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우유를 마시는 소녀
http://cafe.daum.net/suttlebus
(불펌 절대 금지)
타인을 알아 가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고 한다. 때문에 강호는 때때로 친구들이 자신이 쓴 소설을 읽으며 과연 너 다운 작품이야, 혹은 이건 좀 너 답지 않아 라는 말을 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들이 내가 쓴 소설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얼마나 알기에 그런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타인을 알아 가는 데 평생이 걸리는 것이라면 그들은 아직 나에 대해 70분의 1도 모르는 상태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강호 자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오직 조물주만이 알고있을 그런 것에 대해서도 마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곧잘 떠들어댔다. 며칠 전 체육시간에 있었던 일도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오- 강호, 축구공에 한 대 맞은 것 때문에 계집애들처럼 토라진 거야, 너답지 않게 소심하긴. 그 말은 고강호라는 열 일곱 살 소년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 공정성에 얼마만큼 자신할 수 있는 말인가. 날아오는 공에 얼굴을 맞아 코피를 잠깐 흘렸던 것과 발빠른 공격수를 집중 마크하느라 숨이 차서 교대를 신청한 것을 뺀다면 고강호가 사실은 대범한 아이인데 사소한 일로 계집애들처럼 토라진 소심한 아이가 되었다는 것에 보편 타당한 근거로 그들은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설마 그 두 장면이 근거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독선과 아집으로 똘똘 뭉친 무지한 몽상가임에 틀림없다.
"너희들 그 소문 들었냐?"
쥐방울이라는 별명을 가진 만수는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을 가진 날렵한 아이였다. 그는 늘 학교 내 떠도는 크고 작은 소문들을 발빠르게 전달해서 포스트맨(우편집배원)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소문들의 반은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고 나머지 반은 그가 90퍼센트 정도 부풀린 것이었다. 때문에 강호는 포스트맨을 신뢰하지 않았고 그가 제멋대로 퍼뜨리는 소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었다. 뒷자리에서 공포소설을 구상하며 만수의 얘기를 무시하고자 했지만 워낙에 목소리가 큰 만수의 얘기를 강호는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건가!
"가희 있잖아, 이가희. 왜 세 달 전에 자살한 애 말야."
그건 사실이었다. 이가희는 일 학년 전체 여학생들 중에서 톱 세븐 안에 들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타고나길 억대 성형수술의 결과와 맞먹는 미모로 태어난다는 것은 백 명의 공무원이 백 년간 벌어야 만질 수 있는 금액을 한 장의 복권으로 만져버리는 것과 맞먹는 신의 축복일 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축복이 올가미가 되어 그녀로 하여금 십 칠 년밖에 그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해버렸다. 표면적으로 그녀의 자살은 삼각관계라는 진부한 문제에서 비롯된 악소문 때문이었지만 정말로 자살한 이유 같은 것은 죽은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일 테다.
"글쎄 그 애를 봤다는 애가 있대!"
그쯤에서 강호는 헛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는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였다. 그가 공포소설 구상 노트를 손에 들고 교실을 나가는 동안에도 포스트맨은 쉴새없이 떠들어댔다. 그러니까 며칠 전 저녁 여덟 시에서 아홉 시 사이였는데, 늦게까지 남아서 공부를 하던 일 학년 한 명이 커피를 마시러 자판기가 있는 곳으로 갔대. 그 애가 복도에 서서 커피를 뽑아들고 한 모금 마시려는데 발자국 소리가 저벅 저벅 들리더래. 복도 양쪽을 확인해보니 불꺼진 복도가 너무 컴컴해서 아무 것도 안 보였대. 그 애는 잘못 들었겠지 생각하고 교실로 돌아오려는데 뒤에서 또 발자국 소리가 저벅 저벅 들리더라는 거야.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뒤를 돌아보니 복도 저 끝에서, 그러니까 화장실, 그 애가 죽은 화장실, 그 화장실에서 누군가가 어기적어기적 나오고 있더래. 그 얼굴은 틀림없이 이가희였대. 눈알이 하얗게 뒤집혀진…… 입과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는…….
어쩌고저쩌고…….
강호는 교실을 나와 연못가가 있는 학교 뒤편으로 갔다. 연못가 주변에는 십분 밖에 남지 않은 점심 시간의 끝자락을 즐기는 아이들로 분주했다. 그 중에는 남녀 커플도 있었고 남녀 쌍쌍 커플도 있었다. 그들은 매점에서 파는 과자류 한 봉지씩을 들고는 사이좋게 나눠먹으며 꿀맛 같은 여유를 즐겼다. 강호의 시선은 그 아이들을 지나 어딘 가로 향했다. 연못가 옆에는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오솔길이 있었고 오솔길 끝에는 벤치가 있었다. 강호는 그 벤치를 유심히 살폈다. 오늘은 그 애가 보이지 않았다. 긴 머리카락에 분홍색 나비 리본을 하고 다니는 키가 몹시 큰 여자애.
그 애는 늘 딸기우유를 마시는 소녀였다. 강호가 그 소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나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사는 태준이라는 친구 때문이었다. 태준은 마르고 안경을 쓴 아이였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몇 몇 친구들과 함께 틈만 나면 컴퓨터 게임 얘기만 하는 게임 광이었다. 컴퓨터 게임에 별다른 관심을 느끼지 못하는 강호로선 태준과 그 무리들이 내뱉는 말들이 낯설고 재미없어 그들을 멀리하는 편이었다. 어느 날 일찍 등교를 한 강호는 교실에 태준밖에 없음을 알고는 그에게 다가가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태준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태준은 심각하게 '귀신같은 애'를 보았다고 말했다. 강호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태준은 손가락을 어딘 가로 가리켰다. 옆 반에 가봐, 태준이 말했다. 그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강호는 그를 겁에 질리게 한 현실을 확인하고자 옆 교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의 복도는 새벽의 여운을 아직 간직한 채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강호는 옆 교실의 열린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교실은 텅 비어 있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그제야 그는 태준이 무엇에 겁을 먹었는지 그 대상을 막연히 짐작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냥 평범하게 보이는 책상과 칠판에서 그가 혼자 겁을 집어먹었을 수도 있고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을 무슨 수로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돌아와 태준에게 자세한 것을 물었다. 그러자 태준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딸기우유…… 딸기우유를 마시는 여학생이 없었니?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태준은 전학을 갔고 전학을 가기 이틀 전 저녁에 강호를 방문했었다. 태준은 강호에게 작별의 선물로 자신이 아끼던 컴퓨터 게임 CD 몇 장을 건네주었고 그와 함께 한 보따리의 미스터리도 안겨 주었다.
"딸기우유를 마시는 여학생, 그 애는 귀신임에 틀림없어."
그렇게 말하는 태준의 얼굴이 창백한 유령의 모습 같아 강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태준은 요 며칠 동안 자신이 경험한 악몽담을 강호에게 전해주었고 그 시작은 바로 그날 아침 이른 등교였다. 모처럼 일찍 등교한 태준은 교문 앞에서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그 때 시간이 여섯 시였다. 하늘은 연회색으로 밝아오고 있었지만 아직 학교는 캄캄했다. 넓은 운동장은 공동묘지처럼 음습했고 건물 내부는 거대한 납골당처럼 기분 나빴다. 텅 빈 교실들이 늘어선 복도를 지나 자신의 교실로 들어온 태준은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복도에 누군가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애는 지금 막 자신이 지나온 방향에 서 있었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전 태준은 교실들이 모두 비어있음을 확인하며 그 복도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교실 구석자리에 있는 애를 네가 미처 발견 못했을 수도 있잖아. 강호가 이의를 제기하자 태준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사람이 본능이란 게 있고 육감이란 게 있잖아. 어떤 미세한 인기척조차 없었다는 것에 내 전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굳이 현실 가능한 설명을 대자면 그 애가 일부러 책상 밑이나 교탁 밑에 납작하게 엎드려 숨을 죽이고 숨어있었던 거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런 일이 얼마나 비상식적인 일인지를 강호에게 강조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 애는 그냥 갑자기 나타난 게 분명한 거야!"
아무튼 태준이 갑자기 나타난 그 애를 기이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애는 태준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태준은 그녀가 들어간 교실 안을 열린 창으로 넌지시 관찰했다. 그 애는 교실 뒷자리에 앉아 책가방을 뒤졌다. 불을 켜지 않아 컴컴한 그 애의 교실은 거대한 관속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 애는 관속의 움직이는 시체처럼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책가방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그것은 우유였다. 우유팩의 겉 디자인으로 볼 때 그 우유는 딸기우유임이 분명했다. 딸기우유 특유의 붉은 색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준이 그 딸기우유를 보고 놀란 것은 우유가 1리터 짜리였기 때문이었다.
"강호야, 너 1리터 짜리 딸기우유 본 적 있어?"
강호는 딸기우유에 관한 자신의 십 칠 년 기억을 들추어보았다. 과연 1리터 짜리 딸기우유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런 건 세상에 없는 거야!"
"하지만……."
강호는 급히 떠오른 가능성 하나를 제기했다. 외제라면 그런 것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태준은 그건 아니라고 했다. 태준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다시 그 교실 옆을 지날 때 교실은 비어 있었다. 창문으로 안을 꼼꼼히 확인해보았지만 그 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곳을 간 모양이었다. 남의 물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태준이었지만 그 특이한 딸기우유만은 확인하고 싶었다. 태준은 교실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그 애의 책상 위에 놓인 우유팩을 확인했다.
제품명 -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
유형 - 딸기 맛 우유
내용량 - 1000ml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 제품명이 뭐 그래? 어느 회사 제품이었어?"
"몰라, 그것 까진 안 봤어. 하지만 분명 국내 제품이었어."
"그런 이상한 이름은 처음 듣는데……."
"당연하지! 그런 건 사실 이 세상에 없는 거라니까!"
"맛을 봤니?"
"미쳤니?"
태준은 기겁을 했다. 정상적인 사람이 먹어서는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뭔지 아니?"
태준은 그 때의 기억이 눈앞에 그려지는지 사색이 되었다. 태준이 그렇게 남의 교실에서 남의 물건을 만지고 있을 때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시선이 있었다. 태준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 때문에 정면을 주시했고 심장이 멎을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 여학생은 교탁 위에 앉아 있었다.
"뭐야? 그럼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걸 네가 못 본 거였구나?"
"너 지금까지 내 얘길 어디로 들은 거니? 교탁엔 분명 아무 것도 없었다고! 그 애는 갑자기 그렇게 나타났던 거야!"
"설마……."
그렇게 설명을 해줬건만 강호가 미심쩍어 하자 태준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다음 얘기를 계속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태준은 두려움과 모험 심리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가 바로 어제, 그는 다시 한번 일찍 등교를 했고 역시 어둠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그 애를 볼 수 있었다. 그 애는 복도에 서서 딸기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는 빈 우유팩을 복도 사물함 위에 올려놓고 교실로 들어갔다. 태준은 최대한 자세를 낮추면서 그 교실 앞으로 다가갔다. 열린 문틈으로 안을 확인해보니 그 애는 교실 뒷자리에서 다시 1리터 짜리 딸기우유를 들이키고 있었다. 입가로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들이 피처럼 보였다. 우유를 다 마신 그 애는 창가로 가서 창 밖 풍경을 감상하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 애는 고개를 홱 돌려 문틈 사이의 태준을 쏘아보았고 태준은 기겁을 해서 뒤로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태준은 얼른 자신의 교실로 달려가 앞문과 뒷문을 모두 관건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여섯 시밖에 되지 않았고 아이들이 오려면 십 분, 이십 분 정도는 더 있어야 했다. 태준은 자신의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않고 앉아 엎드려 있었다. 짤각짤각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태준은 간신히 눈만 내놓고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해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삼각자의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삼각자는 관건 해놓은 앞문의 빗장 걸쇠를 풀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돌아보니 뒷문 걸쇠는 이미 풀린 상태였다. 식은 밥처럼 목에 걸린 공포는 태준으로 하여금 어떤 비명도 지르지 못하게 했다. 마침내 짤그락 소리를 내며 앞문 걸쇠도 풀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앞문은 굉장히 천천히, 조심스럽게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은 10센티미터 가량 열렸다. 미세한 바람이 틈새로 들어와 투명인간처럼 태준의 턱 밑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어째서 들어오지 않는 걸까. 그런 의구심이 들 때 태준은 섬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뒷문을 응시했고 아니나다를까 이번에는 뒷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있었다. 이렇게 천천히, 조용히 열면 안에서 눈치채지 못하겠지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뒷문도 10센티미터 정도 열렸다. 앞뒷문이 그렇게 조금씩 열려 있다는 것은 마치 '내가 과연 어느 쪽으로 들어갈까?' 라고 속삭이는 듯한 귀신의 조롱 같았다. 바로 그때 앞쪽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고 돌아보니 앞문의 열린 틈새로 하얀 손이 삐죽이 들어와 있었다. 태준은 공포로 얼어붙었고 이제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을 최대한으로 크게 치켜 뜨는 일뿐이었다. 잠시 멎었다 다시 몰아치는 폭풍처럼 태준은 엄청난 전류의 공포에 뒷골이 흔들렸고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손은 뒷문 틈새에도 삐죽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 일로 태준이 엄청난 충격을 받아 헛것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마침내 전학을 가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군인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다른 지역으로 전출명령을 받았기에 가족들 모두가 이사를 가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태준이 비밀스럽게 풀어놓고 간 괴담은 다음 주자에게 이어지는 배턴처럼 강호에게로 전달되어 그를 달리게끔 동요시켰다.
강호는 태준이 겪은 일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쪽과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쪽으로 나누어서 생각해보았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딸기우유였다.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라는 제품명의 1리터 짜리 딸기우유는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강호는 동네 슈퍼마켓을 다 돌며 그런 딸기우유가 있는지 확인해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어떤 슈퍼마켓 주인에게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라는 이름의 딸기우유가 있냐고 물었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을 뻔했다. 적어도 강호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 그런 딸기우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두 가지였다. 그런 딸기우유는 처음부터 없다는 것과 어느 이름없는 3류 회사에서 내놓은 알려지지 않은 신상품이라는 것. 강호는 후자의 경우를 배제할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회사가 존재하고, 광고비가 없어 어떤 광고도 하지 않고, 대형 유통망을 잡지 못해 변두리의 변두리에만 살짝 유통시켰을 수도 있었다.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세상에 없는 우유라는 가설보다는 신빙성이 있었다.
그 다음 문제가 되는 것은 신출귀몰한 그 애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논리적 설명이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었다. 태준은 그 애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정확히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태준은 인기척을 도무지 느끼지 못했다지만 어쨌든 그 애는 발소리를 죽이며 다니거나 어딘가에 숨었다가 나타나곤 하는 것이 취미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앞문과 뒷문에 동시에 보였던 손이었다. 이것 역시 논리적 설명이 가능했다. 우선 그 두 개의 손이 그 소녀의 것이라는 증거는 없으며 그 두 개의 손이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그저 각기 다른 두 사람이 앞쪽과 뒤쪽에 서서 장난을 쳤던 것일 수 있다. 그것이 손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나서 각각 앞문과 뒷문틈새로 삐쭉이 나왔다는 것보다는 훨씬 납득 가능한 논리였다.
그렇게 본다면 그 소녀는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소녀였다. 우연히 변두리의 변두리에만 유통되는 독특한 이름의 딸기우유를 손에 넣게 되었고 단지 그 우유가 맛있어서 즐겨 마시는 것뿐일 테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뒤집어 엎어버린다면 결과는 정 반대의 것이 되어 버렸다.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심령학 적인 문제로 거듭나게 된다. 우선 딸기우유를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마신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가설을 가능케 하는 미스터리한 출발점이 되었다. 인조인간이 건전지를 충전시키고 흡혈귀가 피를 보충하듯 그녀는 딸기우유를 주기적으로 마셔대고 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강호는 상상을 노트에 옮겨갔다. 그렇지 않아도 요 근래 공포소설 사이트에 글을 안 올린 지 오래 되었고 무언가 새롭고 으스스한 이야기 거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강호는 딸기우유를 마시는 소녀를 모델로 그녀의 범상치 않은 행동 하나 하나에 의심을 품고 귀신 이야기를 구상해 갔다. 그는 틈틈이 그 소녀를 관찰했고 그녀의 생김새와 행동, 몸짓 하나까지 스케치하듯이 눈에 담았다. 그 애는 정말로 1리터 짜리 딸기우유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마셨다. 적어도 하루에 5리터 정도는 마시는 것 같았다.(다만 그 특이한 우유를 그녀는 아이들이 없는 장소나 시간대를 이용해서 마시는 편이었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는 애였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친구들도 없었다. 늘 긴 생머리에 커다란 분홍색 나비 리본을 하고 다녔으며 특별히 예쁘지도 못나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마른 체형이었으며 다리가 엄청 길었고 키도 컸다.(170센티미터가 넘었다) 그녀는 점심시간 때마다 학교 뒤편 연못가 옆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끝에 위치한 벤치에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1리터 짜리 딸기우유를 마시며 수첩에 무언가를 적었다. 영어 단어장이나 수학 공식을 적어놓은 학습장 같아 보이지는 않았고 무슨 비밀을 기록해놓은 일기장 같아 보였다. 또한 그녀는 정규 수업을 모두 마친 후에도 늦게까지 교실에 남는 편이었고(공부를 하는 것인지 다른 개인적인 일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침 등교도 누구보다 빨랐다. 대체적으로 학교에 붙어 있는 편이 많은 아이였다. 옆 반의 알고 지내던 친구를 통해 강호는 그 소녀의 이름과 대강의 인적 사항도 알아냈다. 그녀의 이름은 오선미였다. 조금 괴짜인 것은 사실이나 왕따를 당한다거나 특별히 사건을 일으키는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늘 쉽게 접근하기 힘든 차가움이 풍겼다. 아버지는 무슨 유통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없었다.
"유통회사라…… 그래서 그런 이상한 우유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회사에서 비밀스럽게 제조하고 있는 우유인가……?"
강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구상중인 공포소설의 줄기를 잡아갔다.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은 범죄는 얼마든지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말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의 숫자는 상상을 불허할 것이다. 범죄는 비로소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성립이 되는 것이고 그제야 수사는 시작된다. 누군가가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을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몰래 살해한 후 땅속 깊은 곳에 묻어버리거나 불태워버린다면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그녀의 아버지는 바로 그런 식으로 엄청난 양의 피를 확보한다. 그녀를 위해서. 그녀는 지독한 괴혈병에 시달리는 돌연변이 괴물이며 아버지는 딸을 위해 피를 구한다. 사람들을 죽이고 피를 몽땅 뽑아낸 후 시체를 내버린다. 그 피로 딸기우유를 만들어 딸에게 먹인다. 그녀는 시계의 태엽을 돌리듯이 주기적으로 그것을 마셔야 목숨을 연명할 수 있다.
거기까지 상상하던 강호는 문득 시선을 떨구었다. 계단 아래에서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왜 웃는지 알 수가 없어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그 즈음 교내에는 이가희의 유령을 보았다는 괴담이 점차 확산되고 있었다. 밤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을 어기적어기적 배회한다는 둥, 비오는 날이면 창 밖에서 커튼 사이로 노려본다는 둥, 그녀가 손목을 자해해 죽었다는 화장실 좌변기에 가끔씩 피가 철철 흘러 넘친다는 둥,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화해 나갔다.
아이들의 치기와 호기심이 파리 때처럼 들끓어 이가희 괴담이 비대하게 커져 가는 동안 강호는 그것과는 무관하게 아이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떠도는 또 하나의 소문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것은 피를 마시는 소녀에 관한 소문이었다. 학교에 피를 마시는 소녀가 있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피를 마시는 지는 모르나 그녀의 가방 속에는 언제나 피가 가득 든 통들로 가득하다. 소문은 그러했다. 강호는 긴장했다. 무언가 마음을 잡아끄는 불안감이 그에게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 끝 벤치에 앉아 딸기우유를 마시는 그녀를 강호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는 그런 소문이 난 것에 대해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소설 속에서처럼 정말로 그녀는 피를 마시는 괴물인가! 딸기우유처럼 위장한 저것은 정말로 사람들을 죽여서 그들의 생피로 만든 피 우유인가! 게다가 소문은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꿈틀대며 탄력을 받고 있었다. 피를 마시는 소녀는 아이들을 납치해서 소리 소문 없이 죽인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학교에 머물며 납치할 목표물에 대한 인적사항을 수첩에 기록한다! 얼마 전 전학을 간 누구누구는 사실 전학을 간 게 아니라 그녀에게 납치되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금 그 소녀가 마시고 있는 딸기우유가 바로 그들의 피다! 강호는 노트를 접고 머리를 흔들었다. 머릿속이 몹시 산란해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무심코 정면을 쳐다보다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벤치의 그 소녀는 우유를 마시며 강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유 줄기가 그녀의 입가를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선명한 붉은 빛이었다. 이제 그의 의구심은 두려움으로 번져갔다.
그날 이후 딸기우유를 마시는 소녀는 강호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자신을 훔쳐본 것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그녀의 눈길은 수시로 강호를 따라다녔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 복도 창이나 열린 문 사이로 가만히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이 강호를 미치게 했다. 앞에서 노려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보면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면 교실 뒷문에 기대고 선 그녀의 반쪽 얼굴이 보였다. 밥을 먹다가도 알루미늄 밥통에 그녀가 비쳤고 유리창을 닦다가도 유리창에 반사된 그녀의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이사를 간 태준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그에게 어떤 자문을 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기댈 누군가가 강호에겐 필요했다. 그러나 태준의 휴대폰이 먹통이었다. 신호음은 가지만 그것은 불러도 주인 없는 신호음이었다. 설마 태준이 당한 건가! 강호는 자신이 그런 상상을 해버렸다는 것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보다 분명한 무슨 조치가 필요했다.
며칠째 기회를 엿보던 강호는 마침내 그 이상한 우유를 맛볼 기회를 포착했다. 이른 아침에 등교를 한 강호는 그녀의 교실 앞을 지나치다 문득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진 1리터 짜리 딸기우유 통을 발견했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것을 맛본다면 이 모호한 숨막힘을 어떤 식으로든 불식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 실내는 지하 수족관처럼 어두웠고 강호는 어둠에 몸을 숨기며 자세를 낮추었다. 열린 뒷문에서 교실 안을 살폈고 다시 목을 뒤로 쭉 빼 복도의 양끝을 살폈다. 그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교탁 위를 쳐다보았다. 교탁 위에도 아무도 없었다. 강호는 납작하게 엎드려서 책상 밑을 살폈다. 웅크리고 숨어있는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다시 한번 복도를 살핀 후 그 1리터 짜리 우유팩을 집어들었다. 빈 팩이었지만 흔들어보니 짤랑짤랑 소리가 나는 것이 몇 방울 정도는 남아 있었다. 그는 팩을 45도 각도로 들어올려 혀를 쭉 내밀었다. 붉은 액체 몇 방울이 미끄럼을 타듯이 주르르 내려와 그의 혀끝에 뚝뚝 떨어졌다. 의심의 여지없는 피 맛이었다! 강호는 혀에 감도는 끈적끈적하고 비릿한 느낌에 구역질이 나 침을 마구 뱉었다.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강호는 다급히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직한 웃음소리는 계속 들렸고 강호는 그 소리가 복도 쪽에서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서 하얀 손이 올라와 그의 다리를 꼼짝 못하게 붙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뻣뻣이 굳어 있었다. 복도 창에 일렁이는 실루엣이 비쳤다. 실루엣은 열려있는 창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등뒤에서 미세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뒷목을 훔쳤고 커튼은 물결치듯 펄럭였다. 마침내 실루엣은 열린 창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녀였다. 어쩐지 키가 더 커 보였다. 어째서 키가 더 커 보일까? 설마……! 그녀의 두 발이 지면에서 떠올라 허공을 부양하고 있는 중이라면! 짜릿한 전류가 전신을 마사지했다. 강호는 터질 듯이 지끈거리는 왼쪽 관자놀이를 손으로 눌렀다. 그녀의 키는 점점 더 커졌고 입술이 뒤틀리며 묘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 웃음은 마치 '어때, 맛있었어? 콘푸로스트와 함께 먹으면 더 근사한 맛이야'라고 조롱하는 듯했다.
강호는 바닥에 붙박인 다리를 억지로 떼어내 급히 뒷문으로 달아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로 들어온 강호는 앞문과 뒷문을 모두 걸어 잠갔다. 그는 머리를 감싸고 책상에 엎드려 조금 전의 상황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피 맛! 그것은 착각일수도 있지 않을까. 그저 조금 상해서 시큼한 맛이 났던 것뿐인데 혀가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애가 떠오른 것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아니 어쩌면 그 애는 허공을 떠오른 것이 아니라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던 것일 수도 있다. 그녀는 복도 너머에 있었고 그녀의 발은 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허공으로 떠오른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강호는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만수였다. 그는 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난리냐며 성질을 부렸다. 성질 부리는 쥐방울이 반갑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급히 문을 열고 투덜대는 만수를 잡아 끌 듯이 데려와 앉혀놓았다. 그는 만수의 어깨를 붙잡으며 중대한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그에게만 알린다면 학교 전체가 비밀을 아는 것이 될 테다. 그 순간 강호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것은 그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열어놓은 앞문에 삐죽이 내민 손가락이 있었다. 그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무언가를 경고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말하면 죽어.
그날 오후 강호는 사물함 속에서 그녀의 선전포고를 받아야 했다. 급하게 휘갈겨 쓴 쪽지에는 밤 10시에 만나자는 것과 나오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가 가족들 모두를 딸기우유로 만들어버리겠다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강호는 이제 두려움의 감정조차 초월해 허탈감에 빠졌다.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딸기우유가 되는 것은 혼자로 족해야 했다.
강호는 오후 5시쯤 일단 하교를 했다. 그녀의 교실 옆을 지나며 그녀가 교실 뒷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기록하고 있는 모습을 힐끔 보았다. 그녀는 아예 하교하지 않고 계속 남아서 강호를 기다릴 모양이었다. 교문을 나서자마자 강호는 비밀스럽게 알아낸 오선미의 주소로 찾아갔다. 오선미의 집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서양식 구조의 이층 양옥이었다. 대문은 잠겨 있었지만 변두리에 위치한 그곳은 지나는 사람들도 지나는 개들도 없었다. 강호는 도움닫기를 해서 비교적 낮은 담을 뛰어넘었다. 정원은 다듬어지지 않아 이름 모를 이상한 풀들로 가득해 보기 흉했다. 그는 정원 뒤로 돌아 뒤뜰로 갔다. 그곳에는 느릅나무 두 그루가 강풍에 흔들리며 기괴한 모습으로 손짓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 실내로 통하는 뒷문이 보였다. 지금 시간이면 집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굳은 확신을 가지고 뒷문 손잡이를 움직였다. 문은 열려 있었다. 마치 내다버린 자식처럼 집 관리를 엉망으로 하는 듯했다. 강호는 뒷문을 통해 실내로 들어섰다. 천장 구석마다 거미줄이 빼곡이 들어 차 있었다. 계세요, 하고 외쳐보았지만 들려오는 대꾸는 없었다. 강호는 좀더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 영화에서 많이 보았음직한 실내 구조와 인테리어가 그를 맞이했다. 문득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 중앙에 걸린 그림에 눈길이 갔다. 그는 계단을 올라 그림 앞에 섰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산맥들을 배경으로 호숫가에 앉아 홍차를 마시는 소녀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소녀가 그녀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 때 아래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퉁퉁퉁. 강호는 애써 그 소리를 무시하고 그림에 좀더 빠져들었다. 그리고 심장을 무겁게 짓누르는 전율을 먼저 느꼈고 그 전율의 의미를 그림의 오른쪽 하단에서 발견했다. 그곳에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사인이 조그맣게 나타나 있었고 그 옆에는 그림을 그린 날짜가 적혀 있었다. 1924년 6월 20일. 강호는 그림에서 뒷걸음질 쳤다. 그림 속의 소녀는 8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그녀가 마시는 차는 홍차가 아니라 피였다. 아래층에서 다시 퉁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호는 계단을 내려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었다. 계단 뒤편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소리는 그곳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다란 자물쇠가 두 개씩이나 채워진 철문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틈새로 미세하게 비린내가 올라왔다. 강호는 코를 감싸쥐며 지하실 너머의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피가 그득히 담긴 욕조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욕조에 아침저녁으로 몸을 담그며 흡족해할 것이다. 천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시체들로 주렁주렁할 것이다. 열린 지하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것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다. 퉁퉁퉁. 그 중에는 안경을 쓴 채 참혹한 모습으로 죽어 있는 태준의 시체도 있을 것이다. 강호는 철문에 귀를 가져가 보았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이 차라리 빨리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강호는 비틀거리며 양옥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북쪽 하늘에서부터 악마같이 시커먼 구름 떼가 접근하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막 아홉 시 오십 분을 지나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는 우산도 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렸다. 어둠에 묻힌 학교는 회오리 폭풍과 천둥 번개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고 강호는 마치 이곳이 자신이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인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불꺼진 건물에는 외눈박이 괴물처럼 단 한곳만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 창가에 일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림자였다. 석굴 사원 같이 컴컴한 복도와 계단을 뛰어올라 그녀의 교실 앞에 당도했을 때 시간은 열 시 정각이었다. 불켜진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책상 위에는 1리터 짜리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가 한 통 놓여 있었다. 강호는 그것을 들어올려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던졌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우유팩이 터졌다. 끈끈한 피가 교실 바닥에 팍 퍼졌다. 강호는 그녀의 책가방을 뒤져보았다. 공책이나 책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1리터 짜리 딸기우유만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책상 서랍 속을 뒤져보았다. 그녀가 늘 가지고 다니던 수첩이 나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엔 딸기우유가 되어 죽어간 이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딸기우유가 될 이들의 명단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 명단의 끝에는 강호의 이름도 있었다. 강호의 이름 밑에는 추가 설명이 적혀 있었다. 며칠 동안 나에 대해 관찰하더니 마침내 그가 나의 비밀을 모두 알아내었다. 오늘 밤 처단할 예정. 수첩을 든 강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복도 쪽에서 쇳소리가 났다. 강호는 놀라서 돌아보며 준비해왔던 가방을 내려 무기를 꺼냈다. 쌍절곤이었다. 그는 쌍절곤은 양손에 쥐고 복도로 걸어갔다. 다시 쇳소리가 들리며 복도의 사물함 중 하나의 문이 열렸다. 사물함 속에서 천천히 손이 나왔다. 저곳이 그녀가 기거하는 곳이었던가! 그녀는 멋대로 몸을 접을 수 있었던가! 그녀는 사물함에서 나오자마자 머리가 복도 천장에 닿을 만큼 떠올랐다. 그녀는 온통 피투성이였고 눈은 파랗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입이 어찌나 컸던지 양쪽 귀에 걸린 듯했고 삐죽삐죽한 이빨은 적어도 백 개는 넘어 보였다. 강호는 양손에 든 쌍절곤이 바나나 두 개만큼이나 형편없는 것이라는 걸 알고는 그것을 집어던지고 재빠르게 뒤돌아 도망쳤다. 그녀는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그 자세 그대로 그를 쫓아왔다. 복도 중간쯤에서 강호는 미끄러져 넘어졌다. 복도 바닥은 미끌미끌한 피로 가득했다. 그는 일어서서 달리려 했으나 피에 미끄러져 다시 넘어졌다. 뒤통수가 복도 바닥에 부딪히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강호는 희미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바로 위에 떠 있었다. 열린 복도 창문으로 비바람이 몰아쳤고 번개와 천둥소리에 맞추어서 그녀는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번쩍번쩍 반복했다. 다 죽일 거야. 그녀가 말했다. 내 비밀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모두를 일일이 찾아내서 다 죽일 거야. 그럼 당분간 딸기우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녀는 강호의 눈앞까지 성큼 내려왔다. 털이 숭숭 난 하얀 두 손이 강호의 입 속으로 쑥 들어왔다. 손은 강호의 입을 양쪽으로 찢어발겼다.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귀신의 무게 때문에 강호는 비명다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갑자기 그녀의 칼날 같은 손톱이 그의 두 눈을 후벼팠다. 강호는 처절한 고통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이윽고 기분 나쁜 헐떡임과 뜨거운 입김이 강호의 귓가에 전해졌다.
"네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거지?"
그녀가 말했다.
눈을 뜨니 파란색 모니터에 삼차원 그래픽이 떠다니고 있었다. 장시간 컴퓨터를 켜놓은 탓에 화면 보호기가 작동 중인 모양이었다. 강호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컴퓨터를 하다가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입과 눈을 손으로 더듬어 확인했다. 무사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공포소설 사이트에 자신이 올린 연재소설 다섯 편이 엄청난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딸기우유를 마시는 소녀'
그는 그 다섯 편을 모두 선택해서 삭제해버렸다.
다음 날 강호는 복도에 서서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딸기우유를 마시는 오선미를 보았다. 그녀는 그냥 평범한 200밀리리터 짜리 딸기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는 이제 동이 난 것일까. 강호는 시선을 내려 그녀의 두 다리가 지면에 닿아있음을 확인했다. 그 당연함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때 멀리서 만수가 달려왔다. 그는 복도에 모여있는 친구들을 향해 이가희에 관한 새로운 괴담을 한아름 풀어놓았다. 마침내 이가희 유령이 자신을 자살로 몰아넣은 아이들을 찾아내 복수하기 시작했다고. 손에 커다란 유리조각을 들고 하얀 눈동자를 번득이며.
"그만 좀 해 임마!"
강호가 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미 죽은 애잖아! 그냥 편히 쉬게 해줘!"
그가 그렇게 말하자 만수 무리들은 일순간 찬물을 뒤집어 쓴 모양 조용해졌다. 그러나 강호가 돌아서자마자 그들은 다시 떠들어댔다. 강호는 오선미가 있었던 곳을 보았고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있었던 곳에 그녀가 놓고 간 수첩이 있었다. 그는 멀찌가니 지나가면서 수첩을 흘낏 쳐다보았다. 수첩에는 모 가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가수에게 보낼 팬레터를 쓰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흠모하는 가수의 이름을 적으며 그 가수를 동경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찌됐건 그녀는 그저 딸기우유를 무척 좋아하는 평범한 소녀일 뿐이다. 그 이상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 그러니 그 이상의 편견으로 그녀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자.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갑자기 딸기우유가 먹고싶어서였다.
<끝>
첫댓글 헉. 너무길다 ㅠㅠ
......읽을자신이없다 ...
저는 다읽었어요~ㅋㅋㅋ
다 읽었는데 왜 끝이 허무하지..
콘푸르스트에 말아먹으면 좋을 맛이야 ㅡㅡ에서 잠시 폭소....
ㅋㅋㅋㅋㅋ저도;;
ㅋㅋㅋ 그냥 해피엔딩.. 공포소설이네요...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너구리댁님 말씀에 공감>_<콘푸로스트ㅋㅋㅋㅋ
제이슨 친구님의 소설이네요 방가방가
"제품명 - 새벽의 상쾌함과 무조건 맛있는 딸기" 이 부분에서 폭소ㅋㅋㅋ; 근데 너무 무서웠어요ㅠㅠ
새벽의 상쾌함이라니 ,크크크 귀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단어야 ,ㅋㅋㅋ
중간엔 무서웠는데, 끝나니 별로,,
모 가수는...누구? *-_-*
'어때, 맛있었어? 콘푸로스트와 함께 먹으면 더 근사한 맛이야'라고 조롱하는 듯했다. 이 작품의 베스트
다읽었다.................................무섭네요 중간에ㅠㅠ......근데끝은웃기고 콘푸로스트.............무조건맛있는딸기 폭소.......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