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물랭루즈의 화가, 39.5×54.5㎝, 종이에 먹과 채색, 2020.
툴루즈 로트레크의 1890년 작 ‘물랭루즈에서의 춤’(유화, 116×150㎝). 필라델피아미술관 소장.
■ 파리 물랭루즈와 로트레크
툴루즈 로트레크는 본디 12세기부터 귀족 가문 전통을 이어온 이른바 명망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 집안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으니 바로 근친혼으로부터 생긴 유전병이었다. 로마도, 고대 중국 황실도 사실 이 근친혼의 전통 때문에 온갖 유전병에 시달리고 조기 사망을 면치 못했는데 로트레크 집안 역시 그 고리를 끊지 못했다. 로트레크는 백작의 작위를 가진 아버지와 아버지의 외사촌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던 것. 그는 재주 있고 영민한 소년이었지만 뼈에 문제가 있었고 14∼15세 무렵 좌우 허벅지가 차례로 골절되면서 하체는 더 이상 자라지 못했다. 이후 나이가 들면서 상체는 어른이었지만 하체는 아장아장 걷는 듯한 어린아이였다.
150㎝ 남짓 신장의 대부분은 상반신이었는데 이처럼 부실한 몸이다 보니 늘 노인처럼 지팡이에 의지해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은 키 콤플렉스 때문에 광대처럼 높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귀족 집안 출신이었지만 이러한 신체 때문에 말하자면 그는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집안 전통이었던 승마와 사냥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자연스레 집에서 자주 열리던 파티 같은 데도 참석할 수 없었고 겉돌기 시작했다. 유일한 출구는 혼자 틀어박혀 그림 그리는 일이었다. 다행히 부친은 그런 그를 격려하며 질 좋은 화구를 구해주곤 했다. 그런데 아름답고 우아한 그림을 그리기 원했던 부친의 바람과는 달리 로트레크는 파리의 환락가인 ‘피갈’ 쪽으로 눈을 돌렸고 차츰 카바레의 댄서나 매춘부, 서커스 광대 같은 기층민을 많이 그리게 된다.
그는 몽마르트르 물랭루즈의 화려한 밤 풍경을 즐겨 그렸는데 유독 댄서들의 몸동작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기 좋아했다.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이 계층의식이나 어두운 이념적 성향을 보이기보다는 삶의 환희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것도 어찌 보면 무희들의 움직임을 신체적 제약을 받는 자신의 해방구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양반사회의 이면을 살짝 꼬집고 들춰내되 해학성과 따뜻함을 잃지 않았던 우리네 조선 시대 신윤복의 그림처럼 부르주아와 퇴폐문화의 상징 같았던 ‘피갈’의 물랭루즈를 비판이나 고발보다는 인간애적 관점에서 즐거운 관찰자의 모습으로 담아낸 것이다. 때로는 자신이 감독한 영화에 배우나 카메오로 나오곤 했던 우디 앨런처럼 그림 속에 자신의 모습을 살짝 그려 넣기도 했다. 물론 하반신은 감춘 채.
특히 로트레크가 그린 무희 중 ‘뼈 없는 발렌타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여인이 유명한데 마치 뼈가 없이 흐느적거리듯 춤추는 모습을 영화의 스틸 화면처럼 순간적으로 잡아낸 것이다. 무희들 뒤편으로 키 큰 남자와 걷고 있는 꼬마 남자인 자신의 모습을 역시 관찰자의 시선으로 가감 없이 그려낸 것도 이채롭다. 진실로 그는 자신의 집안에 모여드는 빼입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보다는 물랭루즈의 무희나 종업원들을 마음속 패밀리로 생각했던 듯하다. 폭발적이고 다이내믹한 춤솜씨로 열성팬들을 거느리며 ‘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을 얻은 제인 아브릴, 절창의 가수 이베트 길베르 같은 실제 인물들을 그는 자신의 그림에 단골로 초대하곤 했다.
우연히 그리게 된 카페 콩세르의 광고 포스터도 훗날 그의 유명작이 된다. 원근을 없애버린 과감한 평면성은 당시 파리 벼룩시장을 중심으로 많이 팔려나갔던 일본화 우키요에(浮世繪)의 영향으로 보인다, 제인 아브릴, 라 굴뤼, 이베트 길베르 같은 여인들을 동시대인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그림으로 그녀들의 이름을 미술사에 헌정하게 된다. 빛과 어두움 그리고 현란한 춤동작들을 속도감 있는 필치와 아름다운 색채로 생생하게 잡아낸 로트레크의 회화세계는 피카소에게도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빛나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지팡이에 의지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에 일그러진 양악과 부르튼 입 때문에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해 그는 사람들을 피해 홀로 지낼 때가 많았다. 그를 차별 없이 받아준 것은 오직 댄서들과 사창가의 여인들뿐. 결국 로트레크는 지나친 사창가 출입에 알코올과 무질서한 삶으로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스스로가 피에로이자 무대 속의 배우인 듯 살다가 간 인생이었다.
김병종. 화가·서울대 명예교수
■ 드가에게 영향 받아… 인물 표정·동선 표현 능숙
툴루즈 로트레크의 회화 세계
회화와 포스터, 순수미술과 그래픽을 결합시켜 독특한 화풍을 열어갔던 로트레크는 특히 인물과 초상화에서 개성을 드러냈다. 어릴 적부터 대가족과 하인들 속에서 집안의 잦은 귀족 모임과 사냥이며 승마 등을 보고 자란 그는 인물의 다양한 표정과 동선을 속필로 그려내는 데에 능숙했다.
신체적 결함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기보다는 레옹 보나(Leon Bonnat),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t) 등의 화실을 옮겨 다니며 그림을 배웠다. 특히 에드가르 드가의 화실에서 받았던 인물화 수업이 그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1884년 작업실을 몽마르트르로 옮기면서부터 댄서와 악사 등을 소재로 풍속적인 문화를 그리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투사시키는 자전적 그림들을 그리게 된다.
첫댓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