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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이스라엘서 약 3300년 전의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 시기의 ‘매장 동굴’ 발견
이스라엘서 고대 이집트 람세스 2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약 3300년 전 ‘매장 동굴’이 발견됐다고 18일(현지시간) 이스라엘 문화재청(IAA)이 밝혔다. 이스라엘 문화재청(IAA)은 이스라엘 중부 지중해 해안 팔마힘 국립공원에서 개발 공사를 위해 트랙터로 바위를 옮기다 이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의 천장 역할을 했던 바위를 옮기자 2.5m 깊이의 인공 동굴이 나타났다. 고고학자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내려가자 정사각형 바닥에 토기와 청동기 등이 마치 매장 의식을 치르기 위해 배열한 것처럼 놓여 있었다
이 동굴에서는 다양한 유물 수십 점이 나왔다. 붉은 토기, 그릇, 주전자, 초, 단지, 등, 청동 화살촉 등이 있었다. 이러한 유물은 망자가 사후세계로 가는 마지막 길을 함께하는 부장품으로, 거의 훼손되지 않은 해골도 동굴 구석의 직사각형에서 최소 한 구 발견됐다
문화재청의 청동기 전문가 엘리 얀나이 박사는 “일생에 한 번 있을지 모르는 상당히 드문 발견이다. 동굴 바닥에 놓인 토기들은 3300년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다”며 “이 동굴이 어쩌면 청동기 시대 후기 장례 관습의 완전한 그림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2022년 타이완에서 현지시간 18일 오후 2시 44분 규모 7.2의 강진 발생
2021년 우주여행객 3박4일간의 지구궤도 탐험 마치고 복귀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의 ‘크루드래건’에 탑승한 4명의 우주 비행객이 18일 3박 4일간의 지구궤도 탐험을 마치고 플로리다 바다에 도착했다
크루드래건은 지상 575㎞ 궤도(최고 585㎞)에서 사흘간 음속의 22배인 시속 2만 7,359㎞로 지구 주위를 1시간 반마다 한 번씩 선회했다. 탑승객들은 국제우주정거장(420㎞)보다 더 높은 궤도를 돌며 돔 유리창을 통해 360도 우주를 탐험했다.
2018년 5차 남북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2018년 8월 13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4차 고위급회담에서 제5차 남북정상회담을 9월 중에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한 데 이어, 9월 6일 북한을 방문한 대북특사와 김정은 국무위원장 면담을 통해,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개최하기로 일정이 확정되었다.
이어 9월 18일 문재인 대통령과 수행원이 항공편으로 평양을 방문, 국빈 급의 영접을 받고 18일 오후와 19일 오전에 걸쳐 노동당 청사와 백화원 초대소에서 다섯번 째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는 이미 6월에 있었던 북미정상회담에 이어 정체되어 있는 후속 진행을 추진하기 위한 비핵화와 종전선언 일정이 주된 의제였으며, 이밖에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 해제와 민간 협력 등 다양한 분야의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수행한 경제사절단을 통해 가능한 경제협력 모델에 대해서도 논의되었다. 그 결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명한 '9월 평양 공동선언'이 발표된 데 이어, 송영무 국방장관과 노광철 인민무력상이 서명한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합의서'가 발표되었다.
이 회담에서 남북간 군사적 대치 상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하며,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018년 내 서울 방문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동창리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폐쇄하고, 영변 핵시설 폐쇄에 합의하는 등 비핵화 일정이 제시되었으며, 동서 철도를 연결하며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 등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이산가족 상설면회소를 개소하며, 보건의료분야 협력을 즉시 추진하기로 했다. 더불어 2032년 하계 올림픽의 공동 개최를 추진하기로 했다.
2017년 스페인 북한대사 추방 통보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시속 257km) 도미니카 상륙 초토화
2016년 소설가 이호철 세상 떠남
2015년 가수 이미자, 노래 인생 첫 기록 전시회 개최
가수 이미자(74)의 노래 인생 56년을 돌아보는 기록 전시회가 강원도 춘천 남이섬에서 열렸다.
남이섬 노래박물관은 18일부터 이미자의 삶과 음악을 회고하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이미자 특별전’을 개최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동백아가씨’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한 이미자의 활동 모습과 관련 기록, 음반, 무대 의상 등이 시대별로 전시되었다.
또 이미자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음반(560장)과 노래(2069곡)를 취입한 가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보여주는 증서도 공개됐다.
이미자는 “‘이제 인생도 노래도 끝자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제 모든 것을 다 보여 드릴 기회가 마련돼 기쁘고 조금은 흥분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개막식이 열린 18일 오후 3시에는 이미자 다큐멘터리 시사회가 열렸다. 또 전시가 끝나는 2016년 2월 28일까지 매달 이미자의 노래를 주제로 한 토크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다.
2015년 애국지사 박상유 선생 별세
애국지사 박상유(92) 선생이 18일 오전 11시 별세했다.
전남 화순 출신으로 1940년 함흥영생학원 재학 중 유춘봉·김재우 등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오목회를 조직했다.
1943년 함흥지법에서 치안 유지 및 육·해군 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으로 출옥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5년 인도적 대북 지원 앞장선 박창득 몬시뇰 선종
미국에서 활동하며 인도적 대북 지원에 앞장선 박창득(80) 몬시뇰이 18일(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에서 선종했다고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3일 밝혔다.
196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간 박 몬시뇰은 1983년 북미주 한인사제협의회를 만들고 도시별로 공소(公所)를 개설하며 한인 가톨릭 공동체 활성화에 힘썼다.
1995년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와 협력해 평양에 국수 공장을 설립하는 등 북한을 30여 차례 방문하며 식량난을 겪는 주민을 돕기 위해 헌신했다.
20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 첫 수요집회
2004년 ‘스타 이혼 전담 변호사’ 미국 마빈 미첼슨 사망
70년대 미국에서 ‘헤어진 동거녀에게 위자료를 줄 수 있다’는 판결을 이끌어내 이혼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마빈 미첼슨이 암투병 끝에 2004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베벌리힐스의 요양원에서 숨졌다. 29세에 개업한 미첼슨은 60년대 배우 제임스 메이슨의 전처가 100만달러(약 12억원)의 전례없는 위자료를 받게 해준 것으로 시작, 배우 말론 브랜도, 로버트 드 니로, 밥 딜런, 실베스터 스탤론의 전처, 여배우 조앤 콜린스와 모델 비안카 재거 등에게 막대한 위자료를 안겨 ‘할리우드 이혼전문가’로 불렸다. 특히 그는 79년 ‘마빈 대 마빈’으로 불리는 유명한 이혼소송에서 배우 리 마빈이 동거하다 헤어진 여자친구 미첼 트리올라에게 10만4000달러(약 1억20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이끌어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4년 허명숙, 아테네 장애인올림픽 첫 메달
허명숙이 아테네 장애인올림픽서 한국에 첫 메달을 안겼다. 허명숙은 18일(한국시각) 마르코폴로 올림픽 사격센터에서 열린 여자 10m 공기소총 입사 경기에서 489.3점(본선 389점·결선 100.3점)을 쏴 2위를 했다.
대회 첫 금메달의 주인공을 가리는 이 경기의 챔피언은 독일의 마누엘라 슈머문트(합계 493점). 슈머문트는 “본선(392점)에서 세계신기록에 1점 모자라는 좋은 점수를 얻어 결선은 수월했다”고 말했다.
허명숙의 은메달 역시 금메달 못지않게 값졌다. 여섯 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허명숙은 10년 전 소아마비 협회 운영기관인 정립회관서 처음 사격을 시작했다. 생활보호대상자가 받는 보조금과 구슬꿰기 같은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혼자 생활하면서도 총을 놓지 않았다.
2000년 시드니패럴림픽에선 입상하지 못했으나 2002년 세계장애인사격선수권, 같은 해 부산 아태장애인경기대회서 꾸준히 메달을 따냈다. 올 초 삼성생명의 후원으로 최신형 독일제 소총을 지원 받으면서 기록이 더 안정됐다.
허명숙은 “예상치 못한 메달이라 기쁘다. 그동안 힘겹게 지냈던 세월이 떠오른다”며 눈물을 쏟았다.
이 종목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김임연은 본선에서 3위를 한 뒤 결선에서 6위(485.3점)로 처졌다.
2002년 경의선과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착공식, 남북 동시 거행
2000년 경의선 복원공사 기공
1945년 9월 11일 서울-신의주간 운행을 마지막으로 단절된 총연장 486km 경의선 철도 연결을 위한 문산-장단역간 12km 구간 복원공사 기공식이 2000년 9월 18일 임진각에서 거행됐다.
기공식에는 55년간 끊어졌던 남북 철길을 다시 잇는 역사적 의미에 걸맞게 김대중 대통령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3부 요인, 외교사절, 실향민 대표 등 각계인사 1000여명이 참석했다. 복원공사가 마무리되면 남으로 대양축인 경부선과 연결되고 북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횡단철도(TCR) 및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등 프랑스 파리까지 이어지는 대륙횡단철도망과 연결됨으로써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발판 역할을 맡을 것으로 전망됐다.
총연장 486km 경의선의 남측 구간은 서울-문산간 46km로 이번에 복원되는 12km 구간은 토목공사 11km외에 710m, 폭 4.4m의 임진강 다리와 290m 문산터널 보강공사 등이다.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서 폭발사고
1999년 9월 18일 오전 11시40분쯤 서울대학교 공학관 31-1동 원자핵공학과 실험실인 조립식 가건물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폭발음이 들리자 논술고사를 보던 수험생들과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서울대생들이 학교 밖으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여졌다.
사고가 난 실험실과 연결된 31동 건물 1층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저장돼 있었으나 방사능 누출사고는 없었다. 이날 이 실험실에는 1999년 6월 J기계상사로부터 의뢰받은 폭발물 실험으로 재래식 화약을 이용한 다이너마이트를 대처할 수 있는 미세한 알루미늄 가루를 이용한 플라즈마 기법의 폭발물 실험이 진행중이었다. 불이 나자 소방차 35대 특수구조차 4대 등이 출동, 20분 만에 진화했다.
이 사고로 실험중이던 대학원생 3명 박사과정 김태영(29) 김영환(25) 석사과정 홍영걸(23)씨가 중화상을 입고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19일과 20일 전후로 3명 모두 사망했다. 서울대는 숨진 대학원생 3명의 시신을 서울대병원으로 옮기고 9월 21일 영결식을 가졌다.
1999년 쌍방울 최태원 국내 최초 623경기 연속 출장 신기록
쌍방울 최태원이 18년 프로야구사에 또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최태원은 1999년 9월 18일 국내 최초 623경기 연속 출장 신기록을 세웠다. 종전기록은 1994년 김형석(당시OB)이 세운 622 경기. 미국과 일본에서는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 오리올스.2632경기)와 기누가사(전 히로시마 카프.2215)선수의 경기가 각각 이부문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최태원이 기나긴 닻을 올린건 1995년 4월 16일 광주 해태전. 부상과 슬럼프가 항시 따라다니는 그 라운드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했다. 스포트라이트도 제대로 못받는 ‘꼴찌팀’에서였다. 1996년 6월에는 공에 맞아 타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목이 부었고 1997년에도 시즌 내내 팔꿈치 부상에 시달렸지만 그라운드를 지켰다. 그간 최태원은 10번을 빼고는 모두 선발출장해 이번 기록을 한층 빛냈다.
1996년 좌초된 북한 잠수정, 강릉해안 5km 지점 해상에서 발견
1996년 9월 18일 새벽 1시반 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해변에 좌초된 정체불명의 잠수함이 택시운전사에 의해 발견됐다.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군과 경찰은 좌초된 잠수함이 북한이 비정규전에 활용하는 대남공작선임을 확인, 군·경·예비군 합동으로 강릉해안과 산악지대를 3중으로 봉쇄, 무장간첩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이날 오후 4시 45분 무장간첩 중 한 명인 이광수가 모전리에서 생포됐으며 오후 5시 강동면 청학산에서 간첩 11명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됐다. 이어 이광수의 진술을 통해 침투간첩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후 군당국의 수색작전이 본격 전개, 22일 칠성산에서 2명을 추가 사살했으나 이후 작전은 서서히 장기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군은 50일간의 추격작전 끝에 무장간첩 26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한 25명을 생포하거나 사살(11명 자살)했고, 이 과정에서 군장병과 민간인 등 16명이 희생됐다. 북한 잠수함 동해안 침투사건은 1968년 울진삼척무장공비사태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94년 이형철 WBA 주니어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1년 제46차 유엔총회 남북한의 유엔가입 만장일치 승인
1990년 국제올림픽위원회, 1996년 올림픽 미국 아틀랜타시서 개최키로 결정
1988년 정치가 우양 허정 사망
1987년 미국-소련 중단거리핵무기폐기 합의
1985년 제4차 남북경제회담 개최
1982년 현대시조의 선구자 노산 이은상 별세
현대시조 시단의 선구자인 노산 이은상이 1982년 9월 18일 지병인 방광암으로 별세했다. 가고파의 작사자로 유명한 그는 우리 시조 현대화의 선구적 인물이자 개척자로서 그의 한 평생은 문단뿐 아니라 언론계, 민족문화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낳았다.
그가 시조를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말부터로 첫 작품 ‘노산시조집(1923년)’을 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카프문학에 대립한 국민문학파의 주역으로 활약하면서 시조의 형태나 내용면에서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노산은 문학활동과 함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의해 투옥됐다가 전남 광양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았다. 해방 후 줄곧 민족주의 사상과 애국선열을 기념하는 사업에 몰두해 이 충무공 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 등을 맡았다.
노산의 시조문학은 서정과 서경이 융합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가운데 민족혼이 그 주조의 특징으로, 전통적인 시조의 ‘3장’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초장과 종장의 ‘2장’ 시조를 최초로 시도, 시조 현대화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특히, 그는 타계 전해인 1981년 7월 휴전선을 찾은 후 통일의 염원과 분단민족의 한을 담은 최후의 시조집 ‘기원’을 병상에서 출간하는 등 우리나라 시조문학에 마지막까지 혼신을 다했다. 대표작으로는 ‘가고파’ ‘봄처녀’ ‘이충무공 일대기’ ‘노산 시조집’ 등이 있다.
1982년 서베이루트내 팔레스타인 난민 1천8백여명 대량학살
1981년 정부, 소득별 정률(定率)공제 및 법인세율 낮추기 위한 세제개혁안 발표
1981년 프랑스 하원, 사형제도 폐지안 의결
1979년 첫 국산 디젤기관차 운행
1973년 한국-인도네시아, 국교수립
1973년 동서독 유엔 동시가입
1973년 기독교 오순절 세계대회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 효창운동장서 열림
1971년 해병여단 공비 사살사건
김포군 양촌면에서 민간인이 괴한 4명을 발견 신고, 출동한 해병과 교전 끝에 3명 사살. 피해(전사 9명, 부상 20명)
1969년 남부지방 폭우 사망 289명 실종 107명 이재민 160,552명 재산피해 160억원
1962년 소련, 북극에서 대기권 핵실험
1962년 17차 유엔총회 개막. 104국 대표 참석
1961년 함마슐드 유엔사무총장 비행기 사고로 세상 떠남
1959년 흐루시초프, 유엔총회서 군비전면폐지 목표로 하는 군축안 제안
1958년 영국, 프랑스지역 금수(禁輸) 철폐
1957년 고 딘 디엠 월남대통령 방한
1957년 가짜 이강석 구속
“나 이강석인데...” 1957년 8월30일 밤8시쯤, 한 청년이 자신이 이강석이라며 대뜸 경주 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회의장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이강석의 갑작스런 출현에 화들짝 놀란 서장은 청년이 있다는 다방으로 달려갔다. “귀하신 몸이 어찌 홀로 오셨나이까” 황송해하는 서장의 인사에 청년은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상황을 시찰하고 공무원의 비리를 내사하러 왔다”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자유당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이강석은 거리의 무법자였고 또 하나의 작은 권력이었다. 때문에 이 청년 앞에 ‘꿈같은 3일’이 펼쳐졌다. 경주는 물론 영천ㆍ안동ㆍ봉화 등지를 돌며 경찰서장과 군수로부터 향응과 칙사대접을 받았고 46만환이나 되는 거액도 챙겼다.
9월1일 밤, 청년은 경북 도지사의 아들이 이강석과 고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도지사 관저에 여장을 풀었다. 결국 이강석이 아닌 것으로 밝혀져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용돈이 궁해서 꾸민 연극인데 그렇게 굽실거리고 쩔쩔맬 줄 몰랐다”고 둘러댔지만 9월18일 구속돼 징역 10개월을 살아야 했다. 진짜 이강석이 자살한 3년뒤, 가짜도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죽음까지도 진짜를 따라하는 기이한 인연을 맺었다.
1954년 대한영화제작인협회 창립
1954년 북한, 중공군 40만명 철수를 발표
1953년 공산주의 운동가 빨치산 이현상 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됨,
중앙고보 재학중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해방 후 남로당 연락부장, 5년간 지리산에서 투쟁 ‘축지법을 쓴다, 몇 길 담장을 훌쩍 뛰어 넘는다’는 소문 퍼질 만큼 신출귀몰, 절대 포로를 죽이지 않았다고 함
1951년 한국-일본 항로를 허가
1950년 소련, 유엔안보이사회서 일본가입 거부
1950년 미국-영국-프랑스 외상회의 재개(뉴욕)
1949년 서울시, 특별시로 승격
1948년 일본 전학련(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 결성
1947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발족
CIA는 1947년 9월 18일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창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설치된 전략업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후신이다. 전쟁이 끝난뒤 미국은 승패를 면밀히 분석한 후 CIA를 설치했다. 미국 육·해·공군을 총괄하는 국방총부도 이때 설립됐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동서냉전 격화에 힘입어 황금기를 구가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임명한 덜레스 국장에 의해 조직이 확대되기 시작, 능력 자금 등에서 세계 최강 정보조직으로 발돋움했다. 이란과 과테말라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어 성가를 높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쿠바 피그만 상륙작전을 배후조종했다가 실패하고, 마피아 조직을 동원해 카스트로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민심을 잃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은 CIA치부를 드러낸 더러운 공작이었다. 냉전이 끝나자 적을 상실한 CIA는 새로운 적을 찾아 나섰다. 조직과 예산을 축소하라는 국내 요구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1997년 테넷 국장은 각국의 경제정책, 첨단기술의 개발상황 분석 뿐만 아니라 미국 기술 불법유출방지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1947년 영국, 노동력통제령 공포(12.12 시행)
1935년 중국 항일구국동맹 결성
1934년 소련, 국제연맹에 가입
1931년 만주사변 발발
1931년 9월18일 밤10시20분쯤, 중국 랴오닝성의 펑텐(奉天ㆍ현 瀋陽)역 부근에 있는 류탸오거(柳条溝)에서 남만주철도의 일부가 폭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선로와 침목의 일부가 파괴됐을 뿐 큰 사고는 아니었다.
관동군은 중국의 항일 군벌 장쉐량(張學良)군의 소행으로 발표했지만 사실은 관동군 장교들이 본국과의 사전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꾸민 모략이었다. 이튿날 관동군은 ‘자위(自衛)를 내세워 일제히 군사행동을 개시, 장쉐량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北大營)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조선 내 일본군도 국경을 넘어 만주를 침공해 들어갔다. 만주사변이 시작된 것이다.
관동군이 속전속결로 펑텐ㆍ창춘(長春)에 이어 지린(吉林)성의 거의 전 지역을 점령해 들어가자 본토의 내각도 사건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당초의 방침에서 후퇴하고 추인(追認)으로 돌아섰다. 정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나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일본군은 11월에 동북 3성 전지역을 장악하고 이듬해 3월 괴뢰국 만주국까지 세워가며 만주점령을 기정사실화했지만 중국은 국제연맹에 제소만 했을 뿐 적극적인 저항은 보이지 않았다.
1914년 여성운동가 이태영 출생
1911년 표트르 스톨리핀 피살
1911년 9월 18일, 제정 러시아의 보수주의 정치가 표트르 스톨리핀이 황제 니콜라이와 함께 오페라를 관람하던 중 드미트리 보그로프라는 혁명가에게 저격당해 이튿날 끝내 숨을 거뒀다.
러시아의 대지주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노동자의 혁명인 ‘피의 일요일’(1905년) 등 민중운동을 탄압하는 데 남다른 수완을 인정받아 제정 러시아 최초의 입법의회인 두마의 총리로 임명받았다. 그는 혁명운동은 물론, 조합운동 ㆍ자유주의운동까지도 탄압하면서, 국회 해산 및 비입헌적으로 선거법을 개정하는 등 여당세력의 우세를 지켰다.
그러나 그가 강행한 선거법 개정은 결국 돈이 있고 세금을 잘 바치는 사람에게 선거권을 주어 형평성과 평등성이 배제된 것이었다. 그는 또한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스톨리핀 토지개혁’을 강행하였는데, 이것 역시 그 근본 목적이 부유하고 보수적인 농민 계층을 육성함으로써 농촌을 안정시키는 한편 독재정치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그의 야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제를 설득해 두마와 고위입법부(국무협의회)를 임시로 정회시킨 뒤 두 기구를 무시하고 젬스트보 제도(1864년에 창설한 러시아의 지방자치기관)를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까지 확대시키는 법을 제정함으로써(1911년 3월) 결국 온건 우파마저 적이 되어 그들로부터 또다시 헌법상의 통치체계를 모욕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09년 아프리카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 출생
1907년 넵투늄(초우라늄원소)을 발견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맥밀런 출생
1905년 청,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 채택
1899년 경인선 철도 한국최초로 개통(노량진-제물포)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7년 3월 22일부터 공사에 들어가 1899년 9월 18일 개통됐다. 개통당시 철로 길이는 노량진-제물포 간을 잇는 33.2km였다. 영국철도가 1825년 9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적을 올린지 74년 만이었다.
경인선은 1889년 주미 대리공사였던 이하영이 귀국하면서 철도 모형을 가져 온 것이 철도부설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조정은 처음 민족자본에 의한 자발적인 철도건설을 시도했으나 자금난 등으로 결실을 맺지 못하고 1896년 미국인 모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게됐다. 모스는 인천의 미국인 거상 타운센드와 함께 한국개발공사를 설립하고, 1897년 3월 22일 인천 우각리 쇠뿔고개에서 인부 350명을 모아놓고 역사적인 기공식을 가졌다.
그러나 자금난에 봉착한 모오스는 부설권을 놓친 일본의 집요한 매수공작까지 더해지자 1898년 12월, 170만원을 받고 부설권을 일본인들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기고 말았다. 일본은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제2차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속도를 높여서 9월 18일에 경인철도 가영업을 시작했고, 1900년 11월 12일에 서대문에서 개업식을 가졌다.
개통당시의 경인철도는 탱크처럼 생긴 미제 ‘모갈’형으로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28량 이었고 1일 2왕복 주행시간 1시간 30분이었다. 경인철도를 처음 주행한 기관차는 미국 브룩스사의 탱크기관차. 기차가 내뿜는 불똥으로 철로변 민가에는 화재가 빈발했다고 한다. 9월 19일자 독립신문은 철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화륜거의 소리는 우뢰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연기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경인선의 개통은 근대적 교통기관의 도입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침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경인선은 조선식민지배뿐 아니라 중국 대륙과 러시아 침략을 위한 바란으로 일본이 해외에 부설한 첫 철도였다. 일본은 인천과 노량진간의 개통에 이어 노량진과 서울역 공사를 서둘러 1900년 7월 8일에 전구간을 개통시켰다.
월미도행 ‘꽃열차’ ‘경인통학생 열차’ 등으로 유명했던 경인선은 일제하, 광복 공간, 한국전쟁 등 급변하는 역사 속 철길을 숨가쁘게 달리면서 증기기관차에서 디젤기관차, 전철로 모습을 바꿔왔다. 경인선은 1965년 9월 18일 복선에 이어 1974년 8월 15일 전철화됐다.
1894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초등교육기관인 관립 교동소학교(교동초등학교 전신) 개교
1883년 조선 보빙사 방미. 아더 미국 대통령 면담
1810년 칠레 자치정부 수립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402년 조선, 지진 피해
96년 제11대 로마제국 황제 도미티아누스 암살
53년 제13대 로마제국 황제 트라야누스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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