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2일 수요일 오전 10시 목마 도서관에서 6월 글두레 정기 모임을 가졌습니다.
6월의 추천시는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수록된 <콩나물 한 봉지 들고 너에게 가기> 시를 감상하였습니다.
7월의 추천책은 글쓰기와 관련된 책으로 다함께 글쓰기를 해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 김현아의 <활활발발>, 이슬아의 <부지런한 사랑> 책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7월 모임은 평일 모임에 참석하기 어려운 회원님들을 위해 7월 둘째주 수요일이 아닌 토요일 13일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7월 모임의 장소는 곧 공지에 올리겠습니다. 앞으로도 평일 모임이 어려운 회원님들을 위해 2~3개월 한번씩은 수요일 모임이 아닌 토요일 모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회원님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6월의 책,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에 대해 독서 소감을 나누고 소감 발표에서 궁금했던 점이나 함께 토론하면 좋을 주제 몇가지를 취합하여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래의 독서 소감은 조헤정 선배님께서 정리 해주셨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독서 소감 발표하기
ㅡㅡ 섬세하고 간결하게 눈앞에 그려지듯 표현했다. 이런 글쓰기라면 쓸 수 있지 않을까, 편안하게 내 느낌을 쓰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 때 긍정적인 생각 갖기는 어떻게 할 수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어렵기도 했다. 눈으로 읽고 쉭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담백한 글이지만 공감이 안돼 갑갑했다. 내 생활과 동떨어진 느낌에 살짝 불편했고, 이해가 안됐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세계에 사는 듯 정서가 나와 안 맞았다. 불편하고, 산만하고, 어렵기도 했다. 여자의 일생을 전체적 흐름으로 한편의 영화를 본 듯하다. 다사다난한 삶이구나, 그녀가 대단하다 싶기도 했지만, 쓸쓸함과 외로움이 단락마다 느껴졌다. '애도'가 가장 와닿았다. 인생이 두어 시간 안에 정리된다는 게 슬펐다.
예전에 읽은 엘리스 먼로의 단편이 떠올랐다. 좀더 예민했고 감정소비가 많았던 때, <디어 라이프>로 답을 얻었고 위로를 받았는데, 이 책을 통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받았다. 끝까지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 작품이 끝날 때마다 뭉클했고, 감정을 누를 만큼 여운이 길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않았다면 이런 작품이 나왔을까 싶다. '카르페디엠'에 특히 공감했다.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서 지금의 소중함을 더 깨닫기에 조급한 마음이 들곤 한다.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까지 솔직할까, 처음에는 당혹스러웠고,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 자신을 보았다.
하지만 어떤 설명도, 감정풀이도 없이 긴장감있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놀라웠다. 압권은 몇개의 문장으로 때로는 단 한문장으로 글을 가뿐히 끝내는 방식이었다. 유머러스했고, 뭉클했고, 때로는 서늘하고, 냉정했다.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가차없는 현실에, 불완전한 인간을 얘기하지만, 담담히 감당해내는 존재의 힘이 느껴졌다. 저자가 집으로 가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했다.
문학적으로 표현해내는 능력과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능력이 잘 결합되었다. 자신에게도, 독자에게도 거리두기를 가능케 해, 생각해볼 텀들이 있었다. 접해보지 않은 다양한 인물들을 열린 시선으로 매력적으로 그려낸 게 놀랍다. 나의 글쓰기를 보면, 감정 떨치기가 어려웠는데, 어떻게 이런 평정심을 유지하며, 간단 명료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보통의 숙명을 넘어서 살아낸 사람 같다. 자기연민없이 객관적으로 보는 데 기인한 듯하다. 간결한 삶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가며 빛나는 스토리에 감동을 받았다. 뭉클하고 유머러스하기도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기도 했다. 알콜중독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삼인칭으로 표현했는데, 왜 그랬을지 구금하였다. 사실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독자를 공감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삶도 글로 풀어내면 아름답고 이야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남은 10년 동안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엘팀, 환상 통증도 좋았고, 회귀의 마지막 문장이 위로가 되었다.
소설을 오랜만에 진지하게 읽었다. 처음에는 나역시 자꾸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했다. 점차로 조금씩 바뀌면서,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묻게 되었다. 각각의 등장인물에 대한 이해심이 생기면서 가치판단이 사라지는 순간을 느꼈다. 이런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이 책의 능력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르고 낯설었지만 저자가 좋아졌다. 솔직하게 감당해내는 삶의 태도를 배우기도 했다.
###### 토론주제
1. 저자는 하나의 사건, 기억을 다르게 여러 방식으로 썼는데 왜 그렇게 했을까?
- <엔젤 빨래방>과 <B.F.와 나>에서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은 어떻게 다른가?
2. 자전적 글쓰기인데 왜 이렇게 자기얘기를 계속 썼을까? 집으로 가는 글쓰기란 어떤 의미일까?
3. 가치판단이란 무엇인가? 왜 하는가? 당연한 것인가?
4. 저자의 글에 힘이 있다면, 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 독서 후기
ㅡㅡㅡ이전에는 지금보다 예민한 성격 탓에 감정 소비가 많아서 힘들었다. 어떤 일을 겪으면 완벽하게 해결해야 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늘 갈구했다. 담대한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 어떤 이들은 종교에서 그 답을 얻는다지만 난 책을 통해서 답을 얻고자 했다. 그러던 중에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을 만났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다. '완벽한 삶은 없구나. 그런게 인생이야. 다들 아픈 삶을 살지만 그러면서도 살아가는구나.' 내 안으로만 침전했던 어지러진 상념들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디어 라이프>는 내게 참 많은 의미가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번에 <청소부 매뉴얼>을 읽으며 <디어 라이프>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청소부 메뉴얼>은 끝까지 읽는데는 의외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편이 끝날 때 마다 여운에 붙잡혀서 곧장 다음 글로 이어갈 수가 없었다. 자전적인 소설이어서인지 유독 생생하게 읽혔다. 주로 카페에서 읽었는데 목이 메이고 눈물이 찔끔거릴 때가 몇 차례 있어서 감정을 꾹꾹 눌렀다. 그녀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삶을 정말 컬라풀하게 산 듯 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않았다면 삶은 흑백이 되었고 단조롭고 지루했을 것이며 <청소부 메뉴얼>같은 작품도 나오지 못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인생이 그려진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장면을 그리게 되고 그녀의 고통을 볼 때는 같이 마음이 아팠다. <청소부 메뉴얼>의 수 많은 단편 중 <카르페디엠>은 특히 좋아서 몇차례 음미하면서 읽었다.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그녀가 속마음으로 한 말(커피를 타서 집 뒤편 계단에 나가 앉았다. 행복했다. 마음이 차분하고 느긋해졌다.)은 지독하게 공감이 간다. 완벽한 삶은 없다. 삶에 작든 크든 구멍이 생겨도 거기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살그머니 다가오는 기분 좋은 순간을 붙잡을 줄 알아야 한다. 카르페디엠, 우리가 순간순간 작은 행복을 느끼는 힘을 키운다면 너덜해진 삶일지라도 지속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1~2년 전부터 죽음을 시시각각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작별했던 이들처럼 어느순간 나도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서늘해진다. 지금 만나는 사람들, 내가 향유하는 시간, 공간들이 예사롭지 않고 귀중하게 다가온다.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이전보다 다급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루시아 벌린,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한다.
그녀는 그녀의 삶을 정직하고 용감하게 살았다. <쿠키별님>
ㅡㅡㅡ각각의 작품들은 한쪽 가지를 차지하고 바람이 불어와 각기 다르게 흔들리고 있다. 이제 한 백 수십년을 산 큰 나무처럼 내게 와서 우뚝 섰다. 5살때 이웃집 친구와의 이야기의 시작부터 많이 늙어 되돌아 보는 회귀까지
고통과 슬픔의 시간에서 자기연민 없이 객관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보고 또 그렇게 표현한데 기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1인칭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등장인물이 되풀이 되어서 나오니까 거의 자전적 이야기를 보는 느낌을 갖게
하였다. 3인칭으로 씌여진 4편의 이야기는 알콜중독과 관련된 것으로 아마도 본인의 의지가 관여하지 않은 또 다른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1인칭과 3인칭, 복수의 화자로 표현되는 등장인물들에게서 그들이 각기 과제를 안고 있구나 했는데 읽고 나서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다른 색깔의 삶을 보면서 순간 인간의 개체성이 아이러니했다.
풍경이나 사물의 묘사가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로, 간결한 문장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오히려 삶의 궤적만 따라가게 하므로써 그 안에서 스토리의 힘을 느끼게 해주었다. 거의의 작품들이 연결성을 가진 것이었고 또한 한편으로는 별개의 단편으로 속성인 군더더기 없는 인생의 단면을 보게 해주었다.
영웅적 삶이 아닌 평범하다못해 남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본성에 충실한 사람들. 삶과 부서져 내리는 시간중에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작품에 등장하면서 스토리를 가지게 되고 스토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결국은 인생의 또 다른 관계를 발견하게 해준다. 쓸쓸하고 외롭고 부조리하지만 유머러스한 것도 있고 따뜻하기도 했다.
모두가 다른 나였다. 그리고 책을 덮었을때 한그루의 나무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그들을 느꼈다. 부적합한 관계는 있지만, 화가 나는 것과 맥이 빠지게 하는 것도 있지만, 결국은 모두를 끌어안았다. 소설의 힘이라고 본다.
2번을 보고 , 또 들쳐 반을 보았다. 이야기를 정말 잘 만드는 작가이다. 관계와 삶의 묘사만으로 자꾸 읽게 만들다니… 또 읽어도 새롭게 보게 되는 것은 나이가 주는 기억력 퇴보이거나 아니면 정말 잘 썼기 때문이리라.
마지막 <회귀>를 덮으면서 인생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의 얘기에다 “‘만일 ~했더라면…’ 그래도 지금의 인생과 똑같은 결과에 이르렀을 것이다.”의 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상통증>은 제목과 내용이 절묘했고, <내 아기>와 <침묵>과 <엘팀>은 특히 오래 뒷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솔로호프님>
ㅡㅡㅡ때로는 단편 소설이 긴 시 같다. 압축하고 압축했기에, 음미하고 음미해야 하는.
체홉을 통해 단편의 매력에 빠져보았기에 이 책이 반가웠지만, 새로운 이야기 방식에 적응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양한 소재에, 문장의 흐름도 각기 다르고, 과거 현재가 뒤섞이곤 했으니. 더우기 어찌나 솔직하고, 이야기에 경계가 없던지, 당혹스러웠다. 주로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을 알기에 등장인물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나를 보아야 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저자의 한결 같은 거리두기다. 그럴 듯한 설명이나 변명, 감정풀이가 거의 없다. 스토리 뼈대만 존재하는 듯한데, 눈길을 뗄 수 없고, 마지막까지 긴장이 팽팽하다. 글의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압권은 글을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어떻게 끝내려고? 싶은 순간, 단 하나 때로는 두세 개의 문장으로 가뿐하게 정리한다. 때로는 웃음이 났고, 뭉클했고, 가슴이 아팠고, 때로는 서늘하고, 냉정했다.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 다음 글로 선뜻 넘어가지 못했다.
체홉의 단편에서 냉정한 현실에, 불완전한 인간에 위로와 연민을 느꼈다면, 루시아 벌린이 그려낸 현실은 더 가차없고, 인간들은 더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그는 인생의 회귀를 담담히 말한다. 지금과 똑같았을 거라고. 존재의 한계와 결핍을 짊어지고 불끈 일어서는 그를 보는 듯했다.
밀고 당기며 읽기를 끝내고, 다시 한번 읽으면서 비로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예사롭던 문장들이 새롭게 들어왔다. 곳곳에 배어있는 따뜻한 눈길까지.
겁을 먹거나, 아프거나, 비참하거나, 외롭거나, 곤경에 처할 때마다 기억이 곧장 엘패소로 달려간다는 말을 알 듯했고, 안전한 집으로 가기 위해 글을 쓴다는 말을 헤아려보았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시간이다. 짧게는 한 페이지, 길어야 십여 페이지. 처음에는 이렇게 쓰는구나, 쓸 수도 있겠다, 가벼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책을 덮고 나니 오히려 막막하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다면, 이미 루시아 벌린의 처방을 받은 게 아닐지. 그의 삶에서도, 글쓰기에서도 그랬듯, 부단한 노력!
<늘보님>
ㅡㅡㅡ군더더기 없는 문장의 간결함, 정확하고 세련된 장면묘사, 놀라울 적으로 세밀한 관찰력으로 삶을 관통해 버린 통찰력, 뭐하나 빠지지 않은 제대로 된 단편 소설집을 만났다.
<나의 기수>같은 소설의 분량은 단 두 쪽이다. 단 두 쪽으로도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를 상상하게 만든다. 신기한 경험이다.
대부분의 소설이 루시아 벌린,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한다. 각각의 단편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처럼 부분과 전체가 긴밀한 관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장편 소설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루시아 벌린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데 어떻게 이렇게 객관적이고 절제된 입장이 될 수 있을까? 이야기 속의 사건들, 그녀가 겪었던 경험들은 어느 시기하나 고통과 힘듦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삶의 고통과 시련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기쁨 또한 그러하게 담아 내었다. 아마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감을 균형감 있게 적절한 간격으로 유지해 나가는 그녀만의 개성과 진심이 담긴 문체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거야’ 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그녀는 그녀가 살아낸 삶을 마지막 장 <회귀>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했더라면? 이라는 말로 시작해서 과거를 안으로 들이면 어쩌면 그렇게 위험할지도 모른다. <중간 생략> ‘만일’로 시작하는 의문에 따르는 대답이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는 그 ‘만일의 일들은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내 인생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예상할 수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 지금 철저히 혼자 있게끔 몰아온 모든 선택과 행동은.”
인생에 있어 예상할 순 있었지만 피할 순 없다는 말은 자신이 선택한 삶은 오롯이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거나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왔던 삶은 ‘만일’ 이라는 다른 삶의 주어졌다 해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것을 현재 지금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곳, ‘콜로라도주 다코타 리지의 석회암 산기슭 까마귀들이 있는 이곳이라고.‘ 라며 마지막 문장의 끝맺음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삶을 견뎌내었는데 그 특별함은 다름아닌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을 어떠한 편견이 없이 그대로 바라보는 시선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단편들이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마법을 부렸다. 책 장을 넘길 때마다 장면과 장면을 이어주어 상상하게 하고 마침내는 영화 한 편이 내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오랜만에 오래도록 옆에 두고 읽고 싶은 책을 만났다.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준 샘께 감사드리고 싶다. <우이도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