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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2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예멘의 지옥의 우물 진입성공 내부구조 밝혀져
폭 30m, 깊이 100m에 이르는 이 웅덩이는 ‘지옥의 우물’, ‘정령의 감옥’ 등으로 불린다.
오만 국적의 동굴탐사팀이 동굴의 내부를 최초로 직접 확인했다. 정식 명칭은 ‘바르호우트의 우물’이다. 탐사팀이 공개한 사진에는 오랜 시간 물이 떨어지면서 생긴 흔적들이 보인다. 또 회색 및 초록색 암석과 진흙도 눈에 띈다. 동굴의 바닥 부분에 흐르는 지하수도 사진에 담겼다.
지금까지 이 구멍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악취의 원인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으며 과거 탐사대원들이 이 동굴의 지하 50~60m 지점까지 내려갔으나 원인 모를 냄새와 함께 내부에서 이상한 무언가를 발견해 탐사를 멈췄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 동굴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이를 ‘악마를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여겨왔다. 심지어 해당 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이 구멍에 들어가면 머리가 잘리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 믿어 온 것으로 전해졌다.
탐사를 이끈 오만 독일공과대학의 지질학과 모하메드 알킨디 교수는 “죽은 동물의 사체나 뱀 등이 있긴 했지만, 주민들이 생각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흔적은 없었다”고 했다. “뱀의 숫자가 많았던 것은 포식자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이는 매우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다만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은 사실”이라며 “이는 매우 신비한 현상”이라고 밝혔다.
알킨디는 “웅덩이 내부에서 물, 바위, 흙, 죽은 동물의 샘플을 채취했으며 정밀 분석을 마친 뒤 결과를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1년 카나리아제도 라팔마섬에 있는 쿰브레비에호 화산이 50년 만에 폭발 용암이 주택까지 덮쳐 320여채의 가옥이 파손되고 주민 수천명이 긴급 대피
2020년 북한 해군함정,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구조 요청한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살, 불에 태움
2020년 스위스 알프스산맥에서 빙하장례식
2015년 최영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 돈은 장학금, 몸은 연구용으로 기증
노(老) 교수는 평생 몸담았던 모교에 모든 것을 내놓고 눈을 감았다.
지난 22일 대장암으로 별세한 고(故) 최영(71) 연세대 생물과학부 명예교수가 10억원을 모교에 기부하고, 시신(屍身)까지 세브란스병원 해부학 연구실에 기증했다. 연세대는 고인을 기리는 동판(銅板)을 제작해 새로 짓는 연세대 신촌캠퍼스 내 백양로 지하 공간 한쪽 벽에 걸기로 했다.
1962년 연세대 생물학과에 입학한 최 명예교수는 진화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다닌 오스트리아 빈대학에서 유전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74년부터 2010년까지 35년간 연세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동안 한국유전학회, 한국동물학회 이사를 지냈다. 결혼하지 않고 늘 독신으로 지냈다.
연세대에서 유일하게 유전학을 강의하는 교수였던 고인은 학문적으로는 깐깐하기로 유명했다.
2014년 미국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의 시리아 거점 라카 시 공습 시작
2011년 영화 ‘도가니’(감독 황동혁) 개봉
“우리가 싸우는 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위해서예요.”-영화대사, 2005년 청각장애학교에서 실제 발생한 성폭력사건 다룬 동명소설(공지영 지음) 영화화, 온 국민을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음, 장애를 가진 제자들에게 성폭력과 학대 일삼은 어른들의 추악한 모습 고발, 장애시설에서 자행되는 인권침해와 비리 성범죄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등에 대한 경각심 일으켜 '도가니법'으로 불리는 '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제정됨, 개봉 첫날 12만여명의 관객 몰렸고, 개봉5일만에 100만, 10일 만에 200만, 13일 만에 300만, 20일 만에 400만 돌파, 총관객 466만명
2011년 ‘영어의 바이블’ 성문영어 저자, 송성문 별세
‘영어의 바이블’이자 대한민국 수많은 수험생의 필수서였던 ‘성문영어’의 저자 송성문(宋成文·80)씨가 22일 오후 4시 별세했다.
그가 1967년 3월에 처음 내놓은 성문영어(당시 정통종합영어)는 지금까지 총 1000만부 이상 팔렸다. 1970~ 80년대 중·고교생들의 영어 필독서였으며 지금도 학생들이 꾸준히 찾고 있다. 평북 정주(定州) 출신으로 본명은 송석문(宋錫文)이다. 그는 신의주교원대를 나왔으며 6·25 때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영어 중등·고등과정을 동시에 합격했다. 동아대를 졸업한 후 부산고와 마산고·서울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성문영어 시리즈는 한때 1년에 30만부 이상 팔렸으며, 서울대 등 주요대 입시문제에 책의 지문이 그대로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고인은 문화재 수집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가 모았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 중에는 국보(國寶)가 4건, 보물(寶物)이 22건이나 된다. 문화재 기증 공로로 2003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2003년 간암 판정을 받은 이후 8년간 투병해 왔다.
2003년 재독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37년 만에 고국땅 밟음
2001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타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81)이 심장병으로 2001년 9월 22일 뉴욕 코넬 의료센터에서 별세했다. 1년전 여름 심장판막 수술을 받은 스턴은 심장병이 재발, 뉴욕 병원에서 치료받아 왔다.
스턴은 1m65cm의 작은 키에 ‘음악의 지존’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에 앞서 음악교육자, 음악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연주장인 카네기홀 구출운동은 스턴의 ‘수퍼 파워’를 일군 대표적 사건으로, 1891년 뉴욕 맨해튼에 개관한 카네기홀이 부동산 개발업자한테 팔려 1955년 헐릴 위기를 맞자 스턴은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카네기홀 지키기에 나섰다. 그는 “카네기홀은 음악가들의 영감이 숨쉬는 문화유산”이라며 불도저가 버티고 선 홀 앞에서 항의집회를 주도, 홀을 되사는데 필요한 모금운동을 폈다. 결국 뉴욕시가 카네기홀을 매입했고, 홀이 새 출범하던 1960년부터 스턴은 카네기홀 회장을 맡아왔다. 스턴의 의지와 열정을 기려 카네기홀은 1997년 대연주장을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으로 명명했다.
스턴은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유대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생후 10개월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3살 때 데뷔했다. 음반만 100장 넘게 남겼으며, 특히 20세기 현대음악에 애착을 보여 번스타인·뒤티외 등의 작품을 다수 초연했다. 스턴은 카네기홀을 지켜낸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 종신 공헌상’(1987)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1992) 등을 수상했다.
1999년 대만 진도 7.9 지진 사망·실종 2,249명 재산피해 3조9천억원
1999년 미국 배우 조지 스코트 사망
전쟁영웅 ‘패튼 장군’을 연기해 1970년 아카데미 주연상에 선정된 미국 배우 조지 C 스코트(71세)가 1999년 9월 22일 로스앤젤레스 북서쪽 웨스트레이크 자택에서 숙환으로 숨졌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살인 분석’ ‘죄인’ ‘허슬러’로 연기력을 증명한 `가장 정력적인 연기자`이자, 기행을 일삼았던 영원한 할리우드 ‘왕따’ 스코트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살코기들의 행렬’이라고 비웃으며 1970년 상도 거부했다. 수상자로 호명될 때 그는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듬해 아서 밀러 작 ‘더 프라이스’로 받게된 에미상도 거절했을 만큼 상의 권위를 철저히 무시했다. 젊은 시절엔 술을 입에 달고 살아, 다섯번 코뼈가 부러졌고 그중 네 차례는 술김에 싸우다 다쳤다. 다른 감독 배우들과 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1927년 버지니아주 탄광촌에서 출생한 스코트는 디트로이트에서 자라 1945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4년 간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낮엔 매장 일을 하고 밤엔 술을 퍼 마셨다. 제대 후 기자가 되려고 미주리대에 입학했지만 연극단에 들면서 진로를 전향,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
1997년 기아자동차 화의 신청
1997년 김정일 당총비서직 승계
북한 지도자 金正日(55)이 9월21일 한 지방당회의에서 노동당 총비서직에 추대됨으로써 金日成사후 3년 이상 미뤄져온 노동당 총비서직 승계 절차가공식적으로 시작됐다. 홍콩에서 수신된 북한 중앙통신(KCNA)은 노동당 창건일을 앞두고 평안남도 평성에서 『우리 당과 인민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 동지를 우리 당 총비서로 추대하기 위해』 열린 당대표회에서 金正日에 대한 당총비서 추대 결정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고 보도했다. 이번 조치는 金正日이 지난 94년 金日成 사망 이후 승계하지 않고 있는 당총비서직과 국가주석직을 승계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으로 金正日의 공식적인 당총비서직 승계는 앞으로 소집될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종옥 부주석은 이날 대표회에서 『모든 당원과 인민들은 金正日 동지를 우리당과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이자 영민한 인물로 존경하고 지지해 왔다』면서 金正日을 당총비서로 임명하는 것은 『온국민의 일치된 여망이자 오랫동안 그의 옆에서 국가와당의 요직에서 일해왔던 우리 관리들의 흔들림없는 의지』라고 강조했다고 통신은 전했다. 金正日에 대한 당총비서 추대 결정서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자 『참석자들은 자신들의 진심어린 염원이 충족된데 대해 행복해하면서 모두 기립, 환호성을 올렸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金正日은 金日成 사망이후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으며 현재는 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1994년 뽀빠이 만화가 자겐도르프 사망
30여년동안 뽀빠이 연재만화를 그린 포레스트 버드 자겐도르프(79)가 1994년 9월 22일 플로리다주 사라소타 근처 한 작은 마을의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워싱턴주 웨나치에서 출생, 소년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한 자겐도르프는 고교시절 산타모니카 부두에서 낚시를 하다가 만화주인공 뽀빠이를 만들어 낸 만화가 엘지 시거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됐다. 자겐도르프는 시거와 함께 `스위피` `신병 유진` `깡패 앨리스`와 같은 멋진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내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1938년 시거가 사망한 후 킹사의 만화 편집차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 일간지와 일요판의 뽀빠이 만화를 맡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예술` (1955년) `뽀빠이 첫 50년` (1979년) 등 2권의 책도 저술했으며 시력악화로 일간지에 연재하던 만화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었으나 일요판 신문의 연재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1990년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 개막(~10월 7일)
제11회 북경아시안게임이 1990년 9월 22일 오후 5시 북경 공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다. 단결, 우의, 진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35개국 6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이날부터 10월 7일까지 16일간 경기를 벌였다.
북경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8개 회원국 중 이틀전 9월 20일 열린 OCA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상실한 이라크와 재정문제를 이유로 불출전을 통보해 온 요르단 예멘 등 3개국을 제외한 35개국이 출전, 1951년 뉴델리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많은 출전국을 기록했다.
이번 대회에선 육상, 축구 등 27개 정식종목과 야구, 연식정구 등 2개 시범종목에서 총 3백13개(시범종목 5개 포함)의 금메달을 놓고 각국 대표선수가 열전을 벌였다. 27개 종목 3백8개의 금메달을 걸고 싸운 이번 대회의 종합패권은 금 1백83개의 홈팀 중국에 돌아갔으며 한국이 54개로 2위, 일본과 북한은 38개, 12개로 각각 3-4위에 올랐다.
1986년 스톡홀름 협약 조인
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발생
1983년 공인중개사 시험 첫 실시
1982년 대처 영국 수상 중국 방문
1982년 한국, 서독과 재정협력협정 서명
1982년 국제의원연맹(IPU) 집행위원회, 83년도 연차총회 서울개최 의결
1981년 프랑스고속열차 TGB 첫운행, 파리-리용 480㎞를 시속260㎞로 2시간40분 만에 주파
1981년 과기처, 10억원 규모의 기능장려기금을 마련. 국제기능올림픽 입상자에 장려금 지급하기로
1981년 한국-코스타리카, 입국사증면제 합의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1980년 9월22일 이라크군이 이란을 전면 공격하며 이란-이란크 전쟁의 시작되었다 국경지역에 위치한 석유생산지역을 장악하려는 이라크의 야욕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이란과 이라크군은 상대방의 석유중심지를 집중 공격했고 세계 최대인 이란의 아바단 정유공장이 불타버렸다
이란의 3개 도시를 점령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이란에 휴전을 제안했지만 이란의 지도자 호메이니는 휴전제안을 거절하였다.
호메이니는 `이란은 끝까지 싸울 것이며 신의 가호 아래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전쟁의지를 불태웁니다.
전쟁 초기 승리를 계속하던 이라크군은 예상했던 것보다 휠씬 강한 이란군의 저항에 부딪쳐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1988년 경제악화와 군사력 열세를 느낀 이란이 유엔의 휴전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은 막을 내립니다.
1980년 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 취임
1977년 정부, 소비자보호 기본법안 마련
1976년 문교부 초등학교(현 초등학교) 한자교육 부활 않기로 결정
1975년 주민등록증 갱신 발급사무 시작
1975년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1971년 남북적십자 판문점에 상설 연락사무소 설치, 직통전화 개통
1969년 멕시코의 대통령(1958-64) 로페스 마테오스 사망
1966년 이병철 삼성그룹회장,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매스컴과 학원사업에서의 은퇴 발표
1966년 김두한, 국회에 오물투척
삼성그룹 계열사 한국비료가 건설자재를 가장해 2880만원 어치의 사카린 원료 오스타(OSTA) 60t을 밀수한 사실이 드러나 여론이 들끓 때였다.
더구나 밀수로 벌어들인 돈이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의혹까지 제기돼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던 1966년 9월22일.
다혈질의 열혈남아 김두한 의원이 국회 발언대 위에 섰다.
그러나 �나는 무식하기 때문에 주로 행동에 옮기기를 잘한다고 발언할 때도, 불의와 부정을 합리화시켜준 장관들을 심판하겠다며 마분지로 둘러싸인 상자를 들고 각료석으로 다가갈 때도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헤아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료석에는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 다수의 각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윽고 김두한이 이건 국민들이 주는 사카린이니 골고루 나눠먹어라고 고함을 지르며 느닷없이 상자안에 든 물통을 들어 각료석에 퍼부었다.
파고다공원에서 가져왔다는 똥물이었다.
김두한은 이틀뒤 국회의장(議場) 모독과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수감됐다.
한독당 내란 음모사건으로 갇혔다가 석방된지 9개월만이었고 횟수로는 45번째 철창행이었다.
김두한은 청산리전투로 잘 알려진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이자 우리가 예전에 보았던 영화 "장군의 아들"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정전
1965년 중앙일보 창간
1964년 프랑스, 신군비 5개년계획 발표
1964년 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1960년 민주당 구파, 분당 선언
1955년 충주비료공장 기공
1950년 미국 제트 전투기, F84 첫 대서양무착륙횡단 성공
1950년 9월 22일 미 공군의 리퍼블릭 F84 산타 제트전투기가 공중급유를 통한 최초의 대서양횡단에 성공했다. 이 실험의 성공으로 미 공군은 해외전투에 즉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데이비드 실링 대위와 윌리엄 리치 중위를 태운 2대의 F84 제트전투기에는 공중급유장치가 부착되어 있어 장거리 운행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첫 실험은 영국을 출발해, 뉴욕의 한 기지까지를 목표로 했다. 리치 중위가 탄 전투기는 공중급유를 시도하다 급유장치가 파괴되는 바람에 해상에 추락했다. 리치 중위는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실링 대위의 전투기는 연료탱크에 일부 고장이 일어난데다 악천후까지 더해져 예정된 기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다른 기지에 착륙함으로써 대서양 횡단 비행을 성공시켰다.
1949년 소련,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원폭실험 성공
1949년 국회, 반민특위 폐지법안 가결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ㆍ공포
1947년 일본-소련 무역협정 체결
1942년 미국의 고딕 복고양식의 건축가 랄프 아담 크램 사망
1941년 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37년 국민당, 중국의 국공합작 선언서를 공포
1922년 경기 황해 평안 강원 함경도 지방 홍수 사아 155명 가옥피해 22,000여호
1919년 조선미곡주식회사 설치령 공포
1914년 독일잠수함 영국 순양함 3척 공격 사망 400명
1914년 프랑스의 작가 알랭 푸르니에 사망
1911년 44세의 사이 영,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완봉
1911년 9월 22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44세 우완 투수 사이 영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1대0으로 완봉했다. 그해 파이어리츠에 거둔 두 번째 완봉승이었다. 브레이스는 그해 파이어리츠에 3승22패의 절대 열세였으나, 그는 3승 중 2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했다.
이날의 승리는 통산 511번째로, 그는 1890년 23세 때 메이저리그에 입문해 22년 동안 연평균 23.2승씩을 기록했고, 이러한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생애 통산 815게임 선발출장, 753게임 완투, 313패, 7356이닝 투구 등도 고스란히 미국 프로야구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다.
그의 본명은 `덴톤 트루 영`이었지만, 팬들은 사이클론(미 대륙을 덮치는 폭풍우)처럼 빠르면서 무시무시한 공을 던지는 그를 `사이 영`이라고 불렀다. 투수의 대명사가 된 사이 영은 193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55년 사망했다. 미국프로야구는 이듬해인 1956년, 그의 이름을 따서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 영` 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08년 영화감독 김유영 출생
1905년 시인 이산 김광섭 출생
1862년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링컨 미국 대통령이 앤티담 전투에서 북부군이 승기를 잡자 이튿날인 1862년 9월 22일 ‘노예해방 예비선언’을 발표했다. 이것은 연방에서 탈퇴한 남부의 여러 주가 연방에 복귀하지 않으면 노예해방을 선언하겠다는 경고였다. 자치주가 이에 응하지 않자, 링컨은 1863년 1월 1일 흑인노예의 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선언은 반란상태에 있는 여러 주의 노예를 전부 해방하며, 해방된 흑인은 폭력을 삼가고 적절한 임금으로 계속 일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 이외에도 흑인들의 연방 군대 입대를 허용하고 있었다.
이 노예해방선언은 내전에서의 전략적 의의도 지녔는데, 그것이 노린 것은 남부의 사기저하와 남부 여러주의 연방 조기복귀였다. 더욱이 흑인을 북군 병력에 흡수할 수 있게 됨으로 북군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됐다.
링컨이 "자신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면 바로 이 노예해방선언 때문일 것"이라고 했듯이, 후세의 역사도 그의 바램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은 인도적인 명분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단지 미 연방의 대통령으로서 미 연방을 수호한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전쟁을 결심했고, 선언을 발표했을 뿐이다. 노예해방은 단지 부수적인 산물이었을 뿐이었다.
노예해방의 실현은 북부의 산업 자본가와 남부의 대지주 사이의 경제적 이해대립이 전쟁으로 폭발한 뒤에야 형식적으로 이뤄진 셈이다.
1792년 프랑스 국민공회, 왕정 폐지하고 공화정 선포
1503년 피우스 3세 교황에 선출
66년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 네로(Nero)가 로마군대 아이 이탈리카 군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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