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3:13~23
성도들은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을까?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느냐? 는 대단히 중요하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일주일에 단 한 번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그 예배의 대부분은 설교에 맞춰져 있다.
성도들의 목사님에 대한 선입관은 이 설교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느냐? 받아들여지지 않느냐? 를 좌우 한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갖고 있을까?
아마도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생각을 할 것이다.
목사님은 늘 내 인생에 태클을 거는 분쯤으로 생각을 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는 늘 좌측으로 가고 싶은데 목사님은 늘 우측으로 가라고 주장하는 분으로 생각을 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선입관적으로 목사님의 설교를 싫어한다.
몸은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와 앉아 있지만 마음과 귀가 닫혀 있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분들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선입관을 갖는다.
목사님은 현실 감각이 없는 딴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을 한다.
모든 목사님들은 영적인 말씀을 전한다.
하나님에 관해서 전하고, 영생에 관해서 전하고, 영혼에 관해서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내 인생에서 돈 버는 일이 중요하고, 내 인생에서 직장이 중요하고, 내 인생에서 결혼이 중요하고, 내 인생에서 꿈을 이루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님에 대한 선입관이 별로 좋지 않다.
이것은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다.
목사님은 늘 성경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목사로서 나는 일평생 성경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전했다.
그 성경 말씀 안에는 인간의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수많은 신비한 일, 영적인 일들이 가득하다.
그러기에 그 말씀으로 설교하는 목사님은 현실성이 없어 보이고, 조금은 고리타분하고,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져 있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선입관은 결국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일에 결정적인 방해 요인이 되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무너뜨린다.
목사님을 어떤 분으로 보아야 하는가?
어떤 믿음이 좋은 성도들은 목사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말 좋은 태도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목사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인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존대에 대한 사실적인 증거를 갖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리얼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사실적이 되지 않은 사람은 목사님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존재가 사실적이 아닌데 하나님의 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목사인 나는 20살 때부터 지금 70살이 될 때까지 성경을 배우고 가까이 하고 묵상하고 전하면서 살아 왔다.
성경과 함께 살아온 지난 50년의 세월.
그렇게 살아 온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2~3년 전부터 세상의 부와 성공과 자기관리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고 있다.
더 부요지고 싶고 더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고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삶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런 책들을 읽고 있다.
그런데 그런 부와 성공과 자기관리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지난 50년간 오직 성경만을 가까이 하면서 살아 왔는데 그렇게 살아 온 삶의 결과가 세상의 부와 성공과 자기관리가 되는 삶과 너무나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 시대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매일 감사 일기를 쓰거나 매일 일정한 시간을 정하고 감사하는 말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해서 감사하는 삶을 일평생 살아오고 있다.
저들은 감사하는 대상이 구체적이지도 않고 막연하게 감사를 하고 있지만 나는 실제적인 창조주 하나님께 매일 감사를 하고 있으니 나는 저들 보다 한 수 위다.
또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세상에서 소위 부자가 되었거나 성공한 사람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 말씀대로 살아 온 나는 몇 십 년 동안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지고 명상을 하고 있다.
단순한 명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수준의 말씀을 가지고 명상을 한다.
이러니 세상 사람들이 갖는 명상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소위 세상의 부와 성공을 거머쥔 사람들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체험하며 살고 있다.
나는 더욱 크게 부자가 될 사람이며, 더욱 크게 성공할 사람이다.
그런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삶의 축복을 누리고 있다.
나는 오늘도 십일조 헌금을 100만원이나 드렸다.
작년 12월부터 벌써 6번 째 100만원씩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
성경은 이렇게 나를 부와 성공과 자기 관리의 멋진 삶으로 인도하고 있다.
나만 이런 삶의 축복을 누려야 하는가?
아니다.
내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도 이런 축복을 누려야 한다.
나는 그 일을 위해서 날마다 소원을 품고 기도하고 있다.
성경은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목사인 나에 대해서 이런 선입관, 이런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목사님은 내 인생의 행복과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한 최고의 멘토입니다!”
“나는 목사님을 통해서 내 인생의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예배 시간에 눈동자가 반짝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목사님과 늘 가까이 하려고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목사님의 말씀과 목사님의 인생을 주의 깊게 듣고 살펴 볼 것이다.
목사인 나는 하나님 수준의 지혜와 하나님 수준의 능력으로 성도들의 삶을 가장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이다.
아! 누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질 것인가.
목사인 나는 오늘도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성경 말씀 안에는 인간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수많은 신비한 일, 기적적인 일, 영적인 일들이 가득하다.
과연 성경은 이런 것만을 말하고 있을까?
과연 성경은 현실 감각이 없는 저 신비한 세계의 말씀만을 전하고 있을까?
아니다.
성경은 현실감각이 넘치는 역사적이요, 객관적이요, 사실적인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오늘 말씀은 기독교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계로 퍼져 나가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이 오늘 이 지도에서 살펴보는 대로 기독교는 이스라엘 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다.
이 땅에 맨 처음 시작된 교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다.
예루살렘 교회가 주님의 지상 명령을 잊어버리고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시니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을 내리신다.
그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은 온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안디옥 교회다.
우리들이 이 지도에서 살펴보는 대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의 땅에 세워진 교회다.
비록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의 땅에 세워진 교회요, 그 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방인들도 많이 있었지만 그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였다.
성령이 인도를 따라 바로 선교를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고 그들을 선교사로 파송을 한다.
파송 받은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이런 지역을 따라가며 선교 활동을 한다.
안디옥에서 실루기아로,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구브로 섬 살라미에서 육로를 따라 바보라는 항구 도시로, 그곳에서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에게 복음을 전해서 영혼을 구원하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버가라는 육지로 올라온다. 버가는 오늘날 터어키라는 나라가 있는 터어키 반도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육로를 따라 비시디아 지방의 안디옥으로 올라온다.
이 모든 여정은 사도행전 13장에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선교사역을 진행한다.
이렇게 방문한 지역들이 다 오늘날도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지역들이다.
디시 말하면 성경은 어떤 신비한 영적인 이야기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요, 객관적이요, 사실적인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모든 말씀은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차원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받아들일 것이냐? 안 받아 들일 것이냐? 차원이다.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요, 똑똑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요, 고집스런 사람이요, 비양심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역사적이요,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이지 않는 그 사람은 자신이 보인 태도와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서 선교를 한다.
그곳 회당에서 말씀을 전한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바로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
우리들이 이전에 살펴 본대로 구브로 섬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하는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행13: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이 종교 활동을 하는 회당이 왜 여기에 있을까?
이 이방인들의 땅에 회당이 있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하게 사랑하셨다.
애굽에 종으로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출애굽 시킨다.
그 백성들을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들이 들어가는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과연 이 땅은 어떤 땅이라는 의미일까?
이 말을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면 경제적으로 풍요한 땅이라는 의미다.
경제적으로 풍성해서 부족함이 없는 그 땅.
하나님은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들어가서 풍성한 삶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미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런 풍성함을 누리지 못했다.
그들은 그 땅에 들어가서 우상을 섬겼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방인들이 사는 삶의 방법을 부러워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던 것이다.
그들은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다.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화시키고 반대로 이방 나라들을 강하게 하셨다.
그렇게 강하게 된 나라들이 바벨론, 앗수르였다.
그 나라들은 그 강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죽이고, 함락시키고, 빼앗아 가고, 포로로 잡아 갔다.
그런 비참한 침략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남아서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방 여러 나라로 피난을 갔다.
그렇게 흩어진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라고 한다.
그들이 그렇게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이 그들이 사는 곳에서도 나름대로 종교 활동을 했는데 바로 그 장소가 회당이었던 것이다.
그 회당은 이스라엘 나라의 비참한 역사의 산물이고, 그 역사적인 산물인 회당이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를 하는 그 현장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회당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민족은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역사적인 증거의 산물이다.
회당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주는 역사적인 증거의 산물이다.
회당은 죄를 범하면 한 시대만 죄악의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죄의 저주가 계속 임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역사적인 증거의 산물이다.
죄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죄를 두려워해야 한다.
회당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보면서 성경은 영적인 것들만을 말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
복음을 전하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간단하게 언급하며 복음을 전한다.
[행13: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행13: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행13:27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오늘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말하면서 구체적인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애굽 이후 광야의 40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완전히 차지하는데 450년,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민족의 초대 왕 사울의 통치 40년.
이렇게 구체적으로 숫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들이 잘 아는 대로 이 사도행전은 의사 누가가 기록했다.
그는 그 때 당시에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다.
그의 지적인 수준에 맞게 성령이 그에게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누가는 이렇게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사실로서 기록하는데 힘썼다는 것이다.
아! 이런대도 사람들은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인생과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저 고리타분한 신화적인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이 결코 삶의 표준이 될 수 없다.
그저 교회 와서 목사님의 설교 시간에만 들어주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후~ 탁! 성도들인 것이다.
성경의 참 맛을 알지 못하고는 결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진리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성경 말씀을 깨닫고 믿고 이 성경 말씀의 축복을 누리도록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의 성령을 부어 주셨다.
바울사도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정말 중요한 복음을 전한다.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바울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이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구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일하셨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기록이다.
구역 성경의 핵심 요점은 바로 메시아가 오신 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에 들어갔다.
그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은 천천히 정말 천천히 가도 40일이면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40년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을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라는 길고 긴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그곳에 들어가서는 이제는 하나님을 멀리 하지 않고 믿음을 잘 지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축복을 누려야 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땅에 들어가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저주를 내려서 끊임없이 회개의 기회를 주셨건만 그들은 온전히 돌아서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 시대 우리들 같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계속 그런 죄를 범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들이 우리들 보다 더 악해서 그랬을까?
그들이 우리들 보다 더 미련해서 그랬을까?
과연 그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리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선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선명하지 않으니 세상의 어떤 것이 하나님처럼 크게 보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상을 섬기고 그것들에게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선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반드시 인본주의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였다.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체를 입은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행13: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다윗의 후손에서 사람이신 주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다.
그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하고 하는 사람들에게고 해당되는 문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은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불안하고 두려우니 하나님 대신 그 무엇을 믿어야 하고 섬겨야 하고 그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상이요, 그 우상을 섬기는 것 때문에 바로 진노의 형벌이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갖고 있는 비극의 근본 뿌리다.
하나님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이신 주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사람이신 주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사실적으로 보게 해 주신 것이다.
나는 과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 문제를 해결했는가?
나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서 15년 동안이나 교회를 다니면서도 불신자들과 똑 같은 삶을 살았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내가 20살이었을 때 이 세상에 사람으로 살았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 주셨다.
부활의 증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살았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확실하게 알게 해 주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 그 분이 나의 주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당연하게 그 분께 나의 삶의 주권을 넘겨 드려야 했다.
그 때부터 나는 변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졌다.
인생에 대한 목마름이 사라졌다.
삶의 구체적인 방향과 목표가 정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방황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이 나의 주인으로 오셔서 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온 나의 인생.
지난 50년의 세월.
나는 지금 넘치는 감동으로 이 노래를 늘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다.
“삶이 기쁜 샘이 되어 바다처럼 넘치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
고리타분한 사람인 목사님인데
그 속에 금은 보화가 가득하게 들어부렀네
빼 먹을게 넘~많은데
시간 감이 아까우니
어이 할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