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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책 - 현장과 비평
압록강 주변을 서성이며
최 경 호
1.압록강을 가다
압록강(鴨綠江)을 본 것은 이미륵의 소설을 읽기 전이다. 굳이 북한을 건너다보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저 압록강을 보기 위해서다. 그저 압록강을 본다는 말에는 내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강물 하나를 보는데 공산주의니 사회주의니 하고 이념과 정치의 탈을 쓰고 적대적 감정에서 본다면 그 강물이 제대로 흐를 리 없거니와 물의 제대로 된 빛깔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하나의 빛깔인 듯 하지만 사실은 같은 빛깔이 아니다. 제주도 대명콘도에서 동쪽으로 위치한 김녕해수욕장에서 바다를 본 일이 있다. ‘놀멍 쉬멍 걸으멍’ 가 본 함덕성우보해변도 마찬가지지만 수평선 표면은 짙은 자주빛깔이다. 자주빛깔 다음은 푸른 빛깔이고 부서지는 파도는 하얀 빛깔이다. 이 날 오후에 본 두 번째 빛깔은 이와 또 다른 빛깔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야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지만 우선 날씨와 해시간의 영향에 일임해두더라도 사람의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바다의 물은 동일한 빛깔인데 보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은 주변의 물리적 상황 때문이다. 하나의 엄연한 사실을 보는데 도 자신의 눈을 가리려는 부정직한 요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동일한 사실을 경험하고도 상반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직한 판단을 거르치게한 사례들은 폭력적인 경험과 심리적인 압력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적인 압력과 폭력적인 경험에는 전통과 관습은 물론 시대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의 힘이 주범일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은 물론 정치적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가 전부 그러한 힘을 강요한다. 북한이라는 울타리도 그렇다. 북한은 자유세계의 노력에 의해 사회주의의 비밀이 상당부분 개방의 빛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도 동물원의 코끼리처럼 그들은 울타리너머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북한은 땅굴을 파서 무기를 감추고 전시 식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의문과 의혹을 양산하는 국가라 경계를 이루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지리적 의미가 강렬한 것일 수 있다. 이데올로기의 강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강으로 보려는 것이다. 흐리고 침침한 강물, 퇴색한 가을 산이지만 흙의 빛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평범한 늙은이가 대련을 찾고 여순으로 안중근의 감옥을 찾은들 무엇이 달라질 것이 있던가. 여행이란 좋게 말하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기 위한 즐거운 떠남이지만 거짓과 허위의 세계, 악마의 경험도 동반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한다.
어쨌든, 2003년 10월 18일, 대련으로 가는 오후 5시 배를 타기 위해서 서둘러 인천으로 간 것이다. 대구에서 3시간 50분 정도 걸려 인천 고속터미널 지하식당에서 점심을 때우고 주인에게 인천부두까지 얼마나 하느냐 물었더니 7천원에 갈 수 있다한다. 그러나 실제론 1만원이 넘게 든다. 식당주인의 말이 엉터리인 것이다. 대련으로 가는 인천 제2부두에서 얼렁거리다 행선지가 보이지 않아 물으니 대련은 제1연안부두로 옮긴지 1년이 넘었다 한다. 인터넷을 보고 찾은 것인데 이번에는 인터넷이 엉터리다. 일행에게 급히 전화를 하여 제1부두로 오게 하고 택시를 타고 제1부두로 간 것이다. 이렇게 중국대륙의 여행은 처음부터 고난의 행군이었다. 대련과 인천을 오가는 페리호를 탄 것인데 65세 넘으면 2등 칸 선박료 20%를 감해준다. 침대 맞은편의 젊은 사업가 박 사장을 만난 것이 중국의 현실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그는 서울 사람인데 중국,일본 한국을 오가며 고철무역을 하는 청년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는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 중국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런 인연이 없으면 중국에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때문이다. 이 번 뱃길은 2001년 10월 이후 2년만이다. 배안에서 잠이 깊이 들지 않아 달이 없는 뱃전에서 검은 파도가 출렁이는 밤바다를 보며 내가 왜 이 길을 가는지 회의하기도 한다. 왜 자비를 들여 만주 간도문학을 찾아 험한 뱃길을 가는냐에 대한 회의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알밥 먹고 헛짓한다고 빈정대던 기억이 멀리 중국 항구의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것과 겹쳐진다. 하늘에도 별 하나가 반짝인다. 승객이 2년 전 보다 많이 줄었다. 불안한 것은 배 안의 도난을 의식해서다. 모두가 그렇게 예민해 있다. 대련의 젊은 사업가 박 사장은 처음에는 말이 없더니 친화력을 발휘하는 힘이 있어 그의 검은 얼굴도 미남으로 보인다. 16시간 배를 타고 대련에 도착하니 아침 8시 30분이다. 한국에서는 사람이 먼저 내리고 화물은 뒤에 내리는데 여기는 그 반대다. 화물을 하선시키느라 1 시간여를 배에서 기다려야한다. 아침에는 해가 긴 수평선 위로 돋았다. 장관을 이룬다. 두부찌개 한식 5000원짜리를 먹다. 대련의 거대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7,8년간의 대발전이라 한다. 박 사장의 주선으로 안중근의 여순 감옥을 가기로 했는데 중간에서 허용이 되지 않는다면서 차를 돌린다. 아쉬움이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인이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여순 감옥은 현실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 돈 310원만 날린 것이다. 다시 대련에서 지안(集安)으로 가는 차표를 144원에 사고 硬便特快臥 14에서 누었다 일어났다를 반복한다. 층층으로 된 침대차다. 아래층은 군인들이다. 분위기가 험한 것은 조선족 여인과 심리전이 있은 탓이다. 조선족 여인을 깔보는 중국인들의 심리가 역력하다. 북한과 근접해 있는 지안을 가자면 통화를 거쳐야 하고 통화에서 기차를 기다려 다시 환차해야한다.
역 대합실에서 중국 청년 강빈(康斌)을 만난 것은 이 날의 행운이다. 그는 지안에 본가를 두고 있는 길림사범대 정치학원생이다. 한국으로 치면 대학원생이다. 그와 시종일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루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게 된다. 지안으로 가는 버스길은 곡예를 하듯 산을 넘는다. 강 군의 집은 고구려 유적이 있는 아파트에서 홀어머니와 동생이 살고 있다. 강 군이 미리 연락을 해서 일행은 점심까지 대접받고 부근의 고구려 수도성과 환도산성을 둘러본다. 수도성은 아파트가 중심지에 지어져 있어 중국인들이 살고 있고 환도산성은 외곽산성이다. 비록 허물어진 성곽이나마 고구려 당시에 조상들이 쌓았던 성곽의 원형이 상당히 보존되어 있음에 고마움을 느낀다. 중국 당국에서는 성곽을 ‘보호문물 전승문명’保護文物 傳承文明이라 입석해 놓고는 그것이 중국의 유적임을 알린다. 성지의 옛 수로가 보존되어 있고 성곽의 황색돌들이 일부 남아 있어 옛 흔적을 짐작케 한다. 다시 차를 타고 압록강을 찾는다. 맞은 편 북한 땅은 겹겹의 산만 보이고 날이 흐려 침침한 가운데 간혹 집들이 나타난다. 압록강 물은 맑게 흐른다. 집안 쪽에서는 ‘압록강’이란 비를 세워 두었다. 중국 수리부에서 세운 것인데 ‘국가수리풍경구’國家水利風景區라 지정해 둔 것이다. 강이라야 폭 50미터를 넘지 않을 것 같다. 집안에서 택시로 30분 정도를 가면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고구려대왕비를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 한다. 광개토대왕비에서 다시 10여분을 가면 장군총이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라는 글귀가 또렷하다. 그들은 고구려중만기왕릉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방형 계단석실묘인데 둘레 31.58미터, 높이 13.1미터, 계단은 7계단 섬돌22층, 주변에 11개의 거석이 있는데 묘실은 다섯 번 째 계단 중간에 쌓았다는 등으로 소개한다. 연화문와당과 잔와, 철연 등으로 덮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원래 묘상에 건축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얼마를 지나 우산 (禹山)2110호묘를 볼 수 있다. 고구려조기왕릉으로만 소개한 우산묘는 양좌가 이어진 계단식적석묘이다. 남북 약 66미터, 동서 약 15미터, 높이 5.5미터 계단은 5층이다. 일찌기 청동기 시대의 인형과 수레의 부품 등 문물이 나온 적이 있다. 당시는 중국이 동북공정정책에 혈안이 되던 시기라 대련에서 듣기로는 광개토대왕비 있는 곳에 한국인은 접근을 못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북한에서 넘어오는 탈북자가 많아 출입을 제한한다는 소문인데 현지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없다. 다만 현지인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어 차를 교섭하는 데도 선듯 응하지 않는 분위기다. 대왕비는 대왕비각을 세워놓고 철책을 둘러 접근을 막았다. 철책 밖에서 사진만 찍은 것인데 30원 주면 접근할 수 있으나 사진은 안 된다는 말에 그만 두었다. 다시 차로 달리니 비바람이 세고 곳곳의 집안시 외각지에는 고구려인들의 무덤인 듯 묘군인 동구고묘군(洞溝古墓群)이 있고 비석도 있다. 집안시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비교적 높으면서 완만하고 갈수록 험한 지형으로 정상에 이르러서는 가파르게 굽어 있어 요새를 이루고 있다. 장군총은 멀리서만 사진이 허용된다. 마침 강한 비바람을 떨칠 수 없어 대충 보고 내려오니 어딘가 허전하다. 차를 세워둔 운전수가 시간이 없다고 독촉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집안박물관은 시간이 넘어 50원을 주고 들어갔으나 직원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사진을 금지한다는 지시 때문이라 한다. 다만 대왕비 탁본을 확대하여 전시한 것은 눈에 띄인다. 그리고 청동기 한 점을 보긴 했으나 무식한 소치로 그것이 귀중한 것인 줄 모르고 지나쳤고 다만 고구려 묘장 유형시의표에는 적석묘(積石墓),有壇적석묘,階段적석묘,석묘,계단석실,封土石室,봉토,洞室 등이 있다고 소개한 것이 주목된다. 강 군은 자기 집에서 더 머물며 자세히 보고 가라고 권한다. 흐릿한 하늘과 북한의 가을산이 무엇이 다를까마는 사람 없는 곳에 나무와 풀이 가을의 색채를 드러내지 못하고 기빠진 몰골로 서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정을 이유로 백하白河로 향하니 강 군은 몹시 섭섭해 한다. 그는 집안시 성북동 70-8호에 주소를 두고 있지만 길림성에서 교사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백하역에 내린 것은 이튿날 아침이다. 여기는 연길과 백두산으로 가는 갈림목이다. 백하강 치수사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백두산행 버스와 연길행 버스 기타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난립해 있다. 백두산으로 갈까, 백하에서 화룡까지 중간 중간 태우고 좀 쉬기는 화룡에서다. 화룡에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 군고구마,달걀 삶은 것,땅콩 등 한국에서 먹던 것이 일반으로 있다. 사람들은 지쳐 있다. 얼굴도 검고 살결도 칙칙하다. 사람을 보고도 별 말을 않는다.화룡을 가는 도중 안도현 영경중학 간판을 보았고 갈수록 산골에 조선족이 땅에 무 박히듯 살고 있음이 눈에 띈다. 조선말을 하는 여인에게 말을 거니 동립학교의 여교사다. 매우 명랑하고 근래의 학교사정을 잘 말해준다. 조선족 인구가 줄어 조선족 초등학교가 중국의 큰 학교로 병합된다며 우울해 한다. 그 학교는 한인 6학급, 조선족 2학급으로 편성되어 있다 한다.안도문,석문,노두구,인평수금소를 지나 버스는 연길로 향한다. 백하에서 연길로 가는 길은 차로가 하나뿐이다. 길은 넓지 않으나 왕복 2차선이고 비포장길로 괜찮은 편이다. 경성과 안도가 갈라지는 곳에 오호령 터널이 있고 부근에 석탄생산이 많은 듯 석탄이 군데군데 쌓여 있다. 북간도의 가을은 빨리 오는 듯 벌써 나뭇잎은 없고 가지만 새초롬히 서 있어 인정을 잃은 지 오래된 이곳 사람들과 같이 온 산을 덮고 있다. 나뭇가지가 뽀족하게 뻗어 있어 물으니 조선족은 ‘봇나무’라 하고 중국인은 낙엽송수(落葉松樹)라 한다. 한대 고산지대에 사는 수종이다. 과수마을도 있다. 이 날 화룡은 비가 약간 와서인지 어둡고 너절한 인상이다.침침한 거리 흐린하늘,남루한 농민들의 인상을 받으며 연길로 가는 거점 중 가장 큰 도시 화룡을 출발한다. 산과 산 사이의 도로 주변에는 농토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나 농사로만 살 수 없다는 인상은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곳곳에 한자와 한글로 간판을 써 놓아 조선족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게 한다. 미장원, 카페, 음식점 등이 모두 한글로 씌어 있다. 낡은 간판과 낡은 그림 그리고 특이한 북한 글씨체가 우리들 60년대를 상기시킨다. 지도를 보니 지나온 도시는 백하,송강,화룡,서성,노두구,연길로 이어지는 길이다.장백산 농원이 있고 목재,벌꿀,석탄 등이 지나는 곳에 따라 특산물로 선전한다. 연길을 내려 용정으로 갔다. 용정은 이전의 모습과 같으나 연길역전의 인상은 전과 다르다. 전에는 개인택시들이 경쟁하며 호객해위를 하였는데 지금은 그들 모두가 보이지 않는다. 물으니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영업을 하는 것이며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용정에서 장재촌을 찾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운전수나 주민들도 장재촌을 모르고 있어 여러 번 묻고 다니다가 겨우 트렉터를 모는 초로의 노인을 만나 ‘장재촌 수남이지요’하고 감탄을 들음으로서 문제는 해결된다. 30여분을 달려 가니 선바위가 보이고 길가에 ‘장재’란 푯말을 발견한다. 장재촌은 식민지시대 조선 유민이 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에 이르러 정착하던 곳이다. 2차선 도로가 두만강변 까지 연결되어 있다.
연길역에서 하얼빈으로 가려던 발걸음이 중단된 것은 기차의 추돌사건 때문이다. 그것도 밤 12시까지 기다려서야 알려진다. 연길에서 자고 목단강 기차를 타고 도문을 지난다. 안수길의 간도문학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지명이다. 왕청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중삼목재라는 큰 목재회사가 있다. 중도에 낙타산이 있고 천로변을 따라 흐르는 목단강의 폭이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며 흐르는 물은 힘이 부족한 물줄기다. 그러나 물은 맑다. 2급수 정도는 되리라. 들에는 벼를 쌓아놓고는 그대로 방치하듯 무더기로 두고 있다. 논에는 아직 물이 질퍽하고 추수하기에는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다. 동경성,영안을 거치면 목단강시다. 목단강시는 한국인으로서 와보기 어려운 곳이다. 논과 밭, 목재, 산양 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오지인 이곳에서 달리 생산할 것이 없다. 가끔 조선족 미인이 차간에서 차장과 짙은 농담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목단강 도서관에는 일제시대 동북삼성의 귀중한 자료가 옮겨져 있으나 주마간산격으로 다시 하얼빈으로 가야하는 일정에 아쉬움을 더한다. 해림,고령자,상지시,모얼산,아성시를 거쳐 하얼빈에 이른다. 하얼빈에서 장춘시,시평시,심양시, 안산시,영구,신금을 거쳐 대련시에 이르렀으니 압록강과 두만강변을 거쳐 동북 삼성을 일주한 셈이다. 다만 신의주에 가까운 단동을 빠뜨린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이다. 어쨌든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려한 의도에는 어느 정도 만족한 느낌이다.
2. 강물의 정서
분단 시대 압록강,두만강 등이 던지는 강의 이미지는 고유한 지리적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형 또는 지리적인 지시적 기호가 문학적 상상력과 만날 때 강은 단순한 물의 흐름이라는 수로적 의미를 넘어 인간의 통로 또는 한의 심리적 통로임을 발견한다. 물은 불과 더불어 삶의 필요적 요인이면서 존재에 대한 상상력을 부활한다. 수로로서의 강은 발원지에서 대해로 흐른다는 유동적 순차사실이 사유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를 형성하고 혹은 피안을 타자로 인식하기도 한다. 어느 모로 보면 인류사는 전쟁사였다. 강은 인간의 경계이면서 민족 간의 이질성을 확인하도록 강요한다. 강은 인류문명을 촉진하는 화합의 강이면서 이질적 문화를 만드는 강이다. 그것이 순탄한 길인가 혹은 고난의 길인가.
식민지시대 남부여대하여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흥안령을 넘었던 것은 단순한 실향의식만은 아니다. 강이라는 경계를 넘었던 것은 주어진 운명을 자조하는 소극적 행보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로 행보할 때 운명적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두만강과 압록강은 식민지시대 민족적인 한을 내포하는 경계적 의미의 강이라면 낙동강은 6.25라는 민족 내부의 이념적 경계를 경험한 강이다. 부여의 금강은 사라진 부여 역사의 부활이라는 회심의 강이며 섬진강은 남도정서를 대변하는 강이다. 한반도의 산하뿐 아니라 세계의 산하는 지시적 명칭에서 상징적인 의미까지를 포괄한다. 자연에 회귀하려는 인간은 가난과 수난의 역사를 일찍이 강물에 의탁하여 심정의 불안을 표현했다.
강은 박래적 수로이면서 경계적, 역사적 의미를 내포한다. 인간은 강을 건널 때마다 어떤 운명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그것은 강이 인간에게 운명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강에게 운명을 묻는 것이다. 어디로 갈 것인가, 가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등의 물음은 강을 건너는 자가 강물을 향해 끝없이 묻고 회의하게 된다.
이미륵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는 작가가 압록강을 건너면서 물었던 자전소설이다. 한강,두만강,낙동강,금강,섬진강 등을 소재로 한 작품에 익숙한 독자는 압록강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는 비교적 낯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미륵(본명, 이의경)이라는 작가도 그렇거니와 관서대로와 연결되는 황해도 지방의 근대화시기의 시공을 부활한다는 의미는 남다른 바 있다. 한반도 북방지역에서 관동지역은 동토의 지역으로서 유랑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만큼 관심의 대상이다. 관서대로는 관동지역에 비하면 농사나 산업이 비교적 발달한 지역이며 교통이 원활한 지역이다. 그러나 근대화시기의 모습은 잘 반영되지 않은 정보의 불모지역이다. 관동지역은 안수길의 ‘통로’,‘성천강’을 통해서 일부 소개된 바 있으나 식민지시대로부터 근대화시기에 이르는 반세기 간의 그림자를 엿볼 수 없다. 이미륵의 소설은 통상 간과해버린 관서지방의 근대화시기의 현장과 문제점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주목한다.
조선조 말의 관서지역의 삶과 고뇌 식민지시기의 외세대응의식과 투쟁양식 동양문화와 서양문화의 융합과 갈등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자전적 경험과 보편성 등이 이미륵 소설의 중심 테마가 된다.
3. 작가 이미륵
이미륵(1899 - 1950)은 황해도 해주 출신이다. 아명은 미륵이고 별명은 정쇠다. 이미륵은 1899년 3월 8일 황해도 해주시 남영정 205번지에서 천석꾼이던 아버지 이동빈(李東彬)과 이성녀(李性女) 사이의 1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해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1세에 어른들의 권유로 최문호와 혼인하여 슬하에는 1남 1녀(명기,명주)가 있다. 1911년에부터 한문공부 신식중학교에 다닌 적이 있으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중단한다. 그는 강의록 공부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1917년에 경성 의대 예과에 합격하고 3.1운동 활동과 관련하여 국내에 있지 못하고 1920년 압록강을 건너 중국 상하이를 거쳐 독일로 간다.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및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수학하고 1928년 뮌헨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는 1946년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를 발표 최우수 독문소설로 선정된다.
<어깨기미와 복심이>, <어린복술이와 큰 窓>,<이야기>,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무던이>,<이상한 사투리>와 <일본식 두통>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미륵은 1950년 3월 20일 독일에서 귀국하지 못한 채 뮌헨교외의 그래펠링시에서 타계한다. 그의 묘는 그레펠링시 공동묘지에 있는데 1955년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이장했다 한다. 필자는 <압록강은 흐른다>와 <그래도 압록강은 흐른다>를 다룬 바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2009년 4월 드라마로 제작하여 상연된 바 있다.
최 경 호: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 ‘목 긴 찻잔‘, ’새벽 강물로 얼굴 씻고‘ 평론집 ‘억압과 결핍의 시대 한국문학’ 외, 제7회 박종화 문학상, 농민문학 작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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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달문회원, 최경호 선생님 평론,
감사합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