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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8일 오늘의 역사
2022년 미국 사상 최대 4등급 허리케인 '이언'(Ian) 쿠바와 플로리다 주 강타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이언은 플로리다 북부에 380mm, 레이크 웨일스에 12~24시간 동안 432mm라는 기록적인 비를 내렸다. 미국 국립해양대기청 자료에 따르면 이언이 통과한 지역에 내린 비의 양은 1000년에 한번 올 정도의 수치인 것으로 확인됐다.
강풍과 폭우로 집과 상점이 침수됐고 도로는 강으로 변했다. 포트 샬럿의 한 병원에서는 중환자실 지붕이 날아가면서 응급실이 침수돼 중환자들이 다른 층으로 긴급 대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길가의 나무도 뿌리째 뽑히고 해안가에서는 상당한 높이의 해일이 일어 인근에 있던 시민들의 구조 요청이 쇄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관광 명소로 알려진 월트 디즈니월드가 허리케인으로 초토화 돼 잔해물이 널브러져 있는 광경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됐다.
29일(현지시간) 오후 5시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최소 15명이다
쿠바는 이언의 피해로 전국이 정전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21년 남미 에콰도르의 과야킬의 리토랄교도소에서 갱단 조직원들끼리 충돌이 일어나 118명 사망
2021년 ‘SLBM 탑재’ 3000t급 잠수함 신채호함 진수
2021년 북한 새로 개발한 극초음속미사일 '화성-8′형 시험발사
2019년 김포 첫 도시철도 김포 골드라인 개통
2019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선거, 중앙선관위 5개월 만인 2020년 2월18일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 재선 발표
2018년 새 도로교통법 시행, 전 좌석 안전띠 착용 의무화(과태료 최대 6만원), 자전거 음주운전 단속, 자전거 헬멧 의무화
2018년 인도네시아 슬라웨시섬 진도 7.5 강진, 6m 쓰나미 1,234명 사망
2017년 부산항에서 붉은 독개미 발견됨
2016년 김영란법 시행
2002년 부패방지법이 시행되고 국민권익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공직자의 부패·비리 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특히 2010년 '스폰서 검사와 2011년 '벤츠 여검사' 사건이 발생했으나 향응과 금품 수수를 했음에도 '대가성과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자 기존의 법으로 처벌하지 못하는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비리를 규제하는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2011년 6월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국무회의에서 '공정사회 구현, 국민과 함게 하는 청렴 확산 방안'을 보고하며 가칭 '공직자의 청탁 수수 및 사익추구 금지법'을 처음 제안했다. 2012년 8월 권익위는 공직자가 금품 등을 100만 원 초과 수수하면 형사처벌을 받는 내용의 '부정청탁 및 이해충돌 방지법'을 입법 예고했다.
이후 법무부 등 부처간 이견으로 진통을 겪다 2013년 7월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국회 제출 이후에도 '법의 적용 대상이 광범위하고 위헌소지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표류를 거듭했다. 그러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관피아' 문제가 대두되고, 부정부패 척결 여론이 높아지자 이 법은 이른바 '세월호 3법'으로 불리며 새롭게 주목받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나서 세월호 대국민 담화에서 조속한 법안 처리를 국회에 요구했다.
그러나 국회 처리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2015년 1월 정무위가 법안 처리에 나섰으나 제재 대상에 언론사와 사립학교를 포함하면서 '공무원 등 공공기관 종사자'에 포함되지 않는 직군이 무리하게 포함됐다는 논란이 일었다. 게다가 청탁금지법의 한 축이었던 이해충돌 방지 부분은 법안에서 빠졌다. 청탁금지법은 2015년 3월 3일 국회를 통과했고 3월 27일 제정·공포되었으며 2016년 9월 28일부터 시행됐다. 2017년 12월 시행령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었으며 2018년 1월 말부터 적용되었다.
2015년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화성표면에 흐르는 물의 증거 찾았다고 발표.
2015년 미국지원 받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끄는 9개 아랍다국적군 예멘 해안도시 모카의 예식장 공습 여성 80여 명 포함 131명 사망
2015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김정균 성균관대 명예교수 별세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인 김정균(89)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28일 별세했다.
김 교수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시아학술연구회 이사장과 국제법학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국제법' '신고(新稿) 국제법' '분단 한국과 국제법' 등의 저서를 남겼다
2013년 파키스탄 이와란 지역 진도 7.8 지진 사망 515명 가옥2만여 채 붕괴 이재민 수천 명
2010년 북한 3대세 습 공식화
김정일 3남 김정은 전면 등장, 전날 인민군 대장 칭호 받은데 이어 44년 만에 열린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됨
2009년 설매리 여사 별세
2009년 9월 28일 오후 11시30분(한국시각) 남편인 설대위(David Seel·2004년 작고) 전 예수병원장과 36년간 한국에서 의료봉사와 선교에 헌신했던 설매리(Mary Seel·84) 여사가 미국 앨라배마주 버밍햄의대 병원에서 별세했다.
설 여사는 6·25전쟁 직후인 1954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전주 예수병원에서 가난한 환자를 돌보며 선교에 앞장섰다. 임상병리사로 예수병원에 진단검사의학과와 병리과를 개설하고 기독의학연구원 발전을 도왔다.
설 원장은 그의 내조에 힘입어 국내 처음(1963년) 암환자 등록을 받고 재활의학사업을 벌이는 등 업적을 남겨 국민훈장 목련장(1978년)을 받았다. 설 여사는 남편과 함께 199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시골로 돌아간 뒤에도 암치료선형가속기를 보내오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0년 동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유혈충돌 사망 330여명 부상 3,000명
2000년 피에르 트뤼도 캐나다 전 총리 사망
1968년부터 1984년까지 16년간 캐나다 총리를 역임했던 피에르 트뤼도 전 총리가 2000년 9월 28일 오후3시 몬트리올 자택에서 80세로 타계했다. 트뤼도 전총리는 파킨스씨병과 전립선암을 앓아왔으며 올해초 폐렴으로 10일간 입원치료를 받은 뒤 기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 입문 3년 만인 48세에 총리가 된 트뤼도는 카리스마와 유연한 정책으로 격변의 캐나다 현대사를 요리한 정치인이었다. `공정한 사회`라는 비전을 내걸고 진보정책을 펼쳐 역사적 족적을 남기며 인기도 높았지만 저항세력도 그만큼 많았다. 트뤼도는 몬트리올 대학 헌법학 교수를 거쳐 1965년 하원의원에 당선, 정계에 진출했다. 2년 후 법무장관이 돼 낙태와 동성애 규제 완화법을 만들었다. 자유당 당수에 오른 1968년, 총리에 취임한 뒤 1979년 총선 패배로 9개월간 물러났다가 1984년까지 재집권했다. 재임중 업적으로는 프랑스어를 영어와 함께 공용화하고, 헌법을 개정해 인권헌장을 명문화한 것이 꼽힌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거론되기도 했던 그는 1984년 경제위기로 지지도가 급전직하하자 정계를 떠났다. 트뤼도는 1971년 30년 연하의 마거릿 싱클레어 여사와 결혼, 아들 셋을 두었다. 트뤼도는 가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9년 현대남녀농구선수단, 평양서 북한농구팀과 친선경기
1998년 마크 맥과이어, 시즌 70개로 미 메이저리그 사상 최다 홈런기록 수립
마크 맥과이어(34·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가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추가, 메이저리그 사상 처음으로 한 시즌 70개의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이로써 맥과이어는 이날 홈런을 쳐내지 못한 경쟁자 새미 소사(30·시카고컵스)를 4개 차이로 여유있게 앞서며 올 시즌 홈런왕에 올랐다.
전날 경기에서 2개의 홈런을 쳐 시즌 홈런왕을 굳혔던 맥과이어는 28일(한국시각) 세인트루이스 부시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몬트리올과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3회 69번째 홈런을 때려낸 데 이어 7회 대망의 70호 홈런을 터뜨렸다.
첫 타석에서 중전안타를 때려내 타격감각을 가다듬은 맥과이어는 3회 몬트리올선발로 등판한 신인 마이크 서먼이 던진 평범한 커브를 걷어올려 115m 떨어진 좌측 관중석을 맞히는 솔로홈런으로 시즌 69호를 기록, 소사의 추격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이어 5회에서 볼넷을 골라낸 맥과이어는 3-3으로 맞선 7회 2명을 주자를 둔 상황에서 몬트리올 구원투수 파바노의 빠른 직구를 받아쳐 역시 좌측 담장을 살짝 넘기는 113m짜리 3점 홈런을 때려내 한 시즌 홈런 70개라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웠다.
맥과이어는 또 이날 볼넷 1개를 추가, 시즌 162개의 볼넷을 얻어내 이 부문에서도 테드 윌리엄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시즌 기록 2위에 올랐다.
1998년 박찬호, 메이저리그 진출 3년만에 시즌 15승 달성
`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대망의 15승을 달성했다. 박찬호는 1998년 9월 28일 LA다저스 스타디움서 벌어진 밀워키 브루어스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서 6이닝동안 8안타 1실점(볼넷 2개)으로 선방,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며 시즌 15승째를 따냈다. 이로써 박찬호는 15승9패 방어율 3.71로 올시즌을 마감했다.
지난 97년에는 14승8패 방어율 3.38을 마크했다. 박찬호는 이날 삼진 7개를 추가, 시즌 191개로 내셔널리그 6위에 올랐으며 다승 14위, 방어율 19위, 피안타율(0.244) 10위의 성적을 남겼다. 박찬호는 이날 모두 11명의 주자를 내보냈지만 단 한명만 홈인시키는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 팀내 제1선발의 진가를 확인시켰다.
1997년 한국축구,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
차범근 감독이 이끈 한국 축구대표팀이 아시아 B조 최종예선을 6 승1무1패(조1위)로 통과함에 따라 월드컵 본선 4회 연속진출이 이루어졌다. 1997년 9월 28일 한-일 1차전에서 종료 7분을 남기고 서정원, 이민성이 동점-역전골을 터뜨린 `도쿄 역전드라마`는 한반도를 열광시켰다. 1986, 1990, 1994년에 이어 4회 연속 본선 진출.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그은 일이었다
1994년 에스토니아 여객선 침몰 대참사 - 900명 이상 몰사
승객 7백76명과 승무원 1백88명 등 총 1천 54명을 태우고 스톡홀름으로 가던 에스토니아 선적의 여객선 에스토니아호가 1994년 9월 28일 새벽 1시30분쯤 핀란드의 발트해 부근 해상에서 강한 바람과 파도로 인해 침몰, 9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사고 여객선이 침몰한 지점은 핀란드 남서쪽의 우토섬에서 약 39㎞ 떨어진 발트해 해상이었다. 현장에는 최대시속 90㎞의 강풍이 부는데다 파고 6m의 높은 파도가 치는 바람에 효과적인 구조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구조작업이 시작된지 10시간동안에 1백26여명의 승객을 구출하는데 그쳤다.
금세기 들어 최대의 인명 피해를 낸 해난 사고는 1948년 11월 1일 남만주 부근해역에서 중국 상선이 폭발, 침몰한 것으로 당시 배에 타고 있던 6천여명이 몰사했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이번 사고가 인명피해가 가장 많은 사고로 집계됐다.
1992년 국가안전기획부 전 민중당 중앙정책위의장 장기표 등 6명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구속
1992년 노태우 대통령, 한국 대통령으로 첫 북경 방문해 한중정상회담
노태우 대통령과 양상곤 중국 국가주석이 1992년 9월 28일 오전 북경시 인민대회당내 복건청에서 사상 최초의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다.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공식 방문길에 나선 노태우 대통령은 9월 27일 대한항공 특별기편으로 북경공항에 도착, 3박4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은 28일 오전 북경인민대회당 광장에서 베풀어지는 공식 환영식에 참석한 뒤, 인민대회당에서 양산곤 중국 국가주석과 단독 및 확대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8월 24일의 양국 수교이후 새로운 동북아시대의 개발을 위한 두 나라간 쌍무협력 강화문제와 한반도 및 동북아지역의 평화안보 증진문제 등을 중점 논의했다.
한중 양국은 30일 오전 노 대통령의 중국방문과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담은 8개항의 공동언론 발표문을 발표하고, 북경에서 민간간에 체결된 무역협정과 투자보장협정을 정부간 협정으로 격상, 서명하고 과학기술협력 협정과 경제 무역 기술공동위원회 설치에 관한 협정을 새로이 체결했다.
1991년 세계역도선수권대회서 전병관 선수 용상과 합계 2관왕
1990년 전쟁기념관 기공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전쟁기념관은 한국에서 발발했던 전쟁과 호국정신에 대한 기록, 자료가 전시된 곳이다
1990년 9월28일 전쟁기념사업회가 기념관 기공식을 가진 이후 4년여의 공사를 거쳐 1994년 6월10일 개관했다
전쟁기념관의 건립 목적은 전쟁의 교훈을 일깨워 전쟁을 예방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 하기 위함이다
1989년 마르코스 전(前) 필리핀 대통령 망명지 하와이서 사망
1989년 9월 28일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망명지 하와이에서 72세로 사망했다. 마닐라에서 태어나 필리핀대 법률학을 공부한 마르코스는 상-하원을 거쳐 자유당총재와 상원의장을 지냈다. 1965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돼 21년동안 철권을 휘두르며 장기집권했다.
특히, 1972년에는 3선을 금지하는 헌법을 폐지하고 대통령에게 입법, 사법, 행정권을 집중시키는 헌법을 발표했으며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당활동을 금하기도 했다. 마르코스의 아들 봉봉은 대통령 보좌관으로 재직했고, 그의 아내 이멜다도 마닐라의 시장으로 일할 정도로 친족정치가 횡행했다. 1986년의 대통령 부정선거가 문제가 돼 하와이로 망명했다.
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 착공
1978년 로마 교황 바오로1세 심장마비로 즉위 26일 만에 세상 떠남서거
1977년 일본 적군파, 일본항공(JAL)기 납치
1977년 허담 북한 외무장관 미국 방문
북한의 허담 외무장관이 1977년 9월 28일 외무장관으로는 처음 미국을 방문했다. 허담은 유엔본부에서 열리는 비동맹국 외무장관회담 참석차 10명의 수행원과 함께 파리를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회담은 중동문제 토의에 국한돼 있어 북한으로서는 그다지 중요한 회의가 아니었는데도 허담 외무장관이 직접 미국을 방문한 것은 당시의 한미관계가 박동선사건으로 다소 서먹한 상태였고,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결정하고 미수교 공산국가와 관계개선을 시도하고자 노력하는 시기의 미묘성과 맞물려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허담은 도착 기자회견에서 대미관계 개선의지를 강력히 시사하는 발언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 속도가 느린 데 실망을 표시하기도 했다. 카터도 평양 방문 후 미국을 찾은 티토 유고 대통령에게 대북 관계개선에 강력한 의사를 표명했다.
1971년 일본 최초 인공위성 신세이 지구 이온층 관측에 성공
1970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심장병으로 사망
‘아랍 민족주의 기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심장병 발작으로 1970년 9월 28일 사망했다. 나세르는 아랍주의, 중립주의, 반서구주의를 일관되게 주장해 온 아랍세계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1948년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패한 원인을 지도자 부패로 판단, 당시 국왕 파루크1세를 축출하기 위해 청년 장교들의 모임인 ‘자유 장교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해 1952년 7월 나기브 장군과 함께 쿠데타에 성공했다. 1954년 나기브 수상 후임으로 수상에 올랐고 1956년 6월에는 영국군을 몰아낸 가운데 치러진 이집트 최초의 국민투표에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56년 7월에는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 영국-프랑스에 맞서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1958년 2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합병해 아랍연합공화국을 수립하자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전 아랍 통합주의에 기초해 생긴 아랍연합공화국의 탄생은 중동에서 동서가 대립하는 가운데 서방 여러나라에 타격을 주는 중립주의의 큰 세력이 됐다. 1967년 6월, 6일전쟁에서는 이스라엘에 패해 정치적 상처를 입었으나 아랍민족들은 여전히 그를 아랍세계의 지도자로 추앙하고 있다.
1970년 산체스 엘살바도르 대통령 방한
1969년 서독 총선거. 기민당 신승
1968년 북악 스카이웨이 개통
1966년 아르헨티나 반(反)영국 폭동
1966년 유엔총회서 인도네시아의 UN복귀를 발표
1965년 필리핀 타알화산 폭발, 약2000명 사망
1963년 도미니카의 후앙 보슈 전(前)대통령은 쿠데타로 실각 후 망명
1963년 미국 처음으로 원자력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
1963년 영국-인도네시아군, 사라와크에서 무력충돌
1963년 프랑스-독일협정. 아프리카대륙에서의 양국 세력 확정
1962년 옥외 무인공중전화 최초 설치
1962년 경북 군위에서 제2석굴암 발견
1961년 시리아서 쿠데타, 통일아랍공화국서 이탈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
1958년 9월 28일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80%의 찬성을 얻어 승인됐다. 신헌법은 드골의 정치적 주장을 받아들인 것으로 다수파 정당에 의한 강력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다.
대통령(임기 7년)의 권한이 대폭적으로 강화된 한편 의회의 힘은 약화됐다. 특히 하원(국민의회)의 권한에는 여러가지의 제한이 가해져 상원쪽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또 수상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어 대통령, 수상, 상원, 하원의 수직적인 정권시스템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대통령에게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고 중대한 국가적 위협에 직면했을 때 전권이 대통령 1인에 집중되게 되었다.
1956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1956년 9월 28일 오후2시38분경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장면 부통령이 민주당원 김상붕이 쏜 총탄에 맞아 왼손을 다쳤다. 경찰은 사건의 배후인물로 민주당 서울 성동지구당 간부 최훈을 체포했으나 그 이상의 배후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후 1957년 1월 1일 최훈의 부인이 前성동경찰서 사찰주임 이덕신을 배후인물로 지목하자 검찰은 이덕신도 구속했다. 최훈은 법정에서 "치안국장 김종원이 배후로 생각한다"고 폭로했으나 김종원은 이를 완강히 부인했다. 국회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치안국 특수정보과장 장영복 등 경찰간부가 배후조종한 사실을 탐지해냈으나 이 또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4년 뒤 4·19혁명이 성공하자 김종원은 법정에 불려나왔고 그는 "장면박사 저격사건은 전 서울시장 임흥순이 지시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배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즉 사건 40일 전 자유당 2인자인 이기붕이 임흥순에게, 임은 내무장관 이익흥에게, 이는 김종원에게, 김은 장역복에게, 장은 박사일 중앙사찰분실장에게, 박은 오충환 시경사찰과장에게, 오는 이덕신에게 범행을 차례로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정부, 서울 환도
1950년 이승만대통령, 38선이북 진격 명령
1950년 산돌 손양원 목사 순교
한국 개신교 120여년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을 가장 감동적으로 실천한 사람으로 꼽히는 산돌 손양원 목사가 1950년 9월 28일 순교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스런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경남 함안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 출신인 손 목사가 나환자 요양 치료시설인 전남 여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한 것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9년 7월이었다. 그는 나환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복음을 전했다. 의료진조차 접근을 꺼리는 중환자실에도 서슴없이 들어가 환자의 목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다음으로 나환자들을 사랑한다"는 손 목사에 감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신학생 때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강력히 반대했던 손 목사는 애양원에 와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40년 9월 일제 경찰에 체포돼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뤄야 했다. 1차 만기인 1943년 5월 "전향하면 나갈 수 있다"는 검사의 회유를 거절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손 목사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당시 20세 전후였던 두 아들 동인·동신이 살해됐을 때였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좌익 학생이 체포되자 손 목사는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당에 갔지만 얘는 이대로 죽으면 지옥에 갈텐데 그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라면서 구명 운동을 벌여 양자로 삼아서 뒤를 돌보아 주었다.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들은 지금은 부모와 함께 애양원 교회 밑 바닷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의 일대기를 그린 `사랑의 원자탄`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서 6개국 언어로 번역됐으며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저서로는 `산돌 손양원 목사 설교집`이 있다.
1950년 나토(NATO)공동방위군 창설
1949년 미국, 대외군사원조법 성립
1948년 정부, 남북교역 중지 선언
1946년 서울시를 경기도에서 분리하여 서울특별자유시로 승격
1945년 현준혁 암살
1939년 독일-소련 우호조약 조인(폴란드분할점령 결정)
1937년 국제연맹 총회, 일본 비난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
1925년 낙랑 고분 왕간묘 발굴
1925년 우리나라에 복지의 씨앗 뿌린 유진 벨(한국이름 배유지) 세상 떠남
1920년 유관순 순국
3.1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유관순 열사가 일제의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 1902년 9월 28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때 그녀의 나이 향년 19세였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3월 15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이화학당 재학 중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제가 학교 문을 닫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앞장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옥중에서도 굳건한 독립의지를 꺽지 않았기에 지금까지 여성독립운동가로 추앙되고 있다
1912년 일본 키체호 동해서 침몰 사망 1,000명
1902년 자연주의 문학운동의 창시자, `목로주점`의 에밀 졸라 사망
1895년 프랑스 생물학자 파스퇴르 사망
1891년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1819-1891) 사망
1885년 한성전보총국 개국 한성-인천 최초 전신시설 개통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선, 서울-인천 간 가설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의 노동자 대표들이 1864년 9월 28일 영국 런던에 모여 국제노동자협회(약칭-제1인터내셔널) 창립을 결의했다.
2년전 런던 만국박람회에 참석한 프랑스 노동자들이 영국 노동자들을 만나 국제조직 건설을 제의한 데 따른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는 32명의 임시위원을 선출했다. 독일 대표 칼 마르크스는 협회의 `창립선언문`과 `잠정규약`을 초안했다. 산업 부르조아지의 착취에 눌려 비참한 생활을 해 오던 각국의 노동자들은 이날의 협회창립을 환영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1876년 해체됐다 1889년 재건돼 제2인터내셔널로 불렸다
1850년 미국, 해군 및 상선에서 태형을 폐지
1841년 프랑스의 정치가 클레망소 출생
1825년 콜롬비아의 3선 대통령 누녜스 출생
1803년 프랑스 소설가 메리메 출생
1397(조선 태조 6) 정릉의 흥천사 완성
BC480년 마라톤 전투,
아테네 근교 ‘마라톤 평야’에서 그리스군이 2배나 많은 페르시아군 물리치고 승리, 병사 필리피데스가 쉬지 않고 26마일 달려가 승전소식 전하고 지쳐 죽음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첫 올림픽에서 필리피데스를 기념해 마라톤을 마지막 경기로 했는데 1926년까지는 코스가 26마일(40㎞)이었고 현재는 42.195㎞
BC551년 유교의 시조 공자 태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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