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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연평도 해역 공무원 피격 사망
인천광역시 옹진군 소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실종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북한 등산곶 인근 해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피격 받아 사망한 사건이다.
오전 1시 35분쯤 이씨는 무궁화 10호 조타실에서 동료와 함께 근무하던 중 컴퓨터로 행정업무를 하겠다며 조타실을 비웠다. 그리고는 다음 조와 교대하는 시각인 오전 4시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근무조였던 동료는 혼자 인수·인계를 했다.
11시 35분쯤, 점심시간인데도 이씨가 선내 식당에 오지 않자 동료들이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선내 어디에도 행방이 묘연했고, 선미 우현에는 이씨 것으로 추정되는 슬리퍼가 굵은 밧줄 더미 속에 놓여 있었다.
21일 12시 51분경, 해양수산부 서해어업관리단 소속 어업지도선의 1등 항해사인 40대 공무원 1명이 소연평도로부터 남쪽 2km 떨어진 해상에서 실종됐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북한군의 해명에 의하면 북한 측 해당 수역 경비담당 군부대가 어로작업중에 있던 북한 수산사업소 부업선으로부터 정체불명 남자 한명 발견했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으며 강령반도 앞 북한 측 연안에 부유물을 타고 불법 침입한 자에게 80미터까지 접근해 신분 확인을 요구했으나 처음에는 한 두번 대한민국 아무개라고 얼버무리고는 계속 답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군인들의 단속명령에 계속 함구무언하고 불응하기에 더 접근하면서 2발의 공포탄을 쏘자 놀라 엎드리면서 정체불명의 대상이 도주할 듯한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일부 군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엎드리면서 무엇인가 몸에 뒤집어쓰려는 듯한 행동을 한 것을 보았다고도 하였다. 조선인민군 군인들은 정장의 결심 밑에 해상경계근무 규정이 승인한 행동준칙에 따라 10여 발의 총탄으로 불법 침입자를 향해 사격하였으며, 이때의 거리는 40~50m였다고 한다.
사격 후 아무런 움직임도없어 10여미터까지 접근하여 확인 수색하였으나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부유물 위에 없었으며 많은 양의 혈흔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조선인민군 군인들은 불법 침입자가 사살된 것으로 판단하였으며,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은 국가비상방역 규정에 따라 해상 현지에서 소각하였다고 한다
2020년 에베레스트 10차례 무산소로 올라 기네스북에 등재된 네팔 셰르파 앙 리타(72세) 세상 떠남, 1987년 12월 허영호와 함께 무산소로 에베레스트 오름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4등급 시속 175km) 카리브해 강타
푸에르토리코 전국토 정전 350만 전국민 대피령 사망 2,975명
2011년 검찰 공직선거법상 후보매수죄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구속기소
2005년 한미, 대화력전 지휘통제 임무이전 서명
2004년 빌리 조엘,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
가수 겸 피아니스트, 작곡가인 빌리 조엘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2262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빌리 조엘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은 팬티지극장 앞 할리우드 대로에 자리했다.
빌리 조엘은 할리우드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게 됐다며 ‘Say goodbye to Hollywood’를 발표할 때만 해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55세인 빌리 조엘은 이미 로큰롤 전당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산타모니카에서 살고 있는 빌리 조엘은 1973년 발표된 유명한 ‘피아노맨(Piano man)’을 비롯해 20여곡을 빌보드 차트 톱10에 올려놓았다.
2004년 한국-러시아 정상회담, ‘포괄적 동반자관계’ 선언
2003년 미국 목성탐사선 갈릴레오 호(1989.10.18 발사 1995.12.7 목성 도착) 14년 만에 임무 마침
2002년 러시아 최악의 눈사태로 촬영팀 100여명 사망
체첸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 남부 북오세티아공화국에서 21일 최악의 눈사태가 발생, 영화 제작 중이던 배우·촬영 스태프 등 최고 100명이 사망·실종됐다고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했다. 러시아 비상대책부 관계자는 “주말을 맞아 등산객들이 많았을 것으로 보여 사망자 수는 최대 150여명으로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날 사고는 카프카스산맥에서 흘러내린 폭 150m의 거대한 눈덩어리가 시속 100㎞ 속도로 32㎞를 흘러내려 카르마돈 마을 전체를 덮치면서 발생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30명이며, 실종자도 70명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 매몰돼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3일 현재 실종자 수색을 펼치고 있으나 커다란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유족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비상대책부 관계자는 “마을 전체가 흙과 돌멩이, 바위를 동반한 눈더미와 얼음에 뒤덮였으며 마을로 통하는 길이 모두 끊겼다”며 “눈사태는 공화국 수도 블라디카프카스 9㎞ 부근에서 멈췄다”고 말했다.
눈사태로 때마침 카프카스산맥을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 중이던 보드로프 2세 등 배우 27명과 스태프 40명이 몰사한 것으로 알려져 러시아 국민들을 더욱 경악시켰다
2002년 평양에서 추석맞이 남북교향악 합동연주회 개최
1999년 타이완에 진도 7.6 강진 발생, 2,400여명 사망
리히터 규모 7.3~7.6도의 강진이 1999년 9월 21일 대만 중부지역을 강타, 2400여명이 사망하고 8600여명이 부상했다. 지진은 주로 타이중, 타이베이 등 2개 시와 대만 중부의 난터우, 원린 등 4개 현을 뒤흔들어 놓아 건물 1만5000여 동이 붕괴되거나 피해를 입었다.
지진은 타이베이 남서쪽 150km, 화리엔 서남쪽 50km 지점의 난터우현을 진앙으로 1분쯤 계속됐으며 진도 6.8과 5.9 등의 여진이 30분동안 200여차례 이어졌다. 주로 반도체와 PC를 생산하는 대만의 ‘실리콘벨리’ 신주도 큰 피해를 입어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가격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한국의 119구조대 15명도 현지에 급파돼 무너진 12층짜리 아파트 건물 잔해 속에 갖혀있던 6세 소년을 87시간 만에 무사히 구해내고 사체 20여구를 발굴해 현지 매스컴의 찬사를 받았다. 700여차례의 여진과 6차례의 강진이 연말까지 계속 이어져 타이완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1999년 `금오신화` 현존 최고본, 중국에서 발견
매월당 김시습(1434-1493)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 현존 최고본이 중국에서 발견됐다. 고려대 최용철 교수가 중국 동북지방의 한 국립도서관에서 16세기전의 목판본 `금오신화`를 발견, 책 서문 사진을 1999년 9월 21일 국내 처음으로 공개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금오신화` 판본은 일본에 남아 있는 1653년 본이었다. 이날 공개된 `금오신화` 최고본 서문에는 매월당(梅月堂)금오신화(金鰲新話) / 파평(坡平)후학(後學)윤춘년(尹春年)편집(編輯)이라고 적혀있는데 윤춘년은 임진왜란 전 중종-명종 시기에 예문관 재학을 지닌 인물로 1514년에 태어나 1567년에 사망한 기록이 남아있어 이 책의 출간 시기가 임진왜란 이전이고 조선에서 간행된 것임을 입증했다.
이날 공개된 판본은 금속으로 만든 활자본을 다시 목판에 옮겨 찍어낸 것으로, 한국소설사 연구에 획기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써 `금오신화`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간행된 판본 밖에 남아있지 않아 국내에서는 간행되지 않았다는 학계 통설이 수정되게 됐다. `금오신화`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소설 형식을 확립시킨 작품으로,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등 5개의 단편을 담고 있다
1998년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 제4회 서울평화상 수상
코피 아난 UN 사무총장이 제4회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울평화상 문화재단은 1998년 9월 21일 “아난 총장이 1990년 걸프전 때 이라크에 억류된 서방 인질 등 9백여 명을 협상을 통해 구해낸 공적 등이 높이 평가받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최초의 흑인 UN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은 30년 이상 유엔에서 다양한 보직을 맡으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1962년 세계보건기구(WHO)의 행정 및 예산담당관으로 유엔과 인연을 맺은 그는 1993-1996년에는 유엔평화유지군(PKO) 담당 사무차장을 맡았고, 유고 문제 유엔특사 등도 역임했다.
아난 총장이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배경은 1990년대 이후 각종 분쟁-분규의 평화적 해결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었다. 1997년 2월 대만 핵폐기물 북한반입과 관련해서는 유엔의 반대를 이끌어 냈고, 같은 해 5월에는 유엔의 북한식량에 대한 일본 참여를 촉구하는 등 남북한 문제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1994년 지존파 납치살인사건 일어남
1993년 옐친 러시아 대통령 의회해산
1992년 이란 반다르 아바스시서 대우근로자 4명이 무장 괴한에 피납
1990년 이호왕 박사,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 개발
말라리아 및 간염과 더불어 세계 3대 전염병으로 불리던 유행성출혈열의 예방백신이 1990년 9월 21일 세계 최초로 국내에서 개발됐다. 유행성출혈열 백신은 그동안 선진 각국에서 여러차례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해왔는데, 국내 고려대 의대 이호왕 교수팀이 개발에 착수한지 10년 만에 성공한 것이다.
보사부는 이날 유행성출혈열의 예방백신이 고려대의대 이 교수팀과 ㈜녹십자의 공동연구로 개발됐다고 밝히고, ㈜녹십자가 국립보건안전원의 국가검정을 받아 유행성출혈열 백신인 한타박스를 이날부터 의료계에 공급한다고 밝혔다. 임상실험한 결과 항체양성률 97%의 높은 효과를 낸 이 백신은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 등에 특허출원됐다.
유행성출혈열은 들쥐와 집쥐 등의 배설물에 있는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 감염돼 나타나는 병으로 치사율이 10%에 이르며 주로 한국, 중국 북동지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반도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1976년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한탄강 유역에서 채집한 등줄쥐에서 발견한 이 교수는 한탄강의 이름을 따 한탄바이러스라 명명하고 이에 대한 예방접종약을 개발, 실용화하는데 노력해왔다. 이 과정에서 수명의 연구진이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으나, 이 교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구에 정진해 유행성출혈열의 퇴치를 위한 일련의 과정을 모두 수행하는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 1991년부터 이 백신은 아시아 전역에서 사용되었고, 그 결과 최근 한국에서의 출혈열 환자수가 2000명에서 500명으로 감소했다.
1989년 베트남군, 11년에 걸친 캄보디아 군사개입 종식. 철수시작
1988년 사할린교포 3명 소련당국의 허가로 첫 입국
1985년 첫 남북이산가족 상봉 서울과 평양에서 열리다
1985년 9월 21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1984년 9월 북한측의 대남 수재(水災)물자 제공 제의와 남한측의 수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재개되면서 남북적십자회담이 12년 만에 다시 열렸다.
1985년 5월 27~30일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적십자회담 제8차 본회담에서 남북한은 "8․15해방 40주년을 전후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3차례의 예비접촉에서 방문단 규모를 단장 1명,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기자단 30명, 지원인원 20명 등 151명으로 하고, 방문 지역은 서울과 평양으로 국한하며 방문기간은 9월 20~23일로 한다는 구체적 사항들이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방문단이 9월 20일 판문점을 경유해 각각 서울과 평양에 도착함으로써 3박 4일간의 방문일정에 들어갔다.
이산가족 상봉은 9월 21~22일에 걸쳐 이루어졌고, 평양에서는 한국측 방문단 중 35명이 41명의 가족․친척들과, 서울에서는 북한측 방문단 중 30명이 51명의 일가친척과 재회했다.
이는 남북 당국자들의 공식적 합의 도출에 의해 이루어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민족통일의 염원을 새롭게 다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1982년 김상협 제16대 국무총리 취임
1982년 제23차 세계여성단체협의회 개막
1982년 미국-프랑스-이탈리아, 레바논의 치안회복 위해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파병 결정
1982년 레바논 대통령에 아민 제마옐 당선
1981년 동력자원부, 5차 5개년 에너지부문계획을 마련
1981년 한국탁구, 리비아 국제친선탁구대회 단체전 우승
1981년 한국기계전 개막
1976년 서울 풍납동 소재 백제토성 복원공사 준공
1965년 파월 청룡부대 결단식 포항에서 열림
1965년 9월21일 경북 포항!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는 최초의 전투부대인 청룡부대의결단식이 거행되었다.
부대기를 수여한 박정희 대통령은 해병 제 2여단을 청룡부대라고 명명했다.
비전투부대인 비둘기 부대요원 2천 명이 베트남에 파병된 뒤 7개월만의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파병이 우리나라의 안전보장을 위한 자체방위활동이라며청룡부대 장병들을 격려했다.
결단식을 가진 청룡부대는 10월 3일 부산을 출발해 10월 9일 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했다.
1964년 몰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3년 서울서 열린 제5회 아시아 야구대회서 한국 우승
1962년 아르헨티나반란군, 기도대통령의 전투중지령 무시하고 수도 입성
1962년 유엔총회, 쿠바문제로 미국-소련 설전
1961년 유엔군사위원회, 아무 토의없이 한국통일문제 등 차기총회 의제로 채택
1961년 미국 캐네디대통령, 신설 국제개발처(AID) 처장에 국제법 전문가인 포울러 해밀튼 지명
1959년 북한, 남한의 전쟁 복구를 위해 물자제공 제의
1957년 태국 임시국회, 수상에 포테 사라신 선출
1954년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 노틸러스호 발진
물 밑의 무법자!
1차대전 이후 음향 탐지 장치와 레이더가 개발되어 잠수함이 발각될 확률이 높아지면서 잠수함은 점점 수중에서 더 오래 더 깊이 있을수 있도록 발전되었고, 결국 거의 무제한적으로 잠항할 수 있는 원자력 잠수함이 나오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은 1954년에 완성된 미국의 노틸러스호이며, 첫번째로 북극의 빙하밑으로 통과 운행한 기록을 남겼다.
한편 최근에 디젤 전기 추진 잠수함에도 AIP(Air Independent Propulsion) 시스템을 탑재하여 잠항시간을 획기적으로 늘일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노금석 북한공군 대위, 미그 15기 몰고 월남 귀순
1953년 9월 21일 북한군 공군 대위 노금석이 소련제 MIG 15기를 몰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순했다. 노 대위는 이날 평양 동북쪽에 있는 순안비행장을 이륙, 목숨을 걸고 휴전선 상공을 넘어왔다. 철저한 보안 속에 노대위에 대한 심문을 마친 주한 미 제5공군은 사흘 후에야 노대위를 기자회견장으로 안내했다. 회견장에는 5년 전 월남해 부산피난민수용소를 전전하던 노대위의 어머니가 등장, 모자가 극적으로 상봉하는 감격에 젖기도 했다.
1953년 3월 6일 폴란드 공군중위 자렛기가 소련제 제트기를 몰고 노르웨이로 탈출한 적은 있지만 최신형 MIG 15기를 몰고 유엔군쪽으로 투항한 것은 노대위가 처음이었다. 이 사건은 미·소양국의 군사기밀작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노대위는 1954년 5월 10일 워싱턴으로 떠났다
1949년 서독, 민정이양 발표
1948년 유엔총회, 주한 미국-소련점령군 철병안 심의
1947년 대동청년단 결성. 총재 이승만, 단장 이청천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당시 모든 청년운동단체들을 통합해 대동단결을 이룩한다는 명분아래 서울운동장에서 결성대회를 개최, 정부수립 후 이승만의 지지기반 확보를 위해 만든 대한청년단에 통합돼 그 중추세력이 되었다
1945년 김일성, 소련군과 함께 입북 북한 점령한 소련 군정 소작료 3-7제 실시
1942년 B-29 폭격기(Superfortress) 첫 비행
B-29는 제2차세계대전에서 사용된 미국의 전략폭격기이며 . 길이 30.2m, 너비 43.1m, 무게 64t에 프로펠러 4발 기관을 가졌으며 최대 항속거리 9,650km, 실용상승한도 1만 2500m, 최대시속 576km이며 9t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다. 20mm 기관포 6문과 13mm 기관총 16문도 장비하였다.
1942년에 첫 비행을 실시하고 1944년 6월 실용 배치되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본토 공습의 주력기였으며 6 ·25전쟁 때에도 사용되었다.
1939년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 때문에 장거리 운용이 가능한 항공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전 유럽이 독일에게 점령되면 비행기를 미국에서 이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942년에 처녀비행에서 성공하였고 1944년 6월 실용 배치되었다. 설전에 배치된 이후 B-29의 주력임무는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공군 기지가 있었던 남태평양 마리아나 군도에서 이륙한 B-29는 일본의 주요 도시를 폭격하였다.
수백대의 B-29 폭격기가 일본 상공을 뒤덮을 때도 있었으며 한번의 폭격으로 8000여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당시 투하된 폭탄은 테르밋 등 방화탄이 많았는데 일본은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동경을 불바다로 많드는 작전을 펼쳤다.
방화탄은 가격도 저렴하여 일본을 공격하는데 효율적이었다.
히로시마 핵폭탄으로 사망한 사람보다 동경에서 방화탄으로 숨진사람이 더욱 많았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45년 3월 남태평양 티니언 섬에서 이룩한 에놀라 게이로 명명된 B-29 폭격기가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탄을 투하하였고 3일후 박스카로 불린 B-29 폭격기가 나가사키[長崎]를 원자탄으로 폭격하였다. 이 두번의 원자탄 투하로 B-29 폭격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행기가 되었다.
1941년 배(胚)발생 유도를 발견한 독일의 슈페만 사망
1939년 왕조명, 친일 신중앙정권 수립을 성명
1935년 부산방송국(JBAK) 개국
1934년 일본 혼슈지방 태풍 사망 4,000여명
1928년 함경도에 홍수 인명피해 1400명 가옥손실 37,323호
1922년 조선일보, 연중무휴간제 실시
1898년 중국 서태후 친정(親政)선언. 광서제 유폐
1894년 조선 고종31년 죄인 연좌제도 폐지
1897년 동양화가 이상범 출생
1866년 영국 작가 로버트 조지 웰스 출생
1860년 쇼펜하우어 사망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1860년 9월 21일 72세로 사망했다. 1788년 독일 단치히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부모 덕으로 평생을 풍족하게 살았다.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과 자연과학을 배웠고 베를린 대학을 거쳐 예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괴테와 친교를 맺었으며 동양학자 마이어와의 교우를 통해 인도 고전에도 눈을 떴다.
1819년 4년간의 노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했다. 그의 이 책에는 인식론, 자연철학, 미학, 윤리학 등에 대한 그의 견해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칸트의 물자체란 다름아닌 의지로 보았으며, 맹목적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이라고 믿었다. 또한 예술이나 종교적 금욕 및 자선을 진정한 해방의 수단으로 간주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인도의 베다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그의 염세철학도 다분히 이 사상이 바탕이 됐다.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해 피히테, 셸링, 헤겔 등의 관념론적 철학자를 공격했으나, 그의 철학체계도 사실상 관념론에 속했다. 그의 철학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크게 인정을 받지는 못했으나 19세기 후반 염세관의 사조에 영합하여 크게 보급됐다. 그의 철학은 철학 고유의 영역에서보다 바그너의 음악이나 문학 등의 분야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1832년 영국 계관시인 월터 스코트 사망
1676년 교황 인노첸시오 11세 240대 로마교황 취임
1576년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 사망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가 1576년 9월 21일 사망했다. 카르다노는 니콜로 타르탈리아의 3차방정식 해법을 무단으로 훔쳐 발표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변호사의 사생아로 파비아에서 태어나 파도바대를 졸업하고 유명대학에서 수학과 의학을 강의했으며 파비아 시장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도박꾼이고 거짓말쟁이기도 했지만 대수학자였고 점성술을 연구한 자연철학자였으며 의사이기고 했다.
1570년에는 자신의 점성술을 과신, 예수의 생애에 대한 별점을 발표하는 바람에 이교도로 몰려 6개월간 투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을 날을 스스로 예언 그 날짜에 맞춰 자살했던 기인이었다.
카르다노는 그 당시 제1인자 수학자였으나 대수학 저서 `아르스 마그나`에 발표한 3차방정식 대수적 해법이 니콜로 타르탈리아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인격에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오늘날 3차 방정식을 배우는 사람들은 그가 3차방정식 해법을 도둑질했다는 사실도 함께 배우게 됐다. 그의 주요저서는 `산술` `물리학` `천문` 등이 있다.
1452년 엄격한 수도사였던 이탈리아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출생
교황 비판했다가 종교재판에서 사형 선고받고 교수된 뒤 불태워짐
1374년 공민왕 시역(弑逆)사건 발생
고려31대 공민왕 말년에 환신(宦臣) 최만생(崔萬生)이『익비(益妃)가 미소년 홍륜(洪倫)과 사통하여 임신5개월이 되었다.』는 말을 아뢰자, 왕이 이 사실을 아는 자는 전부 죽이겠다고 대노(大怒)하여, 이에 겁을 먹은 최만생이 홍륜․권진․홍관․한안․최선 등과 공모하여 왕을 살해했으나, 다음날 이 사실이 이인임(李仁任)․안사기(安師琦)․경복흥(慶復興) 등에게 발각, 최만생 일당은 처형됐고, 이인임은 10세의 어린왕자 우(禑)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668년 나당연합군, 고구려 평양성 포위. 고구려 보장왕 항복, 멸망
보장왕 27년인 668년 9월21일 고구려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과 싸움에 져 멸망했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북부여족인 주몽 동명성왕이 세웠다.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지 705 년에 걸쳐 28대 보장왕까지 이어졌다. 영토는 한반도 북부에서 요동 반도와 북만주까지 이르러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넓었다.
668년 고구려는 나·당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700여 년 역사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고구려는 70여 년에 걸친 수·당 및 신라 등의 침략을 잘 견뎌냈으나 인적·물적 손실을 입어 국력이 많이 소모된 상태였다.
더구나 666년 독재자 연개소문이 병으로 죽자 그의 세 아들인 남생·남건·남산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12성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해 버렸으며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의 내부 혼란이 깊어지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 침공에 나섰다.
668년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과 이적·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군사는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포위된 고구려는 주위의 여러 성과 연락이 끊어진 채 평양성을 1년 동안이나 굳게 지키면서 싸웠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454년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 사망
로마 장군으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425-455 재위)에게 큰 영향을 끼친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가 454년 9월 21일 사망했다.
기병대장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한때 서고트족과 훈족에 볼모로 잡혀 지냈다. 훈족에서는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 한 아틸라를 볼모로 로마로 보냈다. 아틸라는 열네 살인 410년 이탈리아 라벤나에 있는 호노리우스 서로마 황제의 궁정에서 생활했다. 볼모를 서로 교환하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다. 상호존중의 표시였고 상호 호전적인 분쟁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이기도 했다. 아이티우스는 아틸라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로마 귀족이었지만 훈족 왕 루가의 궁정에서 적의 생활을 체험했다. 그가 성장하면서 실권을 장악해 나가자 황후이자 모후이고 막후 통치자인 갈라 플라키디아가 그를 경계해 갈리아 지방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갈리아에서 서고트족, 프랑크족 등 반란 세력을 평정하며 명성과 힘을 키워나갔다. 더구나 그는 훈족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황후는 그의 승승장구에 점점 더 불안을 느껴 모든 권한과 직위를 면직했다. 그는 훈족으로 도망갔고 훈족은 그를 환영했다. 훈족 기병의 엄호를 받고 로마에 입성한 그는 서로마 제국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훈족에 감사하며 헝가리 지역에 있는 로마 속주 판노니아를 주었다. 판노니아는 이때부터 훈족의 중심지가 됐다.
평민이면서도 이례적으로 세 차례나 집정관을 역임해 433년에는 귀족 칭호를 받았다. 결국 그의 권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모함을 받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명을 받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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