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평 유적
(재)마한문화연구원이 2009년과 2010년 두차례에 걸쳐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석평 마을 일대를 발굴 조사를 하여 주거지 167기, 수혈 51기, 지상 건물지 8기, 토기 가마 3기 등을 확인하였다. 원형계와 방형계의 주거지 형태가 함께 나타나 전남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문화가 교차되는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슬래그(slag)가 출토되는 주거지, 토기제작과 관련된 주거지, 수정 가공과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된 주거지 등 생산시설도 확인되어 자급자족적 경제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해남 군곡리 유적, 보성 조성리 유적, 금평 유적, 순천 낙수리 유적, 남원 세죽리 등의 유물상과 유사한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공반되는 양상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석평 유적은 1세기 후반부터 5세기까지 마한시대의 보성강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보성강은 길이가 126.75㎞에 이른다.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군에서 장평천, 보성읍 북쪽에서 노동천과 합류하고 미력면과 겸백면에서 보성강 댐을 이룬다. 보성강 댐은 1930년 후반 일제가 득량만에 대규모 간척지를 조성하면서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건설한 것이다. 대룡산을 관통하는 터널을 뚫어 득량만으로 흐르게 하였다. 조성면과 득량면, 고흥군 대서면의 대규모 간척평야에 필요한 농업용수는 이곳의 물을 이용한다. 이 낙차를 이용하여 발전용량 3천120kw의 수력발전소가 세워졌다.
미력 용정리에서 보성읍에서 흘러내리는 보성천과 합류한 보성강은 북쪽으로 흘러 율어천·동복천과 합류하고 북동쪽으로 흘러 순천시 송광면에서 주암댐을 이룬다. 곡성군에 이르러 온수천·죽곡천과 합류한 뒤 죽곡면과 오곡면 경계에서 섬진강으로 흘러든다. 영산강이나 섬진강, 탐진강이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흐르는 데 반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높은 산악지대를 굽이쳐 흐르며 곡성 압록에서 섬진강과 합류하고 있다.
이처럼 전남 중동부 지역의 내륙을 휘저으며 흐르는 보성강은 전남의 대표적인 구석기 문화의 유적이 대규모로 확인되고 있어 일찍부터 선사문화가 발달하였음을 알려준다. 보성강 유역에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묘제인 지석묘군이 광범위하게 펼쳐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마한시대에 들어와서도 보성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치체들이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물론 보성강 유역은 험한 산악지대를 흐르는 보성강의 특성상 좁은 곡간을 형성하고 대규모 정치체의 존재를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복내와 미력을 아우르는 비리국이라는 마한왕국이 보성강 중상류 지역에 있었다. 비리국 이외에도 대룡산 넘어 득량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초리국이 득량만과 고흥반도의 정치세력을 아우르는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성 지역에서는 모두 9곳에서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이들 대부분은 목포-광양을 연결하는 고속도로 공사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보성지역의 발굴조사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편은 아니나, 이 지역에서 확인된 출토 유적·유물은 마한시대의 특성을 충분히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까지 박해연 교수 글.
우리동네 보성강댐, 우리가 어릴 때 새파란 잔디밭위에 아름드리 벚꽃 나무가 있어 벚꽃 활짝피면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던 동네....
댐 위에서는 목선배를 띄워 젊은 청춘남녀들이 배안에서 춤추며 노래하고 바다처럼 넓고 푸른 강물을 휘저으며 놀기도 하였다.
그런데, 여름 장마철 비가 많이오면 수문 열겠다고 싸이렌이 울리고 난 다음 댐 12문 가운데 1문만 열어도 어마어마한 북덕수 붉은 물이 내려가 돌다리 건너 겸백면사무소 동네 겸백국민학교를 다녔던 우리들은 엄청 돌아서 저 댐 위로 걸어서 집에 오곤 했는데 고속도로와 또 다른 도로가 생기면서 이제는 저 위험스런 댐위를 걸을 수 없게 철통보안 막아 두었다.
둥그렇게 흘러간 섬진강 원형안이 바로 우리동네 석평이란곳, 동네서 부를때 석뜰, 풍수지리적으로 돌맹이까지 뜬다고 오랜세월 전설로 내려왔는데 우리세대에 실제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70년대 말 보성강물이 범람하여 동네를 싹쓸이 해 집들이 다 없어졌다.
집이 없어져 동네 사람들이 각지로 흩어졌다
2010년 순천 ㅡ 목포 고속도를 내면서 이강을 가로질러 놓았다. 우리 어릴 때 강물은 폭이 넓고 어마어마 했는데 지금은 동네 실개천처럼 되어가고 있다.
저 땅은 전부 아름드리 밤나무밭과 포전밭이었는데 수자원이 전부를 매입해 버리고, 자녀들은 다 도시로 가고 3가정만 산위에 집을짓고, 두집 어르신들은 세상뜨고 90이다된 노인 두집과 또 한집, 3가구가 살고있는데 그분들이 세상뜨면 아예 동네가 사라질 것이다.
가서보니 어릴적 자랐던 내고향 드넓은 대농가 우리집 땅이 고속도로로 들어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집 대문 앞, 3천평 네모 반듯한 우리 포전밭은 수자원 땅으로 어린 묘목들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집 주소 전남 보성군 겸백면 도안리 석평 530번지 (겸백면 면사무소 호적계에 가 연람하면 고속버스 차도에 들어가버린 주소가 있다.)
정영남
첫댓글 이런 역사적인 유적 문화가 담겨 있었군요 어릴때 그많은 벗꽃들은 일본잔제 정리한단 목표하에
다 베어버리고 벌거 숭이 콘크리트 언덕으로 변하고 말았더군요 벚꽃이 피면 관광객들이 인산
인해를 누리던 보성강 발전소 그시절이 그립고 아직도 주마등 처럼 떠오릅니다 이제는 고속 도로를
지나칠때 마다 옛추억 속으로 지나버린 고향 땜이 아쉬움을 남겨 줍니다 글잘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지금생각해 보면 해근이집 그 아름드리
밤나무들이 적어도 5ㅡ600백년 넘는 당산나무 같았어,
일제 강점기에 심은 벚꽃도 벚꽃 만발할 때 넘 아름다웠는데
다 베어버리니 이젠 완전 다른동네 같더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