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7. 7(주일)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맥추감사주일 (2024년 27주)
제목; “감사와 은혜를 나누는 교회”
성경; 고후 8:1-6 (p293) (시 107:1-3, 317<353>, 218<369>, 1)
<예배의 부름> (시 107:1-3)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자들은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그들을 속량하사, 동서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련의 달 7월 첫째 주일과 2024년 상반기를 보내고 감사하는 맥추감사절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삶 속에서 정말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영어 문자 두 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Thank You!” = 감사합니다. "You, Thank You!” = 당신,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후자에 ‘You(당신)’이라는 단어 하나가 더 들어갔는데, 무엇이 다를까요?
후자는 외국인들이 한국인을 보면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고 무슨 의미일까요? 참으로 창피하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한국인들이 감사를 할 줄 모르니까 외국인들이 “너 대신 감사”하고 감사를 대신 해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한국인들이 감사할 줄 모르면 이렇게 말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원래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Thank You?”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그것을 소중히 한다는 의미입니다. 탈무드(Talmud)에 보면 “혓바닥에게 ‘감사합니다.’는 말을 버릇들이기 전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자녀를 하나나 둘만 낳다 보니, 과보호 속에서 유아독존, 자기중심, 이기심으로 살아온 아이들이 도무지 ‘감사’라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원래 기독교인들은 감사의 사람들입니다. 누구 탓하기 전에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Thank You?”,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는 말을 입에 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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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감사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말했고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감사의 분량이 곧 행복의 분량이다.”라고 했듯이, 감사한 만큼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빌헬름 웰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장 많이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정비례하기 보다는 감사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마음은 지옥과 같고 감사가 없는 가정은 메마른 광야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지식과 명예와 권세와 부를 많이 쌓아놓았다고 해도 감사가 없으면 진정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원료이며 풍요로운 삶의 재료입니다.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에너지입니다. 감사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절반을 보내고 새로운 절반을 시작하면서, 지난 절반이 정말 힘들었다고 할지라도, 또 다시 절반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Thank You?”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는 말을 입에 달고, 늘 감사하며 새로운 절반을 시작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고후 8:1-6)은 환난을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모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연보(헌금)에 대해, 마게도냐 교회가 보인 구제 연보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연보를 함에 있어서 마게도냐 교회 역시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지만, 간절히 자원함으로써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하였습니다(2). 또한 연보를 주님께 대한 인격적 헌신의 표시로써 행하였습니다(5).
사실 자신이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 중에 있으면서 남을 돕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옛말에 ‘홀아비 마음은 과부가 알고, 처녀 마음은 총각이 안다’는 말이 있듯이, 환난과 시련 중에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더 잘 알고, 도와주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환난 중에도 힘에 넘치도록 풍성한 연보를 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미 계획을 세워서 시작했던(6,10-11) ‘구제 연보’를 마무리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시작했던 구제 연보를 마무리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주님의 뜻을 이뤄가기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 고린도후서 8장 구성 :
1-5절 : 마게도냐 교회의 구제 연보의 모범
6-15절 : 구제 연보에 관한 권면
16-24절 : 예루살렘 구제 연보를 위해 동역자 디도를 파송함
1. 사도 바울과 고린도교회와의 관계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때 18개월 동안 머물면서 개척한 교회입니다. 고대로부터 고린도는 아테네, 스파르타와 더불어 매우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기원전 44년에 도시가 재건된 후에도 지중해 해상 교통의 요지로써 사람들이 많이 모임으로 무역과 금융이 발달하여 부(富)가 형성된 도시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함께 선교를 하며 성과를 올렸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바울은 다른 지역을 선교하기 위해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과의 관계는 매우 특별합니다. 고린도교회 내의 분열은 물론(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자신을 반대하는 성도들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했고(고후 2: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이로 인해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방문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이전에 이미 고린도 전전서(前前書)를 보낸 바 있고(고전 5: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고린도전서를 보내고, 다시 고린도후서에 앞서 고린도교회와 사도 바울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방문’(painfulvisiting)을 하고, 이어 디도를 통해 소위 ‘눈물의 편지’(고후 2: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를 보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이 방문하고(고후 13:1- 세 번째 방문 예고, 행 20:2-3- 세 번째 방문), 에베소와 마게도냐(아마도 빌립보)에서 머물면서 적어도 네 번의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그야말로 바울의 마음을 후비며 매우 힘들게 한 ‘아픈 손가락’ 교회였습니다. 이런 고린도교회의 분열(파당)(고전 1-4장), 복음과 구원에 대한 오해로 생긴 문제(고전 5-7장, 음행, 송사, 결혼 등), 먹거리로 인한 문제(고전 8-10장, 우상 제물 등), 예배 모임으로 인한 문제(고전 11-14장, 성령 은사 등), 부활(고전 15장)등 교회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면 으레 생길 수 있는 문제들과 해결을 위해 성심성의껏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교회에 생긴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을 보았다고 믿은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헌금에 관한 권면을 하였습니다(고전 16:1-4). 그리고 이 헌금, 특별히 구제 헌금과 관련하여 고린도 교인들을 가르치고 많이 내주기를 내심 바라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8,9장입니다.
2.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연보를 하게 된 이유 :
오늘 본문의 주제인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연보’는 갈라디아서 2:10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라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의 결의에 따라 시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통해 개척된 이방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자신의 편지 가운데 여러 군데에 드러납니다(고전 16:1-4, 고후 8-9장, 롬 15:25-31, 갈 2:10). 특히 로마서 15:26에 따르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라고 언급하는데, 오늘 본문에서 모범으로 제시되는 마게도냐 성도들과 편지의 수신자로 소개되는 아가야 사람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모두 당사자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도행전 20:4에 사도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교회도 구제 헌금에 동참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 이유, 가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추측만 할 뿐이지만, 예루살렘교회가 상당한 규모로 성장하게 되자 돌봐야 할 과부들의 숫자가 늘어나 구제 현금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행 6:1-7), 40년대에 있었던 유대 땅에서의 흉작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행 11:27-30).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때에 여러 지역에 흉작과 빈번한 기근이 들었다는 기록이 있고, 특히 기원후 46-48년 팔레스타인에 심한 기근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1:27-30은 수리아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모교회를 도왔다는 기록입니다. 따라서 기근으로 인한 흉년이 구제 헌금의 이유로 가장 근접합니다.
3. 연보를 하는 목적
오늘 본문의 중심이 되는 주제, 즉연보는 어떤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네 가지 정도의 연보의 성격이 제안되고 있습니다. 첫째, 의무적으로 내는 세금의 성격을 지닌 ’성전세’라는 의견, 둘째, 사랑의 구호금, 즉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도와주는 단순한 ‘사랑의 선물’이라는 성격이라는 의견, 셋째, 순례 예물, 즉 종말에 이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할 때 가져오는 예물이라는 의견, 넷째, 알모젠(Almosen), 즉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믿음과 유대인들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주었던 구제금과 비슷하다는 견해 등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의 의미가 아니라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자발적 구제와 나눔의 표시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먼저 힘들고 어려운 상황, 즉 ‘환난' 가운데에서도 적극 동참하고 있음을 언급합니다(2).빌립보서(빌 1:29-30)와 데살로니가전서(살전 1:6, 2:14, 3:3-4)에 언급되고 있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교회가 당하는 박해 상황일 것입니다.
4. 사도 바울이 말하는 연보의 의미
한글 개역 성경에서 “연보”로 번역된 ‘하플로테토스’(ἁπλότητος)는 ‘하플로테스’의 소유격 단수 여성 명사로, ‘플로테스’는 ‘단순’, ‘성실’, ‘관대함’, ‘순수’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KJV는 ‘liberality’(관대함)로 번역합니다. 이는 타인들을 향한 열린 마음과 관대함을 뜻합니다.9:11.13에서도 이 표현이 ‘관대함’이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마게도냐 교회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던 물질적 결핍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보다 더 심한 결핍을 겪고 있었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그들의 열린 마음과 관대함 그 자체가 구제금을 자발적으로 놓게 된 동기이고, 또한 바로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중요한 표지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게도냐 교인들의 태도는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의 모습을 보인 바울의 삶의 태도와 아울러 자기의 모든 소유를 드린 마가복음 12:41 이하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연보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연보’란 용어와 더불어 ‘헌금’이란 용어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이는 한글 개역 성경이 이 두 용어를 혼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한글 개역 성경을 기준으로 할 때 “연보”란 용어가 7회나오고(고전 16:1, 고후 8:2.20, 9:5,11,13), “연보궤”란 용어가 5회나오며(막 12:42,43, 눅 21:1, 요 8:20), ‘연보하다’란 동사 형태가 3회나옵니다(대하 34:9.14, 고전 16:2). 그러나 “헌금”이란 용어는 명사 형태로 단지 2회나올 뿐입니다(눅 21:1.4). “연보”와 “헌금”이 물론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이와 같은 활용의 빈도를 기준으로 본다면 “연보”가 더 보편적인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연보”(하플로테스)라는 단어를 “은혜”(카리스, χάρις), “참여함”(4, 교제, 코이노니아, κοινωνία), “섬기는 일”(4, 디아코니아, διακονία) 등 본 주제의 핵심 단어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세 단어를 “연보”를 가리키는 단순한 동의어들로 취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먼저 가장 중점적으로 사용된 용어는 “은혜”, 곧 ‘카리스’입니다. ‘카리스’는 보통 ‘은혜, 선물, 호의 베풂, 감사' 등이 기본 의미이지만,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값어치 없는 죄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 또는‘수혜자의 가치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카리스’는 고린도후서 8,9장에서 무려 10회나 언급되는데(8:1,4,6,7,9,16,19, 9:8,14,15),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먼저 ‘복음의 은혜, 즉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리킵니다(8:1,9, 9:8,14). 두 번째로, ‘구제금, 즉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구제금'을 가리킵니다(8:4,6,7,19).세 번째, ‘하나님을 향한 감사, 즉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라는 의미입니다(8:16, 9:15).
최근 영국 더럼대학교 존 바클레이 교수는 사도 바울이 이신칭의 사상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념, 즉 ‘카리스’를 바울과 동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연구하고‘은혜’ 대신 ‘선물’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선물’이 무조건적(unconditional, 수혜자가 어떤 답례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가 없는)이 아니면서, 동시에 무제약적(unconditioned, 수혜자의 이전 상태와 관계가 없는)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부연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카리스)는 인간의 응답을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감사와 함께 제사, 또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롬 12:1). 그리고 이‘카리스’는 서로 주고받는 순환을 가정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의 카리스(고후 8:1, 9:8,14)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고,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하나님께 카리스(감사, 8:16, 9:15)를 돌려보내는 소위 ‘카리스의 순환’이 나타납니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흘러가는 ‘카리스’(예루살렘 연보, 베풂, 혹은 자선, 8:4,6,7,19)도 나오는데, 신약성서에서 ‘카리스’는 이러한 이중 순환이 잘 드러납니다. 이러한 ‘카리스의 순환’은 결국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카리스(감사)가 될 수 있습니다(고후 9:15). 특히 고린도전서 16:3에서도 ‘카리스’로 표현되듯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하는 자유로운 사랑의 선물”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고전 16:3).
그리고 “참여함”(교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단지 다른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나눔을 가능하게 하고 효력 있게 해주는 근거와 기준이 되는 객관적인 실체, 종교적인 선에 참여한다는 개념을 지닙니다(빌 1:5,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이 경우에 마게도냐 교인들이 교제에 참여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섬기는 일”, 즉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구체적으로 “연보”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주석가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듯이, ‘디아코니아’는 바울이 예루살렘 공동체를 후원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의 교인들로부터 모으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연보”를 나타냅니다.
5.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적인 헌금이 주는 교훈
헌금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존재 목표를 위해서 혹은 구제의 목적으로 사용됩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잘 드려야 하고, 잘 사용해야 합니다. 어느 한 편이 잘못되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근본은 다 같습니다. 본장에서부터 9장까지는 이방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본장에서 바울은 먼저 궁핍한 기운데서도 최선을 다해 헌금해 준 마게도냐 교회를 칭찬하였습니다.
1)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환난 중에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2)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환난과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였습니다.
여기서 “환난”(들맆시스, θλῖψις)은 ‘박해’로 번역되는 단어로 성경 곳곳에서 마게도냐 교회 공동체가 경험한 환난을 언급하고 있는데, 빌립보서 1:29-30, 데살로니가전서 1:6, 2:14, 3:3-4, 데살로니가후서 1:4-10 등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은 극심한 가난과 결부되어 있으며(2), 유대인들의 시기로 인해 어려움을 당한 것(행 17:5-8), 대적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빌 1:8-30, 살전 1:6, 2:14, 3:3-4, 살후 1:4-10). 그러나 마게도냐 교회는 많은 시련 중에도 낙망하지 않고 기뻐했으며 헌금으로 그들의 믿음이 입증되어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게도냐 교인들은 정복자들인 로마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용해야 할 많은 천연 자원을 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대부분 교인들이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형편에 비하면 풍성하게 연보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연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카리스)였습니다(1). 하나님께서는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기쁨과 후한 마음입니다(2). 마게도냐 교인들에게 허락되었던 은혜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의 모금 행위로 더욱 빛이 납니다. 그들은 불편 없이 살아갈 만큼 물질적인 부(富)와 번영을 누리는 좋은 형편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들 자신의 빈곤도 대단하였고, 그들의 쌀통은 이미 비워져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 개의치 않고 그들은 기쁨과 관대함으로 헌금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그들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참된 관대함은 넉넉한 소유를 누리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실질적 증거입니다. 종종 가장 참된 자선은 줄 것이 별로 없는 사람틀에 의하여 수행됩니다. 예수님은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은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드린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린 것으로 평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 모든 소유 즉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막 12:41 이하).
2) 마게도냐 성도들은 힘에 지나도록 헌금했습니다(3).
마게도냐 교회는 힘대로 헌금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다고 했습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3)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세 가지로 헌금했다고 합니다.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드렸다고 자랑하고 칭찬합니다.
먼저 “힘대로’(카타 뒤나민, κατὰ δύναμιν)는 일반적인 연보의 기준입니다. 즉 연보는 외부의 강요나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득에 대한 고려와 더불어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금을 남겨두고 드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또한 일반적입니다.
다음으로 ”힘에 지나도록“(파라 뒤나민, παρὰ δύναμιν)동참하였다고 증거합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이 현재와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자세로 헌금했음을 의미합니다(고후 12:9, 마 6:8.25-34, 빌 4:19), 여기서 ”지나도록“으로 번역된 전치사 ‘파라’는 본문에서 ‘~이상으로(above)’, ‘~을 넘어서(beyond)’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뒤나미스, δύναμις)의 범위를 초월하여 구제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원하여”(아우다이레토이, αὐθαίρετοι) 드렸는데, ‘자기 자신’(아우토스) + ‘선택하다’(하이레티조)의 합성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 ‘자기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으로’, ‘독자적으로’란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들의 곤핍하고 가난한 사정을 고려하여 일부러 연보를 부탁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4), 실로 놀라운 헌금 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어 성경 RSV는 이것을 ‘of their own free will', 즉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뜻대로’로 번역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자유로운 뜻대로 드렸던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이 이러한 연보 계획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구했다’(4)는 사실에 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자신들도 박해와 환난을 당하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마게도냐 교인들은 자신들의 이런 열악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수입에 따라 헌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자원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아마 마게도냐 교인들은 극심한 가난 때문에 그들이 모금한 금액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10만원 밖에 없는 사람이 100만원을 헌금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10만원이 그의 힘의 절대 한계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통 당장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 필수품들과 비상시를 위한 안전 조치로써 얼마를 비축해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마게도냐 교인들은 비록 가난하였지만 그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필요에 대해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들을 위한 사랑과 연민 때문에 당장 쓸 것과 얼마간의 저축도 포기하고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필수품들을 공급해주시는 분이라는 신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마 6:8), 강압이나 강요에 의해 사람들로 하여금 힘에 지나도록 내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로부터 돈을 얻기 위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헌금입니다. 참으로 마게도냐 교인들은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고, 그 기도의 응답을 믿고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잠 11:24)는 진리를 설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 강림으로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 2:44-45)라고 했듯이, 그들은 이 초대 교회의 모습을 기뻐하며 실천했던 것을 본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의 본을 배우고 따를 수 있기 바랍니다. 환난 중에도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평안할 때 더 하시기를 바랍니다. 힘에 지나도록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께 드리시기를 기원합니다.
3) 마게도냐 성도들은 헌금보다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다(4-5).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4-5)
마게도냐 성도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것을 간절히 구한 것 뿐만 아니라, 먼저 자신들을 주님과 바울에게 드렸습니다(5). 여기서 “먼저”(프로톤, πρῶτον)는 시간적인 의미와 중요도에 있어서 우선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바쳤다’는 뜻입니다. 즉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헌금을 모금할 때 특별한 목적을 위해 주님께 자신들의 삶을 재헌신(再敵身)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면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성도들이 ‘자신의 기대를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 교인들의 드림은 무엇보다도 자신들을 드린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 자신을 드림은 중요성에 있어서도 “먼저”일 뿐만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먼저”였습니다. 자기를 드림이 없는 자기 희생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다른 무슨 봉사든지 주를 섬김에 있어서 먼저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린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은 입으로는 헌신한다고 하면서 행함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하거나 잘못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는 선을 행하되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요일 3:18). 하나님은 소원을 두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백성입니다(딛 2:14). 주님을 본받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막 10:45). 이웃에게 사랑으로 희생 봉사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눅 10:30-37) 뜨거운 열심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의 지혜나 방법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말씀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을 매우 칭찬합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5)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자신을 드리는 것이 최고의 헌금이며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III.
인간을 파괴시키려고 계획한 한 사탄의 옛날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탄은 그의 동료를 불렀습니다. 맨 처음 “분노”라는 사탄이 와서 “내가 인간을 멸망시키겠소. 인간들이 화가 나서 서로 싸우게 만들면 결국은 다 망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다음엔 욕망이란 사탄이 와서 말합니다. “저는 인간의 마음에 더러운 욕망을 가득 차게 해서, 짐승처럼 전락해서 망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만이란 사탄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나를 가게 해 주십시오. 나는 인간이 욕망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제력을 잃게 되어 스스로 멸망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계속해서 탐욕이란 사탄, 시기라는 사탄, 미움이란 사탄도 찾아와서 각각 그들 나름대로 인간을 망하게 만들 수 있는 계획을 말했습니다. 게으름이란 사탄역시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어느 계획도 사람을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두목 사탄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의 마지막 동료가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설득력 있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인간에게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계획과 그의 결론이 얼마나 훌륭한지, 그리고 얼마나 정직하고 순수하고 용감한지를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좋은 목적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사탄은 그 말에 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간에게 그렇게 좋은 일은 너무 서둘 필요가 없다고 설득시키겠습니다. 잠시 후에 일을 시작해도 모두 할 수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시작하기 전에, 조건이 좀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하겠습니다.” 이때 사탄은 만족했습니다.
그는 “너야말로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보내져야 할 존재로구나”하고 무릎을 치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바로 무슨 일이든 질질 끌게 하는 지체(遲滯)라는 사탄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고 하더라도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4년 절반을 보내며 지나간 시간에 감사하고, 오는 시간에 소망을 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맥추감사절 예배를 드립니다. 자신들이 당하는 환난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어려움 당하고 있는 모교회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힘대로,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헌금했습니다. 구제 헌금을 하고 나눔과 섬김을 하는 것을 한시도 미룰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성도의 사명입니다. 인간을 파괴시키려는 사탄의 최고 전략이 ‘지체, 미룸’임을 기억하고, 오늘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자원하여 헌금하고, 이웃과의 교제(코이노니아), 섬김(디아코니아)을 깊고 넓게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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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7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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