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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저가스관 폭발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가스관 ‘노르트스트림-1’과 ‘노르트스트림-2’의 발트해 구간 3곳에서 발생한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특히 이번 누출이 러시아의 유럽 국가들은 서방 제재에 맞서 가스를 무기화한 러시아의 소행을 의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드스트림2 가스관은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폐쇄됐지만, 여전히 가스관의 90%는 메탄으로 차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환경단체 ‘환경방어기금’이 가스관의 크기와 수온을 기준으로 계산해본 결과, 압력이 떨어지는 초기에 11만5000t(톤)의 메탄이 누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자동차 200만대에서 연간 배출하는 탄소배출량과 맞먹는다.
2022년 대전 현대아울렛의 대형화재 발생 2명사망 4명실종
2021년 독일 올라프 숄츠가 이끄는 독일사회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
2019년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 사망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여성 운전 허용
2014년 멕시코 게레로 주 이괄라 시에서 멕시코 정부의 교육정책 항의시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된 대학생 43명 갱단에게 넘겨져 잔혹하게 살해됨
2014년 수영 박태환 선수 한국선수 역대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20개) 획득
2011년 티베트 승려 쓰촨성 키르티 사원에서 분신자살
2010년 2010 U-17 여자 월드컵 우승 (FIFA 주관 국제대회 첫 우승)
17세 이하 한국 여자 축구 대표팀이 2010년 9월 26일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열린 2010년 U-17 여자 월드컵 결승전에서 일본을 물리치고 FIFA 주관 국제 대회에서 남녀 통틀어 사상 첫 우승을 하였다.
이번 대회는 16개 팀이 4개 팀, 4개 조로 조별리그를 벌여 8강부터 토너먼트로 진행되었다. 한국 U-17 여자 대표팀은 남아공, 독일, 멕시코와 함께 B에 속해 남아공에 3-1 승, 멕시코에 3-1 승, 독일에 0-3으로 패하여 조2위로 8강에 진출하였다. 8강 나이지리아전 6-5 승, 4강 스페인전 2-1 승리로 결승에 진출하여,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전후반 연장 120분을 3-3으로 마치고, 승부차기에서 5-4로 승리하여 U-17 여자 월드컵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다. 대한축구협회는 총4억9000만원의 격려금을 감독과 코치에게 격려금을 선수들에게 장학금으로 지불한다.
한국 여자 축구는 2010년 8월 U-20 여자 월드컵 3위를 차지한 데 이어, 이번에는 U-17 여자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는 업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초·중·고교와 대학·실업까지 한국의 여자 축구팀 수는 65개, 등록 선수도 1450명 남짓에 불과하며, 이마저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 이번 U-17 여자 월드컵 우승의 업적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선수들 개인의 노력은 물론 주변의 지원을 통한 저변확대가 필요한 실정이다.
2009년 필리핀, 태풍 켓사나 피해
40년 만에 최악의 태풍이 필리핀을 덮쳤다. 2009년 9월 26일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 켓사나로 인한 피해가 커지면서 29일까지 최소 246명이 숨지고 38명이 실종됐으며 17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대부분 익사나 감전, 산사태로 인해 숨졌으며 재산 피해는 5000만달러(약 597억원)에 이른다.
켓사나는 풍속 시속 167㎞의 바람을 동반한 카테고리 2급 태풍(예상되는 피해 정도로 구분한 5단계 태풍 중 두 번째로 약한 태풍)으로 수도 마닐라와 주변 12개 지방에 하루 동안 한달 평균 강우량이 넘는 규모의 비를 퍼부었다.
필리핀을 통과한 켓사나는 29일 오후 남중국해를 건너 베트남에까지 상륙, 최소 24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2009년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행사 진행
2008년 미국 영화배우 폴 뉴먼(83) 폐암으로 세상 떠남
2005년 청계천문화관 오픈
2002년 세네갈 여객선 침몰로 740여명 사망·실종
르 줄라(Le Joola)호는 1990년 독일의 게르머스하임 조선(Schiffswerft Germersheim GmbH)에서 건조된 배로 1991년 세내갈로 수출되어 정부에서 국영으로 운영하였다
2001년 9월, 르 줄라호를 몰던 승무원들은 배가 이상함을 느끼고 점검에 나섰지만, 수리에 돈이 많이 들기에 대충 수리해 방치하고,1년 동안 쉬던 이 배는 2002년 9월, 무리하게 운행을 재개하고 하였다.
2002년 9월 14일 다시 운행하면서 처음 몇 번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9월 26일 밤 12시를 넘어 세네갈 남부 카자망스(Casamance)주에 있는 지갱쇼르(Ziguinchor)시에서 북부에 위치한 다카르항으로 향하던 중 소식이 끊기고 만다.
27일에서야 르 줄라호는 감비아를 가던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침몰한 것이 드러났다.
탑승자는 모두 797명으로 보도되었는데 이는 정원 563명을 한창 넘어선 것이라 비난이 터졌다. 그리나 사실은 797명의 2배가 넘는 약 1,927명(선원 44명)이 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엔진 이상으로 배가 언제라도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배에 정원의 3배 반이 넘는 승객을 꾸역꾸역 태웠던 것이다.
게다가 세네갈 및 감비아 정부는 지나가던 어선들이 서둘러 와 어부들이 열심히 구조를 돕던 순간에도 진상파악이 되지 않았다.
몇 척 작은 어선으로선 당시 허우적거리던 수백여명이 몰려와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인데 자칫하면 어부들까지 같이 빠져죽을 판국이었기 때문에 어부들은 겨우 64명만 구해서 그 자리에서 서둘러 빠져나와야 했다.
결국 이들이 구한 64명만이 살아남은 최종 생존자들이었다. 부랴부랴 감비아 해군이 왔을때 1,863명은 사망한 후였다.
사람만 많이 태운 게 아니라 이 배에는 수송차량에서 트럭까지 원래 태울 수 있던 35대보다 많은 100대 이상을 태웠고, 온갖 화물도 가득 실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사망자 다수가 세네갈인이었지만 감비아, 기니, 가나, 나이지리아, 프랑스, 스페인, 노르웨이, 벨기에, 레바논, 스위스, 네덜란드 같은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2002년 `개구리소년` 유골, 대구 와룡산서 발견
1991년 3월 26일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며 마을 뒷산인 와룡산으로 놀러 나간 대구 성서국교 어린이 5명이 실종됐다. 이후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으로 불리며 미궁에 빠졌지만 실종됐던 소년 5명의 유골과 신발 등 유류품이 실종 11년 만인 2002년 9월 26일 오전11시 30분쯤 발견돼 사건은 전환점을 맞게 됐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와룡산 서남쪽 계곡으로부터 2.5km 지점으로 이들이 살았던 달서구 이곡동 집과 다녔던 성서초등학교로부터는 3.5km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은 당초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소년들이 저체온(低體溫)으로 자연사했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추가 발굴 과정에서 총탄과 소매가 매듭 지어진 옷가지 등이 발견되고 유골의 두개골에서 함몰 흔적과 구멍 등이 발견됨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도 비중을 두고 조사했다.
유골 복원 과정에서도 상당수의 치아와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지 않아 소년들이 대구 와룡산의 발굴지점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숨진 뒤 옮겨졌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유해 감식을 맡아온 경북대 법의학팀이 3명의 두개골에서 둔기로 맞은 수십 곳의 外傷(외상) 흔적이 발견됐다고 발표함으로써 타살로 가닥이 잡혀가는 듯 했지만, 워낙 오랜 세월이 지난터라 사건의 전말이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2000년 심권호 시드니올림픽 레슬링에서 금메달 획득으로 올림픽 2체급 석권
심권호 선수가 시드니 달링하버 전시홀에서 2000년 9월 26일 열린 레슬링 그레코로만형 54kg급 결승전에서 쿠바의 라사로 리바스를 8대0으로 제압하고 2회 연속 올림픽 매트의 정상에 올랐다.
두 체급 그랜드슬램(올림픽-세계선수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을 모두 우승하는 것)의 위업을 달성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레슬링 사상 최초로 올림픽 두 체급을 석권한 `작은 거인` 심권호는 한국 레슬링의 간판스타였다.
1985년 문원중 1년때 레슬링을 시작, 1991년 처음 태극마크를 단 뒤 1992년 청소년 세계선수권 우승을 시작으로 1995년 및 1998년 세계선수권 우승, 1994ㆍ98아시안게임 금메달, 96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 등 각종 국제대회 금메달을 휩쓸어 왔다. 그러나 심권호는 국제레슬링연맹이 1996년 48kg급과 52kg급을 없애 54kg으로 통합하면서 체급조정에 실패, 한때 슬럼프에 빠졌었다. 하지만 체력의 열세를 다양한 테크닉과 풍부한 경험, 그리고 상대기술을 간파하는 천부적인 센스로 극복해 냈다.
1998년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서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 최고상 수상
장선우 감독의 영화 `꽃잎`이 1998년 9월26일 열린 제1회 방콕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아시아영화부문 최우수 극영화상을 수상했다. 국제심사위원단은 광주민주화항쟁을 그린 영화 `꽃잎`이 "상징주의 기법으로 참상 현실을 잘 포착해 정치 탄압이 사회를 통해 어떻게 반향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날 폐막된 방콕영화제에는 18개국에서 극영화 50여편과 단편, 기록영화 75편이 출품돼 9일동안 2만여 관객을 모았다.
1997년 인도네시아 항공 에어버스 A300-B4기 수마트라 추락. 234명 사망
1997년 기아 그룹 노조, 전면 파업 결의
1995년 수도권 일원에 초속 32m 돌풍
1994년 선불카드 첫 선
1994년 9월 26일 은행과 신용카드회사가 발행하는 선불카드가 발매됐다. 이날 국민, 외환은행 등 18개 은행과 비자, 위너스카드 등 6개 신용카드 회사들은 선불카드를 발매, 현금처럼 사용하도록 했고, 비씨카드와 조흥, 제일은행 등 13개 비씨카드 회원은행들은 10월 17일부터 선불카드를 발행했다.
선불(prepaid)카드란 공중전화카드처럼 일정액의 현금을 미리 내고 그 범위 안에서 상품 등을 구입할 수 있는 카드로, 선불 방식이란 점에서 후불 방식의 신용카드와 구별된다. 액면금액은 5천원 1만원 2만원 3만원권 등 4종류이며, 사용할 때마다 카드 뒷면에 사용날짜, 금액 등을 표시하도록 되어있다.
은행-카드사의 선불카드는 전국 3천여개의 광범위한 가맹점망을 갖춰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다만 선불카드는 현금과 똑같아 분실-도난때는 보상받을 수 없다. 선불-직불-신용카드 3가지를 갖고 다니면 현금 쓸 일이 거의 없는 플라스틱 머니 시대가 된다. 전문가들은 소액구매는 선불카드, 거액구매는 직불카드, 신용구매는 신용카드를 각각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1993년 국산기술 인공위성 '우리별 2호' 프랑스령 기아나 크루에서 성공적 발사
1993년 9월 26일 오전 10시 45분(한국시간) 한국 국적의 2번째 인공위성인 우리별 2호가 아리안 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발사는 남아메리카 프랑스령 기아나에 있는 쿠루 우주 센터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별 2호는 과학실험용 소형 인공위성으로, 중량 50㎏, 크기 35.2×35.6×67.0㎤이며, 지상 800㎞ 상공에서 적도와의 경사각 98.6°를 갖는 태양동기궤도를 돌도록 설계되었다.
차세대 소형위성을 위한 32비트 컴퓨터(KASCOM), 지상에서 송신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지구상의 원하는 곳에 보내주는 축적 및 전송 통신실험장치(DSFCE), 해상도 2㎞의 컬러 전하결합소자(CCD)와 해상도 200m의 흑백 CCD를 갖춘 지구표면 촬영장치(CEIS), 여러가지 정보를 음성으로 방송할 수 있는 고속 변복조 실험장치(DSPE), 우주환경을 관측하는 저에너지 입자 검출기(LEED), 적외선 영상 시스템 실험을 위한 적외선감지기 실험장치(IREX) 등 6개의 실험장비들이 탑재되어 있다.
우리별 2호는 우리별 1호 개발을 통해 습득된 기술을 바탕으로 순수 국내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1990년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 사망
1984년 영국-중공, 홍콩반환협정 가조인
1982년 스즈키 젠코 일본 수상, 북경 방문
1981년 등소평, 3차 국공합작 제의
1978년 국산 유도탄, 로케트 백곰 시험 발사 성공
종합시험장에서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2단계 로켓추진식으로 정밀유도체제를 갖춘 장거리 유도탄은 우리 기술진의 손으로 제작된 점에서 자주국방의 획기적 진전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후방을 초토화시킬수 있는 지대지 미사일은 휴전선 인접지역에 수도를 갖고 있는 우리와 같은 처지에서는 전쟁억지에 필요불가결한 무기이다. 탄두에 핵을 실을수 있고, 북괴의 프러그7(사정거리 1백㎞)을 압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 세계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었다. 외형은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NH) 유도탄을 모방했지만, 소프트웨어·유도조종장치 등 90% 이상 국산품으로 구성된 국산 유도탄이었다. 시험발사에 성공한 '백곰'은 사정거리가 180㎞로 유사시 군사분계선(MDL)에서 150㎞ 내에 있는 평양 타격이 가능했다. 그러나 국산 유도탄 1호 '백곰'은 실전에 제대로 배치되지 못했다. 우리 기술로 개발한 최초 실전 배치 지대지 탄도미사일은 '백곰'을 개량하여 만든 '현무'로 1980년대 후반 실전 배치되었다.
1974년 소련 구축함, 흑해에서 침몰. 약 200명 사망
1974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발족
정의구현사제단이 1974년 9월 26일 결성됐다.
정식명칭은 한국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고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전국의 천주교 사제들이 명동성당에서 반정부시위를 벌이면서 결성됐다. 생산의 기본목적이 인간봉사에 있고 경제분야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서 평신도 조직에 기반을 둔 교회운동을 펼친다는 정신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70년대에는 유신헌법 철폐운동의 선봉에 섰고 1980년대에는 군부정권을 상대로 민주화운동을 펼쳤다. 특히 1987년에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축소를 폭로함으로써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을 댕겼다. 이어 1989년 임수경양 방북사건때 문규현 신부를 평양에 파견하는 등 1980년대말부터는 통일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왔다
1970년 부산 가덕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부산 가덕중학교 학생이 산에서 괴한 2명을 발견, 출동한 경찰·예비군이 2명 사살. 피해(전사 2명)
1968년 서울 북악스카이웨이 개통
1962년 알제리아의회, 아메드 벤 벨라를 초대수상으로 선출
1960년 케네디 . 닉슨 . TV토론
1960년 9월26일. 미국 시카고 시간으로 밤 8시 반이 되자 미국인들이 속속 TV 앞으로 몰려들었다. 역사상 최초로 열린 대통령후보들의 TV토론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카고 CBS에서 열린 토론은 미국의 3대 TV와 라디오 전파를 타고 미 전역에 생중계됐다.
이날의 주인공은 민주당의 케네디 후보와 공화당의 닉슨 후보였다. 사람들은 닉슨의 승리를 낙관했다. 그는 8년간 부통령 후보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데다 베테랑 정치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케네디는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이었다.
그러나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사람들의 시선은 케네디로 집중됐다. 겨우 40대 후반이면서도 늙고 초췌해 보이는 닉슨과 달리 케네디는 구릿빛 건강한 얼굴에 젊음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케네디는 화면에 뚜렷하게 부각되는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시청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에 찬 목소리로 유권자들을 설득해 나간데 반해 닉슨은 옆 얼굴 만 드러낸 채 “나 역시(me too)”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날 라디오 청취자는 나름대로의 논리로 토론을 끌고간 닉슨에게 후한 점수를 매겼지만 TV는 논리보다 감성과 이미지를 요구하고 있었다. 닉슨은 그걸 몰랐던 것이다.
1960년 전남매일신문 창간
1959년 일본 본주에 태풍 베라호 강타. 4,466명 사망
1959년 스리랑카의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수상 피살
1959년 보사부, 성병보균 조사결과 발표
1958년 미얀마 무혈쿠데타 네윈 집권
1958년 최병우 기자 순직
대만의 진먼다오(金門島)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6km 밖에 떨어져 있지않은, 제주도의 10분의 1 크기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거리가 워낙 가깝다보니 중국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한 이래 늘 이 지역을 눈엣가시로 여겨왔다. 1949년에도 1만명이나 상륙시켰다가 대만군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물러난 적이 있었다.
진먼다오가 세계적인 핫이슈로 떠오른 것은 1958년 8월 23일이었다. 이날부터 45일간 중국 본토에서 47만발의 폭탄이 날아와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기 때문이다. 미 제7함대까지 급파될 정도로 포격전이 치열한 이곳에 세계곳곳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9월 26일에도 일군의 기자들이 섬의 보급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상륙용 배(舟艇)를 타고 섬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배는 섬에 닿기도 전에 세찬 풍랑으로 전복됐고 배에 타고 있던 대만ㆍ일본 기자들은 바닷속 어딘가로 사라졌다. 실종된 것이다. 그 가운데는 최병우(崔秉宇) 한국일보 기자도 포함돼 있었다. 5년 전 조선일보 기자로 6·25 휴전협정 조인식에 참석, 한국의 운명이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순간을 기사로 아쉬워했던 이였다. 그는 언제나 현장을 중시했던 기자였다.
1954년 일본 여객선 도야마루호가 쓰루가해협에서 침몰. 1천1백72명 사망
토야마루호는 일본에서 운행하던 기차 수송 연락선이었다. 홋카이도에 있는 토야코라는 호수에서 이름을 따왔다.
2차 대전 중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하는 연락선이 모두 미군의 폭격으로 침몰되거나 항행 불능이 되어 여러 척의 연락선을 건조했는데, 토야마루도 그 중 한 척이었다. 4천톤급 선박으로 1947년에 만들어져 아오모리에서 홋카이도의 하코다테를 연결하는 여러 페리들 중 하나였다.
1954년 9월 26일 토야마루호는 아오모리에서 승객들과 철도차량 몇 량을 실어 쓰가루해협을 건너 하코다테에 도착했다. 그리고 혼슈로 내려갈 열차와 여러 승객들을 실어서 출항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그날 태풍이 쓰가루해협을 덮칠 예정이었다는 것. 그래서 오후 3시경 토야마루는 이날 운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예정대로 비가 퍼붓고 파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후 5시, 비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도 잦아들었다. 그러나 태풍의 눈 속에 하코다테가 들어가다보니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낮아진 것이었을 뿐, 태풍이 물러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오후에 하코다테가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기상예보와도 딱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승무원들은 결국 출항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미 이때부터 태풍이 다시 강해져 하코다테 앞바다에 많은 비가 내렸고 바람과 파도도 강해졌다. 하지만 태풍이 물러갔다는 기상예보만 믿고 토야마루호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승객과 승무원 1,309명을 태우고 하코다테항을 떠나 아오모리로 항행을 개시한 토야마루호는 기상상태가 악화되자 하코다테 외항에 잠깐 정박해 바다의 상태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닻을 떨어뜨렸지만 태풍으로 인해 빨라진 유속으로 인해 닻이 고정되지 않았다. 뒤이어 파도가 배를 강타했고, 갑판이 낮은 페리의 특성상 바닷물이 그대로 갑판을 넘어 엔진실까지 들어왔다. 결국 동력을 잃은 토야마루호는 3시간 넘게 하코다테항 일대를 표류했다.
22시 26분, 토야마루호는 SOS를 쳤지만 너무 늦었고, 단 17분 후인 22시 43분 침몰하고야 말았다.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1,309명 중 1,172명이 희생됐다. 사망자들 중에는 선거 유세를 위해 자신의 선거구로 갔던 유력 정치인을 비롯해 홋카이도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도 소수 있었다.
1953년 일본 자위대 창설
1953년 서독 재군비 선언
1952년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사망
1950년 국군, 서울 탈환
1950년 NATO이사회, 공동방위군 설립 승인
1949년 정부, 법원조직법 공포
1949년 동서독, 1억5천만달러의 통상협정 체결
1947년 소련, 한국에서의 미국-소련군 동시철수 제안
1940년 발터 벤야민, 망명 실패로 자살
히틀러의 유태인 억압정책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을 결심한 발터 벤야민이 1940년 9월 26일 모르핀을 먹고 자살했다. 벤야민은 20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가장 중요한 독일의 문학비평가로 꼽힌다.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브라이스가우에 있는 프라이부르크·뮌헨·베른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23년에는 교수 자격 취득 논문으로 ‘독일 비극의 기원’을 제출했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은 보수적 학풍을 이유로 벤야민의 논문을 거절했다. 논문 심사에서 거절당한 벤야민은 교수를 단념하고 문필 생활로 들어갔다. 벤야민의 저술은 대체로 체계적인 긴 논문이라기보다는 짧은 형식의 글들이 많다. 이는 그가 생계를 위한 글쓰기를 했음을 알려준다.
히틀러의 광기가 유럽 전역을 물들이면서 당시 48세였던 벤야민은 미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그러나 마르크시즘 연구자라 해서 출국 비자가 발급되지 않자 피레네 산을 넘어 스페인으로 향했다. 1940년 9월 26일 저녁, 국경에 도착한 후 입국 허가증을 받기 위해 출두하지만, 스페인 경찰로부터 프랑스 강제송환을 통보받는다. 결국 밤 10시 벤야민은 다량의 모르핀을 삼켜 자살했다.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그의 일생에서 지고 가는 사상적 짐이 된 것이다.
1936년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금본위제 폐기
1930년 아르헨티나 우리부루 쿠데타
1921년 부산부두노동자 5천여명, 임금인상요구로 총파업
1917년 프랑스 화가 드가 별세
1910년 친일단체 일진회 해체
1908년 소설가 김정한 출생
1907년 뉴질랜드, 독립해 영국자치령을 선언 1947년 11월 25일 독립
1901년 김재준 목사 출생
1889년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자 하이데거 출생, 저서: <존재와 시간>
1888년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한 영국의 시인 T.S.엘리엇 출생
1886년 영국 시인 T.S.엘리어트(1886-1965) 출생,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1881년 (조선 고종 18) 청 나라에 영선사 파견
조선 근대사에 있어서 이홍장(李鴻章)이 청나라에 조선의 유학생을 파견하여 군기의 제조술과 연병술(鍊兵術) 습득, 그리고 군기(軍器)의 구입 종용을 받아 1881년(고종 18) 오늘 김윤식(金允植)이 영선사가 되어 유학생 인솔 책임을 지고 학도 25명과 공장(工匠) 13명을 포함한 일행 총원 69명을 보내게 되었다.
이들은 10월 25일 압록강을 얼음 위로 건너 청나라 텐진(天津)으로 가 약 6-7개월 동안 각 병기 공장에 배치되어 기술을 습득하다가 다음 해인 1882년 6월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정부로부터 경비가 두절되어 귀국하게 되었는데, 영선사 김윤식만은 텐진에 남아 있었다.
그 영향으로는 유학생들이 본국에 돌아와서는, 지금의 삼청동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신식 기기창(機器廠)이 설치되었다(1883 고종 20년).
1877년 독일의 수학자 그라스만 사망 - 벡터 미적분학 발전
1849년 조건반사 개념을 발전시킨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 출생
1815년 신성동맹 체결 (러시아 .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1815년 9월 26일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로이센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파리에서 `신성동맹`을 체결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제안으로 국제평화와 질서유지를 그 목적으로 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먼저 프로이센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를 설득하여 조인에 참가시키고 터키를 제외한 유럽의 전(全)군주에게 가맹장을 보냈다. 터키 황제는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참가요청을 받지 않았다.
이 동맹의 골자는 `각국의 군주가 성서 말씀을 바탕으로 서로 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며 서로 돕고, 자기 나라의 신민(臣民)에 대해서는 가부(家父)와 같이 동포애의 정신에 따라 이를 지도하며, 신앙 ·평화 및 정의를 옹호한다’는 내용의 지극히 관념적 · 비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알렉산드르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기 위하여 로마 교황, 그리고 영국 왕 이외의 모든 유럽의 군주가 이 동맹에 참가했다.
이렇게 이루어진 신성동맹은 1823년 미국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간섭을 거부하는 `먼로선언`을 하고 그 전후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공화제로 잇달아 독립하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뒤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1825년 전유럽적 체제로서의 동맹은 와해됐다.
1687년 파르테논 신전 화약폭발로 크게 훼손, 신전 안에 쌓아놓은 오스만 투르크의 화약 더미가 베네치아군의 포격으로 폭발
1419년 조선, 정종 사망
70년 예루살렘, 로마군에 의해 파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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