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4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칠레 푸에르토몬트 서쪽 해역 규모 6.1 지진발생
2021년 미·중 갈등 불렀던 화웨이 멍완저우 2년9개월 만에 가택 연금 해제
2020년 국회 기후위기비상대응촉구결의안 가결
2019년 문재인 대통령 유엔 연설, DMZ 지뢰제거에 국제사회의 협력 요청
2018년 방탄소년단 한국가수론 처음 유엔 연설(7분간)
2016년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해임건의안 국회 통과, 박근혜 대통령은 사상 처음 해임건의안 거부
2013년 고용노동부 전교조 법외노조화 통보, 전교조 합법화 14년 만에 비합법노조로 돌아감
2013년 파키스탄 남서부 진도 7.7 강진 사망 500여명
2009년 KIA 타이거즈, 12년만에 프로야구 정규리그 우승 확정
2009년 9월 24일 프로야구팀 KIA 타이거즈가 군산 홈 경기에서 히어로즈를 5대0으로 꺾고 80승(48패4무)을 기록,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했다. KIA의 한국시리즈 진출은 전신인 해태 타이거즈가 1997년 한국시리즈에 직행(直行)한 지 12년 만이다.
KIA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과거 해태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해태는 역대 한국시리즈에 9번 진출해 한 번도 챔피언을 놓친 적이 없었다. 1997년 9번째 우승 당시 주축이던 이종범(39)은 “젊은 선수들과 함께 꼭 ‘V10(10번째 우승)’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KIA의 가장 위협적인 적수는 역대 최다인 17연승을 달리는 SK. 앞선 두 시즌 연속 정규리그 및 한국시리즈 우승을 휩쓸었던 SK는 2위로 4강 플레이오프에 올랐다.
2009년 에이즈 백신 임상실험, 최초 부분 성공
2009년 9월 24일 태국 보건부와 미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등은 태국에서 1만60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에이즈(AIDS·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백신 임상실험이 사상 최초로 ‘부분 성공’했다.
실험 결과, 백신을 맞은 사람들의 에이즈 감염률이 이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들보다 31% 정도 낮았다.
1983년 HIV(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가 에이즈의 원인으로 규명된 뒤 지금까지 두 차례의 대규모 백신 임상실험이 있었으나 이들 실험에선 백신의 효과가 있는 사람이 극소수여서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번 실험은 미 육군과 태국 보건부 등의 주도로 2006년부터 시작됐다. HIV에 감염되지 않은 18~30세 태국인 실험 지원자 1만6395명을 두 개의 실험군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백신 6알을 투여하고 다른 그룹에는 위약(僞藥·placebo)을 투여했다. 이들을 3년간 관찰한 결과, 백신을 투여한 8197명 중에선 51명의 감염자가 발생한 반면, 위약을 투여한 8198명에선 74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이번에 ‘부분 성공’한 백신은 프랑스 제약회사인 사노피 파스퇴르사의 알백(ALVAC)과 미국계 제약회사 박스젠의 에이즈백스(AIDSVAX)라는 백신으로, 6개월에 걸쳐 두 가지가 함께 복용됐디. 그러나 기존에 두 백신을 개별 임상실험 했을 때에는 어느 하나도 성공을 거둔 적이 없었다.
2009년 헌법재판소 야간옥외집회금지 조항 헌법불합치 판정(위헌5 헌법불합치2 합헌2)
2004년 프랑스 소설가 프랑소아즈 사강 세상 떠남
2002년 북한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에 양빈 중국 어우야그룹 회장 임명
북한은 24일 신의주 특별행정구 초대 행정장관에 중국의 2대 부호인 양빈(楊斌·39) 어우야(歐亞)그룹 회장을 내정했다.
네덜란드 국적의 화교인 양빈 회장은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업가로 네덜란드와 중국에서 화훼 생산 및 유통 사업으로 어우야그룹을 일궜고, 사업 시작 10여년 만에 중국 2대 갑부로 성장했다. 양빈 회장은 2년 전부터 신의주 특구 개발 계획에 깊숙이 관여해 왔다.
그는 23일 평양에서 전날 자신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CNN 방송을 비롯한 외국 기자들과 인터뷰를 갖고, 중국의 1국2체제 모델을 공개적으로 강조했다. 양 회장은 “나는 중국 출신으로 유럽연합(EU)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의 친밀한 유대 관계 등으로 인해 신의주 특구 초대 행정장관의 적임자”라며 “신의주 특별행정구를 홍콩과 비슷하게 자본주의 노선으로 운영할 것이며, 완전 자본주의화된 지역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 회장은 또 “신의주 특구는 독자적인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을 갖게 되며, 북한 중앙정부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의주 특구가 저렴한 토지와 인건비, 낮은 세금, 좋은 지리적 여건 등을 갖추고 있어 외국 투자가들의 투자를 많이 유치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 회장은 22일 미국의 CNN방송과 영국의 BBC방송,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홍콩에서 발행되는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등 외국 기자들을 이끌고 전세기편으로 평양에 들어갔다.
2002년 남북한 군당국 간 직통전화(핫라인) 분단이후 처음 개통
2001년 윈도 XP 탑재 PC 시판
2000년 북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방한. 분단이후 첫 남북 국방장관 회담
김일철 북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겸 인민무력부장(차수)이 2000년 9월 24일 판문점을 통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입국, 성남 서울공항에서 우리 공군 CN-25 특별기 편으로 제주공항에 도착해 조성태 국방장관의 영접을 받았다.
두 국방장관은 25일부터 이틀간 제주도에서 분단이후 첫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열고 경의선 철도 연결 및 도로개설 문제와 관련, 비무장지대(DMZ)의 철도 및 도로 지역을 정전협정에 기초해 남북이 직접 관할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또 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제거에도 공동노력키로 합의했다. 북한 대표단은 26일 돌아가기에 앞서 청와대로 김대중 대통령을 예방했다.
1997년 전남 영광 불갑사에서 ‘월인석보’와 보물급 고서 다량 발견
1996년 미국 연방수사국, 미 해군정보국 로버트 김(김채곤)을 기밀유출혐의로 체포
미 연방수사국(FBI)이 1996년 9월 24일 미해군정보국(ONI) 소속 한국계 미국인 김채곤씨(미국명 로버트 김)를 체포, 최소한 50여건 이상의 비밀정보들을 한국 정부에 넘겨준 혐의로 기소했다. 김씨는 지난 1996년 5월초부터 9월까지 주미 한국대사관의 백동일 대령(해군 소속)에게 ▲북한관련 비밀문서 ▲한반도 주변국에 관한 정보 ▲군사 기밀 등을 담은 미국의 대외비 또는 1-2급 비밀서류를 우편 또는 인편、팩시밀리 등으로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1974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김채곤씨는 1978년 매릴랜드주 수틀랜드 소재 미 해군정보국에서 근무를 시작, 1년 후부터 극비로 분류된 서류를 취급하기 시작한 컴퓨터 전문가이다. 그가 주미 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하와이에서 열린 안보관련 세미나였다.
이 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는 사건 초기부터 공식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조국을 위해 일한 우리 재외국민들에게 정부가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로버트 김은 1997년 7월 11일 미 연방법원에 의해 ‘미 해군 정보기관에 근무하면서 한국 정부에 미국의 기밀 문서 등을 넘겨준 혐의’ 등으로 징역 9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재심을 청구했으나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 연방지법은 2000년 10월 이를 기각했다. 김씨는 7년 반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2004년 7월 27일 만기출소했다.
1993년 한약분쟁으로 약국 전면 휴업
1992년 서울지검, 시한부종말론 주장한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 구속. 사기 및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
1991년 노태우대통령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평화통일 3대 원칙 제시
1991년 곽선희 목사(서울 소망교회), 평양 도착. 개인자격으로는 최초로 정부의
승인을 받아 북경발 조선민항 편으로 입북.
1990년 바이츠제커 서독 대통령, 동서독 통일에 따른 통독조약에 성명
1990년 한국 페르시아만전쟁 분담금 2억2천만$ 부담
1988년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방해사건의 김용남씨 검거
통일민주당 지구당 창당방해사건의 김용남씨가 사건발생 1년 5개월만인 1988년 9월 24일 인천에서 검거됐다.
일명 `용팔이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87년 4월 당시 김대중, 김영삼씨 중심의 야권정치인들이 구신민당에서 탈당,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용팔이 김용남씨가 서울ㆍ인천ㆍ수원 등 모두 18개 지구당에서 연인원 2천여명의 폭력배를 동원, 창당대회를 방해한 공작정치의 표본이다. 당시 동원된 폭력배들은 대낮에 야당지구당 당사를 습격, 방화하는가 하면 길거리에까지 몰려나와 당원 시민 취재기자들에게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하는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경찰은 당초 이 사건을 정당내부의 일이라면서 그냥 방조하는 분위기였다. 관악지구당의 경우 폭력배가 사무실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등 무려 9시간 45분 동안 난동을 부렸는데도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았다. 더구나 김용남은 사건발생 1년5개월 간 서울 강남의 유흥가와 자신의 연고지인 전주 등지에서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구신민당 원내총무였던 이택돈 전 의원이 사건배후로 지명수배된지 5년 만인 1993년 2월 김영삼 정부 출범 후 검거됐고, 장세동 전안기부장도 이택희ㆍ이택돈 전의원과 창당방해를 공모하고 활동자금 5억원을 건네준 혐의로 1993년 3월 구속되면서 `용팔이사건`은 막을 내렸다.
1988년 첫 UPI 직배영화 `위험한 정사` 상영
1987년 서울대병원서 체외수정 5쌍둥이 출산
나팔관 수정 방식(GIFT)에 의한 다섯 쌍둥이가 세계 최초로 탄생했다.
서울대병원 장윤석 산부인과팀은 1987년 9월 24일 배란장애(무배란)로 임신이 불가능했던 노모씨에게 1987년 2월 18일 난관수정방법을 이용, 여섯 쌍둥이 임신에 성공해 예정보다 7주 빠른 32주 4일만인 9월 24일날 제왕절개수술로 사산된 한명을 제외한 다섯 쌍둥이가 출산됐다고 밝혔다.
그날 출산된 다섯 쌍둥이는 남아 2명, 여아 3명으로 남아의 몸무게는 각각 1.41Kg, 1.65Kg, 여아는 각 1.61Kg, 1.60kg, 0.77Kg이었다.
이들은 건강한 편으로 인큐베이터에 옮겨져 양육되었다.
그때까지 세계의학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나팔관 수정방식으로 탄생한 쌍둥이 분만기록은 1986년 이탈리아의 3쌍둥이가 최고이며 자연분만을 통한 국내 다산기록도 5쌍둥이가 최고였으나 사산됐다.
1987년 한국-부탄, 국교수립
1986년 한국남녀탁구팀 서울 아시안게임 남녀단체전 우승
1984년 대구 무장간첩 출현사건
대구시 동구 신암2동에 무장간첩이 출현, 미용실 여주인과 식당 종업원 등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자살.
1983년 원자력발전소 건설 전면 연기
1982년 문화재관리국,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서 일제에 의해 학살된 순국지사
유해 발굴
1982년 82 서울국제무역박람회 개막
해방이후 최초 최대의 국제무역박람회가 1982년 9월 24일부터 10월 18일까지 25일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종합전시장과 인근 총무처 부지에 가설된 전시장에서 성대하게 개최됐다. 공식명칭은 `82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이다.
1981년 4월 정부의 박람회 개최 결정 이후 1년 6개월간의 준비를 거쳐 개최된 이 박람회에는 676개 국내업체와 미국·일본·영국·프랑스·캐나다·나이지리아 등 해외 40개국으로부터 262개업체들이 대거 참여했다. 박람회 개최기간 중 국내에서 220여만명의 관람객과 해외 97개국에서 1만여명의 바이어들이 방한, 박람회를 관람하는 대성황을 이뤘다.
1980년 정부 정치풍토쇄신 특별법 제정
1978년 경북 고령군 지산동 가야고분에서 중요 유물 다수 출토
1977년 국무회의, 12해리 영해법안 의결
1973년 포루투갈령, 기니아가 기니아비사우공화국으로 독립
1971년 영국, 스파이혐의로 소련외교관 105인 추방
1970년 소련의 무인 달 탐색 우주선 루나 11호 월석 갖고 귀환
1969년 흑산도 근해 간첩선 사건
1966년 육군사관학교 화랑대 준공식
화랑대는 20년전 오늘 같은 자리에서 입교식을 가졌던 육사 2기생들이 모교를 위한 기념사업의 하나로 세웠습니다.
준공식에서 육사 2기생인 박정희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이 화랑대는 육사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전하는 따뜻한 정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선배들의 뜻을 이어 후배들이 구름같이 쏟아져 나와 국가를 위한 새로운 동량이 돼 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1965년 정부, 벨기에에 상주대사관 설치.
1964년 동서 베를린 통행협정 조인
1962년 쿠바에 반정부음모. 150명의 해군장병 체포
1962년 알제리 인민공화국 선포
1962년 인도-중국, 체 자오교 서방에서 치열한 국경전투 재발
1962년 러스크 태평양외상, 뉴욕서 한국문제 등 논의
1960년 육군 장교 16명 육군참모총장에게 정군 건의하고 사퇴 요구
1960년 첫 원자력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진수
1960년 9월24일, 세계최초의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USS Enterprise)가 미국 버지니아주 뉴포트 뉴스 조선소에서 진수됐다.
엔터프라이즈는 미 해군이 전통적으로 사용해 온 군함명으로 1대~4대까지는 범선이었고, 5번째와 6번째는 순양함과 초계정이었으며, 7번째는 항공모함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투입됐었다. 8번째 엔터프라이즈호는 핵추진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공간을 없앴음에도 만재톤수 9만970t에 길이 331.6m, 갑판 너비 76.8m를 자랑하는 당시로서는 세계최대였다.
한번 출항하면 연료의 재공급없이도 지구를 20바퀴나 돌 수 있어 ‘떠다니는 섬’으로 불렸고, 80여대의 항공기를 탑재하고 최대 5400여명의 승무원을 탑승할 수 있어 ‘움직이는 항공기지’로도 불렸다. 배안에서 탈영병이 2개월 만에 검거되고 형제와 함께 근무했는데도 모르고 지내다가 고국의 부모편지를 받고서야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57년 김창룡 중장 살해사건 허태영 등에 사형집행
1952년 크라크 유엔군총사령관, 한국방위수역선을 설정
1951년 대한체육회, 제15차 헬싱키 올림픽대회 참가 초청장 접수
1951년 한국전 휴전회담 연락장교 첫 회담
1950년 북한, 인도를 통해 휴전조건 제시
1949년 이란, 대한민국 정식 승인
1946년 스탈린, 자본-공산주의 두 체제의 공존 강조
1946년 남한철도종업원 9월 총파업
1946년 5월에 적발된 조선정판사 위폐(僞幣)사건을 신호탄으로 미군정이 해방일보를 폐간하고 공산당 간부들을 검거하는 등 조선공산당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자 조선공산당도 폭력에 호소하는 새로운 전술을 들고나왔다. ‘테러는 테러, 피는 피로 갚자’는 ‘신전술’이었다.
전평(全評ㆍ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 전면에 나서 총파업을 준비하던 중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이 갑자기 9월로 앞당겨졌다.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 타개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을 25%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가 있고 난 뒤였다. 철도 노동자들의 불만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9월16일, 철도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시한부 파업을 통보했지만 미군정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9월23일 7000명의 부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시발로 9월24일 오전9시, 전국적인 총파업이 시작됐다. 광복후 최초의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규모의 ‘9월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전국에서 4만명이 파업에 참가해 수송망이 마비되고, 은행ㆍ병원ㆍ미군정청으로까지 동정파업이 확대되자 9월30일 새벽2시, 2000여명의 경찰과 애국청년단 등이 파업현장을 급습했다. 1700여명이 검거돼 파업은 한 고비를 넘겼지만 10월1일의 대구폭동을 시작으로 ‘10월 폭동’이 또다시 전국을 혼란에 빠뜨렸다.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진통이었다.
1945년 한국마사회 창립
1944년 프랑스 조각가 마이욜 세상 떠남
1941년 런던서 프랑스 레지스탕스국민회의 창설
1926년 평양공설운동장 개장
1922년 이탈리아의 바리톤 가수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출생
1896년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피츠제럴드 출생
1870년 정만식, 정감록 믿고 역모하다 발각.
1852년 앙리 지파르, 조종 가능한 최초의 증기 비행선 개발
1835년 이탈리아 작곡가 밸리니 사망
1802년 러시아 작가 라디시체프 사망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가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자 르네상스와 종교개혁도 경험하지 못한 러시아는 압도적인 유럽 문명의 홍수 속에서 주체적 문명을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러시아의 고전주의인 ‘차리즘(러시아 전제 정치체제)’의 통제속에서 유럽과 토착, 전통과 변혁, 개인과 사회 등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추구하던 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인테리겐치아였다.
그 중 급진적인 인텔리겐치아였던 라디시체프는 장 자크 루소와 같은 작가들이 펼친 감성예찬론에 영향을 받아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여행’(1790)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가공의 여행이라는 틀 안에 자신이 보아온 사회적 불의와 비참함, 잔인성에 대한 온갖 사례를 모아놓은 것으로 농노제·전제정치·검열제도에 대한 고발장이었다. 라디시체프는 이런 사회 상황을 모르고 있을 예카테리나 대제를 깨우칠 생각이었으나 불운하게도 때마침 발발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예카테리나 2세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고,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다행히 시베리아 유형 10년으로 감형되었지만, 1797년까지 시베리아에서의 유형은 그에게 너무나 혹독한 처벌이었다. 라디시체프에 대한 이렇듯 혹독한 조치는 개혁에 대한 자유주의적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그러던 1802년 9월 24일 라디시체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예카테리카 2세의 사후 사면되어 풀려났지만, 농노제 지지자들에 의한 박해가 계속되자 재추방을 예측하고 음독자살한 것이었다. 그에게 화를 불러온 그의 작품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당시에 소각되어 우리가 접할 수 없게 됐지만, 그의 사상은 전제정치에 대항해 1825년 12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 혁명을 꾀한 혁명가들인 데카브리스트들과 푸슈킨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553(조선 명종 9) 성리학자 이언적(1491-1553) 세상 떠남
1501년 이탈리아 수학자 카르다노 출생
1493년 스위스 의학자 겸 화학자 파라셀수스 출생
1396년 (조선 태조 5) 한양 성곽 완성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서울을 삼은 근세 조선은 서울의 방비를 위해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 공사가 1396년 오늘 끝났다.
이 성은 1421년에 다시 개축을 했는데, 당시의 성의 길이는 9,900미터에 높이는 12미터로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