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열전 ㉓ 재령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헌트(William Hunt, 1869-1953)
청교도 신앙과 선교적 비전으로 개혁주의 교회 건설
1897년 미국북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엄 헌트(한위렴) 선교사는 황해도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여 황해도 재령 선교의 아버지로 불렸다. 한국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대를 이어 한국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가문에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린튼 선교사 그리고 헌트 선교사 가문도 빼놓을 수 없다. 특별히 윌리엄 헌트 선교사는 아들 부루스 헌트(한부선) 선교사와 함께 선교사역과 신학교육으로 한국장로교 개혁주의 신앙의 정체성을 올바로 제시했다.
황해도 선교의 산파
한위렴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청교도 신앙과 선교적 비전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의 후손이다. 한위렴 선교사는 1897년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받아 그의 첫 안식년을 갖기까지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평양에 머물면서 재령에 선교본부가 세워지기까지 그 지역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순회전도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재령 선교를 위한 산파의 역할을 감당했다. 농경지가 많고 평야가 발달한 대표적인 곡창지대인 황해도 재령은 예로부터 평양과 서울의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한국 초기 기독교의 선교기지와 이웃해 있었다. 이미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 몇몇 교회를 설립해 놓은 상태였다.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는 1893년에 재령지역 최초의 교회인 신환포교회를 설립했다. 재령에서 80km 정도 떨어진 평양에 갔다가 마펫에게 복음을 들은 한치순이 재령으로 돌아와 예배를 드리며 전도를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마펫이 재령을 방문해 교회를 세운 것이다. 1895년에는 재령의 모교회 역할을 할 재령읍교회가 세워졌다. 이곳에서 한위렴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장로교 신앙고백과 신조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교리교육을 강조했다.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초신자들을 철저한 교육을 통해 양육하는 것을 필수적인 과정으로 시행한 것이다.
북장로교 선교부는 장로교 신학의 기반인 칼빈주의와 신조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미국 청교도들과 장로교회가 추구했던 원리를 초기부터 한국교회에 적용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장로교회의 전통과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자진전도와 자력운동 그리고 자주치리의 세 가지 원리를 한국 장로교회의 중요한 특성이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이야말로 신약성경의 전도원칙이며, 한국교회가 자립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재령 선교지부 개척
1906년 마침내 재령에 공식적인 선교지부를 설치하였다. 황해도 재령 선교지부의 설립은 미국북장로회 확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곧 재령읍교회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 기존의 교회를 돌보며 인근 지역의 전도사역에도 힘을 쏟았는데, 권서들과 함께 성경과 전도지를 들고 수백여 마을을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와 성경학교를 설립했다. 한 작은 읍이었던 재령은 황해도 지역의 교회부흥과 다양한 사경회, 재령 성경학교 운동, 그리고 명신학교를 통한 인재양성 등을 주도해 나가는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당시 미국에서 진행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에 세워진 여러 성경학교들을 통하여 배출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자발적으로 다양한 전도와 봉사활동에 헌신했다. 이뿐만 아니라 1908년에는 재령 제중병원이 설립되어 화이팅(황호리) 선교사가 순회 진료와 의료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함으로 선교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황해도 재령에서의 선교사역은 이렇게 복음전도와 함께 교육과 의료를 비롯한 사회적 차원의 관심이 균형을 이루며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했다.
교회지도자들과 함께 한 한위렴 선교사
재령 여성사경회 성도들
재령남자성경학교 교사들
중국선교의 기초를 놓다
일제강점기 시련이 가중된 상황 속에서도 산동선교를 통한 중국 복음화의 노력이 이어졌다. 1912년 총회를 결성한 한국장로교회는 총회를 조직한 것을 기념하여 해외선교를 계획한 것. 1907년 독노회를 조직하면서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보낸 것처럼 총회를 시작할 때총회 전도국은 한위렴 선교사에게 적합한 선교지를 물색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는 중국을 방문해 중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과 중국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중국선교 방안과 선교지역을 논의했다. 그 결과 지리적으로 가깝고 미북장로회 선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중국 산동 지역을 선교 대상지역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13년 마침내 총회에서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3인을 정식 선교사로 파송함으로 한국교회의 산동선교가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연해주와 간도에 이어 중요한 한국기독교의 선교지로 떠올랐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지역의 선교는 단순한 복음전도의 차원을 넘어 민족운동의 기지 확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를 이어 한국교회를 섬긴 사랑
한위렴 선교사의 아내 베르티(Bertha Finley Hunt)는 1868년 일리노이주에서 출생했다. 한위렴 선교사와 약혼한 상태였던 그녀는 1898년 1년 늦게 미국을 떠나 일본에서 헌트와 결혼하고 평양에 주재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왔다. 그녀는 숭실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의 하나가 김인식이다. 빼어난 음악적 기질을 가진 김인식은 서양음악의 개척자로 그레이함 리 선교사에게 코넷을 배우고 많은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이후 홍난파와 이상준 같은 대표적인 음악가를 배출했다. 김인식의 대표적인 번역곡은 ‘예수 나를 위하여’라는 찬송가가 있다.
한위렴 선교사의 아들 브루스 헌트(Bruce F. Hunt, 한부선)는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나 자랐다. 1919년 미국으로 건너가 휘튼대학과 럿거스대학,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이후 1928년 아버지에 이어 제2세대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청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36년부터 한부선 선교사는 만주 하얼빈에서 고국을 떠나 흩어져 살던 한국이민자들을 대상으로 사역을 했다.
그는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에서 불법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할 때 장인 블레어와 함께 참석해 총회의 신사참배결의에 대한 반대를 공개적으로 외치다가 끌려 나갔다. 이후 한부선 선교사는 일본의 탄압을 두려워한 목회자들에 의해 만주 봉천노회에서 목사직까지 제명하였지만, 정처 없이 살아가던 한국인 성도들에 대한 사랑은 여전했다. 그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살던 성도들을 돌보고 성도들이 신앙을 지킬 것을 격려했다. 그리고 우상숭배의 죄를 지적하고, 신앙생활의 핵심을 담은 성경의 가르침을 정리한 ‘언약문서’를 만들어 신사참배에 저항하는 한인 성도들을 규합하고 그들을 영적으로 돌보았다. 이 언약문서는 간도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의 신앙기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고신과 보수신학의 신앙윤리와 좌표가 되었다. 이렇게 열심히 사역하던 브루스 헌트는 1941년 하얼빈 자신의 집에서 검거되어 단동과 심양의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42년 포로교환 형식으로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1946년 그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청주, 만주를 거쳐 부산에서 새롭게 사역을 시작하였고, 이후 신사참배 반대자들과 함께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1960년까지 교수로 섬겼다.
한부선 선교사
황해지역 성도들과 함께
※ 선교사 열전 이야기를 연재하며 한국고등신학연구원 김재현 박사의 ‘한반도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KIATS)을 참고문헌으로 편집했다. 이밖에 KPM 선교기념관 등의 사료를 참고했다.
출처 : 고신 뉴스 K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