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산/김수열-
겨울산을 오른다는 건 나무가 되는 것
모든 겉치레를 벗어버린 나무가
그런 나무와 마주 서 있는 동안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나무가 되는 것
나무가 되어 나무의 마음을 엿듣는 것
가문 물소리에 대해
돌아오지 않는 새소리에 대해
임자 없는 무덤의 쓸쓸함에 대해
겨울산을 내린다는 건 바람이 되는 것
정처 없이 하늘을 떠돌던 바람이
곤한 몸을 지상에 내려놓는 동안
바람과 바람 사이에서 바람이 되는 것
바람이 되어 바람의 마음을 품는 것
서걱서걱 조릿대에 대해
풍화된 노루의 뼈에 대해
눈발을 숨긴 키 작은 구름에 대해
겨울산이 된다는 건
늙은 코끼리의 굽은 등이 되는 것
-물 위의 산/조영심-
내가 걸어 들어가는
이 산은 없는 산
물 위에 우뚝 솟은 산 없는 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네
맨땅 위 무딘 돌덩어리들 서로 어깨 층층이 떠받든 허공 한 덩어리, 아흔의 우공(愚公)이 발길 좁은 산길을 트자고 어림없
는 산을 밤새 옮겼던 지극함이여 사람이 어디 밥으로만 살겠냐 배고픈 밥그릇 들여다볼 줄 알고 내 몫의 한 술 덜 줄 알면
스스로 더 밝아지는 것 천 개의 천을 내어줄 천수관음의 손에 한 가지 바람을 얹어놓고 슬며시 돌아 나오는
외호(外濠) 속에 비친 미농지보다 더 얇은 꿈결 같은 산*
물오리 한 쌍 산 그림자 지우는
반도의 해질녘
툭툭 날개 털며 산 없는 산을
말없이 걸어 나오네
나 없는 내가 저기 서산에 얹혀 있네
* 중국 산동성 봉래시 삼성산.
-산이 나를 들게 한다/천양희-
높은 산은 오른다 하고
깊은 산은 든다고 하네
오른다는 말보다 든다는 말이 좋아
산에 든 지 이십 년이 넘었네
산은 오래 들어도 처음 든 것 같고
자주 든 길도 첫길 같은데
나는 나이 들어도 단풍 든 것 같지 않고
눈에 든 풍경도 절경이 아니네
높은 자리에 든 사람도
깊은 산에 든 것은 아닐 것이네
산에 들어 내가 감탄하는 것은
산에 든 눈먼 돌은 죄가 없다는 것
갈등 속에 든 사람들은 고통의 고리를 잡는다는 것
든다는 것과 오른다는 것이
산만의 일이 아니라서
바람 든 나무 밑에 엎드려 나는
오래 일어나지 않았네
-다시 산에 와서/나태주-
세상에 그 흔한 눈물
세상에 그 많은 이별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으로 다시 와
정정한 소나무 아래 터를 잡고
둥그런 무덤으로 누워
억새풀이나 기르며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앉아 있으리.
멧새며 소쩍새 같은 것들이 와서 울어주는 곳,
그들의 애인들꺼정 데불고 와서 지저귀는
햇볕이 천년을 느을 고르게 비추는 곳쯤에 와서
밤마다 내리는 이슬과 서리를 마다하지 않으리.
길길이 쌓이는 壯雪을 또한 탓하지 않으리.
내 이승에서 빚진 마음들을 모두 갚게 되는 날,
너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백발로 졸업하게 되는 날
갈꽃 핀 등성이 너머
네가 웃으며 내게 온다 해도
하낫도 마음 설레일 것 없고
하낫도 네게 들려줄 얘기 이제 내게 없으니
너를 안다고도
또 모른다고도
숫제 말하지 않으리.
그 세상에 흔한 이별이며 눈물,
그리고 밤마다 오는 불면들을
내 모두 졸업하게 되는 날,
산에 다시 와서
싱그런 나무들 옆에
또 한 그루 나무로 서서
하늘의 천둥이며 번개들을 이웃하여
떼강물로 울음 우는 벌레들의 밤을 싫다하지 않으리.
푸르디푸른 솔바람 소리나 외우고 있으리.
-겨울산 겨울산행/임영조-
눈 오다 그친 일요일
흰 방석 깔고 좌선하는 산(山)
아무리 불러도 내려오지 않으니
몸소 찾아갈 수밖에 딴 도리(道理) 없다
가까이 오를수록,산(山)은
그곳에 없다,다만
소요하는 은자(隱者)의 처소로 남아
오랜 침묵으로 품(品)을 세울 뿐
어깨는 좁고 엉덩이만 큰 보살
도량이 워낙 넓고 깊으니
나무들은 제멋대로 뿌리를 박고
별의별 짐승까지 다 받아주는
이승의 마지막 대자대비여!
뽀드득
뽀뜨득 잔설을 밟고
숨가쁘게 비탈길을 오르면
귀가 맑게 트이는 법열(法悅)이여!
잡목들이 받쳐든 푸른 하늘에
간간 수묵(水墨)을 치는 구름
눈짐 진 노송(老松)이 문득
잘마른 화두(話頭) 하나 던지듯
옜다! 솔방울을 떨군다
덤불 속에 멧새들이 화들짝 놀라
재잘재잘 산경(山經)을 잃는 소리
은유인지 풍자인지 아니면 해학인지
들어도 모를 난해시 같다
(좌우간 정상에 있을 때
몸조심하고,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 더욱 조심하도록)
귀뺨을 때리는 눈보라여!
단지 헝클어진 마음이나 빗으러
겨울산을 오르는 나는
리얼리스트인가?
로맨티스트인가?
그것이 알고 싶어 산에 오른다.
-산/정희성-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여 길이 없으면 또 어떠랴
생에 첫걸음 내딛듯 그냥 올라 볼일이다
칼바람 스치는 등성이에서
붙박이로 살아낸 겨울나목 만나거든
어설피 눈길 주어 고행을 막지마라
애린 삶이 빚어낸 은빛 결실이거니
지나는 길손 위한 소신공양이거니
길은 언제나 예행이 없었으니
오름길도 호기 좋게 달음박 놓다가도
낭떠러지 만나 오금저린 일 한두 번인가
누군가 내미는 따뜻한 손 기다리다가도
푯말을 찾아 무지의 발걸음을 옮겨야만
길이 열리는 것을
주저앉지 말아야 길이 열리는 것을
돌아보지 말라
뜨겁게 안겨 들 정상의 푯말을 생각하라
그리고 느껴보아라
가벼워진 등짐 훌쳐 메고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가난한 발걸음을
산 아래로
산 아래로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를
그것이 또 길을 나서야 하는 이유인 것을
그리고 나의 길은 계속되어야 함을
-산· 2/이문길-
해거름에 산 앞에 서 있으니
구구구 비둘기가 울며
들어오지 말랜다
나무들이 모여 서서 막아서고
그 뒤에 어둠이 지켜 서 있다
나는 산과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산이 나를 냉대하는 것 같아
슬프다
낙엽으로 만들어 놓은
커다란 무덤 같은 산
나는 저녁 산 앞에 말없이 서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불 하나 켜놓고 밖을 내다보니
무엇을 하는지
산도 산 위에 별들로 가득히
불 켜놓고 있었다
-산이 난다/함민복-
큰 새들의 날개는 산을 닮았다
기러기가 날아올 때 선(線)으로 된 산도 함께 날아온다
갈매기가 머리 위를 지날 때 면(面)으로 된 산도 지난다
산이 운다
울며 날아가는 산(山)아!
사람들이 서로 껴안을 때
사람들의 팔도 산모양인 것 너희들도 보았느냐
-산에서 헌법 제12조를 읽다/박칠근-
산에선 뒤엉킨 갈등조차
헌법 제12조처럼 술술 풀린다
나지막한 풀 한 포기도
키 큰 나무와 조화를 이루고
동떨어져 무관할 것 같은 먼 산도
어울려서 말쑥한 풍경이 된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도
헌법 제12조처럼 제 몫을 다 하는 큰 바위
홀로 서 있어도 소외되지 않는 소나무
누구든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이들을 수색 또는 심문할 수 없노라
능선 타며 흐르는 야릇한 빛
나는 비로소 신체의 자유를 느낀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여
휴식을 미룬 채 나를 바라보는 오리숲이여
내 어찌하여 오늘 하루도
옹졸하고 쪼잘하게 내 것을 베풀지 못하고
도둑고양이처럼 남의 행복을 탐했던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이 흘러간다
저토록 탐스러운 절경을 남긴 채, 헌법 제12조처럼.
-산을 오르며/주대생-
산을 오르다.
대한민국 어느 골짜기
아름답지 않을까마는
대둔산 언저리
이름모를 나무들이
봄의 이름값 한다고
굽이굽이 파릇파릇.
나도 덩달아 벌렁벌렁.
통일된 색깔의 장관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자기의 멋짐을 뽐내는
초록 생명들,
모이고 모여
온 산을 뒤덮었다.
몸속에 소우주가 있고
못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만물의 영장,
산꼭대기는 두어 걸음으로 족하다.
자만심이 뻗치고 뻗쳐,
만면 웃음이 가득한 산행.
눅눅치 않은 방어로
자연의 기상을 보이는 대둔산,
삶의 때가 땀구멍으로
쉼 없이 분출된다.
결국 태초의 자세로
그 앞에 오체투지한다.
대둔산,
초입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모습에 전의를 불태우고,
정상에서 맛보는
치열한 아름다움에 잠시 동안
세상을 놓는다.
-먼산 아래/김수영-
멀리 능선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한 몇년 정든 사람과 살고 싶지, 바람이 많은 그곳에서 염소 몇마리
구름이나 뜯게 하고, 한번씩 산꼭대기로 올라가 고사목 그루터기를 파서 꿀단지개미들을 건드려도 보고,
깊은 골짜기에 달 그림자 고이면 천둥벌거숭이로 누워 꿈을 꾸고 싶지, 가을이 다 갈 무렵 허물어진 무덤
곁을 지나다 들꽃다발도 놓고, 울새나 휘파람새가 쪼다 남긴 마가목 열매로 겨우내 차를 끓여야지, 벌 치
는 사람이 살다 간 토담집 언저리 토담 속엔 아직도 장수말벌들이 꿀을 따고 있을지도 몰라, 그곳에서 밭
을 일구어 배추와 옥수수를 심고, 해마다 울밑에 해바라기 접시꽃도 가꾸고 싶지
-내 안에서 크는 산/이해인-
좋아하면 할 수록
산은 조금씩 더
내 안에서 크고 있다
엄마 한번 불러 보고
하느님 한번 불러 보고
친구의 이름도 더러 부르면서
산에 오르는 날이 많아질 수록
나는 조금씩
산을 닮아 가는 것일까?
하늘과 바다를 가까이 두고
산처럼 높이
솟아 오르고 싶은 걸 보면
산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그냥 마음이 넉넉하고
늘 기쁜 걸 보면
-큰 산/경대호-
지난밤
숫자를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다
대차대조표에 쫓겨 도망치는 나를
진땀 흘리며 쳐다본다
큰 산 하나 조용히
내 잠 속으로 걸어와
꽃과 바람을 주었다
흰 눈과 영롱한 햇살을 주었다
단호한 고요로
담백하게 그냥, 서 있기만 한
어머니가,
조용히 웃고 계셨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