어나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다 열세 살에 강제 유학길에 올라 망국의 설움을 온몸으로 받다가,
조국이 해방되었음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잊혀진다. 이방자 여사 등 주위의 각고의 노력 끝에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1962년 50세의 환자의 몸으로 귀국,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이방자 여사의 극진한 간호 속에 1989년 77세로 세상을 떠난다.
시누이 올케 사이인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 늘그막에 낙선재에 함께 기거하며 조선 최후의 황녀 덕혜옹주의
비참한 삶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병 간호를 위해 '덕혜옹주 보다 단 하루만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해달라'라고 기도했다는
이방자 여사의 기도 얘기가 우리를 울컥하게 한다. 실제 11살 연상인 이방자 여사는 덕혜옹주 사후 9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덕혜옹주(1912. 5. 25. ~ 1989. 4. 21. 77세)] // [이방자 여사(1901. 11. 4. ~ 1989. 4. 30. 88세)]
[함녕전 덕홍전 권역]
[함녕전(咸寧殿)]은 1897년 고종의 환궁과 함께 지어진 황제의 침전으로,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라는 뜻.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 1919년 승하 시까지 이곳에 살았다.
함녕전 뒤편에는 계단식 정원으로 꾸며 아름다운 장식을 한 굴뚝을 설치하였다. 특히 모란 꽃이 유명하다.
함녕전은 1985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1904년 대화재로 함녕전 뿐만 아니라 경운궁의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어 일제에 의한 방화설이 제기되었다.
숯으로 보온하는 온돌 구조 상 이런 대화재는 일어나기 어려우며, 일제는 고종의 거처를 서양 외국공사관이
밀집해 있는 이곳 경운궁을 떠나 경복궁이나 창덕궁으로의 이어를 주청하던 시기라 그런 의심이 더욱 강했다.
고종은 이어하지 않고, 황실 도서관인 수옥헌(후에 중명전)으로 옮겨 거처하면서, 주요 전각을 재건하였다.
***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승하 역시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강하게 제기(독살의 확증은 없다)되었으며,
이로 인해 1919년 3월 3일(월) 고종 국장일에 이틀 앞선 3월 1일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은 4월 말까지
더욱 세차고 장렬하게 대한제국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블처럼 번져나갔다.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명’은 ‘밝음을 맞다’라는 뜻이다.
1938년 일제에 의해 중화문의 서남쪽으로 옮겨져 보루각 자격루와 흥천사 동종 등을 전시하였으며,
2018년 약 80여년 만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겼다.
[덕홍전(德弘殿)]은 고종의 황후인 명성황후의 혼전*으로 사용했던 경효전이었다. 명성황후 장례 이후,
고종은 ‘덕이 넓고 크다’라는 뜻의 [덕홍전]으로 고치고, 외교 사절 등 빈객을 위한 접견실로 사용하였다.
내부는 천장의 샹들리에와 봉황문양의 단청, 오얏문양 등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의 남행각에 맞닿아 있다.
*** 1895년 일제에 의해 시해된 명성왕후는 1897년 대한제국의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으며,
장례 또한 같은 해 10월 황후의 예를 갖추어 국장으로 치른다.
'혼전'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임시로 신주를 모시는 건물을 의미한다.
[정관헌]
[정관헌(靜觀軒)]의 ‘정관’은 ‘고요히 바라보다’라는 뜻, 흔히들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쉬던 곳 정도로 알고 있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임시로 봉안했던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안쪽 벽면을
자세히 보면 두꺼운 벽돌 벽면이 일부 남아 있으며, 지금의 모습은 후에 개조한 것이 아닌가 한다.
동서양의 양식을 혼합한 건물로서 기단 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기둥을 둘러서 내부 공간을 만들었고,
밖으로 동·남·서 세 방향에 나무 기둥을 세운 테라스가 있다.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박쥐 등의 전통 문양 조각.
*** 안내판에는 '포치(Porch')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글쎄 테라스가 더 적확한 것 같기는 한데 자신은 없다.
정관헌에서 덕수궁 안길과 거의 나란히 석조전 뒷길로 평성문까지 이어지는 산책로. 철쭉꽃 필 때는 환상적이다.
[석조전]
[석조전(石造殿)]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는 ‘돌로 짓다’라는 뜻.
고종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지었으며, 1987년부터 착수,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건물은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1900년 착공하여 1910년 준공. 건물의 앞과 동서 양면에 발코니가 설치된 것이 특징.
지층은 시종이 기거하는 방과 부속 시설, 돌계단을 올라 들어가는 1층에는 접견실과 귀빈 대기실, 대식당 등,
2층은 황제와 황후가 거처하는 침실과 여러 용도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주독립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을 꿈꾸던 고종의 꿈은 그러나 이 석조전이 준공되기 전에 이미 끝나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를 끝까지 반대하며 옥새를 찍지 않았던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
1907년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결국 고종은 강제로 황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된다.
1907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아버님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라는 궁호를 올려 [덕수궁]이 된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은 13년만에 멸망, 묘하게도 설계에서 준공까지 13년만에야 겨우 준공한
석조전은 이미 그 의미를 잃고, 간혹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을 만나기도 하였으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1911년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영친왕 부부가 귀국 시 간혹 사용했다고 한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덕수궁이 훼손되는 과정에서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1946년부터 47년까지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사무실로 사용하였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였다가
2009년부터 복원공사를 하여 현재는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 석조전 관람은 사전예약 해설관람으로 제한하고 있으며 통상 7회(토,일은 9회), 1회 15명 인원 제한.
경로의 경우 5명 범위 내에서 현장 예약 가능.(1층 입구에서 현장 예약 접수)
*** 석조전 앞의 분수정원은 원래 사각 형태로 거북 조각이 보이나(사진 참조), 물개 조각이 있는 현재의 모습은
아마도 석조전 서관 증축 시 정원 구역을 재조정하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 일제에 의한 덕수궁 공원화 사업이 본격화로 미술관의 추가 필요에 따라 1938년 석조전 서관을 건설하여
주로 조선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하였으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운영 중이다.
의석조(擬石造)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1910년 석조전 준공이후 당시 사진, 현재 물개가 있는 분수정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화문(오얏꽃 문양)
198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발표한 황실 국장인 [이화문(李花紋)]과 [독수리 문장]
1910년 준공한 [석조전]의 기둥은 신고전주의 건축의 이오니아식 기둥
1938년 준공한 [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신고전주의 건축의 코린트식 기둥
[돈덕전]
[돈덕전(惇德殿)]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칭경예식)를 위해 지은 건물로, ‘돈덕’은 ‘덕이 도탑다’
라는 뜻이다. 화려한 유럽풍 외관의 벽돌로 지어진 돈덕전은 1층은 폐현실, 2층에는 침실이 자리하였으며,
각국 외교사절의 폐현(황제나 황후를 만나는 일) 및 연회장, 국빈급 외국인의 숙소로 활용하였다.
1907년에 순종이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이 있었으며, 늦게는 친일내각의 회의 장소나 회식 장소로 이용되었다.
돈덕전은 고종 승하 후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며 2023년에 재건하였다.
*** 이곳에서 고종은 칭경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여 서구 열강을 대상으로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중립국가 승인을 요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콜레라 창궐로 미루어 지다가
러일전쟁 발발 등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1912년 네델란드 공사가 고종 황제에게 선물한 가시칠엽수. 우측은 [평성문]
열매 껍질에 가시가 있는 유럽 원산의 가시칠엽수를 [마로니에(marronnier)]라 한다.
1920년 경성제국대학이 동숭동에 들어설 때 심은 칠엽수는 일본 원산으로 열매에 가시가 없다
흔히 [마로니에 공원]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칠엽수는 '마로니에'가 아니다.
이후, 사진은 2편에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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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세한 설명과 더불어 많은 사진들을
아낌없이 보내주셨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환구단은 처음 가본곳인데
감명깊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환구단과 황궁우를 안보신 분들이 많을겁니다.
사실 30여 년 근무지가 명동이라 조선호텔을 들르거나
부근을 지나다닐 일이 매우 많았지만,
그저 조선호텔의 정원이겠거니 했었지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맞을런지도 ~~~.
첫댓글, 고맙습니다.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대안문이 33미터 안으로 이전했다는 말에 참 아쉬웠는데
사진을 보니 길가에 댕그러니 있는것보다는
안으로 들인거 그나마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요.
뭐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지,
담장은 안쪽으로 들이고
대문만 그대로 남겨둔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죠.
늘 깊은 관심 가져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덕수궁은 슬픈 역사를 지닌 다른 궁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역사와 사연을 지닌 궁궐같애요
그전에는 측우기와 신기전도 있었던것 같은데 어디로 옮겼나봅니다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경운궁, 덕수궁, 그 이름이 지닌 의미는 참 좋습니다만
선조나 고종이나 험하고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요.
때로는 고립무원, 약자의 서러움에 뼈를 깎는 고통도 ~~~.
기억력도 참 참 좋으십니다.
측우기와 신기전을 챙기시는 걸 보면 ~~~. ㅎㅎㅎ
일제의 공원화 추진에 따라, 1938년 석조전 서관(미술관) 개관에 맞춰
광명문을 덕수궁 서남쪽(미술관 남쪽)으로 옮기고
흥천사명 동종(보물), 창경궁에 있던 자격루(국보), 신기전기 화차를 전시했었지요.
2019년 광명문을 함녕전 앞 제자리로 이건 복원할때,
동종은 경복궁 창고에, 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지요.
神機箭機 火車는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르는데 ~~~,
모형이었다는 설도 있고 해서 그냥 넘어가렵니다.
고맙습니다.
청파님의 역사인식과 해박한 지식은 유홍준을 능가합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늘 과찬에 몸 둘 바를 ~~~.
함께라서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