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동안 합천에 다녀 왔습니다.
제가 둘러 본 곳은 해인사 - 대장경테마파크 - 월광사지 동ㆍ서 삼층석탑 - 화양리 소나무 - 합천원폭자료전시실 - 황매산군립공원 - 영암사 터 - 뇌룡정 - 용암서원 - 남명 조식 생가 터 - 삼가고분군 - 대동사 터 - 대암산 정상 - 죽죽비- 대야성 안내판 - 함벽루 - 합천박물관 - 옥전고분군 - 청량사 입니다.
짧은 답사 후기를 두 번에 나누어서 소개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 팔만대장경과 소금
가야산은 북방민족의 침입으로부터 어느 정도 안전한 곳이다. 한반도의 남쪽이라서 거란ㆍ몽골이 쳐들어오더라도 거리가 멀다. 또한 남쪽의 왜구들이 침입해도 보호받을 수 있는 위치다. 왜구들이 남해안에 배를 대놓고 육로로 한참을 걸어와야만 도달할 수 있는 데다가, 산세가 험해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지형도 아니다.
가야산 해인사는 남북의 외적을 방어하기에 좋은 위치이기는 하지만 한가지 취약점이 있다. 바로 화재였다. 목판 대장경은 화재에 약하다. 불이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팔만대장경 보관에서 가장 신경 썼던 점은 화재 예방이었다고 생각된다. 불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실제로 해인사에서는 일곱번의 화재가 발생했다. 조선시대 순조 때에는 해인사에 불이 나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모두 불타버렸다. 대적광전 바로 뒤에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한 장경각이 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만약 불똥이 튀어 장경각으로 날아갔다면 팔만대장경은 재가 됐을 수도 있었다.
이때 불타버린 해인사 대적광전을 복원한 인물이 추사 김정희의 아버지인 김노경(金魯敬)이었다. 당시 김노경은 경상관찰사로 있었다. 복원불사 비용의 3분의 1은 본인 돈으로 부담하고, 3분의 1은 경상감영에서 나온 돈이었고, 마지막 3분의 1은 해인사의 돈으로 감당했다고 전해진다.
해인사에서 취한 화재 예방의 비책은 풍수비보(風水裨補)였다. 우선 해인사 앞산 이름을 매화산(埋火山)으로 정했다. ‘불을 묻어 놓은 산’이라는 뜻이다. 이 매화산은 뾰족뾰족하게 생겨서 불꽃 형상이다. 기도발 받는 데는 좋지만 화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 다음은 절 군데군데 소금을 묻는 방법이었다. 소금은 바닷물이 뭉쳐서 생긴 진액이다. 이 소금을 묻으면 바닷물을 갖다 놓은 셈이다.
대적광전 앞의 돌로 된 축대 위에 구멍을 두 군데 파고 여기에다 소금을 넣었다. 율원(律院) 앞의 바위 속에도 구멍을 한 군데 파고 소금을 넣어뒀다. 해인총림(海印叢林) 현판 앞 오른쪽 방향의 바위에도 두 군데 구멍을 파서 소금을 넣었다. 그 옆의 스님들이 거처하는 건물 정원에도 소금을 넣어둔 바위구멍이 두 군데 있다. 소금구멍의 지름은 대략 10㎝, 깊이는 20㎝ 정도 된다.
그리고 매년 음력 5월5일 단옷날에는 스님들이 매화산에 가서 정상 부근에다가 소금단지 6개를 묻고 오는 행사를 치른다. 단옷날에 하는 이유는 화기가 가장 강한 날이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는 비책은 바로 소금이었던 것이다.
출처 https://m.nongmin.com/299500
■ 합천군 가회면장의 적덕(積德)
경남 합천군에 가회면(佳會面)이 있다. 옛날 같으면 아주 심심산골에 해당한다. 이 동네에 암파(岩波) 허임상(許壬相·1912~1958)이라는 면장 이야기가 자자하다. 6ㆍ25 당시에 가회면장을 하고 있었는데, 좌익 성향을 지녔다고 판단되는 보도연맹(保導聯盟) 관련자 200여명이 총살될 위기에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 책임자가 가회국민학교 운동장에 200여명을 집합시킨 다음에 산골짜기로 끌고 가서 총으로 쏠 예정이었다. '골[谷]로 간다'는 말도 아마 이 무렵에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가회면장을 맡고 있었던 허임상은 잘 아는 지서장 조정수와 함께 ‘이 사람들 죽이면 안 된다’고 통사정을 하였다. 특히 허임상은 ‘나를 먼저 총으로 쏜 다음에 이 사람들 죽여라’ 하고 자기 가슴을 먼저 내밀었다. 가회면 터줏대감이자 유지였던 허임상 면장이 자기 목숨을 내놓고 막아서니까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 책임자도 할 수 없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200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허임상은 공덕이 또 있다. 일제 때인 1933년에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을 일본 도굴꾼들이 훔쳐 가고 있었다. 장대주막에서 석등 끌고 가는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허임상은 장정 몇 명을 모아 추격하였다. 40리 떨어진 의령군 대의까지 쫓아가 일본 도굴꾼들을 위협하여 이 쌍사자석등을 되찾아 왔다. 허임상이 21세 때 일이었다.
▲ 영암사 터 쌍사자석등
출처
https://v.daum.net/v/20190408031426062
■ 합천 영암사 터
▲ 합천 영암사 터
▲ 합천 영암사 터
▲ 1984년 첫 발굴조사 때의 영암사 터 모습. 금당터를 발굴하는 장면이며 그 앞으로 보이는 삼층석탑 좌우에 주민들이 폐사지를 지키려고 세운 집 2채가 보인다. 현재는 모두 철거하고 부지 정리한 상태이다. (동아대학교 발굴사진)/ 사진출처=동아대학교
▲ 그러나 1984년 동아대학교 발굴 시작전 모습을 담은 사진에는 쌍사자석등이 축대아래 석탑과 같은 지면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제자리가 맞는지 궁금하다. (동아대학교 발굴사진)/ 사진출처=동아대학교
-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소리는 언제나 장면과 함께 다가온다. 그렇기에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아무 소리를 내놓지 않음은 때로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구태여 그 소리 없음을 되짚어 찾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나에게 합천의 영암사 터(靈巖寺址)가 그랬다. 그 곳에는 내 그리운 소리가 있다. 비록 한 번도 듣지 못했을지언정 난 언제나 그가 그립다. 지금껏 수십차례,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되뇌며 그에게로 갔지만 그는 다만 적요寂寥의 모습만 보여 줄 뿐, 단 한 차례도 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무작정 그립다.
많은 사람들이 영암사 터를 두고 쌍사자 석등 하나만 봐도 좋을 곳이라고 하지만 나의 영암사 터에서는 석등의 미술사는 크지 않다. 다만 갈기와 뒤 발톱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해 놓은 석등의 사자와 하대에 새겨진 서수瑞獸들의 포효, 그리고 금당 자리의 면석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돈을새김으로 새겨 놓은 사자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싶을 뿐이다.
사자가 사는 곳이 어디던가. 그 곳은 전단목栴檀木 울창한 숲이 아니던가. 맑고 밝아 다른 나무들이 더불어 살지 못한다는 숲, 사자들은 그 숲 가장 깊은 곳에 산다. 설산에 흰 소가 사는 곳은 또 어디던가. 그 곳은 비니초肥膩草 우거진 들판이 아니던가. 곱고 부드러운 비니초가 자라는 들판에는다른 여느 풀들이 함께 자라지 못하는 법. 그토록 아름다운 그곳은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진여자성眞如自性의 숲이며 들판을 일컫는다. 그러니 전단나무 숲의 사자와 비니초를 먹고 자란 흰 소는 이미 깨달음을 이루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리워하는 소리는 그들이 깨달음의 자리에서 상독행 상독보常獨行常獨步하며 내놓는 소리이다. 사자들의 우렁찬 나일할那一喝 한 번이면 나에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번뇌와 망상을 털어 낼 수 있으련만, 그는 넌지시 바라보기만 할 뿐 포효하지 않는다. 그는 기어코 나를 그냥 내버려 둘 참이었던 것이다.
오늘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이른 아침 햇살에 한올 한올의 갈기와 튼실한 허벅지의 근육까지도 남김없이 드러내 놓고는 딴전이다. 눈을 감고 대여섯 종류의 새 소리를 구분해 낼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흘렀을 무렵 퍼뜩 생각이 스쳤다. 영암사 터의 사자가 거기 있는 까닭은 깨달음이란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겨 깨우쳐 주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깨달음이란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이 저 홀로 힘겹게 구해야 하는 것 아니던가. 모든 존재로부터의 외면을 견디고 이윽고 그들을 포함해 내는 것이 그것이리라.
사자의 포효를 들으려는 것은 아직 나에게 버거운 일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욕심 버린 두 눈 부릅뜬 채 멈추지 않고 꿋꿋이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그 곳은 먼 곳이 아니리니 내 발길 머문 곳이면 족하리라. 내가 머문 그 곳이 이미 담연湛然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사자는 나에게 미소지어 보이지 않겠는가. 노자는 말한다.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실패하고 지키려고 하면 오히려 잃는다(爲之者敗之 執之者失之)"고 말이다. 그저 덤덤해야 하리라. 그는 다시 말한다. "깨달은 사람은 만물이 스스로 본성에 순응하려 함을 도와 줄 뿐 의도적으로 행하지 않는다(是以能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고 말이다. 영암사 터의 사자 또한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비록 그가 할喝을 베풀지 않더라도 그저 존재의 위대함이리니 그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안다. 그 적막한 허공 속에 부처님 말씀이 새겨져 있고 나의 자성自性 또한 머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만 내가 듣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로 가는 길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그 길에서 지쳐 헤맬 때마다 마음을 다잡기에 이만한 곳 또 있을까. 어느덧 산 그림자가 금당 자리를 덮고 있었다. 그만 일어섰다. 그러나 등 돌리면 이내 그가 다시 그립다.
출처
1.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지누, 2007
2. https://senior.chosun.com/site/data/html_dir/2021/07/09/2021070980059.html
■ 합천 대동사 터
▲ 합천 대동사 터
느티나무에게 부처님 가신 곳을 묻다
절터로의 만행萬行이 거듭될수록 행동은 하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그것은 어쩌면 나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극명하게 나의 실체와 한계를 동시에 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때로 그렇게 만난 나 자신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라도 만나고 나니 홀가분하기도 했다. 그로써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것은 이제야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며 바위나 나무를 온전하게 그것으로 보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며 하찮은 고민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그리도 어려웠다. 그런 눈을 가지기 위하여 그 동안 나에게 씌워져 있던 그 무엇들을 덜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버려도, 버려도 남아 있던 그것은 꾸밈이며 가식이었다. 나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못하니 부족한 자신을 가리려고 자꾸만 덧씌우던 그것 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눈앞을 가리는 만큼 나의 뒤는 더 크게 뚫리고 말았으니 깊이가 생기기는커녕 종잇장처럼 얇아지기만 했던 것이다. 또 눈에는 이끼가 끼고 마음에는 모래가 쌓여 사실을 사실로 보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있는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본다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미처 몰랐다. 노자는 '위무위爲無爲' 편에서 말하기를 "깨달은 사람은 어려운 일을 어려운 일로 보기 때문에 마침내는 어려운 일이 없다(是以聖人有難之 故終亡難)"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어려운 일을 어렵게 본다는 것은 있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여 그 사실로만 대한다는 것이다. 또 쉬운 일은 쉬운 일로 보며 대할 것이니 그에 따른 대비는 언제나 분명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모든 일들이 그저 일일 뿐 어렵거나 쉽다는 것이 수식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져 버리는 셈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 어떤 부풀림이나 꾸밈도 사라진 무위無爲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쉬울 뿐 그런 눈을 가지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속에서 온갖 꾸밈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고 더구나 그 용기를 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이지누, 2010
■ 합천 초계ㆍ적중 분지
▲ 합천 대암산 정상에서 바라본 합천 초계면ㆍ적중면 분지 모습.
합천 초계면ㆍ적중면의 일부는 분지형태인데, 이곳의 분지 지형은 약 5만 년 전 우주에서 떨어진 거대한 운석隕石의 충돌로 형성된 것이란 연구 결과가 2020년 12월에 발표되었다.
직경 200m 크기의 운석으로 추측되는데, 충돌시 충격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수만 배로 추산하고 있다. 땅에 부딪치는 순간 그 압도적인 운동 에너지로 인해서 거대 운석은 한순간에 증기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지표면에는 지진과 같은 충격과 엄청난 소리가 느껴졌을 것이고, 수천 도의 거대한 열폭풍이 발생하여 인근의 생명체들을 초토화했을 것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운석 충돌이 인정된 곳은 전 세계 200여 개인데 동아시아에서는 이곳 합천이 두 번째다.
그런데 적중면 출신의 의사였던 임판규님이 '이 분지가 왜 생겼을까?'라는 궁금증을 품고 운석 충돌의 가능성에 대해 연구해 왔다고 한다. 그것이 2020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그럼 운석 충돌의 결정적 증거는 무엇이었을까?
운석 충돌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가 필요한데, 그 중 하나는 충격 각력암입이다. 충격 각력암은 엄청난 에너지가 땅에 가해지는 바람에 각진 돌의 파편이 섞여서 그대로 굳은 암석인데 사실 기존의 단층설에 의해서도 각력암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두 개의 단층이 움직이면 짓눌리고 마찰하는 면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며, 이 에너지를 통해서도 각력암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운석 충돌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하다.
▲ 운석 충돌의 엄청난 에너지로 만들어진 충격 각력암. 하단에 놓인 것은 각 변의 길이가 1cm인 스케일 큐브다. ⓒ『보보담步步譚』
섀터콘, 운석 충돌의 결정적인 증거
결정적인 증거는 분지 지하 130미터에서 나온 '충격원뿔암', 혹은 '섀터콘(shatter cone)'이라고 부르는 돌이다. 이 돌은 거대 운석 충돌구 바닥에서만 아주 드물게 발견된다. 자세히 보면, 이 섀터 콘의 무늬는 꼬깔 형태에 가깝다. 즉 운석이 낙하해서 지면에 충돌한 아주 작은 지점의 엄청난 충격 에너지가 방사형으로 땅 속에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 섀터 콘을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운동 에너지는 지구내부에는 없다. 즉 암석을 이렇게 변형시킬 정도의 에너지를 지닌 자연 현상은 운석 충돌 말고는 없단다. 이 섀터콘이 결정적인 증거다
▲ 초계분지 지하 130미터 깊이에서 시추한 섀터콘(shatter cone), 『보보담步步譚』ⓒ 김경태
출처
1. 『보보담步步譚』, 2020 여름, 통권 45호
2. 『당신이 모르는 그곳, 합천』, 2021
■ 합천 원폭자료관과 전시실
▲ 합천에 있는 원폭자료관과 전시실
합천에는 원폭자료관과 전시실이 있다. 합천에 왜 이런 전시실이 있을까?
원자폭탄 투하
▲ 1945.8.6 히로시마, 1945.8.9 나가사키 원폭 투하. ⓒ 합천 원폭전시실
- 투하 목표의 검토
1945년 4월 27일, 일본 원자폭탄 투하 목표의 검토 대상으로 17개 지역이 선정되었다. 그 후 핵폭풍 등으로 효과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는지 등의 조건에 따라 목표의 후보지가 좁혀져 원폭의 효과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목표 도시들이 정해지고 그 도시들에 대한 일반공습은 금지되었다.
▲ 원자폭탄 투하 목표로 검토된 17개 지역. 야마구치, 구레, 시모노세키, 히로시마, 고쿠라, 사세보, 야하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고베, 교토, 나고야, 구마모토, 도쿄 만, 요코하마, 가와사키. ⓒ 합천 원폭전시실.
- 투하 목표 선정의 추이
▲ 투하 목표 선정의 추이. ⓒ 합천 원폭전시실
5월 11일: 교토, 히로시마, 요코하마, 고쿠라를 선정
6월 14일: 고쿠라, 히로시마, 니가타를 선정
7월 25일: 8월 3일 이후 히로시마, 고쿠라, 니키타,
나가사키의 어느 쪽이든 신속히 원폭을
투하하라는 명령
8월 2일: 8월6일에 투하하는 명령의 우선 순위는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
8월 8일: 8월 9일에 투하하는 명령의 우선 순위는 고쿠라,
나가사키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 히로시마
히로시마는 목표 도시 중 유일하게 연합군의 포로 수용소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제 1공격 목표가 되었다. '리틀보이(little boy, ,우라늄 235)'로 불리던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는 8월 6일 히로시마, 고쿠라, 나가사키를 향하던 기상 관측기에서 히로시마의 날씨가 양호하다고 하여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게 되었다.
- 나가사키
'팻맨(fat man, 플루토늄 239)'이라고 불리던 원자폭탸을 실은 폭격기는 8월 9일 제 1공격 목표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지만, 고쿠라 상공은 시야가 나빴기 때문에 제 2목표 나가사키로 향하게 되었다. 나가사키의 상공도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구름 사이로 시가지가 보여서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보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이 몇 배나 되는 위력이었지만 완전 평지인 히로시마와 달리 산지로 둘러싸인 나가사키는 발생하는 고열과 폭풍이 산과 계곡에 가로막혀 멀리 확산되지는 않았다. ⓒ 합천 원폭전시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비행경로. ⓒ 합천 원폭전시실
- 한국 원자폭탄 피해자 현황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에 의한 인명 피해자는 74만 명이 발생했다. 그중 약 10% 해당되는 10만 명이 한국원폭피해자이며 합천사람의 피해자는 한국인 전체의 70~80%였다. 합천인들은 대일항전기(일제강점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군사기지 요새지역인 히로시마에 강제 배치 되어 혹독한 고생을 하던 중 원폭피해를 입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질 때 조선인이 약 6만 명 가량 있었는데 그 중에 합천 출신이 약 5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생존한 분들이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현재 2세ㆍ3세에서도 원폭 피해가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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