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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7일 오늘의 역사
2018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두발자유화선언
2017년 충북 진천에 세계최대 규모의 종합훈련장인 선수촌 개촌
2017년 ‘플레이보이’지 창간한 휴 헤프너 세상 떠남(91세)
2010년 북한 ‘3대 세습’ 공식화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알려진 3남 김정은에게 2010년 9월 27일 명령 제0051호를 통해 인민군 대장 칭호가 내려지면서 북한의 3대 세습을 공식화 하였다.
28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같은 사실을 공식발표하였다. 대외적인 공식발표에 김정은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3남 김정은과 여동생 김경희 등 6명에게 군사 칭호를 부여하며 군과 친족을 통한 3대 세습을 공식화 하였다. 또한 이날 44년 만에 당 대표자회를 열어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재추대하였다.
10월 10일 김정일·김일성 부자가 참석한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 열병식이 김정일 참석 행사로써는 사상 첫 생중계되며 대내외에 후계자 등극을 공식 선포하였다. 이날 CNN 등 외신 기자단 80여명에게 공개한 행사에서 신형 중거리 탄도탄(IRBM 일명 ‘무수단’)을 공개하며 권력 승계를 홍보하였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는 김정은은 얼굴·체형·성격 등 모든 면에서 김정일을 닮았으며, 성격은 다혈질인 김정은은 리더십과 승부 근성이 있고 매사에 적극적이라고 밝혔다.
이번 대장 칭호 수여에 대해 군사적 의미가 아닌 정치적 의미의 대장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며, 당분간은 김정일 중심의 국가운영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또한 이후 북한은 안정적 세습을 위해 변화보다는 체제 안정을 위한 ‘선군정치(先軍政治)’를 강화가 예상된다.
2010년 음악으로 세상 바꾸는아브레우 서울 평화상 수상
2008년 중국 선저우 7호 우주인 자이지강 "페이티엔 우주복"을 입고 중국최초로 우주유영
2007년 진실화회위 :조봉암 사건 진실귀명 결정
2007년 한국어 최초로 국제기구 공식언어 채택
2007년 우리나라 물리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카이스트 초대원장 이주천 세상 떠남
2003년 한국최초 우주망원경 과학기술위성 1호 발사 성공
2002년 안동 극제탈춤 페스티벌 (9,27~10,09)
2001년 헌재 4,3. 사건 특별법 위헌심판 청구 각하
2000년 음성인식 반도체 칩 세계 3번째로 개발
국내 연구진이 음성인식전용 반도체 칩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뇌과학연구사업단 이수영 단장은 2000년 9월 27일 "화자 독립형 음성인식 반도체 칩을 미국-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개발했다. 화자독립형 음성인식은 일단 작동이 되면 말하는 사람에 관계없이 동작하는 음성인식 방식이다. 그동안 국내 음성인식연구는 PC나 범용 반도체 소자인 DSP(Digital Signal Processing - 디지털신호처리)를 이용한 방식으로 주로 개발됐으나, 음성인식 전용 반도체 칩 개발은 처음이었다. 반도체 칩을 사용한 음성인식 방식은 기존 PC나 DSP로 만든 것보다 음성인식기의 크기와 메모리를 줄인 것이 특징이다
1998년 독일 총선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사민당 총리후보가 헬무트 콜 총리를 누르고 승리
1990년 한국-말리 국교 수립
1990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 연구에 큰 역할을 담당해 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이만열(숙명여대), 윤경로(한성대), 서굉일(한신대), 김승태씨 등 개신교인 역사학자들과 서정민(연세대) 이덕주, 심한보, 박효상씨 등 교회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1990년 9월 27일 설립됐다.
1982년 `한국기독교사연구회`를 만들어 세미나와 회보 발간 등 공동연구를 해 오던 이들은 회원이 늘어나자 상설 연구조직을 만든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한국기독교의 역사`(전2권)를 비롯해 논문선집 3권, 자료총서 27권을 간행했으며 학술지 `한국기독교와 역사`를 연 2회 발간해 왔다. 또 자료의 발굴과 수집, 정리에도 힘써 약 1만2000여점의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1989년 일본 소니사, 미국 영화사 콜롬비아 인수 발표
1988년 서울올림픽 100m 금메달리스트 벤 존슨의 약물복용 조선일보 특종
서울올림픽 육상 1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캐나다 육상선수 벤 존슨에 대한 약물복용 사실이 1988년 9월 27일자 조선일보에 1면 머릿기사로 첫 보도됨으로써 세계 스포츠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벤 존슨은 1987년 100m를 9초83으로 달려 그때까지의 세계신기록을 0.1초 단축한 세계신기록 보유자였다. 서울올림픽에서도 라이벌 칼 루이스를 따돌리고 9초79라는 세계신기록을 수립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경기 2일후 도핑검사결과 벤 존슨이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라는 약물을 복용했음이 밝혀져 금메달을 2위 입상자인 칼 루이스에게 반납해야 했다.
올림픽 폐막후 캐나다 정부는 존슨을 정밀조사해 존슨의 코치가 약물복용을 조언했음이 밝혀져 코치에게는 자격을 영구 박탈했고 존슨에게는 2년간의 출장금지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존슨은 2년후에도 다시 약물을 복용해 영구 경기금지 처분을 받았다.
1987년 콜롬비아 메데인 근교 폭우로 산사태 600명 이상 사망
1986년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창립
전국교사협의회가 1986년 9월 27일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700여명의 교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한신대에서 창립됐다. 훗날 전교조의 강령으로 발전된 ‘민족-민주-인간화교육’으로 대별되는 참교육의 이념적 기반과 구호가 이때 만들어지기도 했다.
전교협은 ‘우리는 떳떳할 수 없었던 지난 날의 부끄러움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교육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사가 될 것을 엄숙히 선언하다’라는 창립취지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자기반성으로부터 출발했다.
전교협은 창립 이후 교육법 개정 투쟁을 가장 핵심적인 과제로 삼고 전교조가 결성되는 1989년 5월까지 치열하게 교육악법 철폐투쟁을 전개했다. 교사와 교육을 통제하는 기존의 교육관계법이 정통성을 갖지 못하는 독재정권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1983년 한국 가톨릭순교자 성인103명 탄생
1839년과 1846년, 1866년 서울 용산구 새남터를 포함한 전국 처형장에서는 대규모 참수형이 벌어졌다.
처형당한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들이었고 이 세 해는 한국 천주교사에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로 기록되고 있다.
세 차례 박해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8000여 명에 이르렀고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 모방 등은 참수형에 처해진 뒤 머리가 군문(軍門)에 내걸렸다.
순교자의 시신이 땅에 묻혀진 지 강산이 11번이나 바뀐 1983년 로마 교황청은 순교자들에 대한 중대한 발표를 했다.
9월 27일 로마 교황청은 추기경 33명과 대주교 및 주교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특별추기경 회의를 열고 세 차례 박해 때 한국에서 순교한 103명에 대한 시성(諡聖 ;·성인의 품위를 주는 것)을 승인했다.
1971년 12월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한국 순교자 복자시성안이 접수된 지 12년 만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시성이 승인된 103명에는 한국 첫 신부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모방 등 프랑스 신부 10명도 포함됐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적을 행한 사실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데 이때 시성이 승인된 103명은 3개월 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기적 심사를 면제했다.
그러나 예수가 태어나 활동한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척박한 지역 중 한 곳에서 신앙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1만 명에 가까운 신자가 목숨까지 내어 놓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103명에 대한 시성식은 이듬해인 1984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맞아 방한해 직접 집전한 당시 시성식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열린 첫 시성식이었다.
당시 요한 바오로 2세는 “경의 표시도 하지 않고 이 거룩한 땅을 어떻게 밟을 수 있겠느냐”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김포공항 땅 위에 입맞춤을 했다.
한국 가톨릭은 현재 한국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 등 169명에 대한 시성을 추진하고 있어 한국 성인은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982년 미국 경찰, 여인추행혐의로 유엔주재 북한외교관 수사
1981년 트뤼도 캐나다수상 내한
1981년 프랑스 고속열차 TGV 세계 최고기록 갱신
프랑스 고속열차 TGV가 1981년 9월 27일 첫 운행을 시작했다. 오전 7시15분, 파리를 서서히 빠져나간 오렌지색의 유선형 1번 열차가 리용까지의 425km 거리를 2시간 40분 만에 주파하자 프랑스 언론들은 다가올 TGV 시대의 도래를 축하했다.
출발 후 1시간17분이 지나 “지금 시속이 260Km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자 운행을 축하하기 위해 탑승한 미테랑 대통령과 승객들은 박수치며 환호했다. 1964년 일본의 동해도 신간선이 세운 종래의 210Km 기록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TGV는 최고시속이 380Km이지만 소음 등을 고려해 초기에는 시속을 260Km로 제한해 운행했다.
TGV는 1989년 터널 통과시 압력과 소음방지시설, 제동장치 등을 대폭 개선한 ‘제2세대’ 아틀란틱선을 파리투르노선에 투입하며 시속 3백㎞ 시대를 새로이 개척했고, 스페인 AVE(마드리드세비아)에 투입할 차량도 이때 함께 수주함으로 세계시장으로 진출하는 TGV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프랑스가 ‘세계 최고의 속도, 오랜 경험과 최첨단 기술’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고속열차 TGV는 순간 최고속도가 5백15.3㎞이지만 운행시의 안전을 위해 3백㎞로 운행한다. 그래도 독일 ICE(2백50㎞)나 일본 신간선(2백70㎞)을 앞지르는 성능이다. 첨단기술의 결정체인 TGV는 2000년 6월 탈선사고로 인한 13명의 경상자를 제외하면 개통이래 2억명을 수송한 지금까지 큰 사고없이 정상적으로 운행되고 있는 프랑스의 자존심이다.
1981년 중공, 대만에 교역제의
1980년 정부, 기업체질강화대책 발표
1978년 제42회 세계사격대회 서울서 개최
1970년 강원도 대관령에서 버스 추락 사망 75명
1964년 주간한국 창간
1964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규명 워렌보고서 공개. 오스왈드를 단독범으로 단정
1963년 중앙정보부, 황태성 간첩사건 발표
1963년 9월 27일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가 발표됨에 따라 광복 후 처음으로 현 고위지도층의 가족을 통하여 고위지도층과 직접 접촉하기 위하여 거물급 인사를 남파하였다는 점에서 한때 정계는 물론, 정부 고위층과 관련설로 인하여 세인의 의혹과 물의를 일으켰다.
사형집행이 발표됐던 간첩 황태성이 오끼나와에서 활보하고 있다는 풍문은 정계에 비상한 물의를 야기시켰으며 정부는 그에 대한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국회가 국정감사를 통한 진상규명에 들어갈 정도로 북한의 대남도발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사건이었다.
1962년 예멘, 군부쿠데타
1962년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1962년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출간
바다 생물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레이첼 카슨(1937~1964)에게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1958년 1월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살충제인 DDT를 대량 살포했는데 이 살충제 때문에 새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카슨은 친구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그전부터 DDT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45년 DDT의 폐해를 알리는 글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몇몇 잡지에 기고했으나 살충제 제조회사의 광고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잡지사들의 거부로 실리지 않았다. 친구로부터 편지가 왔을 때 카슨은 유방암과 십이지장궤양 등의 병마와 싸우는 중이었지만 편지를 계기로 이후 4년 동안 DDT의 해독에 관한 자료 조사와 집필에 매달렸다.
카슨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작가를 꿈꾸며 1925년 펜실베이니아여대(현재는 채텀대)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2학년 때 수강한 생물학 강의를 계기로 전공을 동물학으로 바꿔 1929년 졸업했다. 1932년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서 동물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해양과학연구소의 해양 생물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36년부터는 미국 어업국 소속 공무원으로 해양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 시리즈를 쓰고 어류에 관한 보고서나 소책자를 만들었다.
1949년 어업국이 어류야생동물청으로 승격한 뒤에는 그곳에서 발간하는 모든 출판물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해풍 아래서’(1941)와 ‘우리 주변의 바다’(1951)를 출간했다. 특히 ‘우리 주변의 바다’는 기존의 과학도서와는 달리 해양과학적인 내용을 매혹적으로 묘사해 32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86주 동안 베스트 순위에 오르며 카슨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카슨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 1952년 공무원직을 내던지고 1955년 ‘바다의 가장자리’를 출판해 3권의 바다시리즈를 완성했다.
DDT에 대한 집필은 1962년에 완결되었고, 연구 결과를 발췌한 내용은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6월 16일자 ‘뉴요커’지에 실렸다. 2주 동안 연재된 기사에서 카슨은 ‘기적의 화학약품’으로 칭송되던 DDT, 제초제, 살균제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며 과학적 근거와 통계수치, 실제의 사례들을 들어 살충제의 피해를 낱낱이 까발렸다.
그러자 농약 제조업체들이 들고 일어섰다. 카슨을 가리켜 “살충제보다 더 독한 여자”라고 흥분하는가 하면, 내용을 소개하는 신문·방송사에는 광고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농약회사가 “카슨의 글은 부정확하고 또 악의에 찬 것”이라고 출판금지를 요청했으나, ‘침묵의 봄’은 1962년 9월 27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침묵의 봄’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1963년 5월 대통령과학자문위원회가 “정부는 국민에게 농약의 가치와 함께 그 위험성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1969년에는 국가환경보호법이 제정되고 미 환경보호청(EPA)이 발족되었다. 1970년 4월 22일에는 미국에 ‘지구의 날’이 제정되었다.
레이첼 카슨은 평생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바닷가의 오두막집에서 화초밭을 가꾸고 새를 관찰하며 저술에만 몰두하다가 ‘침묵의 봄’ 연구에 따른 유방암의 악화로 1964년 봄 세상을 떠났다. 20세기 말 타임지는 그녀를 ‘20세기를 변화시킨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1961년 한국, 국제과학연맹이사회 가입
1958년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1958년 예멘에 군부쿠데타. 바드르왕을 시해하고 자유공화국 선포
1952년 크라크 유엔군총사령관, 한국 전해안 봉쇄 발표
1949년 정부, 서울주재 소련영사관원 니콜라이 추방
1946년 제1회 IMF(국제통화기금)총회 워싱턴에서 개막
1945년 히로히토 일왕, 미국 대사관의 맥아더 방문
1940년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동맹 베를린에서 조인
1939년 독일-소련 9.28 우호조약 조인
1938년 `애국적 미국인`, 보브 호프 데뷔
1917년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 세상 떠남
1915년 프랑스 시인 구르몽 사망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 한 글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프랑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구르몽이 1915년 9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기의 매우 지성적인 비평가이기도 했던 그는 이제 영어로 된 수많은 번역본으로 우리네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는 수많은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상징주의 미학의 원리를 깨우쳐줬다.
프랑스 북서부 바스노르망디주(州)의 캉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1884년에 국립도서관의 사서가 되었으나 1891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라는 잡지에 비애국적인 기사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가 남긴 50권의 저서는 주로 수필집인데 그 내용은 18세기의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비교될 만큼 광범위하고 논조도 비슷하다. 그의 저서로는 에필로그(1903~13)·문학산책(1904~27)·철학산책(1905~09) 등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문두에서 언급한 그의 대표적인 상징시 ‘낙엽(落葉)’이 친숙함은 사실이다.
1908년 '독립운동의 선구자' 왕산(旺山) 허위(許蔿)순국
'서대문형무소 1호 사형수'가 된 허위 선생의 형제와 많은 후손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항일 무장투쟁을 하다 희생됐다.
1855년 경북 구미 임은동에서 학자 집안의 네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허 선생은 당대 성리학의 거물 중 한 명이었던 맏형 허훈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허훈은 19세 아래인 동생 위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학문에서는 아우에게 양보할 게 없지만, 포부와 경륜은 아우에게 미치지 못한다"며 동생의 범상치 않음을 꿰뚫어 봤다고 한다. 허위 선생은 39세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화란(禍亂)을 피해 경북 청송군 진보면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에 항거하다가 41세 때인 1896년 3월 경북 김천 장날에 항일의병 기치를 들었다. 이기찬을 의병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이 됐다.
의병은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뒤 직지사에서 포군(砲軍) 100여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충북 진천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고종의 밀서에 따라 의병을 해산했다. 허위는 이때의 답답한 심정을 "호남 3월에 오얏꽃 날리는데/ 보국하려던 서생이 철갑을 벗는다/ 산새는 시국 급할 줄은 모르고/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不如歸)라 하네"라고 읊었다.
그는 청송군 진보에 있는 맏형에게 돌아와 3년간 학문을 닦다가 1899년 중앙 관계로 진출해 성균관 박사, 중추원 의관(왕명의 출납과 병기·군정 등의 일을 맡아본 관청의 관직), 평리원(대한제국의 사법기관) 수반판사,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임금을 보좌해 정무를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기관) 참찬(정2품 관직)에 이어 1905년 비서원(왕명의 출납·기록을 담당하던 관청) 승(현 대통령 비서실장·종3품)을 역임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침략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 조인했다.
허위 선생이 전국에 배일 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자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해 선생을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은거 중이던 1905년 1월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는 등 국권이 완전히 기울었다.
선생은 전국을 돌며 의병을 모집하다가 1907년 9월 연천·적성·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해 11월에는 선생의 휘하 의병부대와 이인영 의병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이 조직됐다.
이인영이 총대장, 선생은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軍師將)을 맡았다.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1만여명의 의병을 경기도 양주로 집결시켰다.
서울 진공의 선공을 맡은 선생은 선발대 300명을 이끌고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했다.
그러나 후발 본진의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 타계 소식을 듣고 경북 문경으로 급거 귀향하고 서울 진공 정보까지 누설됐다.
허위 선생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대비하던 일본군 공격을 받았고, 작전은 실패했다.
이후 선생은 경기 북부지방에서 의병운동을 계속하다가 1908년 6월 은신처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는데, 당시 나이 53세였다.
왜승이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라고 대성 일갈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또 검사가 시신을 거둘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죽은 뒤의 염시를 어째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도 무방하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답했다.
정부는 허위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독립 유공 최고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고, 서울시는 1966년 선생이 진격한 길을 따라 청량리에서 동대문까지 3.3㎞ 구간을 왕산로로 제정했다.
1901년 시인 파인 김동환 출생
1854년 대서양횡단여객선 아크릭호 침몰. 300여명 사망
1825년 스티븐슨, 세계최초의 증기기관차 로코모션호 운전
1825년 세계최초의 철도 영국에서 개통
1821년 스위스 문학자 앙리 프레데리크 아미엘 탄생
1575년 이이, 성학집요 저술
1540년 로욜라의 이나시오가 주도한 예수회 공인됨
1484년 창경궁 준공
1469(조선 예종 1) 『경국대전』 편찬
1290년 중국 직예 지방에 지진 사망 10만여 명
1013년 감수국사(監修國史) 최항(崔抗), 수국사 김심언(金審言)이 국사(國史)를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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