學記曰, 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
孟子曰, 人之有道也, 飽食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有憂之, 使契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주지하는 대로 위의 문장은 소학 입교편의 것이다.
옛날에 중국에서 교육기관으로 가장 작은 단위가 塾이며 가장 큰 단위가 學이었다. 그러한 교육기관을 왜 세웠는가?
맹자는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道 있으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히 살면서 교육이 없다면 금수에 가깝게 된다. 성인이 이런 사실을 우려하여 설을 사도로 삼고 인륜을 가르쳤다. 父子에는 親함이 있고, 君臣에는 義가 있고, 夫婦간에는 구별됨이 있고, 長幼 사이에는 질서가 있고, 朋友사이에는 신의가 있다, [이것이 인륜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 유아원부터 초중고, 대학, 대학원 그리고 그 외 무수한 명칭의 교육기관들이 있다. 피아노 학원도 있고 미술 학원도 있고
대구 명덕 로타리에는 만화학원도 몇 군데나 보인다.
그 많은 교육기관이나 교육단체의 목표가 무엇일까. 얼마전에 인터넷에 학생들 설문조사를 하였다면서 나온 내용에 수많은 학생이 의대를 가려는 목적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였다.
어찌 의대만 그렇겠는가. 동네의 작은 피아노 학원 하나 조차도 그 바이에르니 체르니니 교본을 들고 다니며 손가락 아프게 연습하는 것은
모차르트가 되고 싶은 것도 바하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렇게 연습하여
뜨는 것이고, 뜨면 유명세를 타는 것이고, 유명세를 타면 수입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이가 음악을 좀 탄다 싶으면 트롯을 훈련시켜 방송국의 무슨 경연대회에 내보낸다. 제2의 이찬원. 제2의 정동원을 만들고 싶어 환장한다. 그렇게 오래 훈련 받은 아이는
아이 답지 않게 경연대회에서 ‘이별가’를 목이 터져라 애절하게 불러댄다.
그리하여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기라도 하면 그에게 더는 아무런 교육이 필요 다.
누가 말했던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두 가지라고.
자본주의와 전쟁.
핵전쟁이 터지면 인류가 멸망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것과 병치시킨 것이 자본주의이다. 이제 인류는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나 간에 오로지 돈에 혈안이 되어 있다.
돈을 잘 벌 수 있는 방법으로 그 많은 교육기관이, 교육단체가 벌여서 있다.
맹자가 말한 금수란 어떤 의미일까.
더 이상 진리에의 목마름도 없고 인류애도 없고 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뿐인 존재를 말함이리라.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무고한 생령이 무더기로 죽어나도 거기에다 무기 팔아먹을 생각을 한다.
우리는 베트남 전쟁에서 경제적인 재미를 보았다. 혹은 우리나라의 6. 25에서
일본이 재미를 톡톡히 보았다. 미국은 갖은 무기들을 가져다 시험하는 장소로 삼았고 미국이나 쏘련이나 중국은 한국전을 이용하여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100년 이내에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 한다. 아이를 안 낳기 때문이라 한다. 그 이유의 하나가 저명한 미국인 학자의 분석에서 지나친 경쟁과 이를 부추기는 교육이 원인이라고 하였다. 그 골치 아픈 사회에 나의 2세를 던져 넣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이 안 낳는 큰 이유라고 하였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한 것인데, 어쩌다 교육이 아이들이나 사회를 생지옥으로 만들어가고 있나. ‘입시지옥’이란 말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 지 모르겠다.
근본적으로 교육에서 대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교육이 돈 많이 벌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1등 아니면 안된다면 그럼 2등부터는 살 수 없다는
사회가 아닌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조선조 사회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가난한 선비들이 존경 받았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1800년대의 그 신유한 같은 사람은 벗이 보내준 몇 자루의 붓을 보고 감격해 하는 글을 남겼다. “아아, 올 겨울 내내 이 붓을 쓰다 다 닳고 나면 다시 나는 복희씨 전의 그 결승의 사회로 돌아가겠네.”하였다. 같은 시대 남경희 같은 사람은 죽을 먹으며 ‘죽배가’란 시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가난하여도 가난한대로 그들은 존경 받으며 살았다.
오늘의 한국 사회는 飽食暖衣, 逸居而無敎의 사회 그대로이다. 제사도 지내기 싫으면 안 지내도 된다. 부모도 가지고 있는 유산을 제대로 물려주지 않으면 한판 소송도 불사한다. 잘 차려 입은 禽獸가 길거리를 횡행 하고 있다.
왜 교육을 실시하는가.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그 궁극의 목표가 돈이라면, 그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닐까. 아이들이 자신의 담임을 보고 말한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생님보다 돈을 훨씬 더 잘 벌어요. 선생님은 한 달에 얼마 받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