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 南冥 曺植할아버지
<글을 시작하며>
올해는 남명할아버지의 탄신 510주년이 되는 해이다. 1501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나신 남명할아버지할아버지께서는 1572년 72세의 나이로 경상남도 산청 덕산에서 세상을 떠나신 조선중기인 대표적 선비이시다. 우리는 ‘선비정신이 남명할아버지정신’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 왔지만, 사실은 남명할아버지 정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남명할아버지의 숨결’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남명할아버지 탄신 510주년을 맞아 남명할아버지할아버지의 정신이 배인 곳을 찾아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나의 17대조이신 남명할아버지께서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남긴 글을 비롯해 경남지역에 있는 할아버지의 유적들을 소재로 경남일보 강동욱 기자가 신문에 1년간 연재하고, '칼을 찬 선비, 남명 조식'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낸 바있는 내용을
블로그에 연재할 계획이다. 강동욱기자의 연재내용을 그대로 살리되 일부 남명선생을 남명할아버지로 수정하고 각장마다 관련사진을 첨부하여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남명할아버지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겨보고, 또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후손의 바람 간절하다.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 남명 조식(曺植)
명종 치하 ‘사화의 시대’에 제수된 벼슬을 한사코 거부한 남명 조식…
“문정왕후는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소로 조정 흔들어”
언제부턴가 선비와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72)은 달랐다. <남명선생 별집(別集)> ‘언행총록’(言行總錄)은 조식이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그의 칼에는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과거를 버리고 학문을 얻다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義內明者敬/ 外斷者義)
»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던 남명 조식. 그는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 즉 백성들의 마음과 어긋난다고 보았다. 칼에 새긴 글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많은 사대부들이 형이상학을 논할 때 경(敬)과 의(義)를 새긴 칼을 차고 다녔다는 자체가 남다름을 말해준다.
증조부가 한양에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면서 조식의 집안은 이 지역에 정착했는데, 그도 어린 시절 과거 공부를 했으나 곧 과거가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20살 때인 중종 15년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송인수(宋麟壽·1499∼1547)가 선물한 <대학>(大學)의 책갑에 쓴 발문에 “과거 시험은 애초에 장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라고 쓴 것이 이를 말해준다.
9살 때인 중종 14년(1519)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발생하는데, 숙부 조언경이 함께 파직된 것도 과거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조식은 25살 때 친구와 산사에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던 중 원나라 허형(許衡)의 글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윤(伊尹)에 뜻을 두고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워, 벼슬길에 나아가면 큰일을 해내고, 초야에 숨어살면 자신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글이었다.
이윤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고 은(殷)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인물이며, 안자(顔子), 즉 안회(顔回)는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사자성어를 만들 정도로 가난을 선비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인물이다.
벼슬에 나가면 대대적인 개혁을 하고 초야에 은거하면 가난 속에서 도를 찾는 선비가 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벼슬에 나가 이윤처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는 당시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친과 모친의 권유로 몇 번 더 과거에 나가기는 했으나 <대학> 발문에, “문장이 과거문장(科文)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미 마음은 과거를 떠나 있었다.
30살 때 김해로 이주해 신어산(神魚山)에 산해정사(山海精舍)를 짓고 45살 때까지 거주했는데, ‘산해’(山海)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는 뜻으로서 주자학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연보>에 따르면 조식은 37살 때인 중종 32년(1537)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 공부를 영영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해 학문을 가르쳐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세상사는 묘한 것이어서 과거를 포기한 이듬해부터 벼슬이 찾아왔다. 38살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이윤(伊尹)에게 뜻을 두고서도 그 뜻을 펼칠 수단인 벼슬을 포기한 것은 당시 정치 지형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당시는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하는 사화의 시대였다. 45살 때인 인종 1년(1545)의 을사사화로 여러 친구가 희생된다. 병조참의 이림(李霖)은 사사(賜死), 사간원 사간 곽순(郭珣)은 옥사(獄死), 성운(成運)의 형 성우(成遇)는 이들을 옹호하다가 ‘역적을 구원하고 공신을 모욕한다’고 장사(杖死)한다.
조식은 죽을 때까지 이들을 잊지 못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분노했다. 명종 2년(1547)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학>을 보내주었던 친구 송인수가 사사(賜死)당했다.
명종의 모후 문정황후와 그 동생 윤원형이 주도한 사화였다. 명종 3년(1548)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거절한 것은 이런 정치 환경에 대한 거부감의 표출이었다.
» 조식의 묘에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 조식은 죽는 순간까지 처사의 재야 정신을 지켰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단성현감 사직상소
조식의 거듭된 출사 거부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과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명종 8년(1553) 이황은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사양한 데 대한(‘여조건중’(與曹楗仲))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식은 이황에게 답장을 보내 조(植)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아껴서 그랬겠습니까?”라고 답하면서 “단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성상(聖上)에게까지 잘못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데 있어서겠습니까?(‘퇴계에게 답합니다’(答退溪書))”라고 덧붙였다.
퇴계 이황은 조식의 편지에 마음이 상했다. 사림의 종주인 자신의 천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두 사람의 이런 출사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조식이 명종 10년(1555)에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즉 ‘단성현감(丹城縣監) 사직상소’였다.
조식이 단성현감 제수를 사양하는 이유로 먼저 든 것은, 자신은 헛된 명성만 있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명종 즉위 뒤의 정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평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이는 명종의 10년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는 말은 명종에게 천명이 떠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금기였다. 조식의 친구들이 죽은 을사사화나 양재역 벽서 사건은 모두 문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명종 2년(1547)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세를 종간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인데, 조식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해 많은 사림들이 죽었고, 이후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그런 문정왕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으니 평상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언급인데 하물며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한 사화 때였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조식을 죽이지 못했다. 은거 선비의 사직 상소를 가지고 죽이는 것은 도리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 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사관(史官)이 ‘사신은 논한다’에서 “유일(遺逸·은거한 인사)이란 이름을 칭하고 공명을 낚는 자가 참으로 많은데, 어질도다. 조식이여!”라고 칭찬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퇴계집> ‘언행록’에 따르면 이황은 오히려 조식의 상소를 비판했다. “선생은 남명의 상소를 보고 사람에게, ‘대개 소장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순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았으니 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 조식이 61살 되던 해에 지리산 덕천동에 지은 산천재. 그는 72살 때인 선조 5년 이곳에서 삶을 마쳤다.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
그러나 조식은 척신 윤원형이 주도하던 명종 치하에서 ‘임금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의를 추구할 수 없다고 보고 상소를 올린 것이다. 사관은 조식의 상소를 둘러싼 논란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오늘날과 같은 때에 이와 같이 염퇴(恬退·고요하게 은거함)한 선비가 있는데, 그를 높여 포상하거나 등용하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공손하지 못하고 공경스럽지 못하다고 책망하였다. 그러니 세도가 날로 떨어지고 명절(名節)이 땅에 떨어진 것이 당연하며, 위망(危亡)의 조짐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명종실록> 10년 11월19일)
조식이 분개한 것은 명종 때의 정치가 하늘의 뜻과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하늘의 뜻이란 곧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민암부’(民巖賦)에는 이런 생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경>(書經) ‘소고’(召誥)의 “백성의 암험함을 돌아보아 두려워하소서”란 글에서 나온 ‘민암’(民巖)은 ‘백성은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민암부’는 ‘단성현감 사직상소’가 평소 그의 소신임을 말해준다. “…백성이 물과 같다는 말은/ 예로부터 있어왔으니/ 백성은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백성은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원한과 한 아낙의 하소연이 처음에는 하찮지만/ 끝내 거룩하신 상제(上帝)께서 대신 갚아주시니/ 그 누가 감히 우리 상제를 대적하랴/ …걸(桀)왕과 주(紂)왕이 탕(湯)왕과 무(武)왕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백성에게 신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필부로서 천자가 되었으니/ 이처럼 큰 권한은 어디에 달려 있는가?/ 다만 우리 백성의 손에 달려 있다/ …백성을 암험하다 말하지 말라/ 백성은 암험하지 않느니라.”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백성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조식과, 백성은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주자학자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불씨(佛氏·석가모니)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라며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 조식이었다.
조식은 45살 때 모친상을 당해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48살 되던 해에 삼가현 토동(兎洞)에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학문에 몰두했는데, <장자>(莊子) ‘재유’(在宥)에 나오는 ‘뇌룡’은 ‘고요히 있지만 신비한 조화가 드러나고 천둥 같은 소리가 난다’는 뜻으로서 은거함으로써 세상을 움직이겠다는 의지이다.
이황이 “남명의 본 바는 실로 장·주와 같다”라고 비판한 것은 조식이 이처럼 장자의 학설도 배척하지 않고 수용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조식은 61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했는데, '산천’이란 <주역>(周易)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밖으로 빛을 드러내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갓 즉위한 선조가 교지로 부르자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사양하면서 개혁을 주문했다. 그리고 72살 때인 선조 5년(1572) 산천재에서 세상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이 사후의 칭호를 묻자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 만약 이를 버리고 벼슬을 쓴다면 이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사의 재야 정신을 죽는 순간까지 지녔던 것이다.
북인 제자들, 대거 의병장으로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수제자(首門) 격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그리고 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하락(河洛)·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박성무(朴成茂) 등 쟁쟁한 의병장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장악했고, 처사 조식은 선조 36년(160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 인사들이 사형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조식이 64살 때인 명종 19년(1564) 이황에게 보낸 편지는 오늘의 현실을 말해주는 듯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
칼럼 이덕일의 시대에 도전한 사람들 목록 > 2007년01월25일 제645호에서옮김
1.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은 선비기상 '우뚝'
[남명할아버지의 숨결]지리산 천왕봉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던 삼신산(三神山)으로 불려졌던 지리산.
제일봉인 천왕봉은 거대한 바위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듯이 외로이 서 있다. 이 거대한 바위를 옛날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란 뜻으로 천주(天柱)라고 불렀으며, 천왕봉 서쪽 암벽에는 ‘天柱’라는 음각 글자가 있다.
남명할아버지께서는 태산교악(泰山喬岳)의 기상을 지닌 선비이다. 왕을 ‘아비 없는 자식’ 대비를 ‘궁중의 한 과부’라고 할 정도의 배포를 가졌으니, 할아버지의 기상은 태산에 비길만하다고 하겠다. 남명할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의 ‘태산’이라고 할 수 있는 지리산을 좋아했다. 아니 그 자신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지리산 천왕봉이고 싶어 했다. 그래서 61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등지고 만년에 살 곳을 지리산 천왕봉 가까이로 정했다.
봄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 마는
다만 천왕봉이 옥황상제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해서 라네
빈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을 건가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리에 흐르니 먹고도 남겠네
춘산저처무방초 (春山底處無芳草)
지애천왕근제거 (只愛天王近帝居)
백수귀래하물식 (白手歸來何物食)
은하십리끽유여 (銀河十里喫有餘)
남명할아버지께서 61세때 지리산 아래 덕산으로 옮기면서 지으신 시로, 지금 산천재 기둥의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다. 남명할아버지께서 덕산에 자리잡으신 것은 17차례나 지리산을 유람하고 나서이다. 화개동천과 청학동 신흥동으로 3차례, 마천의 용유담과 휴천계곡으로 3차례, 삼장의 유평계곡과 왕산 1회, 악양과 청암 옥종방면으로 3차례, 덕산을 7차례 둘러보시고 마지막 살 곳을 중산리와 대원사 쪽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합쳐지는 덕산에 자리 잡으신 것이다.
남명할아버지께서는 이 시를 통해 세상에는 부귀영화가 가득 찬 좋은 곳이 많지만, 단지 천왕봉이 옥황상제 사는 곳 즉 하늘과 가까이 있는 것을 좋아하시어 깊숙이 지리산 골짜기 덕산에 은거한 것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다. 비록 백수로 왔지만 천왕봉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흐르는 맑은 물을 먹고도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다.
육체적인 풍족 보다는 정신적 풍족을 추구하겠다는 뜻이다. 남명할아버지께서는 이 시를 권응인(權應仁)에게 적어주면서 “이제부터 다시 십년동안 이 물을 더 마시게 된다면 자연의 도적이 될 것이다”라고 까지 했으니 남명할아버지께서 덕산으로 와서 얼마나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렸는가를 알 수 있다.
보통 인간은 “배가 고프면 못할 짓이 없다 ”라고 까지 한다. 하지만 남명할아버지께서는 배고픔 속에서도 정신적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지리산 천왕봉을 닮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높은 산이 큰 기둥처럼
하늘 한 쪽을 받치고 있다
잠시도 내려앉은 적이 없는 데도
자연스럽지 않음이 없도다
고산여대주(高山如大柱)
탱각일변천(撑却一邊天)
경각미상하(頃刻未嘗下)
역비부자연(亦非不自然)
하늘 한쪽을 받치고 있는 기둥은 지리산 천왕봉일 것이다. 그렇게 받치고 있되 잠시라도 힘이 부쳐서 쩔쩔 매지 않는 자연스러운 모습.
이것이 바로 남명할아버지께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흡사 하늘을 받치고 있는 천왕봉 같이 말없이 우뚝 솟아 있을 뿐이라는 심정을 토로하신 것이다.
저 천석들이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아니하면 소리나지 않네
어찌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청간천석종(請看千石鍾)
비대구무성(非大구無聲)
쟁사두류산(爭似頭流山)
천명유불명(天鳴猶不鳴)
천석종(千石鍾)은 남명할아버지께서 지향하는 이상적인 선비이고, 또 남명할아버지 자신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쳐도 소리 내고 싶어 안달하는 조그만 종이 아니라 워낙 큰 그릇이기 때문에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 하찮은 부귀영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오직 국가 대사를 좌우할만한 요청에만 응한다는 말이다.
벼슬할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아무리 불러도 나가지 않지만, 벼슬할 만한 때에 포부를 펼치기 위하여 국가와 백성에게 이익을 끼칠 수 있는 학문을 계속 쌓아 위대한 공적을 끼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한번의 울림’으로 온 세상을 깨우칠 수 있는 있기를 바랐다.
지리산은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고,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왕조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어떻게 하면 저 지리산처럼 하늘이 울 정도의 큰 변란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그런 지조를 갖출까하는 것이 남명할아버지의 염원이었다.
지금 지리산 천왕봉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1982년까지는 남명할아버지께서 지은 시 중‘만만고의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천석종과 같은 남명할아버지. 이 시대에 더욱 간절히 생각나는 것은 어째서일까. 우리 모두 가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이시대의 화두인 것 같다.
2. 단성소[丹城疏]의 산실 삼가 뇌룡정
[남명할아버지의 숨결]
조선조 학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남명할아버지를 일컬어 “천길이나 되는 벼랑에 서 있는 듯하며, 해와 달과 빛을 다투는 듯한 기상은 지금까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우암은 남명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선비들은 구차해지고 풍속은 더욱 투박해져 글을 아는 사람들은 남명할아버지를 사모함이 더욱 간절하다고 했다.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하는 선생의 기상이 잘 드러난 글이 우리들이 흔히 단성소(丹城疏)라고 일컫는 상소문이다.
상소문은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다. 상소문은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비롯해 성균관의 학생들이나 시골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올릴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의 언론 역할을 하여 왕이 백성들의 여론에 따라 정치를 하게 만들기도 했다.
남명할아버지 선생이 지은 단성소. 정확히 말하면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이다. 남명할아버지 선생이 55세 때인 을묘년(1555년)에 조정에서 단성현감(丹城縣監)의 벼슬을 내렸다. 이때 선생이 단성현감의 벼슬을 사양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는데, 이것을 ‘단성소’라고 부른 것이다.
남명할아버지께서 단성소를 지은 곳은 ‘단성’이 아닌 합천 삼가 ‘뇌룡정’이라는 곳이다. 합천은 남명할아버지께서 태어난 고장이면서 동시에 학문을 강론하던 뇌룡정이 있는 곳이다. 합천의 뇌룡정이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는 덕산 산천재에서 학문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남명할아버지께서 48세 되던 해(1548년) 2월 어머니 상을 마치고 삼가 토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30세때부터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밑의 탄동에서 살다가 고향으로 온 것이다. 이때 공부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이 많아 뇌룡사(雷龍舍)를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한 뇌룡사 건너편에 계부당(鷄伏堂 : 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을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고, 근처 절벽에는 할아버지께서 노닐던 곳인 영파대(暎波臺)가 있었다고 한다.
남명할아버지께서 공부하는 곳을 ‘뇌룡’이라고 지은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뇌룡(雷龍)은 “장자(莊子)” ‘재유(在宥)편’의 ‘淵默而雷聲(연묵이뇌성) 尸居而龍見(시거이용현)’에서 따온 말이다. 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뢰처럼 소리치고, 시동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곧 뇌룡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뜻으로 덕을 갖춘 사람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묵묵히 있어도 그 덕의 교화가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지금 삼가의 뇌룡정에는 이 두 구절이 주련으로 걸려 후세 사람들에게 남명할아버지의 숨결을 전하고 있다.
남명할아버지께서는 공부하는 곳을 왜 ‘뇌룡’이란 이름을 지었을까. 이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할아버지께서 삼가로 오기 3년전인 1545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1545년 일어난 을사사화에 남명할아버지의 벗들인 이림 성우 곽순 등이 화를 당하였고,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절친한 선배 송인수가 사약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을 직접 목격한 남명할아버지께서는 어지러운 세상에 나와 벼슬하는 것보다 시골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 선비의 도리라고 여겼다.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어지러운 시대를 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1555년 조정에서 단성 현감을 제수한 것이다. 남명할아버지는 선비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은 조정에 벼슬할 뜻이 없었다. 곧 비장한 마음으로 붓을 들어 사직 상소를 적어 내려갔다.
“제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저의 나이는 예순에 가깝지만 학문은 성글고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시험에 뽑히기에도 부족하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도 못합니다……… 또 전하의 나라일이 이미 그릇되어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자전께서는 생각이 깊어시나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한 아드님이실뿐이니 천가지 백가지의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乙卯辭職疏
宣務郞新授丹城縣監臣曺植 誠惶誠恐 頓首頓首 上疏于主上殿下 伏念 先王不知臣之無似 始除爲參奉 及殿下嗣服 除爲主簿者再 今者 又除爲縣監 慄慄危惧 如負丘山 猶不敢一就黃琮一尺良地 以謝天日之恩者 以爲人主之取人 猶匠之取木 深山大澤 靡有遺材 以成大廈之功 大匠取之 而木了自與焉 殿不之取人者 有土之責也 臣不任爲慮 用是不敢私其大恩 而躑躅難進之意 則終不敢不達於側席之下矣 抑臣難進之意 則有二焉 今臣年近六十 學術疏昧 文未足以取丙科之列 行不足以備洒掃之任 求擧十餘年 至於三刖而退 初非不事科擧之人也 就使人有不屑科目之爲者 亦不過悻悻一段之凡民 非大有爲之全才也 况爲人之善惡 決不在於求擧與不求擧也 微臣盗名而謬執事 執事聞名而誤殿下 殿下果以臣爲如何人耶 以爲有道乎 以爲能文乎 能文者 未必有道 有道者 未必如臣 非但殿下不知 宰相亦不能知也 不知其人而用之 爲他日國家之耻 則何但罪在於微臣乎 與其納虛名而賣身 孰若納實穀而買官乎 臣寧負一身 不忍負殿下 此所以難進者一也 抑殿下之國事已非 邦本已亡 天意已去 人心已離 比如大木 百年䖝心 膏液已枯 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 久矣 在廷之人 非無忠志之臣夙夜之士也 已知其勢極而不可攴 四顧無下手之地 小官嬉嬉於下 姑酒色是樂 大官泛泛於上 唯貨賂是殖 河魚腹痛 莫肯尸之 而且內臣樹援 龍挐于淵 外臣剝民 狼恣于野 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 臣所以長想永息 晝以仰觀天者 數矣 噓唏掩抑 夜以仰看屋者 久矣 慈殿塞淵 不過深宮之一寡婦 殿下幼冲 只是先王之一孤嗣 天災之百千 人心之億萬 何以當之 何以收之耶 川渴雨粟 其兆伊何 音哀服素 形象已著 當此之時 雖有才兼周召 位居鈞軸 亦末如之何矣 况一微身材如草芥者乎 上不能持危於萬一 下不能庇民於絲毫 爲殿下之臣 不亦難乎 若賣斗筲之名 而賭殿下之爵 食其食而不爲其事 則亦非臣之所願也 此所以難進者二也 且臣近見邊鄙有事 諸大夫旰食 臣則不自爲駭者 嘗以爲此事發在二十年之前 而頼殿下神武 於今始發 非出於一夕之故也 平日 朝廷以貨用人 聚財而散民 畢竟將無其人 而城無軍卒 賊入無人之境 豈是怪事耶 此亦對馬島倭奴陰結向導 作爲萬古無窮之辱 而王靈不振 若崩厥角 是何待舊臣之義 或嚴於周典 而寵仇賊之恩 反如於亡宋耶 視以世宗之南征 成廟之北伐 則孰如今日之事乎 然若此者 不過爲膚革之疾 未足爲心腹之痛也 心腹之痛 痞結衝塞 上下不通 此乃卿大夫乾喉焦唇 而車馳人走者也 號召勤王 整頓國事 非在於區區之政刑 唯在於殿下之一心 汗馬於方寸之間 而收功於萬牛之地 其機在我而已 獨不知殿下之所從事者何事耶 好學問乎 好聲色乎 好弓馬乎 好君子乎 好小人乎 所好在是 而存亡繫焉 苟能一日惕然警悟 奮然致力於學問之上 忽然有得於明新之內 則明新之內 萬善具在 百化由出 擧而措之 國可使均也 民可使和也 危可使安也 約而存之 鑑無不空 衡無不平 思無邪焉 佛氏所謂眞定者 只在存此心而已 其爲上達天理 則儒釋一也 但施之於人事者 無脚踏地 故吾家不學之矣 殿下旣好佛矣 若移之學問 則此是吾家事也 豈非弱喪而得其家 得見父母親戚兄弟故舊者乎 况爲政在人 取人以身 修身以道 殿下若取人以身 則帷幄之內 無非社稷之衛也 容何有如昧昧之微臣乎 若取人以目 則衽席之外 盡是欺負之徒也 亦何有如硜硜之小臣乎 他日殿下致化於王道之域 則臣當執鞭於厮臺之末 竭其心膂 以盡臣職 寧無事君之日乎 伏願殿下 必以正心爲新民之主 修身爲取人之本 而建其有極 極不極 則國不國矣 伏惟睿察 臣植 不勝隕越屛營之至 昧死以聞
천길 벼랑에 서있는 듯한 남명할아버지의 기상이 그대로 드러난 글이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에게 초야에 묻힌 일개 선비가 이처럼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남명할아버지가 아니고는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글은 오늘을 힘들게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남명할아버지께서 강학하시던 뇌룡사는 정유재란때 불에 탄 뒤 복원되지 못하고 1678년 합천군 봉산면 계산에 있었던 용암서원(龍巖書院) 부속건물인 뇌룡정으로 재건되고 1758년과 1831년에 중건되었는데 1868년 서원 훼철령으로 없어졌다. 지금 건물은 1883년 허유 정재규 등 삼가의 유림들이 원래의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자료출처-건강한 세상-http://blog.daum.net/g31111/7366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