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동안 경남 거창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둘러본 곳은 갈계리 삼층석탑 - 수승대(거북바위, 구연서원, 요수정) -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 동계 정온 고택 - 황산 신씨고가 - 가섭암지 석조여래입상 - 거창고등학교 - 아림사지 5층 석탑 - 거창박물관 -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 둔마리벽화고분 - 면우 곽종석전시관(갔으나 주말에만 문을 연단다) - 면우 곽종석 유적비 - (고견사) - 건계정 - 개봉고분 - 침류정(이주환의사비, 파리장서비) - 거창사건추모공원입니다.
짧은 답사 후기를 소개합니다
■ 거창으로 거제도(거제현)가 이주했었다
고려는 후기에 들어 13세기 몽골족의 침입, 14세기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여파는 거창지역까지 미쳤다. 첫 변화는 거제현(거제도)의 이주였다. 거창에는 가조면이라고 있다. 그런데 거제현의 이주로 거창의 가조현이 없어지고 거제현이 설치되었다.
거제현의 이주는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거제현의 관청과 수령, 향리, 주민뿐만 아니라 거제현의 속현인 아주현과 송변현, 그리고 오양역까지 설치되었다.
조선 초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의 기록은 이러하다.
"고려 원종 때 왜구 때문에 사람들이 육지에 건너가 거창과 가조현 땅에 임시로 살았다. 조선 태종 때 거창과 합하여 제창현이라고 불렀다가 1년 후 거제현으로 되돌렸다. 세종 때 사람들이 옛 섬으로 돌아왔다."
- 『경상도지리지』 거제현 조
거창의 거제현은 1422년 세종 때 거제도로 돌아갔다. 거제현은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 약 150년간 거창에 와서 더부살이를 하였다.
출처: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신용균, 2015
■ 동계 정온과 정희량
▲ 거창의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고택
- 동계 정온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보았을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낙동강 좌측에 해당하는 쪽이 좌도이고, 우측을 우도라고 부른다. 오늘날 경상남도 지역이 옛날에는 경상우도로 불렸던 것이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집안이 선조 · 광해 · 인조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거창의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집안이다.
거창의 초계 정씨들이 조선시대에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동계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직언 상소문(甲寅封事)이다.
동계가 46세 되던 해, 당시 임금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향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했다. 이에 동계는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지금 패륜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했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한다. 동계를 옹호하는 전국 선비들의 여론 때문에 동계는 죽지 않고 대신 제주도 대정현에 10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을 받는다.
후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가서 생활한 곳이 동계가 위리안치된 바로 그곳이었기 때문에, 추사는 대정현 사람들에게서 동계의 유배 생활이 어떠했는지 소상하게 전해듣고 동계의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추사는 제주 귀양이 풀린 후 일부러 이곳 거창의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 후손인 정기필에게 동계 선생에 대한 제주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忠信)'이라는 현판을 써주고 갔다고 한다.
동계가 충절의 선비로서 존경받게 된 또 다른 사건은 병자호란 때 일어났다.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 조선조 선비들에게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무릎 꿇은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은 선비로서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1636년 동계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칼로 배를 긋는 할복자살을 기도했다.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자락의 모리(某里)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 · 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 무신란의 주동자 정희량
정씨 집안에서 동계라는 인물이 집안을 명문가로 올려놓는 치세를 이루었다면,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鄭希亮, ?~1728)은 정씨 집안을 존폐의 기로에 몰아 넣은 일대 난세를 기록했다. 정희량은 영조 4년(1728년)에 발생한 무신란(戊申亂)의 주동자였다.
- 국혼물실(國婚勿失)
1623년(광해군 15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인조반정의 주도세력들 간에 은밀히 약속한 내용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국혼물실(國婚勿失)이고, 다른 하나는 숭용산림(崇用山林)이다.
'국혼을 잃지 말 것(國婚勿失)'은 왕비나 세자빈을 서인가家에서 내겠다는 뜻이었다. 즉 노론이 왕실을 장악하겠다는 말이다.
그런 비밀 약속에서 어긋난 첫 번째 임금이 제20대 경종(재위: 1720~1724년)이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고, 장희빈은 남인의 작업으로 왕실에 들어갔다. 노론의 국혼물실 관례를 깬 셈이다. 그래서 장희빈은 노론의 집중사격을 받았고 그 소생인 경종도 무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조정을 뒤흔든 목호룡의 고변
경종1년(1722년)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변했는데 이 사건으로 김창집ㆍ이이명ㆍ이건명ㆍ조태채 등 노론 4대신과 수많은 노론가家 자제들이 사형을 당했다. 더 큰 문제는 노론가 자제들이 경종을 제거한 후 추대하려던 임금, 즉 역모의 수괴가 세제(世弟) 연잉군(훗날 영조)이었다는 점이다.
경종은 재위 4년(1727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런데 경종의 병환이 심할 때 왕세제(연잉군, 영조)가 전면에 나서 병구완을 총지휘했다. 그런데 연잉군은 당대 제일의 어의였던 이공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비전에서 올린 게장과 생감, 그리고 자신의 처방과 상극이라는 어의를 윽박질러 가며 인삼차를 올린다. 이것들은 무수한 뒷말을 낳기에 충분한 소재들이었다.
졸지에 임금을 잃은 소론이 대비와 연잉군을 의심할 것은 분명했다. 특히 소론 강경파는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이런 의심 속에서 세제 연잉군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다. 소론 강경파는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조는 즉위 내내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다.
영조 4년(1728년) 선왕 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의 란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의혹의 소산이었다.
- 무신란(戊申亂, 이인좌의 란)
이인좌의 란(무신란, 戊申亂)은 소론 강경파와 일부 남인들의 연합거병이었다. 충청도에서는 청주 일대의 이인좌가 주동을 했고, 경상도에서는 거창의 정희량이,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과 나주 나씨집안이 가담을 했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거창의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고, 약 20년 동안 동네를 떠나서 이곳저곳 뿔뿔이 흩어져 숨어 찾아야만 했다. 한 마디로 집안이 절단난 것이다.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철저하게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무신란의 주도 세력인 충청도의 이인좌, 전라도의 나숭대(羅崇大)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나숭곤은 전라도의 유명한 남인 집안인 나주 나씨로서, 고려 때부터 이 지역 유지로 군림해온 벌족이었다.
그런 나주 나씨들 중 토라(土羅)에 속하는 일족들이 나숭대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 금성 나씨라고 하는 새로운 본관 명칭을 만들어 나갈 정도로 무신란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인좌와 정희량, 나숭대 집안이 서로 혼맥(婚脈)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세 집안 간에도 거미줄같이 얽히고 설킨 혼맥이 있었다.
먼저 정희량을 보면 정희량의 조부인 제천공의 부인, 즉 할머니의 친정이 나주 나씨 집안이다. 제천공의 장인 되는 사람은 나위소(羅緯素)로서, 나위소는 인조대에 동계와 같이 벼슬을 한 인물이다. 이후에도 계속 혼맥을 맺었다. 나씨 할머니의 친정 재종증손자 되는 나상질(羅尙質)이 정희량의 재종숙인 정중제(鄭重濟)의 사위가 되었으며, 정중제의 아들인 정광준(鄭光俊)이 나상질의 숙부인 나의조(羅義肇)의 사위가 되었다.
나씨들과 이인좌 집안 간의 혼맥도 이에 못지 않다. 나위소의 형님이 나계소(羅繼素)이다. 나계소의 손자가 나만서(羅晩瑞)이며, 나만서의 아들이 나숭곤(羅崇坤)이다. 나숭곤은 이인좌의 매부가 된다. 이인좌의 막내동생인 이기아(李夔兒)가 나만서의 동생인 나만규(羅晩揆)의 사위가 된다.
이인좌와 정희량의 혼맥은 어떤가? 이인좌의 당숙인 이홍발(李弘渤)이 정희량의 둘째 조카인 정의련(鄭宜璉)의 장인이니, 이인좌와 정의련은 재종 남매간이 된다.
이를 보면 이인좌, 정희량, 나숭대의 집안은 종횡의 혼맥으로 얽힌 관계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정희량은 반란에 실패해 처형당했지만 거창의 정씨집안은 반란 후 몇십 년 있다가 복원됐다. 집권여당 측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당파는 달랐지만 대쪽 같은 선비 정온을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이 집안은 봐줬던 것이다. 대개 반란 주동자의 고택은 땅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후손들은 노비로 만든다. 그런 세상에서 연못으로 만들지 않고 후손들도 집안을 유지하도록 해준 조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 삼(三)겹집 안채
거창의 동계 정온 고택의 안채는 특이하게도 삼겹집이다. 보통 집들은 한 겹이다. 호남에 있는 부잣집 고택들의 사랑채가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수가 있다. 사랑채의 앞뒤 면에 방을 들인 구조가 겹집이다. 홑집에 비해서 수용 인원이 두 배가 된다. 그만큼 집주인이 과객들에게 부담해야 할 경비가 추가되는 집이 겹집이다. 삼겹집은 겹집보다 측면으로 한 칸 더 있는 큰 집으로서 흔치 않은 구조이다. .
이 삼 겹 구조 안채에는 사연이 있었다. 1860년(庚申)에 보리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주변에 배고픈 사람이 넘쳤다. 부잣집이었던 동계 집안에서는 일부러 공사를 시작하였다. 기민(饑民)들을 먹이기 위해서였다. 동네 사람들이 돌을 가져오면 쌀 한 되, 서까래를 가져오면 쌀 두 되, 기둥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쌀 한 말, 대들보는 쌀 한 가마를 지급하는 식이었다. 인근의 위천면, 북상면, 마리면의 배고픈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이 집 공사장에 몰려왔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생각했던 규모보다 집을 크게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사가 커져야만 지급되는 쌀도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안채와 함께 금원산의 암기(巖氣)를 가리기 위하여 지은 사랑광채도 이때 기단을 높여서 지었다고 한다
출처:
1.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조용헌, 2005
2. 『조선 왕 독살사건 2』, 이덕일, 2010
3. 『조선 왕을 말하다』, 이덕일, 2010
4.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9. 나라 위한 눈물엔 백성도 함께 운다 - https://v.daum.net/v/20150602105818738
5.
https://www.nongmin.com/article/20171118284430
6. https://www.nongmin.com/article/20171126284659
7.
https://v.daum.net/v/20160523030512539
8.
https://v.daum.net/v/20130909032506400
■ 거창고등학교와 전영창 선생님
▲ 거창고등학교
1956년 전영창(1917~1976)이 거창고등학교 3대 교장으로 부임한다. 전영창은 무주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전주 신흥학교, 일본의 고베중앙신학교, 미국의 웨스트민스트신학대학교,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을 나온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대일항전기(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2년 징역형을 받아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가석방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1950년 미국 유학 당시 6·25전쟁이 발발하자 급거 귀국하여 부산에서 피난민을 도왔다. 이때 그가 시작한 빈민구제기관은 오늘날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이 되었다.
1956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오늘날 한림대학교 부총장 자리를 마다하고 학생 17명만 남은 폐교 직전의 거창고등학교 교장으로 왔다. 그는 부모의 유산을 팔아 빚에 몰린 재단을 인수한 후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으로 신축교사와 농장을 마련하였고, 명문대 출신의 우수한 교사들을 초빙하여 실력 있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동시에 거창지역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 전영창 교장선생님
그러나 지역사회와 독재정권은 전영창과 그의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1960년 7월 1일에는 거창농업고등학교와 거창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 명이 거창고등학교를 공격하여 교실을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9년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이 3선개헌 반대 시위를 벌이자 박정희정권은 주모학생 처벌을 요구하였다. 전영창 교장이 이를 거부하자 경상남도 교육위원회는 전영창 교장을 파면하였다.
거창고등학교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전인교육을 실천하였다. 전영창 교장은 『경향신문』 좌담회에서 그의 소망을 “영어ㆍ수학 학원식 교육방법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의 이상적인 학교 건립을 꿈꾸고 있습니다. 학생수를 2백 명으로 제한하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고 싶습니다. 생활도 같이 하면서 인격교육을 시켜야겠지요."라고 밝혔다.
1976년 전영창 교장 사후 전인교육은 그의 제자인 전성은, 도재원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이 학교의 교육 내용은 채플, 훈화, 수준별 수업, 무료 보충수업, 봄ㆍ가을 예술제, 노작체험, 직업보도관 운영, 1박 2일 소풍, 토끼몰이, 자율적인 학생회 활동, 교복과 두발자율화, 각종 동아리 활동 등이었다.
거창고등학교에는 직업선택 10계명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1956년부터 20년간 이 학교 교장을 맡았던 전영창 선생의 철학과 가르침을 그의 아들이자 4ㆍ6대 교장이었던 전성은 선생과 5대 교장 도재원 선생이 계명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 직업선택 10계명
첫째,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째, 승진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째,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째, 앞다투어 모여드는 곳에는 절대로 가지 말고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째,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째, 사회적 존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째,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째,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하지 말고 가라.
열째,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출처:
1.『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신용균, 2015
2. https://m.knnews.co.kr/mView.php?idxno=1204808&gubun=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거창군 신원면의 민간인 학살은 육군 제11사단이 1950년 말부터 지리산과 덕유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700여 명의 '민간인'들이 국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경악할 만한 이 사건은 전쟁 중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은 적지 않았지만 사건 당시 진상이 폭로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대표하였다.
육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은 단지 거창군 신원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 부대는 1950년 말 거창군 북상면 일대에 소개(疏開, 공습ㆍ화재 등에 대비하여 도시 또는 밀집하고 있는 곳의 주민이나 시설 따위를 분산함) 작전을 벌여 민간인 피해를 야기했으며, 1951년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을 일으키기 며칠 전에 산청과 함양에서 민간인들을 집단학살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북상면 사건, 함양과 산청의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이어진 연속된 사건이었다.
11사단은 잔류한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부대로 11사단 예하 연대가 지나간 산청, 함양, 거창, 함평지역에서 빈번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하였다.
▲ 11사단과 예하 연대, 대대의 주둔 위치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신원면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9연대는 1948년 12월 29일까지 제주도 4.3사건 진압에서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입혔던 전력이 있는 부대로, 1950년 9월 25일 11사단에 배속, 1950년 11월 20~21일에 경남 진주로 이동하여 지리산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하였다
11사단 9연대 10중대와 11중대는 2월 7일 산청에서 500여 명, 함양에서 590여 명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2월 9일 거창에서 첫 대량 학살이 청연마을에서 발생하였다. 10중대는 청연마을에 들어와 집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마을에서 100m 떨어진 마을 앞 논 뜰로 몰아내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여기서 8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하였고 5명이 생존하였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다음 날인 2월 10일, 탄량골에서 두 번째 대량학살사건이 일어났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탄량골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사격을 가하여 100여 명을 학살하였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2월 11일 3대대 이종대 정보장교는 신원초등학교에 남아 있던 500여 명의 주민들을 박산골짜기로 끌고 가 일제히 사격으로 학살하였다. 박산골짜기에서 517명이 학살당하였고 3명이 살아남았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1951년 2월 9일, 10일, 11일 3일 동안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은 719명이었다. 이때 학살당한 사람은 15세 이하의 어린이가 362명, 여자가 391명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이었고, 61세 이상의 노인이 64명이었다. 이로 보아 학살당한 사람들은 빨치산이 아니라 평범한 주민들이었다.
▲ 4월 1일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대령이 지리산 주변에서 일어난 약간의 민폐는 군기문란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4월 2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김종원대령에게 국회합동진상규명조사단이 현장에 가지 못하도록 부탁하자 군인을 공비로 가장해서 신원면 길목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4월 7일 국회합동진상규명조사단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결국 현지 조사를 하지 못했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 4월 23일 이승만 대통령은 "용공분자 187명을 처형했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1951년 12월 16일 고등군법회의에서 판결이 내려졌다. 제9연대장 오익경(대령)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형, 제3대대장 한동석(소령) 사형 구형에 10년 징역형, 경남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대령) 7년 징역 구형에 3년 징역형이 각각 선고되었다. 그러나 박산골 학살을 현장 지휘했던 제9연대 3대대 정보주임 이종대(소위)에게는 10년 징역 구형에 무죄가 선고되었고, 국방부장관 신성모, 제11사단장 최덕신(준장)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거창사건 재판은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사건이 축소, 왜곡된 채 종결되었으며 책임자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처벌받았던 인물들조차 1년 이내에 모두 풀려나 군으로 복귀하거나 경찰로 중용되었다.
▲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거창사건 이후 해양대학장을 역임했다. 김종원 경남 계엄사 민사부장은 이후 경찰국장, 치안국장을 역임했다. 한동석 소령은 이후 27사단 부연대장, 강릉시장, 원주시장을 역임했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 최덕신 11사단장은 이후 외교부장관, 천도교 교령 등을 역임했다. 오익경 11사단 9연대장은 이후 형면제를 받은 후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자료
▲ 거창사건 위령비의 수난. 1960년 4월혁명 이후 유족들은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1961년 5ㆍ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부는 위령비를 정으로 쪼아 땅에 파묻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다시 파내어 놓은 위령비에는 아직도 정 자국이 뚜렷하다. 파괴된 위령비는 학살이후 역사의 비극을 말해준다. ⓒ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 거창사건의 해결 과정
현대사에서 거창지역의 최대 비극은 신원면 민간인 학살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발생 당시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가해자들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역대 독재정권 아래에서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그릇된 시선 속에서 한을 품고 살아야 했다. 특히 독재자들이 반공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함으로써 신원사건 유족들이 그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유족들의 끊임없는 명예회복 노력에 의해 1995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이 법률은 1996년 1월 5일 공포되었다. 이로써 민간인 학살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고 2004년 4월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준공되었다.
아직까지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피해자의 명예가 회복된 것은 실로 사건발생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출처
1. 『한국사에 비추어 본 거창의 역사』, 신용균, 2015
2. 거창 민간인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 국민방위군사건
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이란 것이 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한국 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 사이에 500,000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약 50,000~90,000여명에 이르렀고 동상으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 뿐만아니라 손과 발까지 절단난 200,000여명이 넘는 동상자들을 이르게 한 사건을 말한다.
사실 원래 책정된 비용마저 부족해서 대량의 아사자 발생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 고위 간부들은 그것마저도 횡령해서 피해규모가 몇배로 불어나게 되었다. 5명의 국민방위군 고위간부들이 횡령한 돈이 1951년 당시 화폐로 30억원이었다.
- 하루아침에 장군이 된 김윤근
이승만 정권은 1950년 12월 21일 군인과 경찰, 공무원이 아닌 만17세 이상~40세 이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하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했다.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군 경력이 없는 사위 김윤근을 하루아침에 준장으로 만들어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윤근은 지청천이 만든 우익 반공 청년단체 대동청년단 출신이었는데, 대동청년단이 이승만의 사조직인 ‘대한청년단’에 흡수 된 후 단장을 맡았다. 부사령관 윤익헌도 대동청년단과 대한청년단 간부 출신이었다.
▲ 대구에서 징집된 국민방위군
- 죽음의 행진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다시 뒤집히자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4 후퇴라 불리는 제2차 서울철수 작전을 감행하는데, 이때 50만여 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도 남하대열에 올랐다.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하느냐였는데, 이들 50만 명은 걸어서 추운 혹한 상황속에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보급과 겨울피복 및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혹한의 추윗속에 굶주린 채 '장거리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많은 50여만 명의 병사들은 이동 중 아사하거나 동사하게 된다.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의 방위군 장병 중 무려 약 12만 여명이 사망했고 20만 여명이 동상에 걸렸다.
- 공산주의자의 선전?
곳곳에서 국민방위군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제보를 받은 일부 국회의원들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야당의원들은 1951년 1월 15일 ‘제2국민병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했다. 그 결과 무려 9만명에서 12만명에 달하는 청장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내무부 장관 조병옥은 대통령 이승만에게 국방장관 신성모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은 거부했고,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전 서울시장 윤보선도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라고 거부했다.
이 사건 와중인 1951년 2월 육군 11사단 9연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주민 719명을 마을 뒤 산골짜기로 모아 죽인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까지 드러나면서 이승만 정권의 무능, 잔학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 식민사학자 이선근이 재판장
국회 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결과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는데, 재판장이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이었다.
이선근 역시 지청천이 만든 대동청년단 준비위 부위원장 출신이므로 처음부터 봐주기 위해 재판장으로 선정한 것이었다. 와세다대 사학과 출신의 이선근은 식민사학자이자 만주국 협화회 협의원을 역임한 친일파였다. 이선근은 사령관 김윤근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해 큰 충격을 주었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 해체를 결의했고, 1심 선고에 대해 비판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중앙고등군법회의는 7월 19일 김윤근, 윤익헌 등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8월 12일 전격 집행했다.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착복한 수 십 억원 중 상당수가 이승만 계열 정치인들에게 상납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이들이 전격 처형되는 바람에 더 이상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 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 군 경력이 전혀없는 사위 김윤근을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그 와중에 동시에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마저 겹치면서 다급해진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와 내무부장관 조병옥 법무장관 김준연을 동시에 해임하고 이기붕을 국방장관으로 임명, 내각을 재개편하면서 국회에서의 국민방위군사건 중간발표의 중지를 요청, 사건의 확산을 무마하려 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진상규명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를 비롯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상규명이 방해받는 것을 지켜보았던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은 크게 실망감을 느껴 이에 반발하여 사표를 제출하였다.
- 국민방위군 관련책임자 조사재판
1951년 6월 15일 국민방위군 사건 재판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이 증인으로 나왔을 때 한 답변을 보자. 육군준장 김태청이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에게 국민방위군사령관 김윤근은 일등병의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별을 달고 사령관이 될 수 있나? 하고 묻자 정일권은 신성모 국방장관이 시키는 일만 했고 이승만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을 뿐입니다. 라고 답변하였다.
- 이승만을 살려준 6·25 남침
이시영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대통령 이승만은 사임은커녕 일체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반성은커녕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직을 연임하려 시도했다.
1948년의 제헌국회 선거에서 총 200석 중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중앙회는 55석, 득표율은 24%에 불과했다. 이승만은 한민당 세력을 끌어들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거듭된 실정으로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총선거에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회는 14석, 득표율 6.8%로 줄어들었다. 한민당 후신인 민주국민당도 참패했고 승자는 전체 210석 중 126석으로, 득표율 62%를 달성한 무소속이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으므로 이승만 정권의 몰락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총선을 치른지 불과 한 달 남짓만에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기사회생했다.
- 5·26 정치파동과 국제구락부 사건
부산으로 쫓겨 온 이승만은 국회의 간선제로는 대통령에 연임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직선제로 바꾸려했다. 이에 맞선 야당 의원 123명이 1952년 4월 17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자 이승만은 1952년 5월 25일 부산과 경상남도, 전라남북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다음날 5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헌병대로 끌고 갔다. 이것이 ‘5·26 정치파동’ 혹은 ‘부산 정치파동’이다.
이때 부통령직을 사임한 만 83세의 성재 이시영은 이승만의 무능과 독재를 방치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에 조병옥 등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6월 20일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시영과 조병옥을 필두로 심산 김창숙, 이동하, 서상일, 전진한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유진산, 장면 등의 정치가 등 77명의 정당, 사회ㆍ문화단체 지도자들이 위원으로 포진했다.
그러나 선언은 예정대로 발표되지 못했다. 선언 발표 당일의 사건을 여기 참석했던 정치인 고흥문(전 국회부의장)의 회고에서 보자.
“사회를 맡은 유진산 씨가 등단하여 막 개회선언을 마치는 순간 또다시 민주주의의 새싹은 짓밟혀지고 말았다. 와지끈! 출입문이 박살나면서 수많은 괴한들이 대회장 안으로 난입해 들어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의자·화분 등을 뒤엎고 대회에 참석 중인 1백여 인사와 40여 명의 국내외 기자들을 향해 무차별로 돌멩이, 부숴진 의자, 깨어진 화분을 집어 던졌다. 심지어는 발길질, 주먹질을 해댔다. 대회장은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당시 대회장에 참석해 유석(조병옥)과 진산을 거들어 주고 있던 나는 의자로 머리를 가리고 황급히 조병옥 박사와 이시영 씨 등을 감싸고 피신했다. 그때 조 박사는 화분을 뒤집어 써 타박상을 입었고 김창숙ㆍ서상일 씨 등도 부상을 당했다. 현장에서 유진산ㆍ김동명ㆍ이정래……등이 헌병에게 체포되어 경남 도경찰국에 구금되었다(고흥문, 『못 다 이룬 민주의 꿈』)”
- 이후에 발생한 일
이승만은 그해 7월 4일 야당 의원들의 참석을 저지한 채 직선제 개헌을 밀어붙였고 부정선거 끝에 대통령에 연임되었다. 10만 명 이상을 죽게 만든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선근은 이후 서울대 교수, 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성균관대·영남대·동국대 총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초대 원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이승만 정권은 물론 유신체제 찬양에도 앞장섰다. 한국현대사의 뒤틀린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출처
1.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44851859456808&id=100017959833091
2.
https://ko.m.wikipedia.org/wiki/%EA%B5%AD%EB%AF%BC%EB%B0%A9%EC%9C%84%EA%B5%B0_%EC%82%AC%EA%B1%B4
■ 전직 일본군 김종원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일제는 자기네 국민을 총알받이로 내몬 것은 물론 조선과 대만 등 식민지 백성들에게도 희생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1938년 조선에 실시한 ‘지원병 제도’는 그중 하나였지.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강제로 ‘지원당한’ 경우도 많았지만 출세하려는 마음으로, 일본인으로 살아보겠다는 꿍꿍이셈으로 ‘지원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김종원(1922~1964)도 있었다.
해방 이후 신생 대한민국에서 군인으로 새 출발을 한 김종원은 1948년 10월 여순 사건에 진압군으로 투입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박격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아군에게까지 피해를 입혀 미군 군사고문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반란 진압 후에는 더욱 ‘일본군스러운’ 면모를 과시한다. 일본도를 들고 다니며 ‘빨갱이’ 포로들의 목을 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김종원은 3사단 23연대장으로 경북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경북 영덕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 1950년 3월14일 빨치산 내통 혐의자 3명에 대한 총살을 집행하는데 유치장에 갇혀 있던 좌익 혐의자 33명을 끌어내 이를 보게 했단다. 겁을 주려는 심산이었겠지. 그런데 그 가운데 철없는 한 명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짖었다. 이에 격분한 김종원은 “직접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내장이 튀면서 현장은 난장판이 됐고, 그걸 지켜본 사람은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경남도민일보〉 2015년 6월7일,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
1951년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이 폭로되고 발칵 뒤집힌 국회는 조사단을 파견했다. 당시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한 뒤 조사단에 위협 총격을 가한다. 즉 국군을 인민군으로 위장시켜 국회의원들을 공격했던 것이다. 이 일이 폭로됐을 때 김종원은 군법회의에 회부돼 징역 3년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이승만이 직접 나서서 사면을 지시했다. 이때 이승만이 이종찬에게 했다는 얘기는 그가 제정신이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김종원이 우국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 이순신 장군에 비교할 만하다(〈프레시안〉 2013년 11월14일,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 4월 1일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대령이 지리산 주변에서 일어난 약간의 민폐는 군기문란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4월 2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김종원대령에게 국회합동진상규명조사단이 현장에 가지 못하도록 부탁하자 군인을 공비로 가장해서 신원면 길목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 ⓒ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추모공원내 역사교육관
사면 이후 군복을 벗은 김종원은 경찰 제복을 입고 활개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56년 내무부 치안국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보직을 차지하게 되지. 그 비결은 다름 아닌 “이 박사의 명령이면 죽기라도 할 수 있는 충성(경북도청 홈페이지)”이었지. 이 단순 무식 과격한 치안국장 김종원이 장안을 호령할 무렵, 장면 부통령이 총을 맞는다.
경찰은 민주당 계파 갈등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우겼지만 내막은 전혀 달랐다. 고령의 이승만이 갑자기 사망한다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은 야당의 장면 부통령이었기에 당시 여당 인사들에게 장면은 제거 대상 1호였고, 기어이 이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치안국장 김종원은 이 암살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된다. 1957년 3월6일, 재판을 받던 도중 그는 또 한 번 기막힌 행동을 벌인다. 판사에게 이렇게 호통을 친 거야. “재판 공정히 하시오! 나를 근거도 없이 배후로 몰고 있어! 맘대로 해! 당신은 일개 판사지만 나는 헌병 사령관이었어.”
민간인 살해, 국회의원들의 공무집행 방해, 적전(敵前) 도주, 살인교사, 법정 모독 등 비전문가가 주워섬겨도 10개는 넘을 듯한 범죄를 저지른 김종원은 4·19 혁명 이후에야 겨우 그 악행에 대해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장면 암살 음모 재판에서 하수인들은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몸통' 김종원은 겨우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그마저도 보석으로 풀려났고 편히 살다가 1964년 세상을 떠난다.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308/0000028815?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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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팔도유람 선생님 너무 유익한 정보 감사드려요. 직업 선택 10계명을 보니 돈, 명예, 권력을 버리라는 건데 생각나는 직업이 없네요 ㅎㅎ; 아무튼 시간나면 꼭 팔도유람 답사 코스를 가야겠네요 !
ㅎㅎ 지금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고 인기가 없는 곳이라도 묵묵히 가다보면, 음지가 양지되듯이 운세가 바뀌면서 좋은 날이 올 수 있으니까 너무 세속적으로 직업을 선택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닐까? 본인이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남들이 전혀 가지 않는 길은 간 사람으로서 한 말 같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박 박사도 양지될 날이 곧 올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