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인근에 위치한 유학산을 찾아간다.
빨갱이 놈들의 남침으로 인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6.25전쟁의 최대격전지로서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으로 말이다.
대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디디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산행지까지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3호선 태전역에서 구미 방면 시외버스를 타고 다부동전적기념관이 위치한 다부리에서 하산한다.
들머리는 도로 건너 외딴집이 있는 곳 옆.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서 하차하여 기념관을 둘러보려니 문이 잠겨있다.
사무실 직원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코로나 탓이리라!
해서, 그냥 주위를 둘러보고 나온다.
기념관 옆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유학산.
국도를 건너 외딴집 좌측으로 들머리가 있다.
등로는 완만하게 이어지고,
시그널이 달려있어 이 길로 올라갔더니 곧 좌측으로 가는 등로와 만났다.
등로 주위로는 거의 대부분 참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674고지.
유학산은 6.25 전쟁 때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다부동전투의 현장이다.
이곳 674고지는 동쪽의 다부원 협곡을 통하는 대구 북편 관문 국도와 서쪽으로 왜관방면 도로를 잇는 Y선의 감찰 방어 고지이다.
8.13 국군 제1사단은 동명초등학교에 사령부를 두고 인민군 제13사단이 점령한 이 고지에 1개 대대를 투입하여 8부능선까지 진격했으나 가파른 산위에서 내리던지는 수류탄 때문에 빈번히 물러나야 했다.
1:3의 열세한 병력에다 학도병과 신병이 많은 아군은 산악 전술 상 개인 장비를 가볍게 하고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사격 아래 돌격하여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육탄전을 거듭하다가, 8월 21일 복실(천평)에서 벌어진 한미 최초의 전차전을 이겨낸 여세로 8월 22일 새벽 특공대가 백병전을 감행하여 비로서 완전 탈환했다.
9월 1일 왜관-가산은 미 제1기병사단이, 국구은 팔공산 쪽을 맡아 9월 2일 개시된 적의 마지막 총 공세 때 이 고지가 다시 돌파당했으나 9월 15일 인천 상륙에 맞춰 한미 연합 작전으로 반격하여 재 탈환하고, 9월 21일에는 병력이 1,500명만 남은 적 제13사단의 참조장(총좌:대령급)이 귀순해 와 한국전쟁 중 최고위 포로가 되었으며, 9월 24일 부터 총 추격전을 펴면서 혈전의 '다부동 전투'를 마쳤다.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는 길도 지나고,
바위길도 나타난다.
무성한 잡목 사이도 지나고,
완만한 봉우리도 넘는다.
등로는 대체로 편안하고 경사도 그리 급하지 않아서 걷기가 좋다.
하지만 자욱한 미세먼지는 오늘도 맹위를 떨치는데...
흐릿한 가운데 유학산이 시야에 들어오고,
조망이 트여 건너편의 황학산과, 좌측으로 백운산과 매봉산을 바라다 보지만 형체를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
아래로 다부동전적기념관도 희미하다.
제법 괜찮은 소나무.
좌우로 가지를 벌리고 누울 듯이 서 있는 소나무.
837고지에 도착했다.
6.25 한국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에서 다부동 쪽은 국군, 낙동강 쪽은 미군이 맡아 경찰대와 주민 총력전으로 인민군 정예 3개사단을 격멸하였다.
유학산 제2봉인 이곳 837고지는 대구 진입로를 감찰 방어하는 제1의 요지이다.8월 13일 인민군 제13사단이 먼저 점령한 이 고지에 제1사단 제12연대는 다부리(유전부락)에 지휘소를 두고 3개 중대를 투입했다.
용사들은 1:3의 열세에다 쏟아지는 수류탄막을 뚫고 돌격하였으며 주민들은 한더위 속에 주먹밥과 보급품을 나르고 부상병을 후송했다.
8월 17일 다부협곡 도로에 적 전차가 증강되자 미군 2개 연대가 지원되고, 8월 18일 상황이 급박해져 정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으며, 8월 20일 새벽 재정비된 2개 중대가 암벽을 기어올라 백병전을 거듭했다.
8월 21일부터 대대장이 인솔하는 150명의 결사대가 이틀 간의 격전 끝에 8월 23일 새벽 2시 마침내 정상에 뛰어올라 주봉(유학산 839m)까지 탈환하여 8월 30일 9km의 방어선을 미군에게 인계하고 국군은 팔공산 쪽을 맡았다.
9월의 재공세 때 방어선이 돌파되어 동명 지천까지 밀렸으나, 9월 15일 인천상륙에 맞추어 한미 연합 작전으로 다시 격퇴하고, 9월 24일부터 총 추격전을 펼치면서 격전 기간 동안 매일 수백명씩 산화한 이곳이 반격의 전환점이 되었다.
거대한 암벽이 나타났다.
그 앞에는 암릉도 이어지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지만 시야는 여전히 흐릿하다.
중간중간 나타나는 기암들도 둘러보면서,
지나온 봉우리들도 뒤돌아본다.
마당바위 비슷한 멋진 암릉 위에 다가섰다.
따뜻한 날씨에 바람도 거의 없어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간다.
쳘계단도 있고...
통신시설.
도봉사갈림길.
유학산(839m) 도착.
839고지는 북고 남저의 특징이 뚜렷하여 다부동을 남북으로 5호(대구~안동 국도), 25호(대구~상주 국도) 도로를 제압하여 대구를 공격하는데 가장 유리한 다부동 격전장의 제1의 요지이다.
이 고지의 방어부대는 제1사단 12연대 1대대와 3대대, 그리고 11연대 3대대로 8월 1일 낙정리에서 낙동강을 도하한 후 지연전을 하면서 이곳에 방어선을 형성한 것은 8월 12일경이었다.
적군은 제15사단 2개 연대가 공격에 가담하였으며, 국군은 8월 30일 이곳 진지를 미 제1기병사단에 인계하고 아군 제1사단 본대와 함께 영천방면 전투에 가담하였다.
9월 1일 미 제1기병사단이 이 지역을 방어하다가 북괴군의 총공세에 밀려 660고지(도덕산) 일대까지 후퇴하게 되었으나 9월 16일 유엔군의 총 반격으로 미 제1기병사단과 아군 제1사단이 이 지역을 탈환하고 잔적을 소탕한 후 9월 24일 북진을 함으로서 이곳 유학산 전투는 종결되었다.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의 전투로 주야간 9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로 아군은 600여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낙동강 방어전투로 아군 1만여명이 희생되었고, 적군 1만7천5백여명과 유엔군 3천여명이 희생되는 전투를 치른 곳이다.
헬기장을 지나가니,
헐!
웬 포장도로가...
생강나무.
겨우살이는 고지대에 자생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곳에서 볼 줄이야...
꿀벌도 벌써 일어나 꽃을 찾았다!
봉두암산이 보인다.
낙엽쌓인 평평한 등로는 걷기에 참 좋다. 비가 온 뒤라 먼지도 날리지 않고.
다시 시야가 트이는 가운데 지나온 유학산을 뒤돌아보니 어느새 멀어져 있다.
쉰질바위.
질은 길의 사투리이니 높이가 50길이나 된다는 의미겠지...
유학산 좌측으로 천생산도 보이고...
쉰질바위 위에 올라섰다.
미세먼지는 오전보다는 조금 덜한 것 같지만 아직도 여전하다.
당겨본 유학산.
낙동강도 당겨보고,
진행할 봉두암산.
잔나비걸상버섯 같은데 아직 어리다.
진달래는 곧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은데...
활짝 핀 진달래를 그리워하며 미소를 짓고 있는 돼지의 모습이 푸근하다.
봉두암산에 도착하니 봉두암에 오르는 철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요거 경사가 상당히 급해 조심하는 게 좋다.
봉두암에서 바라 본 선산 인동 시가지.
봉두암에서 바라 본 천생산.
헬기장도 있다.
평상도 마련되어 있고...
여기서 경북교통연수원 방향으로 하산한다.
양탄자도 깔려 있는데 솜씨가 엉망이네!
여기서는 인동고등학교 방향으로.
체육시설을 지나면,
바로 부영아파트 단지로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을 마감한다.
공원을 지나 대구 방향 시외 버스를 타야 하는데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도상거리 13.5km, 6시간 30분 걸렸다.
미세먼지가 아니면 멋진 산행이 되었을 하루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한국전쟁 시의 아군의 활약과 목숨을 건 희생의 고귀함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킬 수가 있었고!
다시는 잊지 말아야 할 동족상잔의 비극을 후세에 물려주는 어리석음을 기필코 범하지는 말아야 할 터이고 말이다.
그런데도 무식한 자들은 막무가내로 평화만 외치고 있으니!
외치기만 하면 국가가 평화로워지는가?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평화는 모래 위에 성쌓기라는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첫댓글 대구에서 구미까지 멋져요
미세먼지 때문에 조망이 별로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