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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사무침의 시 . 설 렘의 노래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사람은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노래도 흥얼거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래가 시가 되고 시가 다시 노래가 되는 모듬살이 속에서 세계의 몇몇 문명의 보금자리에서는 이들이 글자로 옮겨져 본격적으로 문예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런 호사를 처음부터 누리지는 못하였다. 이웃에서 빌려온 엉뚱한 글자로 자기들의 입말을 옮겨 적자니 마치 둥근 그릇에 네모난 상자를 우겨 넣듯이 아귀가 잘 들어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렇게 겨우겨우 꾸려 놓은 시가의 보따리들도 침략과 약탈이 거듭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떠내려가고 흩어져서 살아남은 것이 거의 없게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서기 888년, 신라의 진성여왕 2년에 삼대목(三代目)이란 향가집이 편찬되었다고는 하지만 죽은 자식 뭣 만진다고 지금 우리들은 책이름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일찍이 전해준 향찰식 표기법으로 비슷한 때에 편찬된 일본의 만엽집(萬葉集)에는 사천 오백 수가 넘는 순일본말 노래가 한자로 적혀 살아남아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우리말 시가로는 향가 스물다섯 수가 고작이다. 이 어찌 참담하지 않으며 이 어찌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니랴! 그 알토란 같은 스물다섯 수란 고려시대 일연(一然 1206 ~ 1289) 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 충렬왕 7년, 1281년)에 실린 열네 수와 고려초 스님인 균여(均如 923 ~ 973)의 일대기인 균여전(均如傳, 고려 문종 29년, 1075년)의 열한 수로 채워진다.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들은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오는 우리말 노래를 한자를 써서 향찰의 방식으로 적은 것이다. 말의 성격이 완전히 딴판인 한국어를 이질적인 한자로 어쨌든 적어 놓은 것인데다 향찰은 일찌감치 맥이 끊어진지라 현대에 와서 노래의 본뜻을 제대로 풀자니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이는 균여 스님이 고려초에 지은 불교 노래로 균여전에 실린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열한 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노래의 내용을 살피자면 보현보살의 열 가지 원을 행하고자 다짐하는 균여전의 보현십원가는 물론이고 신라의 향가도 대부분 불교 노래다. 대놓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닐지라도 불교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그런데 여러분 아시는가? 그 후 21세기에 이르는 오늘날까지 한국의 우리말 시가는 이렇게 불교적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알게 모르게 부처님 가르침의 감화를 입어 지어진 것들이 그 전통의 등뼈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은 우리 글자가 없었던 저 구차스러운 향찰의 시대에서 비롯하여 현대를 향해 내려오며 내 눈에 띄는 몇몇 불교적인 시가들을 추려서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금 맛보고자 한다. 보시기에 귀에 익은 가락도 눈에 낯선 시가도 있을 터이다. 내가 여기에 뽑아 실은 것들에 어떤 뚜렷한 기준이 있지는 않지만 한 쪽으로 쏠려 고른 추림에서 벗어났을까봐는 별로 염려하지 않는다. 이미 말했듯이 예나 이제나 웬만한 우리 시가라면 으레 부처님의 향기가 스며 있어서 여기 찌르나 저기서 뽑아내나 그 향내는 퍼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향가의 세계를 찾아가 그 가운데서도 애절하고 멋들어진 십구체 시 한 수를 읊어 보자. 신라의 경덕왕 시절인 서기 760년쯤 월명사(月明師)라는 스님이 죽은 누이동생을 제사 지내며 부른 노래다. 향찰로 쓰인 원문부터 싣는다. 그리고 조금씩 다른 여러 해석 가운데 양주동(梁柱東 1903 ~ 1977) 박사의 풀이가 있어 원문을 따르고 요샛말 풀이가 그에 뒤따른다. 원문에 한문음을 달 수도 있지만 향찰인 경우 그런 한국식 현대 한자음 읽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런 절창은 우리끼리만 즐기기엔 아까워서 특별히 마지막에 대략적인 영어 번역도 덧붙인다.
祭亡妹歌 月明師 生死路隠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隐去内如辝叱都 毛如云遣去内尼叱古 於內秋察早隠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隠枝良出古 去奴隠處毛冬乎丁 阿也 彌陁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生死路ᄂᆞᆫ 예 이샤매 저히고 나ᄂᆞᆫ 가ᄂᆞ다 말ㅅ도 몯다 닏고 가ᄂᆞ닛고 어느 ᄀᆞᅀᆞᆯ 이른 ᄇᆞᄅᆞ매 이에 저에 ᄠᅥ딜 닙다이 ᄒᆞᄃᆞᆫ 가재 나고 가논곧 모ᄃᆞ온뎌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道닷가 기드리고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이르고 갔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 닦아 기다리리라 A REQUIEM FOR A DEAD SISTER On the hard road of life and death That is near our land, You went, afraid, Without words. We know not where we go, Leaves blown, scattered, Though fallen from the same tree, By the first winds of autumn. Abide, Sister, perfect your ways, Until we meet in the Pure Land. |
시 한 수 한 수를 이런 식으로 풀어 나가다간 책 한 권이 모자라겠다. 속도를 좀 내야겠지만 1443년(조선 세종 25년) 한글 반포까지의 잃어버린 긴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 사이 우리말을 적는 그 나마의 방식인 향찰의 전통은 끊기었고 한문 경전에 토를 붙이는 구결(입겾)이나 이두만 겨우 살아남은 반면에 한문은 번성하여 불가든 유가든 온통 한문에 절어 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그 많은 오도송이나 열반송도 오로지 한시의 형식만을 빌었으니 그 보수적인 전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스님들은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이나 이승에 마지막으로 던지는 노래까지 외국어로 읊다가 돌아가시는 셈이다. 이리 보면 한국의 불교는 천 육백 년이 지나도록 여태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된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아닌가? 이제 구세대의 막차는 떠나가고 신세대의 첫차가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불교의 새벽녘이라고?
아무튼 우리에게 남겨진 얼마간의 고려가요에서도 불교의 흔적은 짙지만 고려의 불교 자체가 대체로 그랬듯이 겉은 흐드러졌되 속은 문드러진 것인지 저 신라의 제망매가 한 수에 비길 만한 절실함과 감동이 모자란다. 순수하고 치열한 정신과 그 결과물인 지고의 예술은 시대가 나아감에 따라 정제되고 진보만 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오래도록 확실히 타락하며 퇴보도 하나 보다.
그리고 이러한 사정은 조선으로 넘어가 한글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 동안의 반짝 생기를 빼고는 마찬가지 양상이었다. 이제는 세상을 완전히 뒤덮은 듯한 유학과 한문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솔찮게 많은 우리말 시조와 가사, 그리고 나중에는 언문소설들이 생겨나긴 했다. 작품으로서 건질만한 것이 드물지 않지만 그것들 가운데 불교가 단지 작품을 구성하는 소품으로서가 아니라 그 작품의 알맹이 정서와 정신으로 무르익은 경우는 많지 않다. 고려의 불교가 일찌감치 문드러진 이후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하수처럼 땅밑으로만 퍼져 땅위의 비바람을 짐짓 잊은 채 민중의 피와 살로 체화하면서 삭아 가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인가? 이에 나는 오늘 이 글에서 그 기나긴 시절을 과감히 쳐내어 던져 두며 다음 기회로 미루는 한편 본격적인 우리말 문학시대가 열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 곧바로 건너뛰련다.
그런데 오백년의 긴 왕조가 이민족에게 망하는 이 혼란과 절망의 곳간에 다가가 쪽문을 비틀어 열자니 우리의 불행이랄까, 원죄의 보따리가 먼저 굴러 떨어진다. 한국의 근대문학을 개척한 뛰어난 몇몇 천재들의 잘라진 머리통들이다. 그 보따리엔 변절자, 민족반역자의 꼬리표가 피떡으로 눌어붙었다. 열 몇 살에 이른바 한국 최초의 신체시라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 ~ 1957)은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된다. 그는 어찌하여 새벽이 오기 전 하늘이 잠시 더욱 캄캄해짐을 몰랐던가! 그가 단 몇 시간, 몇 날, 몇 달, 몇 해만 잘 가누고 추슬렀다면 우리는 지금 얼마나 자랑스러운 문화 영웅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는 여러 번쩍이는 말 중에 일찍이 갈파하기를 우리 문물은 다 불교적 감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의 불교 이해와 평가는 일반인의 어림짐작을 훨씬 뛰어넘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근대소설을 일으킨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 ~ 1950) 만한 문학의 천재는 또 있었던가? 그는 또한 불교를 사랑하여 ‘원효대사’ ‘이차돈의 사’ ‘마의태자’ 등을 지었으며 정신적 방황 끝에 불교에 귀의하기도 하였고 쏟아지는 원망과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 병약한 제 한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봉선사로 숨어들기도 했으며 이런 감성 어린 시조를 짓기도 했다.
관음상 이광수 관음상 이뤄지다. 대자대비 하신 모습 끌로나 붓으로나 옮길 줄이 있으련만 하그리 그리운 맘에 흙을 빚어 봅니다 시방 아무데나 아니 나심 없으시니 이 따이 부정키로 바리실 줄 있으시리 임이여 현신하소서 그 얼굴 보이소서 서른두 가지 마음대로 나투시니 끝동 회장저고리 남치마로 차리시고 젊으신 어머니 되시와 오래 여기 겹소서 |
선각자에서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회의하는 계몽주의자에서 마침내 확실히 변절하여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찬양하고 일제의 침략전쟁 정당화와 전시동원 독려에 앞장서 글재주를 판 이 괴물을 어찌할 것인가? 해방이 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 ~ 1949)가 ‘아직 그자가 살아 있단 말이냐!’고 역정을 냈다는 그 이광수다. 뒤이어 반민특위에 오랏줄로 묶여간 그는 육이오의 와중에 납북되었다가 전쟁 도중 이북에서 병사한다.
민족의 일원으로서도 불자로서도 안타깝고 부끄러운 이런 절망과 허무의 기억 속에서도 한 가닥 빛이 있으니 우리는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 ~ 1944) 보유국인 까닭이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만해 보유종교다. 끝까지 지조를 지킨 독립지사인데다가 불교 개혁가, 거기에다가 깊고도 아름다운 우리말 시를 써 국문학을 한 걸음 높이 끌어올린 그의 시 가운데 이런 기막힌 것도 있다.
봄낮(원제: 春晝) 한용운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피고 앉았더니 쌉쌀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꾸기 소리는 산을 넘어 오더라 따슨 볕 등에 지고 유마경 읽노라니 가벼웁게 나는 꽃이 글자를 가리운다 구태여 꽃 밑 글자를 읽어 무삼하리오 대실로 비단 짜고 솔잎으로 바늘 삼아 만고청수 수를 놓아 옷을 지어 두었다가 어즈버 해가 차거든 우리 님께 드리리라 |
이민족의 모멸과 압박을 견디며 어쨌든 우리 시가는 지평을 넓혀 나간다. 개인과 겨레의 몸과 마음은 상처 입고 시달려 조금씩 침략자에 길들여지면서도 그러는 가운데 솟아오르는 문학적인 역량은 강압으로 쉽게 문질러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에 지금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의 날에 삶이 걸쳐진 시인들 가운데 몇몇을 내키는 대로 순서 없이 소개하려 한다. 시인 각자에 따라 영욕은 있겠으나 각자의 불교스러운 문학적 성취에 치중하였다.
일반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경남 창원 출신으로 승려와 교육자, 시인이며 한학자의 길을 걸은 월하 김달진(月下 金達鎭 1907 ~ 1989)이 있다. 그는 이십대 초반에 문단에 나왔지만 민족의 현실 앞에 절망하다 서른이 되기 전에 강원도 유점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불교전문학교를 거쳐 해방후에는 환속한 몸으로 동아일보 기자도 했고 해군사관학교에 출강도 했는데 그 후 삼십여 년간 한학자로서 고전과 불경 번역에 남은 일생을 바쳤다.
육당이나 춘원 등 초창기 문인들은 작품을 통해 부처님의 감화를 곧바로 펼치려 했고 만해도 시를 통해 이를 중생들에게 살갑게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월하는 이런 구심적 차원보다는 원심적 차원에서 온전한 서정의 시세계를 펼쳐 나간다. 그리고 감상이나 기교로 흐르기 쉬웠던 당시의 서정에 도(道)의 시학을 불어넣는다.
샘물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 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
여든이 넘도록 장수한 김달진과는 달리1900년대 초에 태어난 문인들 중엔 요절한 이들이 많았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 김유정(金裕貞 1908~1937), 이상(李箱 1910~1937), 이장희(李章熙 1900~1929), 나도향(羅稻香 1902~1926), 최서해(崔曙海 1901~1932), 그리고 남궁벽(南宮璧 1895 ~1922) 들이 있다. 서른을 가까스로 넘겼거나 아직 새파란 이십대에 맞는 이런 죽음은 아깝고 안타까운 사적인 죽음이지만 나같은 일반인의 직관으로는 식민지 시대를 겪던 문인들의 절망적 죽음으로 받아들여진다. 문학평론가 김윤식(金允植 1936 ~ 2018) 교수는 이를 ‘본격적인 문단적 죽음’이라고 했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초몽(草夢) 남궁벽은 오산학교에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는 천재시인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지만 하늘의 시샘일까, 스물여덟 살에 그만 세상을 떠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그 나이의 배가 넘도록 살았어도 변변한 시 한 수 못 남기고, 시인으로 이름 써 놓고 그저 낙서인으로 읽히는 회한의 인사도 적지 않으리라만.
풀 남궁벽 풀, 여름 풀 요요끼(代代木) 들의 이슬에 젖은 너를 지금 내가 맨발로 삽붓삽붓 밟는다 여인의 입술에 입맞추는 마음으로 참으로 너는 땅의 입술이 아니냐 그러나 네가 이것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내가 죽으마 흙이 되마 그래서 네 뿌리 밑에 가서 너를 북돋아 주마꾸나 그래도 야속다 하면 그러면 이렇게 하자 네나 내나 우리는 불사의 둘레를 돌아다니는 중생이다 그 영원의 역정에서 닥드려 만날 때에 마치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될 때에 지금 내가 너를 삽붓 밟고 있는 것처럼 너도 나를 삽붓 밟아 주려무나 |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성북동 비둘기’로 잘 알려진 김광섭(怡山 金珖燮 1904 ~ 1977)의 시에는 ‘저녁에’라는 것도 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싯귀인 듯한데, 그렇지, 대중가요, 포크송에 쓰여 우리 당시 젊은이들의 귀에도 익숙했던 노랫말이다. 인연과 윤회를 노래한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함북 경원 출신인 김광섭은 와세다 영문과를 나와 중동학교 교사로 있을 때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불러 넣었다는 구실로 네 해 가까이 감옥살이를 한 적이 있다. 강인함과 올곧음은 이런 일상적이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시어 속에서 배어나는 것일까?
아래는 청록파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지훈(芝薰 趙東卓 1920 ~ 1968)의 시다. 경북 영양 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나왔는데 주로 자연이나 무속, 불교의 선을 소재로 한 민족적인 색채가 짙다.
고사(古寺) 1 조지훈 목어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 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 |
경북 청도가 낳은 오누이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1912 ~ 1970)와 이영도(丁芸 李永道 1916 ~ 1976)가 있다. 문단도 서울 시골을 따지는가 모르겠지만 청도에서 태어나 주로 대구에서 살며 대구일보 문화부장을 지낸 이호우의 시조는 가히 국가 문화재급이다. 여동생 이영도는 남편을 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여의었는데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 ~ 1967) 시인은 홀로 된 그를 사랑하여 오천 통이 넘는 연서를 써 보냈다.
석굴암 석불 이호우 아니로다 아니로다 석수 손길 아니로다 하도 한 원이 쌓여 이루어진 현신불을 범종이 목 잠겨 천년 석상으로 남은 허울 |
그런데 우리 문단에서 애틋한 사랑 이야기의 예라면 빼놓을 수 없는 백석(白夔行, 필명 白石 1912 ~ 1996)이 있다. 평북 정주 출신으로 오산고보와 일본의 아오야먀 학원을 나온 백석은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기리며 우러르고 있다. 그런데 그는 해방 직후 고향에 돌아가 머문 까닭에 북한에 남아 오랜 기간 남한에서는 월북작가로 취급되었다가 1988년에야 재북작가로 해금되었다. 한때 백석과 사랑을 나누다 애꿎게 생이별했다는 자야(子夜) 김영한, 곧 길상화 보살이 백석을 그리워하며 평생 일군 요정 대원각을 접고서는 이를 고스란히 법정 스님께 바쳤다는데, 서울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가 그것이다.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전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그런데 이쯤 해서 우리는 또 한 사람의 곤혹스러운 거장을 피해 갈 수가 없다. 대한민국의 시단에서 감히 그의 그림자를 벗어날 이들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문화 권력의 지배자,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 1915 ~ 2000)가 그 사람이다. 그런데 곤혹스럽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른 노골적인 친일행위자이며 부역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군사독재 권력을 철없이 찬미한 어용시인이기도 하다. 하기야 자신의 말로는 일제가 망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고 하니 이광수와 같은 과이기는 한데 그에 한참 못 미치는 아류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언어의 마술사요 시적 상상력의 천재는 어찌하여 사회적, 정치적 상상력에 있어서는 그렇게도 아둔하게 때 맞추어 바닥만을 긴 것일까?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서정주는 스님 밑에서 공부하고 중앙불교전문에 들어갔다 중퇴하는 등 일찍이 불교와 인연을 맺었으며 ‘신라초’, ‘동천’ 등 그의 여러 시집들은 온통 불교적 주제에 젖어 있다.
동천(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임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일제강점기부터 활약하여 해방후에까지 상당한 시적 영역을 확보한 시인으로 충남 서천 출신 신석초(石艸 申應植 1909 ~ 1975)를 빼놓기 어렵다. 그는 이육사(李陸史 1904 ~ 1944)와 사귀며 여러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아래에 그 일부분을 내보인 대표작인 장시 ‘바라춤’을 비롯하여 그의 시들은 이승의 내적 갈등을 다룬 작품으로서 동양정신과 서구시적 요소의 이중적인 구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평이다.
바라춤 신석초 언제나 내 더럽히지 않을 티없는 꽃잎으로 살어 여려 했건만 내 가슴의 그윽한 수풀 속에 솟아오르는 구슬픈 샘물을 어이할까나 청산 깊은 절에 울어 끊인 종 소리는 하마 이슷하여이다 경경히 밝은 달은 빈 절을 덧없이 비초이고 뒤안 으슥한 꽃가지에 잠 못 이루는 두견조차 저리 슬피이 우는다 아아, 어이하리. 내 홀로 다만 내 홀로 지닐 즐거운 무상한 열반을 나는 꿈꾸었노라 그러나 나도 모르는 어지러운 티끌이 내 맘의 맑은 거울을 흐리노라 몸은 설워라 허물 많은 사바의 몸이여! 현세의 어지러운 번뇌가 짐승처럼 내 몸을 물고 오오, 형체, 이 아리따움과 내 보석 수풀 속에 비밀한 뱀이 꿈어리는 형역(形役)의 끝없는 갈림길이여 구름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 지는 꽃잎도 띄워 둥둥 떠내려가것다 부서지는 주옥의 여울이여! 너울너울 흘러서 창해에 미치기 전에야 끊일 줄이 있으리 저절로 흘러가는 널조차 부러워라 |
지면이 무한정한 것도 아니니 이쯤 해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라고 해방 직후 문단에 나온 이원섭(巴下 李元燮 1924 ~ 2007)의 시로 오늘은 일단 마무리를 하자.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초기의 기독교적인 체험과 더불어 불교적이고 동양적인 관점에서 인간의 고결한 정신세계, 영혼의 순수성을 추구한 작품을 발표하여 문단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이후 불교학자로서 많은 고전을 번역하였으며 여러 권의 불교 관련 저술을 하였다. 그래선지 이 시는 무슨 법문 같기도 하다.
집을 비워 놓고는 이원섭 인수봉을 찾았더니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했다 또 백운대를 찾았더니 조금 전에 나갔다 했다 내친김에 만경대에 들러 보았으나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괘씸한 생각이 들어 문수봉을 찾아가 털어놓았다 어디를 싸돌아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집을 비워 놓고는 그러자 문수봉이 정색하고 물었다 그럼 선생은 지금 집에 있습니까 아니면 집을 비우고 있습니까 놀라서 깨어보니 새벽 네 시였다 |
위에서 내리 밟아 와 보듯 향가든 현대시든 불교 없이 우리 시단, 문학을 온전히 논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불교 없이, 불교를 대략으로라도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우리 시, 우리 노래를 짓거나 눈 밝게 들추어 살펴볼 수 없다. 앞으로 얼마나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 우리가 저 향가의 시대를 떠나 훑어 내려오며 마침내 새파랗고 통통 튀는 오늘날의 젊은 남녀 시인들까지 두루 챙겨 볼 수가 있다면 그들 각각의 재주 부리기와 멋 부린 겉모양은 어떨지라도 부처님의 향훈이 이들 쓸 만한 우리 시, 진정한 우리 노래의 후예들에게도 너르고 깊게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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