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1. 25. 8:06 AM 오전
거리 : 24.6 km 소요 시간 : 3h 55m 52s 이동 시간 : 3h 19m 47s 휴식 시간 : 36m 5s 평균 속도 : 7.4 km/h
인공관절 수술과 대상포진 후유증으로 체력이 떨어진 아내를 생각하여 앙코르왓 일출은 생략하기로하다.
1일 스몰투어 곧 오전에 앙코르왓을 돌고 호텔로 돌아와 쉬고 2시부터 프레룹과 바이욘만 보기로 하다.
호텔 소속 툭툭이를 이용하기로 하다. 툭툭 이용료 20불 기사 팁15불로 정하다.
크메르의 왕들과 앙코르왓과 타프롬과 바이욘 사원의 관계
1. 초대국왕 자야바르만 2세(재위 802년~835년) 자바로부터 독립하여 국가를 세우고 국토를 확장하다.
통일신라 41대 헌덕왕과 42대 흥덕왕 시대였다.
2. 라젠드라바르만 5세(재위 968년 ~1001년) 크메르의 번영시대를 이룩. 불교를 수용. 크메르 제국의 기틀을 닦음
3.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1113년~1145). 타이와 베트남까지 세력을 확장 크메르를 동남아 최고 강국으로 만듦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앙코르왓을 비슈누신에게 봉헌하였다.
4.자야바르만 7세; 재위기간(1181년~1218년); 고려 무신정권시대
크메르 최고의 성군. 현재의 타이. 라오스. 베트남까지 크메르를 동남아 최강국으로 만듦
소승불교를 국교로 삼아 앙코르왓도 불교사원으로 변조. 바이욘과 타프롬 사원도 건설하다.
그의 사후 국력은 쇠태해 지고 손자대에 이르러서는 힌두교로 복귀하여 모든 불교사원을 힌두사원으로 개조하다.
오전 8;06 치타타 CTS 호텔 시엠레아프(Cheathata Cts Hotel Siem Reap)
앙코르왓; 숙소에서 약 6km. 지도를 보니 걸어가도 길 잃은 염려도 없고 환경도 좋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의 아내에게는 무리다. 사원내에서 걸을 거리도 아내에겐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호텔 직원에게 툭툭이를 소개받았다. 호텔 전속이라는 데 야간학교에 다니는 알바생인듯하다
툭툭이 기사 '찬놈'. 손자와 동갑내기인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참 기특하다.
아이스박스에 시원한 물도 준비해 왔다. 영어 실력이 우리보다 좀 낫다. 그래서 아내와 소통이(?) 잘 되었다.
오전 8 ;26 프레 시하누크대로; 앙코르 국립박물관
오전 8;28 프레 시하누크대로; 5성급 호텔 소피텔 앙코어 포키트라 골프 & 스파 리조트
오전 8;30 시하누크대로에서 우회전 하여 60번 도로; 유적지 매표소를 향하다.
오전 8;32 소카 씨엠립 리조트 & 컨벤션 센터
.
오전 8;33 60번도로 앱사라 가든 로타리
오전 8;33 앙코르 유적 매표소. 큰 길에서 한 참 들어와서 좀 엉뚱한 곳이 있다. 넓은 공간이 여기밖에 없었던 걸까.
찬놈이가 안내해 주다. 37×2=74불;
프놈펜 은행에서 받은 10불짜리 8장을 내었다. 한장 한장 살펴 보더니 5장을 도로 준다. 새돈을 달란다.
어제 프놈팬의 캄보디아 은행에서 받은 '달라'라는 뜻을 전했는데. 알아들은 건 같은데. 머리를 도리도리한다. 허참.
한국에서 환전한 50달러짜리는 합격. 캄보디아 화폐로 환전했어야 했는데.
입장료를 낼 때 찍은 즉석 사진으로 만든 1일 입장권; 현장 입구에서 보여 주면 된다
오전 9;02 다시 프레 시하눅 대로; 앙코르 식물원
오전 9;08 '프레 시하눅'대로 끝. 남쪽 해자 중앙 지점에서 좌회전
해자(垓字);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적의 접근을 막는 방어 시설.
성벽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설치하며 방어목적 이외에 성벽 기초의 침수나 지하수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한단다.
즉 해자의 물의 무게가 사방에서 지반에 압력을 가해 앙코르왓이 자체의 무게로 지반이 가라 않거나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고 한다.
과학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전쟁이 많았다는 사실과 사방에 성벽을 쌓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해자 역시 해자의 주 목적은 앙코르왓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게 상식적일 듯하다.
남쪽 해자에서 북쪽 레인보우브릿지 방향 해자
해자의 둘레는 동서 각 1.5km=3km. 남북 각 1.3km 합계 5km라고 한다.
폭이 190m 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평균을 말하는 게 아니라 최대폭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오전 9;27 무지개다리에서 바라본 남쪽 해자 방향의 부교
무지개다리(레인보우브릿지) 보수 공사를 할 당시 임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한바퀴돌고 나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듯 하다
앙코르왓의 조감도(빌려온 사진); 동서남북 사방 해자; 좌편 서쪽 정문으로 입장하는 무지개다리 .
우편 동문으로 나가면 타프롬과 프레 룹사원 방향.
서 바라이호(West Baray 가로 4km 세로 1.5km) 해자의 수위를 유지하기 위해 3천명의 노예가 3년을 밤낮으로 파서 만들었단다
앙코르왓 평면도와 복도 구조(빌려온 사진)
문득 앙코르왓의 주제는 '전투와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신화이든지 역사이든지 간에.
원래 계획한 관람 순서는 1층 회랑(복도)을 크게 한바퀴 돌고 난 후에 중앙 복도를 관통하여 중앙 성소를 본 후에
동문과 남문 회랑을 돌아 나오는 약 6km 코스였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하여 보니 아내에게는 무리였다.
결국 관광팀을 따라서 일단 중앙 통로로 가게 되었다.
회랑의 부조는 우유바다젖기~천국과 지옥을 보고 수리야바르만 2세 일부를 보고 빠져 나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적당한 코스였다. 회랑의 부조가 너무 많고 숱한 전설이 좀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이드드 분들도 천국과 지옥 구역에서만 열심히 설명하고 나머지에서는 대충 지나가는 듯했다.
오전 9;29 앙코르왓의 무지개다리(Rainbow Bridge)
동서남북 정방위에 고푸람(Gopuram, 힌두 전통 양식의 탑문)이 있는 데 서문 고푸람이 가장 크다.
3개의 무너진 고푸람 중에 중앙은 왕의 문. 좌우는 신하의 문이다
앙코르왓의 서문의 무지개다리 건너기 전에 '찬놈'이가 찍어준 사진
주차장에서 찬놈이와 약 두시간 후에 만나기로 하다. 혹시 다른 상황이 생기면 전화로 연락하기로 하다.
앙코르 왓(Angkor Wat)=앙코르(도시)+왓(사원)=사원의 도시라는 의미로 16세기 이후부터 사용
12세기 초에 수리야바르만 2세가 28년에 걸쳐서 당시 크메르제국의 국교인 힌두교 사원으로 창건.
서문이 정문 역할을 하는 게 특징인데 이는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사원은 큰 탑들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방 길이 3.6km의 외벽과 5.1km의 해자에 둘러싸여 있다.
사원 정중앙에는 4개의 탑이 1개의 중앙 탑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다.
앙코르 와트는 그 거대한 규모, 정교한 건축 기술과 빽빽히 새겨진 부조(浮彫)로 유명하다.
오전 9;31 무지개다리 중간 쯤에 좌우편 해자를 바라보고 있는 조각
양 가장자리 뱀신 나가신상과 가운데 사자조각상;
사자 꼬리가 없는 것은 이곳을 침입한 이웃나라가 잘랐기(뽑았기) 때문이란다.
사자의 힘이 꼬리에 있다고 생각하여 크메르의 약화를 시키기 위해서란다.
왕의 문인 중앙 고프람으로 들어가 중앙 회랑을 관통해 보기로 하다.
앙코르왓사원의 종교적 기원과 변천
힌두(Hindū 큰 물)는 '거대한 물'(인도의 간디스와 인더스강)을 가리키는 단어인 신두(Sindhu)에서 유래.
신두가 페르샤에서 '힌두'로 그리고 유럽에서는 '인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초기 힌두교의 최고의 신은 자연신인 인드라(태양) 아그니(불) 바루나(물) 이었는데
후기 힌두교에서는 수많은 신 중에 인격을 가진 최고의 3신 곧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섬기게 되었다.
브라흐마는 세상을 창조하고+비슈니는 세상을 관장(기독교용어로는 섭리)하고+시바는 타락한 세상을 파괴하고 재건하는 역할을 한다
초기 크메르시대에는 현실적 문제 해결과 관계가 많은 시바신을 주신으로 여겼다.
그러나 수리야바르만 2세는 비슈누를 주신으로 생각하고 앙코르왓을 비슈니에게 봉헌하기 위해 세웠다.
자기의 정권과 업적이 파괴되고 재건되는 것보다는 파괴되지 않고 계속 유지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의 사후 불과 10여년 후 나라는 쇠약해 지고 왕들은 죽고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왕위에 올라 크메르제국을 세운 자야바르만 7세가 무능한(?) 힌두신을 버리고 불교를 국교로 채택하면서
앙코르왓은 불교사원이 되고, 사원 내의 힌두 신상은 부처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후 또 정권이 바뀌면서 힌두교와 불교 시대가 뒤바뀌고 또 공산당 크메르루즈 시대를 거치면서
부처상과 힌두신상이 모두 훼손되기도 하였다. 허참.
오전 9;33 다리 건너서 좌편 북쪽 회랑(복도) 방향; 랑카 전투에 관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거대한 나가신상; 앙코르왓이 불교사원으로 바뀌었으나 인도 힌두교의 뱀신 나가신상은 곳곳에 남아있다.
신하(승려)의 문과 코끼리문(백성과 코끼리) 사이의 회랑; 반대편 남쪽에도 같은 구조물이 있다.
다리 건너서 좌편(9시 방향에서 12시방향)으로 진행하여 북쪽(Northern Angkor Pagoda)부터 돌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중앙 회랑을 찾아 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은 관광팀을 따라 중앙 복도로 가기로 했다.
회랑(回廊): 궁전이나 사원 등에서 주요부분을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통로).
우편 남쪽 1층 회랑(복도); 역시 신하의 문과 코끼리문이 있다.
앙코르왓의 유명한 부조(돌에 새긴 벽화) 중에 쿠루평원전투 부조가 있다.
.
오전 9;36 중앙의 왕의 문으로 들어서면 천상계의 다섯 탑들이 있는데 정면에서는 세개만 보인다.
중앙탑은 힌두교의 메루산(불교의 수미산)을 상징한다고 한다.
메루산;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으로서 힌두교의 신들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다.
후에 불교에서 수메루 산이라는 이름으로 차용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한문식 단어인 수미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좌편(북쪽); 도서관과 잔디광장과 호수. 우편(남쪽)에도 같은 시설이 대칭으로 배치되었다.
중앙 왕의 문
오전 9;45 왕의 문 통과하기 전
남북쪽에 하나씩 있는 건물; 일반적으로는 도서관이라고 표기 되어 있다.
그러나 경전이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보간한 장소였을 가능성도 있다.
크게 다른 것이 없을 듯 하여 멀리서 보기만 하고 패스하다
오전 9;40 들어 가면서 우편에 있는 남쪽 호수. 건기여서 수위가 낮다
반대편 북쪽에도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북쪽으로 가는 가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우리는 중앙 통로로 직진하여 동문방향의 중앙탑을 보고 남쪽 길을 따라서 저곳으로 돌아 나왔다.
오전 9;43 명예의 테라스(Terrace of Honor)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 사자상이 지켜보고 있다.
옛날에는 왕만이 통행할 수 있었는데.
비슷한 계단이 반복되면서 1층(자연계)~2층(인간계)~3층(천상계) 올라가기 때문에 무릅이 아픈 아내가 좀 힘들어 했다.
오전 9; 45 가까이서 본 남쪽 1층 회랑;
앙코르왓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동서남북 회랑을 한 바퀴 돌아보고 중앙 회랑을 걸어서 동문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오전 9;46 2층 인간계에서 3층 천상계로 올라 가기 전에 목욕재계를 하였던 곳으로 추측된다.
십자회랑; 천불회랑(Hall of a Thousand Gods); 우주의 중심. 앙코르왓의 중심표시라고 한다.
이곳에 나침팜을 놓으면 십자회랑의 중심이 되어 동서남북이 정확하게 90도 각도로 나누어진다고 한다.
원래는 그 회랑에 1천의 불상이 있었다고 하여 천불회랑이라고 부른 것 같다. 그후 파괴되어 지금은 몇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오전 9;48 Hall of a Thousand Gods(천불홀)
3층 천상계 성소 올라가는 계단;
방향이 서쪽인 것과 계단의 수가 적은 것으로 미루어 보면 왕이 올라가는 50도 경사의 계단일 수도 있다
10;01. 3층 천상계의 중앙성소의 다섯개의 탑 중에 하나로 올라가는 계단
3층 천상계 중앙성소는 동서남북 각 75m인 정사각형 기단 위에 13m 높이로 세워졌다.
동서남북 사방에 각 3개 합계 12개의 계단이 있는데 경사도가 70도라고 한다.
보이는 것은 서쪽 계단의 하나다. 왕 전용 서쪽 계단 보지 못했는데 그 경사도가 50도 라고 한다.
좌회전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
앙코르왓을 짓기 위해 사용된 돌은 적게는 몇백 킬로, 많게는 몇톤 짜리의 돌 60만개나 사용되었다고 한다.
10;02 천상계 중앙 성소의 북쪽에서 본 동문 방향
오전 10;04 중앙성소 북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오전 10;06 천상계 중앙성소 동문 방향의 계단
천상계에서 제일 높은 성소로 올라가는 계단 중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동문 계단
70도의 급경사이지만 손잡이가 있어서 왠만한 사람이면 올라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한번에 올라갈 수 있는 정원(100명?)이 있고. 그들이 내려와야 다음 팀이 올라가는 무슨 규칙이 있다고 한다.
물론 요금도 있다. 그래서인지 생각밖에 올라가는 사람이 적다. 지금 올라가는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다.
한국관광팀 중에는 올라가는 분이 없다. 이런저런 분위기와 아내 혼자 남겨두고 갔다오는 것도 그래서 포기하였다.
10;11. 정동 방향에서 본 천상계 성소의 다섯개의 탑 중에 동쪽에서 볼수 있는 탑;
가운데가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중앙탑
2층 인간계에서 1층 자연계(미물계)로 내려가는 경사 50도의 동문 계단;
아내는 2층 회랑에서 쉬게하고 혼자 내려가서 1층 회랑을 빨리 둘러보다
오전 10;15. 2층에서 동문 방향 계단으로 내려가면 저 회랑을 둘러볼 수 있다.
맞은편 북쪽이 크리슈나의 승리회랑과 우편 동쪽이 비슈누의 승리회랑이다
10;18 동쪽 끝 회랑 비슈누의 승리 회랑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바꿨다.
오전 10;21 힌두교의 신중에 하나이며 구름과 물의 요정 압사라가 압사라 춤을 추는 부조.
앙코르왓에만 1850개의 압사라 부조가 있다고 한다.
3층 천상계 성소의 중앙 탑; 세계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는 탑이다.
그리고 중앙통로 끝 지점에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현지 캄보디아 가이드가 함께 아내의 손을 잡아 주어서 내려 갈 수 있었다
10;32 남쪽 첫번째 회랑; 앙코르왓을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
공주에게 가마에 오르기를 권하는 신하들
위 부조 밑의 부조; 저승사자에게 매질을 당하면서 코나 목에 밧줄을 꿰어 끌려가는 죄인들.
특별히 여자로 보이는 인물이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인지.
전체적으로는 지옥 묘사가 많고 무섭게 그려져 있다.
좌편; 치트라굽타 뒷편 수리야 바르만 2세. 그가 내세의 심판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신과 같은 존재임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중앙; 기록된 죄의 정도에 따라서 심판하는 치트라굽타
그 앞: 지옥행 심판을 받고 두손을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선처를 빌거나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죄인들.
우편; 그들은 뒤뒷덜미를 잡아 끄는 지옥행 집행관 아수라
아수라들이 죄인들을 거꾸로 잡아 지옥에 던지는 아수라들
천국과 지옥회랑에서 내려오다
19;40 사원의 동쪽 끝부분 동문 방향에서 큰 행사가 있는 듯
10;43 동문 사원 정원에서 뒤돌아 본 중앙 성소 탑들
승려들에게 보시를 하는 행사인듯. 신도들이 길게 줄을 서 있고 그 줄을 따라 승려들이 걸어간다.
10;51 동문 방향 정원에서 돌아다 본 중앙 성소의 탑. 다섯개 중에 세개만 보이다.가운테 탑이 중앙탑
사원 서쪽과 동쪽 길 중에 동쪽 길을 택하여 돌아나오다
적게는 몇백 킬로, 많게는 몇톤 짜리의 돌을 무려 60만개나 사용하여 지어진 석조건물이다.
10;53 회랑에서 밖으로 나와 둘레길을 걷다. 동쪽과 남쪽 모퉁이에서
10; 55 남쪽 둘레길
10;59 중앙 성소의 남문 방향 둘레길
11;04 남쪽 호수의 벵골 보리수(반얀 트리 Banyan Tree)의 공기뿌리
가지에서 아래로 뿌리(공기뿌리)를 내리면 그것이 줄기가 되고
다시 공기뿌리를 내러서 또 줄기가 되는 현상을 반목하여 큰 숲 모양을 이룬다.
11;08 남쪽 호수; 일출을 보는 곳으로 짐작된다.
한국팀을 안내하던 한국이 여저 가이드가 찍어 준 사진
오전 11;09 일반적으로 일출 해가 저 중앙탑 위로 떠오르게 촬영한다.
오전 11;16 다시 서문 레인보우 브릿지(폭 12m. 길이 250m)
오전 9;29에 입장하여 11;16에 서문으로 돌아나오다. '찬놈'과 약속한 2시간이 채 못되었다.
거의 쉬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시간이 단축된 것 같다. 앙코르왓은 서문이 정문 역할을 하도록 설계가 되었다.
수리야바르만 2세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따라 자신의 장례 사원으로 지으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회랑의 부조들이 시계 반대 방향, 즉 전통적인 힌두 양식의 반대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도 그를 뒷받침한다고 말한다.
동서양의 위대한(?) 건축물 대부분이 국가와 종교의 권력자들의 묘지(묘원)으로 지어졌거나 사용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서문의 해자와 부교
오전 11; 22 찬놈과 만나기로 약속한 서문 주차장을 향하여 파워워킹을 시도하는 아내
결국 찬놈이와 약속한 두시간 만에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앙코르왓은 초대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 동안 지었다.
생전에는 자기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사후에는 자신의 묘원으로 삼으려고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28년 동안 매일 2만 5천명의 인력과 물자를 조달하느라 국민은 도탄에 빠지고 국력은 쇠약해졌다.
그 후에 캄보디아의 최고의 성군 자야바르만 7세(1181년~1218년))는 성벽 도시 앙코르 톰과 바이욘 사원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부모에게 바치기 위해 타프롬과 프레아칸 사원을 건축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가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면서 자기가 세운 사원에는 모두 부처상을 세웠고.
앙코르왓도 불교사원으로 바꾸고 힌두신상도 부처상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크메르족이 대대로 지극정성으로 섬긴 힌두교 신들이 국가와 왕을 지켜주지 않은 것에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역시 그의 거대한 사원 건축과 잦은 전쟁으로 국민은 다시 도탄에 빠지게 되고 국력이 소모되었다.
그 사후에 나라는 쇠약해지고 힌두교가 부활하여 14세기에 이르기까지 반불교 운동이 벌어졌었다.
이제는 문화재로서 후손들이 먹고 사는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문득 멀리는 진시황릉과 만리장성이 연상되고 가깝게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경복궁 공사가 떠올랐다.
이 사원을 짓기 위해 28년동안 매일 동원된 25.000명의 일군들은 합당항 삯을 받았을까. 기술자들은?
왕이 아니라 이 거대한 건물을 짓기 위해 동원된 백성과 건축 기술자들과 예술가들을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