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
경험과 추억이 많은 사람으로 살기.
[장우석작가ㆍ심리상담사 글]
인생의 행복은 경험과 추억들이 많은것이다.
도전하고 용기 내어본 사람만이 경험과 추억을 남길수 있다.
나는 중년에 들어가는 50세 지천명 나이에 나름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어린시절 불자로 태어나 팔공산을 10번 오르고 갓바위에서 불공을 드리고 10세에는 불상에 1500배를 하며 해인사 성철스님을 찾아가려는 불심이 있었다.
종교에 여정으로 11세에 천주교로 온 가족이 개종했다.
성당 복사단을 7년간 하며
매일 미사와 매일 묵주기도를 15단이상 드리며 종도 향도 치면서 경건생활을 했고 수사신부님의 꿈을 가지고 20세 가톨릭대 신학과를 지원했었다.
고교시절 대인공포증과 강박증ㆍ조현병 환각과 망상으로 갔다가 양극성장애1형으로 재진단을 받았다. 은둔형외톨이2년간 했고. 20세부터 3번 정신병원에 입ㆍ퇴원하며 2년간을 자유없는 폐쇄병동에 갇힌 자유없고 화학적 약물강박으로 모진 인생을 보냈다. 7차례 가량 침대에 꽁꽁 묶여 5~7일간 좀비같은 생활을 겪었다.
1세대 정신과약의 모든
약부작용으로 지옥같은 나날을 20세부터~27세까지 지냈다.
15~20알 가량의 약으로 온갖 부작용을 겪었다.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CPZ500미리 2년간 먹었고 리튬중독도 1년간 심하게 겪다가 죽을고비를 넘기고 약을 바꿔갔다.
노래방알바부터 22세 겨울 퇴원해서 낮병원 다니면서 일하며 재활과 회복했다.
재발시 체대지원으로 매일10km씩 100일을 뛰었고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 1000km를 달렸고 13kg가 빠졌다.
체대입시에 다 떨어졌고 좋아하는 동창을 좋아하다가 실연의 아픔으로 입원하며 긴 입원생활도 했다.
병원에서 병원으로 이동해서
부산에서 경기도이천에서 서울 현)국립정신건강센터(과거 국립서울병원)입원후 나와서 한우리찻집부터 알바하다가 노래방알바로 나아갔다.
알바하며 노래부르고 탁구를 치러 복지관가고 파고다영어학원다니고 등산다니며 힐링과 회복시간을 경험했다.
그때 영어학원에서 현재 유명배우 이정은배우 누나도 만났고 함께 영어학원도 다녔다.
몇몇 여성들과 썸도 탔으나,
사회성 부족으로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건강회복으로 등산과 개인상담을 받고 27세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시범단활동도 했다.
25세 정신재활극복수기 우수상을 받고 달리다쿰공동체(티쿰선교회)를 만나서 섬김ㆍ봉사를 하게 되었다.
25세부터 개신교로 개종해 청년부활동을 열심히 했고 교사봉사하며 청년부 부회장으로 국립정신건강센터 개방병동에 예배봉사도 2년간 했다.
30세에 교회 자매랑 결혼을 했다. 정신질환의 증상이 사라지고 관해되었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내가 24세때 부모님과 형제는 이민가셔서 사셨기에 나의 결혼식때만 잠시 나와서 보고 가셨다.
나는 태권도사범일을 10년간하며 유아체육강사와 레크레이션강사도 하면서
태권도장 수석사범으로 일하며 태권도4단ㆍ유도1단을 취득한 상태였고 국기원에서 시험봐서 사범자격증도 땄다.
나는 더 도전하며 운전면허1종을 3번 도전해서 합격후 수시적성을 3년 지나 정신질환 편견을 이겨내고 일반적성검사로 하게 되었다.
20대중반~40대중반 사이에는 책에 빠져 독서광ㆍ메모광으로 1만권의 책을 읽었고 많은 글들을 썼다.
그리고 결혼생활 후
야간대학교를 도전해 신학과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33세에 들어가서 4년을 열심히 다니고 주경야독으로 성적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바로, 취업패키지후 취업되어서 수원ㆍ안산쪽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들에 병원사회복지사로 정식사원으로 취업했다.
치열하게 배우며 적응하며 일했다.
일하며 틈틈히 사회복지사1급에 도전해서
퇴근후 과천도서관에서 매일 살다시피하며
코피 터지며 시험3년만에 마지막 3개월을 더 열공한 결과로 합격했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에
1만 대형교회 새가족반 봉사를 하다가 여성들ㆍ장로님들 교구 레크레이션봉사를 했고 교회안에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상담공부를 하며 상담위원봉사를 했다.
교회 집사로 섬기며 교회ㅡ집ㅡ직장으로 성실히 살았다.
집을 전세로 살았고 30대후반에 1억원 가량의 재산을 모아보기도 했다.
상담 자격증도 여러개 따고
정신건강의학과 폐쇄병동 병원사회복지사로 교육프로그램들과 상담일과 행정일과 보호사 업무까지 1인 3역을 하며 일했다.
열일하던 중 전처의 경계성 성격장애의 한계와 무자식으로 긴 결혼생활의 권태 위기로 11년만에 이혼을 했다.
미국여행을 함께 하곤 이별여행로 나아갔다.
참 힘든 기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혼소송도 겪었고 집이 가압류걸러서 떠돌이 생활도 6개월간 했다. 이모집에서 한칸살이도 했고 괴로움속에서,
결국 돈도 많이 쓰고 마음도 괴롭고 피폐해졌으며 결국 합의이혼으로 끝났다.
전처를 처가로 보내주며 나는 자유로운 돌싱이 되었다.
이혼전에 부부상담도 했고
상담이 완충작용이 되었다. 이혼 후는 트라우마치료 상담으로 2년 가까이 나는 상담을 받았다.
그후 병원일에 열중하다가,
가톨릭대 교수 출신 정신건강의학과 원장님께 정신과 환자 치료에 대한. 전문지식과 기술 등 많은 부분을 배우고 주 치료진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좀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41세때
라틴댄스에 입문해서 춤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9년간 3만명의 여성과 춤추며 원없이 홀딩했다.
춤고수가 되어갔다.
나는
인생에서,
종교에 미쳐보았고!
정신병으로 미쳐보았고!
달리기 운동에도 미쳐보았고!
책과 글쓰기에도 미쳐보았고!
아름답게 보이는 다양한 여자들에도 미쳐보았고!
수없이 많은 황홀한 밤을 보내 보았고!
태권도에 이어 댄스에도 미쳐보았다!
고교교사 여성ㆍ건설소장 여성ㆍ사업가 여성ㆍ강남사는 고위공무원 여성ㆍ광신도 여성ㆍ세상 즐거움에 빠진 여성 등과 사귀어 보았다.
한번에 한명씩요.
다양한 여성들에게 올인해보고 연애도, 동거도, 사랑도, 뜨밤도 원없이 해보았다.
그리고 그 허함과 일시적인 도파민중독ㆍ관계중독ㆍ 성중독의 불장난도 차차 내려놓게 되었다.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면 안되는걸 절실히 배웠다.
내면의 애정결핍에서 시작된 배고픔은 많은 여성들을 만나게 했다.
돌싱 된 후,
40대 중후반까지 뜨거운 열정으로 불나비같이 이성적 사랑과 연애에 미쳐보았다!
육체적 쾌락의 극치를 한없이 누려보고 뜨밤으로 많은 밤을 새워보기도 했다. 결국 허무앞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이쁘고 몸매좋고 아름다워보이는 여자들을 만난다고 물쓰듯 쓰던 돈들과 여행다니며 놀던 시간으로 좀 있던 재산도 모두 탕진하고 가난함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몸 하나만 남게 되었다.
고독한 광야생활을 서울에 오기전에 충북 증평에서 혼자지내며 감당해야했다.
3년전쯤
서울에 다시 올라올때는 수중에 200만원뿐, 종로에 1평반 고시원에 2달간 기거하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미니멀라이프로 살아가며 그많던 세상 만남과 인맥에도 다이어트를 하게 되었다.
주님을 의지해가며 외로움을 감내하고 내면이 단단해지는 시간을 가졌고 많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40일 기도를 드렸다.
세상의 인기ㆍ자랑ㆍ욕심도 너무 덧없다.
어린시절 아버지가 큰부자였기에 세상의 부와 산해진미와 여행도, 국회의원집안과 어울리는 권력지향도 잠시 경험했다. 부모님덕에 10년간 호의호식을 누려보았다.
나는 충북 동거녀와 헤어진후, 다시 서울을 혼자 올라올때는,
다시 초심을 간직한 채, 가난한 심령으로 왔다.
2018년이후,
책을 3권 내며, 좀 우쭐할 뻔하기도 했고,
정규방송들과 유튜브들과 전국에 강연120회이상도 하며 삶의 의미가 주님안에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현재는 내가 가진 것도 별로 없으나,
그래도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과 경험들을
나누고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쓴 책도 꽤 많이 기증하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어떨때는 강연비보다 책값이 더 나가기도 한다.^^
6년전에는 시골가서 손목수술후 공장 생산라인에서 막노동도 6개월간 하며 몸무게도
12kg빠져보았다.
5년전부터 청원경찰도 하고 올해초 종료했고 현재는 5년간 심리상담사로 사람 살리는 일을 하며 지내고 있다.
몇년간
혼자 지내며 티쿰선교회봉사와 심지회나 가족협회 모임을 참여하고 종종 강연하고 지낸다.
최근 1달전 미국 캘리포니아에 사시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서 천국 같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후 한국에 귀가해서는 아직 실직 후,
생활이 넉넉치 못해서 올해 5월에는 동네 행정복지센터에 차상위계층 주거급여를 신청해둔 상황이다.
또, 최근 무릎수술위기와 치료 그리고 야생진드기사건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중년 이후의 인생을 보다 의미있게 살길 바라게 되었다.
몇년전부터 연애도 안하고 혼자 지내며 상담일로 이웃을 돕고 강연ㆍ질의문답으로 타인을 돕는 삶에 자족하며 지낸다.
내담자들을 도우니 연애 안해도 만족하고 마음이 풍요롭다.
일어나면 감사하고 홈트레이닝을 매일 집에서 하고 가끔씩만 라틴댄스로 취미운동을 가는 정도이다.
무리하지 않고.
생활의 여유는 없고 가난하고 중년나이에 취업도 불투명하지만,
나는 마음만은 부자이다.
경험과 추억이 풍성하기에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남은 여생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주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되길 기도드린다.
부모님과 형제들께 감사드린다.
매일이 기적의 날이며
살아있음에
참 감사합니다!
2024.6.14금
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