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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홍대 앞에서
신외숙
홍대 앞 거리는 럭셔리하고 아티스틱하다.
빌딩 한가운데를 차지한 남자 배우의 전신광고판에 사람들은 정신을 빼앗긴채 걸어간다. 남자 배우는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으로 행인들을 향해 눈빛을 쏘아대고 있다. 건물마다 쏘아대는 전광판으로 거리는 이미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상가마다 광풍 같은 음악으로 행인들을 호객하고 있다.
S자로 휘어진 거리는 버스킹 공연으로 온종일 법썩인다.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특유의 골반춤으로 여성 관객에게 다가가 윙크를 날리고 있다. 요동치듯 하체를 흔들어 대며 한참 여심을 공략하는 중이다. 그의 몸 동작 하나 하나에 열정과 기교가 흐르고 있다.
와! 함성이 터진다. 그때 관중석에 있던 외국인 남자가 갑자기 무대로 뛰어들면서 분위기는 절정에 오른다.
외국인 남자는 유럽 계통으로 보이는 서양 남자다. 그는 춤판에 뛰어들자마자 요란한 골반춤으로 관객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요란한 춤사위와 노골적으로 섹스를 표방하는 노랫말 가사로 홍대 앞 거리는 연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관객의 절반 이상은 외국인들이다.
러시아인과 동남아에서 온 히잡을 쓴 여자들, 그들은 유학생이 분명해 보인다. 일본어를 구사하는 젊은 남녀와 아프리카 계통의 흑인과 유럽에서 건너온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도 눈에 띄인다.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도 보인다. 이제 홍대 앞은 관광명소로도 이름을 떨칠 모양이다.
거리는 그들을 위한 듯 외국 음식점들로 즐비하고 창가마다 외국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영어 중국어 일어 등 중동권에 속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바퀴 달린 커다란 트렁크를 끌면서 골목 골목을 누비고 있다. 상권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인지 2호선 홍대 앞 전철역은 항상 만원이다. 길가까지 늘어선 행렬은 짜증나고 불안하기도 하다. 예측 못할 불길한 움직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상되기도 한다. 이태원에서 발생했던 불상사가 이곳이라고 비껴갈 수 있을까. 도로는 거의 매시간마다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버스킹 공연이 이루어지는 거리 뒤편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담배 꽁초와 토사물과 취객들의 고함소리로 구토가 나올 지경이다. 그곳을 중심으로 형성된 의류타운 너머로 시립 도서관이 보인다. 거기서 언덕배기를 넘으면 그 유명한 홍익대학교가 위용을 뽐내며 다가서고 있다.
서울대와 맞먹는 미술대학 하나로 유명세를 떨친 홍익대학교는 미술학도들의 로망이 되어 이젠 국제적인 관광명소로도 자리 잡게 되었다. 갑자기 여고 동창정란이 생각난다.
그녀는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과 정치를 같이 했던 할머니와 육군 장군 계급장을 단 아버지와 미모의 엄마를 둔 외동딸이었다.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고려대에 다니고 있었고 남동생은 장난꾼처럼 보이지만 영특하고 재주 많은 아이로 따르는 여자애가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녀의 집안은 부와 명성을 겸비하고 있었는데 딸의 미술공부를 위해 집안에 따로 아뜰리에를 마련해 줄 정도였다. 선생님들은 그녀만 보면 항상 웃었다. 그녀의 집안 내력을 알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한마디로 안 했다. 제자들을 편애하기로 유명한 담임 선생님도 그녀를 보면 항상 서울대를 외쳤다.
공부도 잘하겠다 그림 그리는 솜씨 좋겠다. 얼마든지 서울대는 따놓은 당상이라 했다. 가족 모두 그녀의 대입시를 위해 총력 후원했다. 특히 그녀의 할머니가 손녀를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는데 오빠마저도 여동생에게 절절매며 비위를 맞춘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그녀의 서울대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그토록 기다리던 합격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홍익대 수석으로 입학했다. 가족들은 재수를 권했지만 그녀는 화가로 성공하기 위해 일부러 홍대를 지원한 것이었다.
그녀는 졸업하면 프랑스로 건너가 학업을 마저 마친 뒤 교수로 봉직할 계획이었다. 그녀는 집안 배경 못지 않게 외모 또한 수려했다. 잘 먹어 윤기가 반지르르 흐르는 피부와 날렵한 몸매는 엄마를 닮은 듯했다. 그때 나는 내 처지와 전혀 상반된 그녀를 보면서 차이(差異)라는 단어에 집중했고 절망했다.
그녀가 자랑삼아 하는 이야기는 늘 가족 사랑이었다. 대입시를 앞둔 고3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은 모두 그녀를 여왕 대하듯 했다.
“대학은 인생의 전부다. 대입시에 목숨을 걸어라.”
담임 선생님은 입만 열면 말했었다. 성적이 떨어지면 난리가 났다. 우리반이 학년 전체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데도 닦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난리를 쳐대고 들볶아 댔는데도 정작 대학에 입학한 아이들은 15명도 안 됐다. 그것도 전문대까지 다 합쳐서 그랬다.
대학에 떨어진 아이들은 담임선생님께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대신해서 전화해 소식을 알렸다. 누구 누구는 떨어지고 나 혼자만 합격했노라고.
담임 선생님은 알았다고 하면서도 여간 실망한 기색이 아니었다. 당시 전교에서 수위를 달리던 반장 아이는 서강대 영문과에 합격했고 전교 1등 하던 경현이는 서울대 입학했는데 과는 확실치 않았다. 그녀는 천재라고 미리 소문이 나 있었기에 서울대 합격은 당연한 거였지만 어렵게 붙었다는 소문이었다. 나 역시 간신히 턱걸이로 대학에 합격했다.
원하는 과는 실력이 모자라 아예 지원조차 못했고 이차 대학에 원서를 내 간신히 합격했다. 재수는 꿈도 못 꿀 처지였기에 무조건 합격부터 하고 보자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전공이 내 적성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형편없는 집안 형편 때문에 재수라는 단어는 입에 올리지도 못했다.
만일 그랬다간 기다렸다는 듯이 대학 때려치우고 당장 공장에라도 들어가라 할 판이었다. 전전긍긍 하던 나는 교회 오빠인 민영기에게 말했다.
“적성이 전혀 안 맞고요, 졸업이나 할려나 모르겠어요.”
눈치 없는 그가 말했다.
“차라리 재수하지 그러니?”
“그게 어디 맘대로 되야 말이죠. 자신도 없고요.”
“그러게 내가 말하는 대로 했어야지. 너 거기 졸업하면 취업할 자신 있니?”
“취직이요? 난 그런거 싫은데. 사실은 간호학과나 약대 가고 싶었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재수 하면 갈 수 있어, 똑같은 거 두 번 하는데 왜 안 되겠어.”
나는 속으로 절망했다. 그런데 그는 한 술 더 떠 명문여대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요즘은 여자도 배워야 해. 그냥 집안에 주저앉아 살림만 하던 시대는 지났어. 여자도 자기 주체로서의 삶을 살아야 나중에 후회 안 해.”
난 왜 그에게 그토록 매달렸을까. 그가 떠나버릴 걸 알면서도 끝까지 집착했을까. 내가 가족들의 반대에도 기를 쓰고 대학을 고집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 진학을 독려하고 전공과목까지 지목하며 관심 가져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었고 행복해 했다.
나쁜 머리 쥐어 짜고 공부에 열일했고 집안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미래에만 집착했다. 담임 선생님 말씀처럼 대학이 인생을 결정해 준다고 믿었고 그 끝에는 그가 있었다. 그러나 내 소원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림 공부가 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보기만 하면 그림을 그려대는 통에 내 노트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였다. 그림 물감 하나 사는 것도 눈치가 보여 말 못하고 주저주저 하는 형편에 미대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간호사나 약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었다.
만일 간호사나 약사가 되었다면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해서 대학원은 반드시 미대를 갈 작정이었다. 언젠가 그런 내 속마음을 털어 놓았을 때 그가 말했다.
“그림 그리겠다고?”
“네, 전 화가가 되는 게 꿈이에요.”
“난 별로 찬성하고 싶지 않은데.”
“왜요?”
“우리 집안이 그림하고 철천지 원수거든.”
난 어안이 벙벙했다. 그림과 철천지 원수라니?
“집안 어른이 젊었을 때 그림 그린다고 재산 다 들어먹고 덕분에 우리 아버지도 가고 싶은 학교도 못 가고 고생 고생.”
그는 거기서 말을 멈추었다. 나 역시 그 순간 그림에 대한 생각은 싹 거두었다. 그가 싫어하는 미술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어찌하든 대학만 무사히 졸업하고 그의 인생에 나를 합류시키고 싶었다. 성격이 외골수인 나는 한번 꽂히면 다시는 헤어나지 못하는 청맹구리였다.
아! 그런데 이 홍대 앞 거리를 걷자마자 내 안의 잠재해 있던 세포가 눈을 뜨는 것 같다. 화려한 색상과 선에 대한 감각이 어릴 적 꿈꾸었던 화가에 대한 동경심이 불을 지피듯 살아나는 것만 같다. 그리고 홍대에 진학한 홍정란, 그녀에 대한 생각도 아지랑이처럼 일어났다.
예술은 천재적인 재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음악가에겐 절대적인 음감(音感)이 화가에겐 색감(色感)이 글쟁이에겐 영감(靈感)이 필수적으로 따라 주어야 한다. 거기에 끊임없는 고행과 같은 연습으로 예술은 진행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언젠가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제 와 그림을 그린다는 건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손이 굳어 생각처럼 움직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40년 가까이 흘렀는데도 생각은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뇌리를 잠식한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도 안 보이던 미래가 인생 육십을 살고 나니 일장춘몽이란 생각이 든다.
험악한 인심에 치이고 상처와 굴곡진 인생을 살다 보니 남은 건 극도의 이기심 뿐이더란 혹자의 말이 생각난다. 상처와 배반 피해의식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후회와 아픔만 남는다. 특히나 피해의식은 한번도 내 생각을 거쳐가지 않은 적이 없었다.
피해의식은 과거에 대한 뼈저린 경험에서부터 시작된다. 편견과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교만으로 뿌리 내리게 하는 씨앗이 된다. 한동안 심리학과 상담학 공부에 열공한 적이 있었다. 전문 자격증까지 땃지만 전문가로 나서진 않았다. 내 안의 쓴뿌리를 교정하고 좀더 강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진정성보다는 이중성을 띠는 것 같아 스스로 아연해지곤 했었다. 그리고 나는 뜻없는 결혼을 통해 나의 정체성과 미래를 위한 도약을 시도했지만 철저하게 실패했다. 처음부터 결혼은 나와 맞지 않았다. 사랑이라니? 사랑은커녕 난 상대에 대한 배려나 감싸주려는 최소의 긍휼함조차 없었다.
결혼을 섣부르게 결정한 게 가장 큰 화근이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나보다 학력 낮고 지성도 변변치 않은 그에게 나의 미래를 맡긴다는 게 처음부터 잘못된 결정이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진행된 결혼이었다.
될대로 되란 식으로 오직 재산 하나 보고 가족들이 막무가내로 밀어부쳤다. 많이 배우면 뭐하냐? 돈이 최고다. 돈 없어봐라. 개뿔도 아니다. 머리에 먹물 들었다고 일할 생각도 않고 백수로 놀고 먹는 놈들이 얼마나 많냐? 차라리 있는 재산 까먹으며 사는 게 백번 낫다.
어쩌면 가족들은 처음부터 결론을 내리고 나서 오로지 사윗감이 가진 재산을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내 집안에 들어서자 마자 재산 목록을 양파 껍질 까듯 까발렸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오빠는 사람을 시켜 재산 목록 리스트를 확인했고 번갯불에 콩 튀듯 결혼을 몰아부쳤다.
“대학 좀 안 나왔음 어떠냐? 그 대신 엄청난 재산이 있지 않냐? 평생 벌어봐라. 그 많은 재산 모을 수 있나? 니가 인물이 있냐? 성질이 좋냐? 따지고 보면 너도 내세울 거 없잖니, 겨우 대학 나온 거 말고는.”
아버지의 말에 곁에서 듣고 있던 오빠가 토를 달았다.
“쟤가 성질이 보통 성질이어야 말이죠. 그래도 저 좋다고 매달리는 남자 있을 때 얼른 시집 보내야지, 고집 부려봐야 별 수 있나요?”
“너도 이제 돈 걱정 않고 편히 살아야지. 시집 가서 아들만 낳아 봐라, 시부모도 너를 떠받들어 모실 거다.”
정말이지 돈 고생이라면 치가 떨렸다. 자랄 때 가장 많이 듣던 소리가 돈 없다였다. 오빠는 고졸이었다. 겨우 상업 고등학교를 나와 취직했는데 벌이가 영 시원찮았다. 그래서 늘 한다는 말이 맞벌이 할 아내감을 원하는 것이었다. 인물도 시원찮은 것이 눈은 높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웃기지도 않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않은 말이 뛰쳐 나왔다.
“그래 나도 이 돈 때문에 빌빌대는 이 집구석이 싫어서 재산 좀 있는 집으로 시집 가려고 억지로 대학 공부했다. 왜?”
“아! 그러니까 니 소원대로 됐으니 시집 가라 그거여, 아무 것도 필요 없이 니 한 몸만 와주면 된다고 하지 않냐? 그려야 우리 집안도 좀 필 것 아니냐?”
도대체 내 결혼과 집안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남편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날 좋아한다고 하지만 느낌도 없었다. 그 역시 어떤 계산적인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작 망설이는 데 딴 이유가 있었다.
그 민영기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가슴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예전에 내게 말했듯이 능력있고 재능 많은 여자를 원했다. 그래서 후배 여자들과 점찍듯 교제를 하다가 드디어 고등학교 미술교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는 능력 외에 미모도 겸비하고 있었다.
집안도 짱짱하단 소문이었다. 그의 결혼 소식을 듣고 많은 여자들이 식음을 전폐했고 낙심했다. 물론 그중에 나도 포함돼 있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이상한 분노가 가슴속을 충동질 했다. 나는 대학 졸업할 때 겨우 자격증 하나 취득했지만 취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회 생활하는 게 두려웠고 그저 편히 살고 싶었다. 그래도 용돈 벌이를 해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알바를 하다 남편을 만났다.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한가지였다. 다른 여자들은 오직 재산 하나만을 노리고 자기에게 접근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순진무구 자체라는 것이었다.
그건 그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난 그에게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기에 재산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 추가된 게 있었다.
자기는 공부를 못해 대학도 여러번 떨어졌는데 결혼만큼은 꼭 대학 나온 여자와 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역시 가진 재산 말고는 학벌도 인물도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인격이 고매하거나 원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어찌보면 나보다 더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다.
손해볼만큼 어수룩하거나 관용적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나는 집안 식구가 시키는 대로 돈보고 시집을 갔다. 신혼 초부터 사방팔방에서 불협화음이 터졌다. 둘 다 조금도 양보함이 없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으니 열정도 없었고 참고 기다려 줄 여유도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가 술만 취하면 첫사랑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잘나지도 못한 추레한 외모에 꼴에 사내랍시고 순정을 다 바쳐 사랑한 연인이 있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었지만 난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최소한의 질투심도 없었다. 어느날 그가 물었다.
“도대체 넌 날 뭘 보고 결혼한 것이냐?”
“그러는 당신은?”
그는 심호흡을 하고 나더니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너랑 결혼 안 하면 재산 한푼도 안 넘겨준대서 할 수 없이 했다.”
처음 듣는 기함할 소리였다. 그래서였구나.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게 마음이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내게 원하는 게 뭔데? 내가 이혼해 주면 그 첫사랑인가 하는 여자한테 달려갈 테냐?”
말하고 나서 속으로 외쳤다. 저런 등신 같은 놈.
“너도 내가 좋아서 결혼한 거 아니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런데 잘 알고 있으면서 왜 나랑 했냐?”
“아까 말했잖아, 우리집에서 등 떠밀어서 했다고.”
“나도 마찬가지거든.”
“그럼 잘됐네. 이쯤에서 찢어져서 서로 제 갈 길 가면 되겠네.”
그는 너무도 간단하게 이혼을 선언했다. 그로서 이혼의 모든 책임은 그가 지는 걸로 했다. 나는 처음에 그가 나를 좋아하는 걸로 착각했었는데 전혀 아니라는 사실에 이상하게 실망과 분노가 치밀었다. 착각은 북한에서도 자유라더라. 언젠가 들은 말이 생각나 쓰게 웃었다.
나도 돌아서는 그에게 칼처럼 말했다.
“나도 처음부터 당신이 마음에 없었거든 사실 내 마음은.”
거기서 멈추었다. 그 뒤의 말은 생략했다. 헤어지는 마당에 더이상 상처주는 말은 하지 말자. 나 역시 내 첫사랑인 민영기를 단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어 피장파장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혼하는 과정에 처음으로 내게 아량을 베풀었다. 이혼의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으며 위자료는 섭섭지 않게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린 서로 깔끔하게 헤어져 이혼남 이혼녀가 되었다.
시댁에서는 난리가 났지만 그나마 딸린 애가 없어 다행이란 식으로 말하고 마무리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런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친정에서도 섭섭해하는 눈치였지만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는 사위의 말에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하고 오히려 내 눈치만 봤다.
그런데 이혼하고 한달도 안 돼 그의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자살이었다. 캄캄한 어둠 같은 절벽이 나를 향해 득달같이 덤벼드는 것 같았다. 그 모든 게 짜여진 각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이번에는 내 미래에 대해 조언했던 첫사랑 민영기에 대한 죽음 소식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아내와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딛던 그때 췌장암이란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었다. 이미 4기가 지나 있어 의사는 시한부 판정을 내렸다. 그들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고 한다. 의사는 그에게 3개월이란 시한부를 내렸지만 그는 이후 3년간 더 생존하며 아내와의 아름다운 이별을 장식했다고 했다. 둘은 끝까지 행복했고 사랑했다.
그들은 내세에도 행복하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 마음은 또다시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이었다. 그들의 행복이 부러웠고 은근 저주스러웠다. 이율배반적인 아픔과 고통이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지배하고 지나갔다. 그동안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수많은 세월의 격랑속에 나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기에 휘말리기도 했고 우연찮은 기회로 목돈을 벌기도 했다. 인생은 새옹지마란 말이 맞는 듯했다. 그러다 어느날 이혼녀라는 딱지가 내 뒤통수를 때린 적도 있었고 어느날 길을 걸어 가다 전 남편과 흡사한 남자를 만나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중년인 40-50대 때는 외국여행을 하느라 국내를 떠난 적도 부지기수로 많았고 한때는 캠핑에 미쳐서 거금을 날린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니 캠핑은 나의 어릴 적부터 로망이 아니었던가 싶다, 예전에는 캠핑족이나 트레킹 하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왜 편한 집 놔두고 험한 곳에 자며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무슨 큰 성취감을 누리겠다고 돈을 주고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그러다 어느날 캠핑 동영상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캠핑은 솔로 캠핑이 대부분으로 그들은 오롯이 혼자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한갓진 자연 풍광 속에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힐링과 기쁨을 누리며 재충전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어릴 때부터 혼자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낯선 골목 낯선 동리에 가면 이상하게 희열에 들떳었다. 주변 풍경을 마음속으로 스케치하며 미래에 대한 상상화를 그렸다.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쾌감이 일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건 낭만심리였다. 인생 고비 고비마다 난관 아닌 적이 없었지만 마음속에 강한 힘이 나에게 용기를 주며 명령했다.
곧 일어나 걸어라.
홍대 앞 거리를 걷다 길모퉁이 난 사잇길로 접어 들었다. 계단을 따라 올라서니 시립 도서관이었다, 각종 강좌를 알리는 현수막과 함께 시화전 발표회가 있었다. 늘 푸른 학교. 70-80대 할머니들이 뒤늦게 한글을 깨우치고 시를 써서 발표한 것이었다.
액자 안에는 삐뚤 빼뚤 한글 필체가 감동어린 글귀와 함께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나름 문법도 갖추고 진한 감동과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깊은 산골에 태어나 가난 때문에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배움의 시기를 놓친 할머니들의 아픔이 문장에 서러움으로 박혀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1학년이 전부였다.
왜 그랬나 생각해 보니 내 동생이
또 학교에 가야 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1학년으로 마무리를 하고
동생이 입학을 하고 나는 엄마를 도와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늘 공부만 생각하면 가슴이 퍽퍽하고
서글픈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행복하다.
참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한 자 한 자 배워 가는 중이다.
그래서 나는 늘 꽃길만
걸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 나는 봄날이다.
늦은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의 봄날은 시작 되었다.
내 마음은 청춘이요
언제나 소녀의 마음으로 살고 있다.
세월아 천천히 가거라
이 아름다운 날들을 오래 오래 간직하면서
나의 봄날을 지키고 싶구나!
그때 갑자기 은혜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리고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축복이란 단어도 생각났다. 후회와 연민, 모순된 감정과 함께 오직 나 자신에게만 집착해 살아온 이기심도 생각났다. 그러면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생뚱맞은 느낌도 들었다.
도서관에 처박혀 자신의 미래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와 용기에 경탄이 났다. 난 왜 저들처럼 개척정신이 없었을까. 그저 인생을 편하게만 살려고 타인의 감정은 도외시한 채 살았던 건 아니었을까. 내 인생 궤도에 어떤 그림이 그려졌던 걸까?
내가 그린 그림은 과연 어떤 모양과 색채로 채워졌던 걸까. 척박한 산골 벽지에 태어나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까막눈 신세로 살아온 할머니들의 고통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래 전후 세대라 못 먹고 못살던 시대라 그럴 수도있겠다 싶었다.
어린 시절, 월남 파병과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그때도 얼마나 곤궁한 시절이었던가. 그래도 의무교육은 마치지 않았던가. 하긴 나의 청소년 시절만 해도 흔하지 않지만 대학은커녕 중 고교에 진학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고 2학년 때 동네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을 만드는데 내 또래의 남자 아이들이 보였었다.
그들은 학생 신분도 아니었고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였다. 당시는 내 또래들 중에 평화시장이나 봉제공장에서 살인적인 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축들도 많이 있었다. 난 가난하고 병들어도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건 그나마 천운이었다. 오빠도 못 간 대학을 가족들의 반대에도 기를 써서 진학한 것도 따지고 보면 행운이고 축복이었다.
비록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이혼과 함께 위자료로 거금을 쥘 수 있었던 것도 그랬다. 그런데 왜 그는 이혼한 지 한달만에 자살했을까. 첫사랑인 여자와도 잘못됐던 걸까. 그러게 처음부터 밑그림을 잘 그렸어야지. 누가 처음부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래?
나는 마치 남의 일처럼 나 자신과 동시에 전 남편에게 힐문하고 있었다. 멍청하게 말도 안 되는 결혼 조건을 내세우더라니. 무작정 돈만 보고 등 떠민 가족이나 돈 고생이나 면해 보겠다고 결혼이란 굴레에 뛰어든 나나 발상은 똑같았다. 시작이 잘못되면 결과는 뻔하다.
가족들이 재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는 전 남편을 들먹이며 다시는 입밖으로 내지도 말라고 했다.
왜? 이번에도 한몫 잡아 보겠다 그거야?
그러는 사이 오빠는 운 좋게 미용실 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여동생과 남동생은 각각 지방에서 자리를 잡아 기세 좋게 살고 있었다. 명절 때 말고는 얼굴 구경도 못하는데 만날 때마다 돈자랑에 열을 올렸다. 거기에다 자식 자랑은 얼마나 해대는지 마치 자식 없는 너는 약이나 올라라 하는 투였다.
그래도 나는 조카들에게 용돈을 듬뿍 듬뿍 주는 바람에 조카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어린 시절 돈 고생에 이골이 난 가족들이 노년에 이르러 신세가 펴지고 있었다. 그런데 우스운 건 조카들 공부는 겨우 중간치를 맴도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액 과외를 시켜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식들 공부 못하는 게 유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서로 상대 배우자만 탓했다. 옆에서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리도 마음이 허전한 걸까?
마음속이 텅 빈 듯 무력감마저 든다. 난 이제껏 무엇을 위해 달려왔던가?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누군가 썼던 명 문장이 생각난다. 다시 마음속 화두가 떠오른다. 난 그동안 무엇을 위해 애쓰고 힘쓰며 애면글면 다투며 살아왔던가. 의문부호가 여전히 가슴을 때리며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난 도대체 누구인가? 그때였다. 내 발밑에 전단지가 보였다.
당신은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피조물입니다. 창조주의 독생자 그리스도 그분께 해답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인생의 의미와 참된 만족이란 부제의 글이 실려 있었다. 상투적인 종교적 언어는 호기심만 유발할 뿐 감흥은 주지 못했다. 거리는 광풍 같은 음악에 잠식돼 발걸음을 각각 흩어놓고 있었다.
눈길을 어디로 돌려도 외국인이 보였다. 과연 홍대 앞 거리는 외국인들을 위한 명소답다. 관광명소 안내소로 발걸음을 디미는 히잡 쓴 여자들이 보였다. 뒤이어 거친 말투를 내뱉는 중국인들이 커다란 트렁크를 끌면서 골목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뒤로 러시안으로 보이는 육중한 체격의 남자들이 험한 인상의 동남아 남자들과 함께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홍대 앞은 마치 외국인들을 위한 명소처럼 보인다. 어디선가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한다. 의류상가가 시작되는 골목 위로 둥근 달이 떴다,
많은 젊은이들이 핸드폰을 꺼내 연신 셔터를 눌렀다. 불을 환히 밝힌 노점상어깨 위에도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이 느리게 바뀐다. 청색 신호등에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무작정 들어선 길에는 예술성을 강조한 럭셔리한 건물이 줄을 댄듯 서 있다.
문득 화려한 불빛에 이끌려 들어갔는데 건물 전체 한 동이 미용실이었다. 창밖으로 모과나무와 감나무가 보였다. 미용실은 철저하게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격을 보니 역시나 고가(高價)였다. 건물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있고 불빛이 밤무대를 연상케했다.
깜짝 놀라 돌아서 나가는데 앳된 미용사가 말했다.
“머리 하러 오셨죠? 지금은 예약된 손님이 없어 가능해요, 이리 앉으세요.‘
하지만 나는 말보다 몸이 먼저 말했다.
”괜찮아요, 잘못 알고 들어왔네요.“
이젠 그만 옛 의식에서 벗어날만한데 가격에 놀란 발걸음이 출입문을 급히 넘어서고 있었다. 이상했다. 수입이 늘어나도 가난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비싸면 무조건 노우 싸면 반사적으로 지갑을 열면서 예스라고 외쳤다.
”재산 물려줄 자식도 없는데 왠만하면 쓰면서 살지 그래.“
누군가 비꼬듯 말해도 심장이 먼저 두근거렸다.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어떻게 외국여행은 뻔질나게 다녔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간다. 걸음을 다섯 발자국 옮겼을까. 이번에는 고색창연한 불빛에 마음이 설레면서 멈춰섰다. 핸드 드립 커피를 파는 커피숍이었다.
창밖에 호수 같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2층에서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연인들이 보였다. 발코니가 보이는 3층 건물은 옷가게였다. 옛날 언어로 하면 의상실이었다. 생각보다 가격대가 낮았지만 의외로 손님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1층은 옷가게이고 2층은 고가를 전문으로 파는 패션몰에 3층은 사무실이었다.
밝은 조명에 최근 유행하는 옷가지가 걸려 있는데 직원들은 계속 새로운 물건을 꺼내 옷걸이에 걸고 있었다. 옷가게 앞은 넓은 주차장으로 벤츠 승용차가 빼곡이 정차돼 있었다. 어떤 유럽풍 3층 건물은 제과점으로 직원들이 건물 밖에까지 나와 안내하고 있었다.
작은 도넛츠 한 개에 3500원. 줄은 길게 늘어서 있었고 창밖을 보며 커피와 빵을 먹는 젊은 연인들은 여유롭고 한갓지게 보였다. 그들 얼굴마다 력셔리란 단어가 보이는 듯했다. 홍대 맞은편인 이곳은 예술성이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건물마다 고풍스럽거나 럭셔리한 흡사 외국에 온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내가 유럽으로 외국 여행 갔을 때 보았던 건물이 그러했고 분위기도 그러했다.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이곳에선 음식점 간판 이름도 모두 예술적 색채를 띠고 있다. 이곳에서는 예술이 아니고서는 존재가치가 없어 보인다. 럭셔리한 예술적 감흥이 젊음이란 대세와 함께 흐른다.
사회 평론. 기억 저장소. 다시 봄. 클럽 엠.
선(線)과 선(線)의 조화. 기하학적인 건물 형태는 하나의 종합 예술 세트장 같다. 내 안에도 예술혼이 깨어나는 것 같다. 어릴 적 공책에 그림을 그려대며 화가가 되고 싶다던. 그 꿈을 민영기 한마디에 포기하고 잊고 살았었다. 내 인생 책임도 못 질 거면서 꿈마저 포기하게 하다니. 결국 다른 여자 만나 내세까지 함께 행복을 꿈꿀 거면서 왜 내게 하찮은 관심을 표시했던 걸까.
그런 걸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하고 남편에게마저 정을 주지 않은 파렴치한 내 과거 모습이 떠올랐다. 좀 더 참고 기다려 주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싫어서 헤어지는 마당에 거금의 위자료를 주었던 건 혹시 미련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님 첫사랑을 못 잊고 결혼한 죄책감 때문에?
그래 서로에 대한 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그렇게 쉽게 이혼 카드를 꺼내 들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자살할 게 뭐람. 누가 들으면 이혼에 대한 충격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나서 다시 생각한들 무엇 하겠는가. 이혼녀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면서 한동안 정신과 약을 복용한 적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내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된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지 정신 한구석이 무너져 내린 건 아닌지 세상만사가 다 귀찮았다. 어쩌면 나는 모태 솔로가 본업이었는지 모른다. 정신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삶을 포기할 순 없었다.
수없이 여행을 떠났다. 자연의 신비는 안정제 역할을 했다. 푸른 삼림이 맑은 강줄기가 마음을 부드럽게 위무해 주었다. 자연과 동화되는 느낌이 들면서 여행은 힐링을 선물해 주었다. 한동안 유투브 방송을 진행한 적도 있었다. 여행 칼럼을 쓰면서 내가 작가가 아닌가 착각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희한한 건 단 한번도 돈 걱정을 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돈이 풍족해서가 아니라 소비를 최소로 줄였기 때문이다. 어린 날 겪었던 가난에 대한 사무친 기억이 지출이 늘 때마다 겁이 덜컥 덜컥 났다. 그런데도 여행할 때는 돈을 뭉텅 뭉텅 썼다. 해외 여행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희한했다. 아무리 환경이 바뀌어도 마음은 늘 가난했다. 허무와 함께 늘 정서가 불안했다. 상가 골목을 빠져나와 걸음을 지하철역 쪽으로 옮기자 시위 대열이 보였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전단지를 나눠주며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정의도 선도 아닌 구호가 남발하는 세상이다. 군중이 악을 선이라 주장하면 악도 선으로 탈바꿈하는 세상이다. 피해자를 욕보이고 가해자에게 인격 운운하며 신상을 보호해 주는 세상이다.
가장 웃기는 건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피해자에게 두 번 세 번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어리석은 군중이 악을 호도하여 선과 의를 깔아뭉개는 세상이다. 다수라는 이름으로.
만천하에 드러난 죄악상 앞에서도 오히려 거짓으로 치부하며 악을 정당화 한다. 보편화 된 악에 침묵하고 동조하고 편승한다. 피아(彼我)를 구분 못한 내로남불 현상을 두고 서로 상대 탓으로 돌려댄다.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떠밀려 자신이 의인인냥 전문가 행세를 한다.
나도 지난날 그 한 무리에 속했던 건 아니었을까 의심 부호가 떠오른다. 그중에서 내로불남이라는 단어가 가슴속에 콱! 와 닿는다.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자의 횡포를 고발한다는 시위대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았다. 사상과 이념에 있어서도 편협된 어불성설에 불과했다.
오도된 가치관으로 특정 세력을 비호하는 정당하지 못한 억지 주장이었다.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한쪽으로 편중된 발상으로 흐르고 있었다. 행인들은 옆눈으로 그들을 흘기며 무심하게 지나갔다. 자신의 이익과 직접 관계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무관심하거나 침묵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념이나 정의보다 개인적 취향에 더 집착하고 이익을 앞세운다. 민심이 천심인 시대는 지나버렸다. 동심천국? 글쎄라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의 죄악상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우스갯소리로 요즘 중학교 2학년생들이 얼마나 악에 대담하고 뻔뻔한지 당해낼 수가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북한에서 남침하고 싶어도 중2 아이들이 무서워서 망설이고 있다고 해 한바탕 웃은 적이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미진한 느낌이 후회라는 단어와 함께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다, 아! 그건 바로 어리석은 그리움에 대한 후회였다. 그 어리석은 그리움을 상쇄할만한 건 정체성을 향한 도전이었다. 거리마다 나부끼는 현수막과 광고판이 눈앞을 스치면서 가슴이 뛰었다.
그때였다. 대학 동문들의 미전을 알리는 현수막이 보였다. 화랑 입구에 대형 화환이 놓이고 유명하다는 화가들의 이름이 보였다. 늦은 시간임에도 화랑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일반 관객들보다는 동료 화가들처럼 보였다. 전문적인 용어를 써가며 그림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었다.
추상화보다는 구상이 더 많아 천천히 구경하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띠는 그림이 있었다. 선과 색상의 조화가 절묘한 수묵화였다, 그런데 그림 옆에 써진 작가 이름과 사진이 어딘지 낯익었다.
서민정.
서민정. 어디선가 많이 듣던 이름이었다. 누구였더라. 사진 속 얼굴도 젊었을 때 찍었는지 화사한 미인이었다. 여유로운 미소가 안정된 기쁨이 보였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그러다 아! 하고 빛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남편에게 내세에까지 행복하자고 했다던 민영기의 아내였다. 세상에나! 나도 모르는 알 수 없는 탄식이 흘러 나왔다.
그녀의 사진 위로 과부 미망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본업이 고등학교 미술교사였으니 남편 사후에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으리라. 내게는 그림이 철천지 원수처럼 말하더니 정작 결혼은 미술 전공한 여자와 했구나. 능력 있고 재능 많은 여자를 선호한 그가 내린 당연란 결과였다.
거기에다 외모까지 겸비했으니 그에겐 딱 안성마춤인 셈이었다. 언제 찍은 사진일까. 그녀는 사진 속에서 여전히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적 독신일까?
순간 궁금증이 화산처럼 타올랐다. 궁금증 속에 설마라는 단어와 그러면 그렇지라는 동의어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학 동문들의 미전치고 소박했다. 그래도 명문 미대 출신 화가들인데 갤러리치고 규모도 작은 편이었다.
선과 색상의 화려한 조화가 정신없이 관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그림 제목마다 화가의 의지가 담겨 이해를 돕고 있었다. 정신없이 그림을 보는 동안 나는 어릴 적 꿈꾸었던 시절로 회귀하고 있었다. 그림 그릴 스케치북 살 돈을 탈 때마다 너희 학교는 매일 그림만 가르치냐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색연필 그림물감이 한달도 안 돼 동이 났다. 화가라는 직업을 알지도 못한 때였다. 그저 그림 그리는 게 좋았을 뿐이다.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사생대회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던 기억이 났다.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하필이면 왜 지금 이 순간 생각이 나는 걸까.
서민정의 그림은 아늑한 시골풍경을 연상시키는 흔한 풍경화였다. 아마도 그녀 역시 같은 동문 출신으로 미전에 참여한 것 같았다. 꼭 꿈속같은 그림 풍경도 어디선가 매우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생각하는데 뒤에서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서민정 선생은 요즘 잘 나가봐. 벌써 국전도 여러번 입상하고.“
”그거야 다 남편 잘 둔 덕분 아닐까?“
”남편이 국전 심사위원이라는 소문 있던데.“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런데 이어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얘 저기 서민정 서방님 오신다.“
시기와 비아냥이 섞인 말투였다. 나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홱 젖히고 쳐다 보았다. 거기에는 과연 화가다운 품격이 엿보이는 초로의 남자가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과 걸어오고 있었다. 그 옆에 중년으로 보이는 화사한 미인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중년치고 앳돼 보이고 미인형이었다. 몸매도 날씬하고 지성미까지 겸비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계속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엑스타시도 이런 엑스타시는 없으리라, 꼭 혼절할 것만 같은데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던 여자가 나를 바라보더니 자구만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었다. 나도 자꾸만 그녀에게 눈길이 갔다. 기억의 수렁 속에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다. 그래 맞아!
그때였다. 여자가 나를 손으로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다.
”어! 김신애 김신애 맞지? 나 모르겠니? 우리 여고 동창이잖아 나 홍정란이야.“
그녀는 양팔을 벌려 나를 덥썩 껴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버 액션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절친을 만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더니. 그러나 저러나 세월이 40년 흘렀는데 그녀는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 집중했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모두 내 입을 향하고 있었다.
”홍정란? 그래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한반이었지. 홍대 미대 갔다고 소문 들었었어.“
나는 일부러 신난 듯 말했다.
”그래 너도 대학 갔다는 소문 들었었어. 그런데 참 신기하지. 안 죽고 살아 있으니까 만나게 되네, 저기 내 그림도 있으니까 구경하고 다음에 시간 될 때 만나자, 내 명함줄께.“
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스르르 풀면서 말했다. 나는 홍정란의 그림을 구경하는 척하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 혹시 조금 전에 보았던 서민정이라는 이름이 동명이인은 아닐까. 나야말로 오버센스한 건 아닐까. 제발 민영기의 아내가 아니기를. 그러다 또 감정적 모순에 빠졌다.
이제 와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데 방금 전 여고 동창 홍정란을 만난 건 정말 기적과 같다. 그녀는 4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고 어떻게 나를 알아보았을까 생각할수록 신기한 일이었다. 난 그녀가 준 명함을 손에 꼭 쥐고서 화랑을 나왔다.
동명이인도 있을 테니까. 나는 스스로 설득하며 홍대역 전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전동차가 한강 철교를 건너는 동안 난 계속 속으로 웃었다. 세상에 홍정란을 만나다니. 그녀는 아무래도 화가로 성공한 게 틀림없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뒷배가 좋았으니까.
그녀를 만난 게 꼭 꿈을 꾼 것만 같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출한 것만 같다. 그리고 좀 허황하기까지 하다. 난 전동차 안에서 네이버 검색을 했다. 서민정 서양화가. 당장 뜰 줄 알았는데 내가 찾는 문장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잘못 본 걸까.
나는 홍정란이 준 명함을 꺼냈다. 전화해서 물어볼까.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전동차에서 내려 집에 가는데 자꾸 엉뚱한 길로 접어드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하다. 내가 정신회로가 이탈된 걸까. 왜 자꾸 딴 길로 가는 걸까. 발걸음을 옮길수록 처음 보는 낯선 길만 나타났다.
내가 사는 동네는 아파트 군락지대인데 내 발걸음은 엉뚱한 빌라촌을 헤매고 있었다. 분명하다. 이 길이 맞는데. 난 핸드폰을 꺼내 네비게이션을 켠 뒤 사람들에게 물어 겨우 집을 찾아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삶의 방향 감각을 잃은 게 어찌 이번뿐이겠는가.
나는 살면서 수시로 길을 잃었고 구원자를 찾기 위해 헤맸다. 그러다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을 때 내 안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들었다.
곧 일어나 걸어라.
누군가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환한 빛이 죄책감을 뚫고 나를 위무하고 있었다. 신비한 음성과 함께.
이튿날 정신과를 갈까 망설이는데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엉뚱한 생각 말고 나랑 같이 성당이나 가자.“
”성당을 왜?“
”너 요즘 많이 상심한 것 같아. 이제부터 나랑 성당 나가면서 새로운 길을 찾자.“
”새로운 길? 그게 뭔데?“
”진정한 참된 만족을 주는 평강의 길. 그건 바로 그리스도의 평화야.“
나는 친구의 권유로 성당을 나가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신적 평화가 임재하기를 바라며 묵상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다. 평화와 불안은 빗금치듯 교대로 찾아왔다. 어느날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홍정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너희 학교 동문 화가 서민정을 나느냐고.
한참 후에 답신이 왔다.
응 알아.
그뿐이었다. 그러다 한참 후에 문자가 왔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데? 너도 그 여자 잘 알아?
응, 하도 유명하다고 해서.
유명하긴 뭐가 유명해 다 지 남편 덕분이지.
말 속에 시기와 비아냥이 잔뜩 묻어 있었다. 또다시 가슴 속에서 쿵! 소리가 났다. 우당탕탕 절벽 무너지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그날 니 옆에 서 있던 분은 누구야?
응 그 여자 남편?
뭐라구?
내 지도 교수님이시고 국전 심사위원이야, 우리 남편하고도 절친이고.
너 성공했구나, 하긴 넌 예전부터 능력이 출중했으니까.
성공이라고 말하긴 뭣하고, 나중에 내 개인전 할 때 찾아와. 섭섭지 않게 대접할게, 사실 나 고등학교 때 친구는 너 하나야.
왜? 어째서?
나중에 만나서 차 한잔 하자. 그동안 너 살아온 이야기도 들을 겸. 우리도 이제 천천히 천국으로 이사갈 준비해야 할 나이야.
그녀는 뜻모를 말을 하더니 일방적으로 문자를 끊었다. 그날은 반갑다고 껴안고 호들갑을 떨떠니 다 쇼였나. 그나 저나 서민정은 전 남편과 내세에까지 행복하자고 하더니 재혼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국전 심사위원 남편을 만나 화가로도 발돋움 하고. 그나 저나 언제 재혼한 걸까.
어느날 나는 성당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화를 보았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고통과 수치와 모욕을 참는, 볼 때마다 무심코 지나치곤 했는데 그날은 느낌이 이상했다.
주께서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린다는 성경말씀이 떠올랐다. 아무 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다니. 그러다 차츰 그 의미에 대해 알아갈수록 내 안에 진정한 평화가 임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평화는 자유와 함께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랜 세얼 동안 찾아 헤매던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깨달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하나님의 자녀라.
본당 신부의 강론에 마음이 낮아지며 안정된 평화가 찾아왔다. 홍정란 말에 의하면 서민정은 화가로서 계속 주가를 올리고 있다고 했다. 어느날 내게 급전을 요구했다. 경제한파와 함께 운영하던 갤러리가 곧 부도날 위기에 몰렸다고한다.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투자 가치가 없는 그림을 누가 살까.
나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창밖으로 눈발이 서서히 날리기 시작했다. 왜 하필이면 나한테 도움을 청한담.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그날 그렇게 반갑게 나를 맞이했던 걸까. 또다시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어르러졌다. 오랜만에 찾은 평화가 그녀로 인해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십자가가 보이는 탑 앞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이튿날 인터넷에 홍정란이 이혼했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올라와 있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요지경속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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