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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3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인천항구 정박중 이던 6300톤급 화물선 폭발
2021년 아마추어 다이버 바다 청소하다 로마시대 금화 발견
두 명의 아마추어 루이스 랑스와 세자르 지메노 프리 다이버가 스페인 알리칸테주 하비아 포르티촐만 해변 앞 해저에서 휴가를 보내다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은 1500년전 로마시대 금화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해변에서 약 7m 떨어진 곳에 있던 금화 1개를 발견했는데 보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후에 7개를 더 찾아냈다. 그리고는 45개를 추가로 더 발견해 총 53개의 금화을 찾아냈다.
고고학역사유산연구소 연구자들은 이 금화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사이에 로마시대에서 주조된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파악된 금화 속 인물은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 금화 3개, 발렌티니아누스 2세 금화 7개, 테오도시우스 1세 금화 15개, 아르카디우스 금화 17개, 호노리우스 금화 10개이다. 나머지 금화 1개 속 인물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2021년 멕시코정부, 비판적 학자· 교수 31명 중범감옥에 투옥
2020년 공연예술의 대부로 불린 이종덕 전 예술의 전당 사장 세상 떠남(85세)
202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2020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정은경 질병관리청장과 봉준호 감독 선정
2019년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17세) 유엔 기후행동정상회의 연설
2017년 정조대왕 능행차 222년 만에 재현(-9.24) 서울 창덕궁-수원-화성 융릉 59.2km 연인원 4,580명 참가
2016년 공공‧금융부문 노동조합(조합원 20만명) 성과연봉제 도입 반대 사상최대규모 연쇄파업
2015년 ‘MLB 전설’ 요기 베라 별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큰 점수 차를 뒤집는 극적인 승부가 연출될 때마다 회자되는 야구 명언으로 유명한 미 프로야구(MLB)의 전설 요기 베라(90)가 23일 세상을 떠났다.
1925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베라는 1943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때 해군 대공포 사수로 복무한 그는 1949년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이후 양키스에서 18시즌간 포수와 외야수로 뛰면서 10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빼어난 방망이 솜씨와 수비 능력을 발휘해 아메리칸리그 MVP(최우수선수)로도 3번이나 뽑혔다.
그를 대표하는 명언은 지도자 시절에 나왔다. 1973년 뉴욕 메츠 감독을 맡은 베라는 시즌 중반 팀이 꼴찌로 처지자 취재진에게 “이번 시즌은 끝난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답한 그는 최종 두 팀이 겨루는 월드시리즈로까지 이끌었다. 월드시리즈에선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져 준우승했다. 베라는 이 외에도 “야구의 좋은 점 중 하나는 겸손을 가르친다는 것”, “똑같이 할 수 없다면, 흉내 내지 마라” 등의 명언을 남기며 ‘요기즘(yogism·요기주의)’이란 별명을 얻었다.
1972년 전미야구기자협회 투표에서 전체 396표 중 339표를 얻어 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4년 김천시 폭발사고
2013년 경기도 여주군 여주시로 승격
2013년 대구대명동 가스폭발사고 발생
2002년 제14회 부산 아시아 경기대회 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수단 부산 도착
이날은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 1진이 남한 땅을 밟은 날이다. 고려항공 전세기 편으로 오전 10시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오전 11시 36분에 부산 김해공항에 도착한 북한 선수단과 다대포항으로 만경봉호를 타고 들어온 북측 응원단은 부산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남한에서 열리는 국제행사에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봤지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한민족 혈육임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꺽다리 리명훈’은 단연 눈길은 끌었다. 최장신 농구 선수인 리명훈은 키 235cm에 앉은키가 130cm인 ‘국보급 센터’였다. 북측이 리명훈 만을 위한 전용차량과 침대 마련을 요구했지만, 아시안게임조직위에서 이를 마련하지 못해 애를 먹기도 했다. 결국 리명훈도 다른 선수들과 같은 차량에 탑승해야 했다.
북측의 참가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를 남기기도 했데, 금메달을 딴 여자 역도 리성희 선수의 시상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공식행사에서 최초로 북한 국기인 인공기가 게양됐고 북한 국가(國歌)가 울려 퍼졌다.
1994년 인도 봄베이 서부의 항구도시 수라트, 페스트 번져 200여명 사망
1993년 2000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호주 시드니 선정
1993년 중국 잔징의 하해(河海)대학 유학중 북한 유학생 이정철 귀순
1992년 레둑 안, 베트남 새 대통령에 선출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 제2인자인 레둑 안(72) 장군이 1992년 9월 23일 베트남 국회에서 보 치 콩 국가평의회 의장 후임으로 새 대통령에 선출됐다.
레둑 안 장군은 뛰어난 군경력을 바탕으로 명실공히 베트남 정치의 실권자로 자리잡은 인물이다. 지금까지 그는 외교, 국방, 공산당의 보안문제 등을 전담해왔다. 1991년 7월에는 중국 공산당의 초청으로 북경을 방문, 캄보디아 침공 이후 악화된 두 나라 관계를 정상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안정이 유지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보수파 인물이었다.
중부의 투아티엔성에서 출생한 그는 1975년 4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사이공 정부를 축출한 고지명작전의 부사령관으로 활약, 베트남 국내에서 `사이공의 해방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1978년 12월 캄보디아 침공작전을 지휘, 단 2주 만에 크메르 루주 정권을 전복시키고 1981년까지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 사령관을 지냈다. 1982년 당 정치국원에 임명됐으며 1987년에는 국방장관 및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그리고 지난해 6월부터 당중앙위원회 서기직을 맡았다.
1992년 대한민국과 중화민국, 외교 관계 단절 후 대사관 완전 철수
1991년 유엔 핵무기 사찰단 44명 바그다드서 피억류
1990년 소련최고회의, 공산주의 경제 청산하고 자유시장경제로 전환
1982년 한국-미국 농산물차관회담 개막
1981년 홍콩지, 중국이 백두산에 인공위성관측소 설치 보고
1977년 중국, 모잠비크 및 적도기니와 경제기술협력협정 조인
1977년 국무회의 12해리 영해법안 의결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구성
1974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대표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유신규탄성명
1973년 서머힐 학교를 창립한 영국의 교육자 A.S.닐 사망
1973년 노벨문학상 받은 칠레 시인 네루다 사망
1973년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당선, 18년 만의 재집권
1973년 9월 23일 실시된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이 득표율 61.3%로 당선돼 1955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스페인으로 망명한 이래 18년 만에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페론 부인 이사벨도 라틴아메리카 역사상 최초의 여자부통령에 당선됐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는 개표 종료전부터 ‘페론 부활’을 기뻐하는 퍼레이드가 진행됐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의 대통령 시절, 2번째 부인 이사벨과 함께 2차대전중에 비축해 둔 풍부한 재정을, 사회보장제도와 노동자 주택정비에 투입하는 등 ‘페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곧 독재와 재정파탄으로 실각하고 말았다. 이 선거에서의 페론 압승은 ‘페론-에바시대’의 재현을 갈망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반영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72년 필리핀에 계엄령. 유력상원의원, 기자 등 체포
1969년 극동 최초로 팬텀기 전투부대 창설
1967년 강변 1로 개통 (한강변 최초 유료도로)
1963년 박정희후보 사상논쟁을 유발
1960년 민주당 신파 ‘민주당’으로 원내교섭단체 등록
1960년에도 신파ㆍ구파로 갈려 한지붕 두가족을 이룬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 ‘구파’는 주로 한민당ㆍ민국당에 뿌리를 둔 사람들이었고, ‘신파’는 원내자유당이나 자유당 탈당파에서 민주당으로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구파의 중심에는 신익희ㆍ조병옥이, 신파의 중심에는 장면이 있었다.
이들은 민주당으로 통합되기 전에도 소속당이 달랐지만 성향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구파는 우국지사적 기질에 보수적이며 배타적이었고, 신파는 관료ㆍ법관ㆍ금융인 등의 테크노크라트였다. 1955년 통합야당으로 출범할 때부터 민주당에 내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승만 독재에 맞선다는 대의가 늘 우선했던 터라 첨예한 갈등도 그럭저럭 헤쳐나갔다.
그러나 민주당을 야당에서 여당으로 탈바꿈시켜준 4ㆍ19가 문제였다. 자유당이 몰락한 공백을 선점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곧 치러진 7ㆍ29총선 결과, 민주당은 예상대로 압승을 거둬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 과정에서의 앙금이 너무 컸다. 내각제하에서 실권을 가진 총리 자리를 장악하려면 자파(自派) 의원을 한 명이라도 더 당선시켜야 했기 때문에 양측은 무리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윤보선(구파)과 장면(신파) 지역구에까지 같은 당 소속의 후보를 출마시킬 정도로 분열상이 극에 달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면이 총리가 되고 연립내각 구성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양측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총리 자리를 빼앗긴 구파가 먼저 반격을 시도했다. 1960년 8월31일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한 것이다. 이것이 공식적인 별거의 시작이었다면 9월23일 신파가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원내교섭단체를 따로 등록한 것은 공식적인 이혼 선언이었다. 결국 민주당은 여당으로, 구파는 야당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2공화국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싹텄다.
1958년 레바논대통령에 슈하브장군 취임
1958년 영국, 크리스마스섬에서 핵폭발실험 성공
1957년 흑인학생의 등교보호를 위해 미국 리틀 록 백인 고등학교에 군부대 투입
1957년 9월 23일 미국 남부 아칸소주(州) 리틀 록의 센트롤고등학교에 9명의 용감한 흑인 학생들이 미국 연방 공수부대의 보호 아래 최초로 백인학교에 등교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교를 반대한 2000명의 백인 학생들 거의 모두가 등교를 거부했고, 결국 흑인의 입학을 반대하는 무리와 이를 수호하려는 무리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 사상자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는 1954년 미연방 대법원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인종차별을 금한다는 판결을 내린 후 미국에서 발생한 첫 번째 흑백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1957년 리틀 록 시(市). 흑인 학생들이 백인학교에 입학원서를 낸 사실이 알려지자 리틀 록 시내에 불안한 기운이 맴돌았다. 새학기를 바로 앞둔 9월 2일, 풔보스 리틀 록 주지사는 흑인 학생의 등교를 저지하기 위해 주방위군 투입을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인종폭동으로까지 이어지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학원 내 인종차별을 철폐시키기 위해 리틀 록 고등학교 안으로 연방 낙하산 부대를 투입했고, 흑인 학생들이 정당하게 학교 정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101 공수부대도 투입했다.
익일 24일 밤 미국 백악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 전역에 흑인 학생의 백인학교 입학 허가를 호소했다. 취임이래 가장 간절한 연설이었다. 25일, 350명의 공수부대가 감시하는 가운데 흑인 학생들이 드디어 등교하기 시작했다.
1954년 新 형사소송법 23일 0시를 기해 발효
1952년 제주도 포로수용소서 포로들 데모
1952년 로키 마르시아노, 세계챔피언에 올라
1952년 9월 23일, 데뷔 이래 42전승(37KO승)의 연승가도를 달려온 로키 마르시아노가 챔피언 조지 월코트를 쓰러뜨려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회에 다운되는 등 12회까지 열세를 면치 못했으나, 한때 ‘살인 청부업자’라는 별명을 들을만큼 타고난 펀치력과 강한 맷집의 소유자였던 마르시아노는 13회에서 한 방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그는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에게도 1패를 안겨 천하무적임을 입증해보였다. 또 마르시아노는 복싱 시합이 TV에 중계된 뒤의 첫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국민적 인기까지 얻었다. 그래서 마르시아노와 같은 이탈리아계 가수 프랭크 시내트라는 “이제 우리들도 당당하게 이탈리아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이후 마르시아노는 6차례의 방어전을 모두 승리(5KO승)로 장식한 뒤 1956년 4월, 49전 전승(43KO승)의 기록을 남기고 타이틀을 자진반납했다. 더 이상의 적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후, 무하마드 알리와 그와의 싸움을 시뮬레이션으로 시험한 결과 그가 알리를 13회에 KO승하는 것으로 드러날 만큼 그는 20세기 최고의 복서였다. 실베스타 스탤론이 주연한 영화 ‘로키’도 그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1950년 미국 반공법안 성립
1950년 수원비행장 준공
1947년 유엔총회서 한국문제 토의를 41대 6으로 가결
1945년 소련군 위원단 서울에 도착
1945년 조선육상경기연맹 창립(회장 김승식).
1945년 대구역구내서 열차충돌 사망 73명 부상 78명.
1945년 일본인의 무장해제에 관한 법령 제3호 공포
1943년 이탈리아 파시스트공화국정부 성립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인도차이나 반도 침공 개시
1939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 사망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39년 9월 23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 및 정신병 치료에 관한 이론인 동시에 문화와 사회를 해석하는 시각을 제공하는 이론이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던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태인 모직상 아들로 태어나 3살 때 빈으로 이사, 80년 가까이 한 도시에서 산 프로이트는 괴테의 자연에 관한 수필을 읽고 감명 받아 전공을 의학으로 선택했다. 빈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생활을 하던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은 프랑스 신경병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였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정신세계를 발견하고, 무의식의 실체를 접근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정신분석’을 제창했다. 즉 정신병은 무의식에 존재하는 억압된(본능적) 욕구 때문이고, 따라서 이 무의식의 본능적 욕구를 ‘의식화’ 시키는 것이 정신분석 치료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본능’(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로 나누어진다. 프로이트는 1900년 발표한 ‘꿈의 해석’과 1905년에 발표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그는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정신현상들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논했다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왕국 성립
1922년 영국-프랑스, 이스탄불의 터키 반환 결정
1919년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한일관계사료집 4권 발행
1913년 일제 강점기: 일본, 육해군형법(陸海軍刑法)을 조선에 시행하는 법률 공포 시행
1910년 시인·소설가 이상 태어남
1903년 안창호, 이대위 등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 조직
1900년 제2인터내셔널 파리대회 개최(-9.27)
189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샤군에 포위된 파리에서 기구로 사람과 우편물 운반. 최초의 항공우편
1885년 독일 화가 슈피츠베크 사망
1870년 프랑스 소설가 메리메 사망
1846년 영국의 챌리스, 해왕성 발견 발표
1846년 9월 23일 영국의 천문학자인 제임스 챌리스가 베를린 천문대에서 해왕성 발견을 발표했다.
챌리스는 1826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뽑혔으며, 1830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1836년에는 케임브리지 천문대의 플럼좌(座) 천문학교수 및 대장이 되었다.
천왕성의 궤도섭동(軌道攝動)을 계산한 천문학자 존 쿠치 애덤스가 1845년 9월 특정한 위치에서 새로운 행성을 찾아볼 것을 요청해 1846년 7월부터 관측을 시작했다.
마침내 챌리스는 애덤스의 계산으로 예측된 위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해왕성을 발견했다.
그러나 자신의 관측에 대해 조사하던 챌리스는 이미 8월의 어느 날 밤 자신이 이 행성을 발견․관측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날 밤의 관측을 그 전날 밤의 관측과 비교하는 데 실패해 발견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챌리스는 225편의 수학․물리학․천문학 관련 논문들을 과학 저널에 기고했으며, 주된 연구결과를 정리해 <케임브리지 천문대에서의 천체관측 Astronomical Observations Made at the Observatory of Cambridge>(12권, 1832-64)을 출판했다.
1779년 미국의 존스, 영국 해군 격파
1779년 9월 23일 미국의 해군 지휘관 존 P. 존스가 영국 동부해안에서 영국 군함을 크게 무찔렀다.
12세 때부터 견습선원으로 일을 시작한 존스는 미국독립전쟁이 터지자 필라델피아로 가서 신설된 대륙 해군의 대위로 임명되었다.
그는 '앨프레드 호'에 배속되어 바하마에서 활약했으며, 귀환중 벌어진 영국 군함 '글래스고 호'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776년 이후 여러 군함들의 지휘를 맡아 뛰어난 항해술과 지휘력을 인정받게 되자 1777년 6월 미국 의회는 그에게 새로 건조한 '레인저 호'의 지휘를 맡기기도 했다.
1779년 8월 '본옴 리처드 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소함대를 이끌었는데, 영국 근해를 항해하던 중인 9월 영국 군함 '세라피스 호'와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 호'의 호위를 받는 발틱 상선단을 만나 항행을 저지했다.
이 일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전이 된 전투가 일어났으며, 이 전투에서 존스는 대승을 거두었다.
전투에서 손상을 입은 본옴 리처드 호가 침몰 직전에 놓이자 존스는 세라피스 호에 승선해 나포한 카운티스 오브 스카버러 호를 이끌고 네덜란드로 항진했다.
이 승리로 그는 미국 해군의 영웅이 되었다.
1459년 영국 장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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