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기념일
내일이 4.19혁명 기념일인데 대학은 시험기간이고 너도나도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지
아무도 4.19혁명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 보입니다.
하긴...그 끔찍한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고 하니...
아득한 옛날...호랑이가 담배피고 술주정도 하던 시절인
1960년 3월 15일..
당시에 대통령과 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당시 선거에서 수 많은 공무원들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되고 한마디로 부정선거의 극치를 달리는 선거가 있었죠.
개표도 4사5입이 되는 말도 안되는 짓을 하고
이전의 선거에서는 경찰의 개입해서 후보자등록·선전활동·
투표과정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3월 선거에서는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투표 총계를 조작하고 날조하는 어이없는 일이 생긴거죠.
1956년 선거 직전에는 신익희씨가 죽음을 당하고, 1960년 선거에서는 많은
국민들이 떠받들고 지지하던 당시의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선생이 죽음었기에 국민들은 다시금 대 실망에 빠졌습니다.
조병옥선생은 선거에서 가장 강력한 이승만의 대항세력이었는데
그가 죽었으므로 이승만의 재선은 거의 확실시되었고 결국은
당시에 현직 부통령이었던 장면과 이승만이 밀어주는 후보자인
이기붕이 맞붙은 부통령 경합이 보다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구조와 정치의식계층, 특히 학생들의 가치관 사이에 크고 명백한 균열이
있었던 것이 1960년 당시 한국의 정치상황이었는데
4.19혁명은 이승만과 그의 지지세력에 대항하는 반정부세력에 의한 혁명적 시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불행하게도 시위학생들과 시위군중들이 스스로의 조직화된 혁명적인
지도력을 지니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온갖 조직들이 날뛰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죠.
결국 조직화된 지도력이 없는 상태에서 학생은 다시금 학교로 돌아가고,
4.19혁명의 결과도 당시로서는 힘없는 정치세력인 민주당이 가져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지도력의 부재가 이승만의 조속한 사임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인해서 피까지 흘린 혁명은 이승만 정권의 붕괴만을 가져오고
진정한 혁명을 완성시키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1년후에는 박정희소장이 이끄는 5.16혁명(오늘날은 구데타라고 하지만...)의
빌미가 되기도 했습니다.
419 기념탑과 4.19국립묘지에는 당시 희생한 영령들이 잠들고 있는데
이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습니다.
.19혁명 진행과정
(1) 제 1차 마산봉기(3월 15일)
3월 15일의 마산 학생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날 민주당에서는 선거를 포기한다는 선언이 나왔고,
오후 3시에는 수천 명의 시민,학생이 '협잡선거물리치자'며 시위에 돌입, 괴한들로부터
곤봉세례를 받으며 투석전을 전개하여 마침내 제1차 마산봉기 의 화약고가 터졌다.
(2) 제 2차 마산봉기(4월 11일)
제1차 사건 때 행방 불명되었던 마산상고생 김주열 군의 무참히 학살된 시체가 때마침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걸려 나왔을 때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극도에 달했다.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학살 경관 처단', '재선거','살인범 처단' 등을 외치며 자못 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3) 고대생 피습 사건(4월 18일)
18일 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질서 정연한 시위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종로 4가에서 5.60명의 괴한으로부터 기습을 받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민심은 완전히 정부로부터 돌아서고 말았다.
(4) 경무대 진출, 계엄령선포( 4월 19일)
19일 수천 명의 학생,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
이승만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연좌 시위를 하자, 하오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하오 4시에는 부산· 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오 5시에는 비상 계엄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의 발포로 시작된 충돌로
183명의 사망자와 6,259명의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5) 이승만대통령 하야(4월 26일)
25일 하오 5시 45분 전국 27개 대학의 교수 300여명은
"4.19에 쓰러져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계엄하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평화적 시위를 감행, 시가를 행진하였다.
교수단의 시위는 이제까지의 학생시위에 이은 정부의 마지막 단안을 촉구하는 데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26일 상오 10시 이대통령은 비로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 12년의 장기 집권이 이제 막을 내린 것이다.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고 혁명은 성취된 것이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