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㉒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최초의 복음선교사 한국장로교 새문안교회 개척
호레이스 언더우드
오늘의 한국교회 성장 뒤에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미지의 땅으로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건너와서 우릴 도우라’는 소명으로 복음 들고 이 땅을 찾아온 선교사들…. 특별히 선교에 있어 두 명문가가 있는데 지난 호에서 살펴보듯 미국 남장로교회가 파송한 린튼 가문과 함께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회가 파송한 한국교회 대표적인 선교사로 그의 자손들은 선교사 명문가문으로 대를 이어 사랑의 섬김을 전하고 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1859년 영국 런던에서 존 언더우드와 엘리자베스 그랜트 메리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언더우드는 어려서부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그가 선교사 꿈을 갖기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였다고 한다. 열네 살 되던 해에 인도 사람의 강연을 듣고 인도 선교사로 갈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 신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 졌으며 처음 그가 가려고 했던 선교지는 인도였다. 그는 1년간 의학을 공부하면서 선교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던 중 1882년 일본에서 사역하던 올버트 올드만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지를 변경했다. 그러나 한국 선교사로 파송되는 일도 생각했던 것처럼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그가 소속된 개혁교회 본부에 2차에 걸쳐 한국 선교 청원서를 냈으나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며, 이어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도 같은 요청을 두 번씩 냈으나 이 역시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러던 중 뉴욕에 있는 한 개혁교회에서 1년에 1,500달러 조건으로 그를 청빙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선교의 꿈이 좌절된 상태에서 이같은 청빙을 받자 이에 응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또다시 신비한 음성을 들었다. “한국에 갈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 한국은 어떻게 될까?” 언더우드는 그 길로 센터스트리트 23번지(옛 장로회 선교본부 건물)로 방향을 돌렸다.
언더우드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를 찾아갔을 때엔 총무가 바뀌어 있었다. 훗날 한국 선교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엘린우드 박사가 총무로 부임하여 그를 맞이 한 것. 언더우드는 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금 6000달러를 받고 1884년 7월 28일 미국장로회 선교본부를 통해 한국 최초의 목회자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수정의 번역 성경을 들고 내한
언더우드는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약 3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주로 헵번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루미스에게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별히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한 이수정도 만났다. 또 귀중한 동지를 만났으니 그는 자신과 같은 목적을 갖고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성경을 갖고 1885년 4월에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외국 선교사가 선교지에 들어가면서 그 나라 말로 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한국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명은 장로교 선교사로, 또 한명은 감리교 선교사로…. 한편 언더우드는 주한미국공사 푸트로부터 한국의 정치상황이 갑신정변으로 불안정하므로 한국 입국을 연기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부활주일에 제물포에 도착해 임신 중인 부인을 대동하였던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는 제물포에 머물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미혼이던 언더우드만이 위험을 무릎 쓰고 서울에 도착했다.
언더우드 목사 가족의 북부지방 전도여행
언더우드 목사 사랑방에서 시작된 새문안교회
전도여행과 세례
언더우드는 한국에 도착해 처음 2년간 주로 한국어를 공부하며 조심스럽게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활동을 모색했다. 제중원 교사가 그의 공식적 직함이었기 때문에 언더우드는 제중원에서 알렌의 일을 도우며,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1887년 가을에 언더우드는 개성, 소래, 평양, 의주 지역으로 전도여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서울 위쪽 북부 지방으로의 첫 여행이었다. 그러나 의주를 중심으로 한 북쪽 지역에서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성경을 읽고 세례를 받고자 하는 신앙공동체가 곳곳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에 언더우드는 1886년 알렌의 어학 선생 노춘경에게 세례를 베풀고, 전도여행을 할 때에도 몇몇 신자들을 문답하고 세례를 주었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아펜젤러와 함께 개성과 평양을 방문하고 1889년 3월에는 제중원에서 활동하던 릴리아스와 결혼해 신혼여행으로 평양을 지나 의주, 강계, 압록강변 마을을 여행했다. 이때 언더우드가 의주에 도착했을 때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세례는 물론 한국인에 대한 포교활동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상황에서 언더우드는 자신의 중국 통행증을 활용해 중국에 건너가 한국인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새문안교회와 언더우드학당
언더우드는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 집 사랑방에서 14명의 조선인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새문안교회의 시작이다. 교회 창립에 모인 14명 중 13명은 언더우드가 입국하기 전 만주에서 존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서상륜과 한국인들의 인도로 신자가 된 이들이었다. 이처럼 새문안교회는 언더우드와 서상륜 같은 한국 신자들의 공동 노력으로 세워진 한국인 스스로 전도하고 신앙을 고백한 한국장로교 첫 번째 교회였다. 이밖에도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원을 시작하면서 이를 학교교육과 연계시켰다. 그는 길가에 버려진 고아들을 눈여겨보고 그들을 데려다 돌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고아원으로 발전했다.
언더우드학당은 1905년에 오늘날의 경신중, 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당으로 바뀌었다. 언더우드이외에 사무엘 마펫과 프레드릭 밀러 등 다양한선교사들이 이 학교를 거쳐 갔다. 언더우드는 고등교육을 담당해 줄 교육기관을 세우기 원했지만, 총독부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후 에비슨과 함께 1917년에 경신학교 대학부에 해당하는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이후 연희학교는 세브란스와 합병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발전을 이루었다.
언더우드를 통해 많은 민족 지도자가 배출되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은 언더우드 고아원 출신으로 새문안교회의 장로였고, 겨레의 스승이라 불린 도산 안창호 선생도 민로아학당 출신이며 그 학당의 선생에 해당하는 접장이었다.
한국선교 메신저 ‘건너와서 우릴 도우라’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메신저를 자처했다. 그는 미국, 일본, 유럽을 오가며 한국에 대한 강연, 기고, 선교지원 연설 등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전 세계에 알렸다. 언더우드와 친분을 맺은 한국인들은 세계의 흐름이나 새로운 사조에 새롭게 눈을 뜰 수 있었는데, 이런 면에서 언더우드는 근대 한국의 복음화 메신저였다.
미국북장로회에 속해있던 언더우드는 안식년을 맞이해 1891년 4월부터 1893년 2월까지 미국을 여행하며 한국을 알려 미국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891년 10월 시카고 맥코믹신학교 강연과 10월의 테네시주 내슈빌 미국 신학교연맹 연차대회 강연은 신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이 강연을 계기로 남장로회에 소속된 테이트, 존슨, 레이놀즈, 전킨 등이 한국선교에 헌신하여 남장로회 최초 한국선교가 시작되었는데, 이로써 북장로회 소속인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의 캐나다 강연을 통해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에비슨을 조선으로 오게 하였다. 스왈른 선교사의 경우도 신학교 재학 시절 언더우드에게 들은 한국의 이야기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장차 한국에서 하나님을 위해 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캐나다 출신 맥켄지 선교사가 소래에서 죽자 소래교회의 교인이었던 서경조의 편지를 번역해 주었는데, 이 편지는 캐나다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캐나다 장로교회가 한국선교를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 1898년 푸트, 그리어슨, 맥래 선교사가 한국에 오게 되었고, 언더우드는 이들을 이끌고 감격스럽게 소래를 방문했다.
영국성서공회 소속으로 성경 번역과 반포사역에 큰 공을 세운 휴 밀러 또한 언더우드의 요청으로 1899년 한국에 와서 한동안 언더우드의 서기로 일했던 인물이다. 이처럼 언더우드는 해외에서 한국 선교자원 동력화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연세대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가 묘원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하였다. 이밖에 새문안교회 역사자료관 등의 사료를 참고하였다.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