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파수 맞추기/김정숙
그런 줄 알았다
마음은 타인이다. 머리가 결심한 일을 뒤집어 놓는다. 시킨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린다고 돌아서지 않는다. 관심을 버리라 했는데 바라보고, 가지 말라 해도 어느새 달려가 있다. 애써 모른 척, 못 본 척했지만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비포장 길을 한참 달려 산허리 중턱에 무심히 앉아있는 그곳, 많은 이의 만류에도 덜컥 인연을 맺어 버렸다.
손이 시린 이른 봄. 가냘픈 모습으로 언 땅을 뚫고 나온 새싹을 만났다. 앳된 초록. 낭창이며 서 있는 줄기. 속살보다 여린 게 오묘한 색도 지녔다. 찬바람을 가르며 꼿꼿하게 서서 겨울의 결계를 푼다. 짐승의 발에 밟힐까. 빗줄기에 쓰러질까. 내 맘이 더 떨린다. 하지만 햇살이 나른해질 즈음엔 억세진 그들을 이길 수 없어 한 귀퉁이를 내주었다.
몽롱하다. 어딜까. 한 곳을 지날 때면 어렴풋이 풍기는 향에 취한 듯 코를 벌렁댄다. 퇴비 냄새 가득한 들판 사이 들킬 듯 말듯 나는 내음. 둘러보니 찔레가 보인다. 수줍은 향기는 어떻게 숨길 수 없었나 보다. 행복한 기분 탓에 잘 다독여 두었다. 여름이 익을 즈음엔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 가시를 고추 세우고 기세가 등등하다. 하는 수 없이 가장자리를 온통 비워 주었다.
마냥 좋았다. 풀을 뽑고 가지를 다듬고 그곳에 마음을 두었다. 뙤약볕 아래서도 그들을 위해 물을 뿌렸다. 기운이 부족한 날은 기어서라도 풀을 뽑았다. 거친 땅의 살갗을 다듬고 매만지고, 땀을 흘리고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면 하나가 된 것 같아 기뻤다.
어떤 날은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그곳에서 울었다. 다른 이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연을 남김없이 꺼냈다.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며 일어서는 연습도 그곳에서였다. 형용할 수 없는 아픈 감정과 많은 상념과 쓰린 고통이 생길 때마다 땅을 파고 묻고 또 묻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다. 나는 늙어 가지만 현상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바람에 묻어오는 풀들은 더 많이 늘어나고, 온갖 종류의 벌레가 괴롭힌다. 두더지는 터널을 내어 작물을 죽게 하고, 내가 묻어두었던 상처들은 다른 모습이 되어 나를 괴롭힌다. 내가 그리던 풍경화는 매 해 원치 않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나는 사랑인줄 알았다.
그런 줄 몰랐다
나는 수억의 대군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소리도 없고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뛰어난 매복으로 바람을 타고 시간을 이용해 진군한다. 이들의 동선을 감지한 순간이면 이미 늦었다. 베어내고 독한 약을 뿌려도 그들은 멈추지 않고 진격을 한다. 잠시 방심해 틈을 보이면 거침없이 점령한다.
미인계도 뛰어나다. 야리야리한 얼굴. 매서운 바람에도 절대 꺾이지 않고 차가운 눈발에도 꼿꼿하다. 애처롭게 서서 보호 본능을 한없이 자극한다. 언 땅을 뚫고 고개를 내밀면 자태가 예뻐 어쩔 줄 모른다. 잔설이 있는 들판에 홀로 피어 있으니, 보는 이의 마음을 뺏기는 쉬운 일이다. 그 후엔 쉼 없는 번식으로 공간을 넓혀 가다 보면 억세질 대로 억세져 터줏대감인 양 자리를 차지한다.
화생방전에 능하다. 봄날 찔레 향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그런 다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한 뺨씩 뻗어 나간다. 밭둑을 어느 정도 점령할 때 쯤 상대는 정신을 차린다. 너무 많아 어쩌지를 못하겠다며 구시렁거리며 낫을 들지만 이미 늦었다. 가시에 몇 번 찔려 피를 본 후에야 패함을 인정하고 자리를 내준다.
내통하는 첩자가 많다. 헤아릴 수 없는 곤충들을 쫙 깔아두고 작전을 개시한다. 산모기 몇 방이면 두려움에 벌벌 떤다. 지렁이는 한순간 놀라게 하는 바람잡이지만 두더지는 내 안에서 자기만의 왕궁을 만든다. 허락 없이 이것저것 심어둔 작물은 제대로 자랄 수 없지. 바람은 다양한 지원군을 보낸다. 매번 새로운 잡초에 헷갈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다. 바람과 나의 비밀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녀는 편애와 변덕이 심했다. 자신이 원하는 작물만 고집한다. 몇 해 전에는 깨만 심고 또 재작년에는 도라지만 심었다. 그 변덕으로 많은 친구가 죽었다. 작년부터는 대추나무만 편애한다. 새들이 먹고 퍼트린 씨가 뽕나무가 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살아 보려고 애써 제법 자리를 잡았는데 그걸 단방에 잘라버렸다. 너그러움이나 선량함은 보이지 않는다.
무기라고는 무뎌빠진 낫 하나. 손잡이가 흔들거리는 호미 두 자루. 싸구려 분무기 통이 전부였다. 어느 날 예초기 하나를 들고 와 덤빈다. 날이 윙윙 돌아가니 익숙지 않아 자빠졌다.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해 사람을 불러 간신히 갔다. 그러다 태풍이 온다고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날. 목발을 짚고 와 의자를 치우느라고 낑낑거린다. 꼴이 웃기기도 하고 바보 같기도 하다.
그 후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해가 바뀔 때까지 안 보이니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삼월이 된 첫 날 절뚝이며 그녀가 왔다. 여느 날처럼 허리에 앞치마를 둘렀지만 주머니에 넣어둔 손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전과 달리 슬프다. 햇살에 앞산까지 선명한날 ‘안개’라는 노래가 깔리더니 하늘을 보고, 심어둔 나무를 바라보더니, 애잔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이젠 정말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한 건지.
나는 단지 스치는 바람과 그때그때 나누는 햇살과, 생존에 충실한 식물들과 함께 뒹굴며 자유롭고 싶었다. 그녀의 행동이 사랑인 줄 몰랐다.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온 건 아닐까?
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