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래공수거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come empty, return empty’로 영역해 본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빈손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죽어갈 때도 모든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빈손으로 죽어간다는 의미이다. 지나치게 탐(貪)하지 말고 분수에 맞게 본래의 마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다. 최근에 ‘세한도’가 국민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들으니 ‘공수래공수거’가 다시 머리에 떠오른다.
1844년 추사 김정희는 유배 시절 도움을 줬던 제자에게 그림을 그려 보내줬다. 이 그림은 180년 동안 10명의 주인을 거쳤다. 이 굴곡진 소장사(史)에서 일본인 후지쓰카 지카시다씨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 추사를 흠모하고 열정적으로 연구한 학자였다. 1926년 경성제대 교수로 부임해 서울에 왔다. 부지런히 추사 유품과 자료를 사 모았다. 1943년 그는 ‘세한도’를 들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얼마 뒤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러고는 100일간 문안하며 ‘세한도’를 내달라고 간곡히 청했다. 후지쓰카는 그 귀한 작품을 생면부지의 한국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내주었다. “그대 나라의 물건이고, 그대가 나보다 이 작품을 더 사랑하니 가져가라.”라며.
62년이 흐른 2006년,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아버지가 수집했던 추사 친필과 관련 자료 등 2700여 점을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아버지의 수집품을 돈으로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려받은 문화재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한국이라고 믿었다. 그는 사람이 공수래(空手來)는 못 해도 공수거(空手去)는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1944년 극적으로 고향에 돌아온 세한도는 주인이 계속 바꿨다. 이후 개성 갑부 손세기 소유가 됐으며 아들 손창근씨가 물려받아 소중히 간직해왔다. 손세기는 평생 근검절약을 철칙으로 삼았으나 고서화 수집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서예·회화 200점을 생전 서강대에 기증했다. 선친의 정신을 계승한 손창근씨도 대를 이어 수집한 컬렉션 304점을 아무 조건 없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식에서 손씨가 한 말은 후지쓰카 아키나오의 말과 묘하게 닮았다. “죽을 때 가져갈 수도 없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박물관에 맡기기로 했다.” 어떻게 삶을 품위 있게 마무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손씨가 구순을 맞아 컬렉션을 몽땅 기증하면서도 ‘이것 하나만은 섭섭해 안 되겠다.’던 작품이 ‘세한도’였다. 그 마지막 한 점까지 아낌없이 내놓으면서, 굴곡 많은 작품의 여정도 대미를 장식하게 됐다. 한일 부자(父子)의 대 이은 나눔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선의를 새삼 일깨워줬다. 두 부자는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살면서 얻은 교훈이다. 젊어서는 나 자신도 모르게 세월을 허비했다. 조금 나이가 드니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난 괜찮고, 넌 아니야!’라고 하면서 살았다. 더 나이가 드니 선과 악의 가치를 가리면서 더 나만 옳다는 이기적인 사람이 되었다. 이젠 옳고 그름도 아니고, 선과 악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며 살고 싶다. 다툼을 멀리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넉넉한 아름다운 여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공수래공수거’는 이런 소망을 이끄는 여러 지렛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시구 “사는 것, 잠자는 것, 죽는 것, 이 모두가 꿈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