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상시인과 칠곡 *
글/사진 김경식
참여시를 쓰는 행위는 위험하다.
이념에 관한 글을 쓰는일은 민감했으며, 필화를 당할수 있었다.
잠수함속에 공기가 부족하면 토끼는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다.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같은 존재다.
자유가 억압받는 독재국가나 사회에서는 누군가 “자유를 달라”고 소리쳐야 한다.
시인들이 가장 먼저 독재자에게 저항했다.
가혹한 정치와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읽는 사람들이 집회를 하면서 시위로 번진다.
이 집회에서 저항시가 낭송되곤 했다.
우리나라도 이런 과정을 거쳐서 오늘의 민주주의를 이루었다. 이처럼 작가의 사회적인 책무가 중요할 때도 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대에 시인은 아름다운 언어와 서정적인 글로 독자와 친숙해지는 일이다.
구상 시인 ( 구상문학관 사진 자료 인용)
이제 “펜이 무보다 강하다”는 말이 설득력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직도 작가의 문학적인 의식과 삶이 하나될 때 독자들에게 신뢰를 받는다.
작가의 흔들림은 때로 방황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심하고 번민하는 일이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은 절망의 눈물을 베개에 적시기도 한다. 진실한 작가의 눈물은 독자들에게도 전달되어 가슴에 감동의 파동을 일으킨다. 이런 경우 문학작품은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언어의 생수가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
우리 민족의 희망과 자유에 관한 건강한 세포를 살리기 위해 시를 쓴 시인이 있다.
글을 썼다가 남과 북의 이념에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구상 시인(1918~2004)이다.
그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면, 아름답고 맑은 삶의 샘물들이 모여서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그의 삶과 문학을 찾아 가기 위해서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으로 가야 한다.
칠곡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이니 선사시대의 유적을 간직한 곳이다.
신라때는 팔거리현, 고려에서는 ‘팔거’라고 불리다가 경산부의 속현이 되기도 했다. 조선 인조18년(1640)에 칠곡도호부로 승격된다.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아마도 가산산성이 이 무렵에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칠곡(七谷)이란 이름 역시 이 고장의 명산인 가산의 다른 이름이 칠봉산(七峰山)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이 산에는 골짜기가 사방 7개로 형성되어 있다. 이 형세를 따와 칠곡(七谷)이라고 했다. 이 후 칠(七)자를 옻칠(漆)자 고쳐 1895 년부터는 칠곡(漆谷)이라 부른다.
구상문학관
왜관(倭館)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의 입국 및 교역을 위하여 설치하였던 장소였다.
건국때부터 조선은 일본을 평화적인 통상관계로 만들기 위한 회유책을 추진한다. 과거 왜구의 침략원인이 주로 경제적인 욕구에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안의 포구에서는 자유로운 무역을 허가하였다.
처음에 왜인들은 경상도의 연해안을 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지역을 확대하자 무질서하게 되어 그 폐단이 심각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태종 때부터는 교역장소를 주로 부산포로 한정하였다. 1426년 삼포제도(부산포, 염포, 내이포)의 확립으로 많은 왜인들이 조선반도 땅으로 유입된다. 염포는 오늘날 울산이며, 내이포는 진해이다. 삼포를 통해 육지로 들어오는 왜인들을 감사할 장소가 필요했다.
또한 국방상의 이유와 왜인들의 행동을 제한하기 위해 그들의 접대처와 교역처가 필요했다.
이곳이 왜관이다.
왜관은 양국에서 각기 관리를 파견하여 외교 및 무역업무를 총괄하였던 곳이다.
다른 곳은 모두 폐쇄되고 오직 칠곡군의 왜관만 남아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연을 가진 왜관이 동네이름으로 된 곳이 지금의 왜관읍이다.
왜관으로 떠나기 전에 구상 시인의 대표시 ‘오늘’ 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의 방식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구상 시인의 시‘오늘’ 전문
‘오늘’이란 시는 시인 스스로도 자신의 사상을 가장 잘 담은 시라고 말하곤 했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이 시를 읽게 되면, 맑고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을의 서막이 아침과 저녁으로 일렁인다.
삽상한 바람이 피부에 살갑게 닿으며 여름이 떠난 것을 알려준다. 어느새 구월이다.
새벽에 집을 나서니 부지런한 사람들을 만난다. 신문과 유유를 배달하는 사람들이 새벽길을 달린다. 공원으로 운동을 가는 사람들도 만난다. 승용차 시동을 걸고 아직은 어둑한 아파트 단지를
빠져 나온다.
자유로에 들어서니 차량들이 빠르게 달려가며 법석을 떤다. 이렇듯 부지런한 민족이니 짧은 기간에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와 중앙고속도로에 인접한 왜관은 교통이 편리한 동네다. 1970년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경제발전 초기단계에 성장의 상징이었다.
왜관은 경부선이 지나가고 경부고속도로가 인접한 동네이다. 왜관IC에 도착하니 10:0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먼저 구상 시인이 살았던 집터를 찾아 나선다.
구상문학관은 2002년에 칠곡군 왜관읍 왜관리 785-84번지에 건립되었다. 구상 시인이 월남하여 6,25전쟁이 끝난 후인 1953부터 1974년 살았던 집터에 세웠다.
구상 시인은 이곳을 본적지롤 삼았다. 문인이 생존시에 자신의 이름으로 된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구상 시인이 처음일 것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었지만, 칠곡군민들이 그에게 보낸 찬사의 상징이 구상문학관이다.
그는 노벨문학상 본선 심사에 두 차례나 거론되었다. 문화적인 자존심이 강한 프랑스에서 세계 200대 문인으로 선정한 시인이다. 프랑스에서 크게 평가를 받은 우리나라의 문인으로는 구상 시인이 유일하다. 영국 옥스퍼드 출판부에서 1997년에 펴낸 <신성한 영감-예수의 삶을 그린 세계의 시> 에 신앙시 4편이 게재될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의 가톨릭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런 거창한 문학적인 업적 때문에 칠곡군에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아니리라.
구상 시인이 평소에 칠곡 사람들에게 보여준 따듯한 인간애와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모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상 시인은 현대판 처사였다.
우리의 현대정치사에 자신의 이름을 높게 올릴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가난한 문인으로 소박하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 줄 알았기에 위대하다.
문인으로서의 일관된 삶을 고집하면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슴으로 사랑했다.
구상문학관이 뜬금없는 장소에 있으면 의미는 삭감될 것이다.
다행히 문학관은 그의 고택 자리에 앉아 있다. 아쉬운 것은 당시 구상 시인이 살았던 집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단아했던 관수재 만은 복원해 놓았다. 관수재는 구상 시인의 서재이자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머물던 집이다. 관수재의 존재만으로도 칠곡의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관수재
구상 시인이 22년간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한 관수재를 복원한 것만도 다행이다.
구상문학관은 칠곡군에서 그의 삶과 문학적이며 구도자적 정신세계를 영원히 이어가고자
건립하였다. 200 평 규모의 2층 건물로, 1층에는 구상 시인이 문단활동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와 문우들과 주고, 받았던 편지, 서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구상 시인이 문학관에 기증한 22,000여권의 소장도서로 가득하다. 문학관의 외관은 현대적인 건축물이다. 현대적인 문학관과 관수재의 작은 기와집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집필실이자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들렀던 관수재(觀水齋)의 문은 닫혀 있다. 관람객들에게 시인의 문학 향수를 느낄수 있는 장소가 닫겨 있는 것이다. 관수재의 담 너머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강변도로만 없었다면 낙동강의 조망이 더욱 아름다웠을 것이다.
그의 고향을 함경남도 원산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사실은 서울 태생이다. 구상 시인은 1919년 서울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원산에 있던 베네딕도 수도원의 교육사업을 위촉받은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이사했기 때문이다. 처음 이주한 곳은 함남 문천군 덕원면 어운리였다 그의 나이 4살 때이다.
구상 시인은 할아버지가 울산부사였다. 큰아버지들은 창녕 현감, 현풍군수를 지냈다. 아버지 구종진도 궁내부 주사로 있었으니 그의 선대 조상들은 모두 벼슬을 한 사람들이다. 외할아버지도 백두진사였다. 백두진사란 과거에 급제는 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은 사람을 칭한다. 아산이씨 집안인 외가는 전통적인 천주교 집안이었다. 구상 시인의 아버지도 결혼과 함께 천주교회에 다니게 된다.
구상은 늦동이 막내로 태어난다.
아버지 나이 쉰, 어머니 마흔 넷이었다. 이런 환경의 자녀들이 의례 그렇듯 그 역시 집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다.
중학교 시절 구상 시인( 구상문학관 자료인용)
그러나 시대는 격동적인 상황이었다. 일제하의 암울한 그림자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대부분 지식인들처럼 구상 시인도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한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구상 시인은 형님이 두 분 있다. 한 분은 가톨릭 신부고, 다른 한 분은 동경 유학중 행방불명된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에 사망하였다고 추정된다. 구대준 신부는 해방 후에도 월남하지 않았다. 1949년에 독일신부들과 함께 투옥된다. 독일인 신부들은 1954년 국제적십자사의 중재로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구대준 신부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로 갔던 신부들 중 몇 명이 한국으로 들어와 왜관에서 포교 활동을
벌였다.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자료 전시회가 열렸는데, 구상 시인은 사진 중에 북한에 두고 온 자신의 어머니와 친인척들을 발견한다. 독일 신부에게서 귀한 가족사진을 기증 받는다. 그의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아마도 구상문학관에서 가장 귀한 자료가 될 것이다.
원산과의 인연은 이사로 시작된다.
원산에 독일계 신부들이 교구를 만들면서 교육사업을 그의 아버지에게 맡겼다. 그의 아버지는 해성학원의 원장이었으며, 60마지기 넘는 논을 소유한 부자였다. 구상 시인은 원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중도에 신학교를 포기한다.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함이라고 하였지만 변명이었다. 아마도 “우리민족이 일제에 의해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저항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일반 중학교로 전학을 하지만 그곳에서도 퇴학을 당한다. 문학을 한다며 불평불만을 가진 조선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기도 했다. 다만 문학이라는 그릇에 자신의 시대적 반항심을 담아 내려고 했다.
반골기질을 지니고 유랑의 생활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생활을 통해 시대의 아픔과 삶의 무게를 느낀 그가 선택한 것은 대학진학이었다.
결국 그는 원산을 떠나야 했다. 고향을 떠나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했다. 야학교사가 되기도 했다그러다가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밀항에 성공한 그는 연필공장 노무자와 일용노무자로 전전한다.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가슴에 품은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무렵 선배의 권유로 일본대학 종교과에 합격한다.
문예창작과를 가려다가 종교과로 선택한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기독교, 천주교, 불고 등 각 종교의 철학적 근거를 배우게 된다. 이 학교에서 그는 종교와 삶의 의미를 인식한다. 훗날 그의 시에 초월적 종교관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경 유학생활 중 저항적 기질의 구상 시인은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평등을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여기게 된다. 자신의 출신성분을 소농 출신이라고 숨긴다.
그러나 동경에서의 생활은 짧았다. 부친의 죽음과 형님이 흥남교회로 부임하고 집에는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국하여 詩 작업에 매달린다. 이 무렵 폐병을 앓게 된다.
폐병에 걸린 그를 징집하려 하자 1941년 ‘북선매일’ 기자가 된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근무한 것을 크게 후회하였다. 이곳이 일제의 어용되었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그는 동네 인근의 지도자가 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는 못한다.
체질적으로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과 가족들(구상문학관 사진 자료 인용)
결국 원산문학가동맹에서 1946년에 펴낸 시집 <응향>이 필화사건에 휘말린다.
필화사건으로 문인의 길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시는 북한에서 반사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되는 체재에서 혹독한 문책을 당한 그는 월남을 결심한다. 월남한 구상 시인은 연합신문사에서 근무한다. 6·25 전쟁 때는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를 만든다. 그의 이런 행위는 자유의 소중함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남한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어 10여 편이 넘는 시집과 수상집, 수필집 등을 펴냈다. 구상 시인의 문학작품들은 영어와 불어, 독어,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되어 세계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남한에서 살았지만 그의 유년시절 고향 원산이 그리웠다.
자신이 어린시절부터 살았던 원산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고향이었다.
칠곡군 왜관읍은 그의 제2의 고향마을이다. 바닷가인 원산이 아니라 낙동강 가의 마을에서 그의 꿈을 키우기로 마음 먹는다.
구상 시인은 1953년 베네딕도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내려왔다. 이 수도원이 본래 원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관에서 그는 1974년까지 살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가 왜관에 본적지를 두고 생활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북에 있던 가족이 베네딕트수도원이 있는 왜관으로 찾아올까 기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이별하고 난 후에 만남을 염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엿볼수 있지 않은가.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왜관의 집을 팔지 않았다. 헤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실날같은 희망을 간직했던 집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월남한 후 이 집을 다녀간 사람들과의 추억과 자신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리라. 이 집터에 그의 문학관이 세워진 것은 그래서 의미를 더 한다.
구상 시인에게 낙동강이 흐르는 왜관은 시심의 고향이다. 퍼내도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솟는 샘이었다. 월남한 구상 시인이 마음의 안식을 얻은 곳이다. 관수재는 문학과 아내, 자식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던 장소가 아니던가.
구상 시인에게 왜관은 아내에게 큰 은혜를 받은 곳이다.
폐병에 시달리던 그의 목숨을 살려준 사람이 1994년 세상을 떠난 아내 서영옥 여사다.
의사였던 그녀는 결혼 초부터 폐병에 걸려 있던 시인을 구해준 은인이다.
이런 부인의 사랑과 삶의 은신처인 관수재는 결국 시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이들 부부의 인연과 사랑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왜관 구상 시인 고택( 구상문학관 사진자료 인용)
구상 선생의 형인 구대준 신부는 흥남천주교회에 주임신부였다. 당시 교회는 대건의원을 운영했다. 이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서영옥 여사는 훗날 구상 시인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다.
환자였던 구상 시인을 위해 그녀는 온갖 정성으로 간호했다.
그녀는 훗날 구상 시인이 시작업에 몰입하고 요양도 할 수 있도록 왜관에 집을 마련했다. 구상 시인은 이곳을 가난한 예술가들을 위한 정양소라고 표현했다. 정양소란 몸과 마음의 안정과 휴양을 위한 시설을 갖추어 놓은 곳이 아닌가.
관수재(觀水齋)에는 구상 시인을 만나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드나 들었다. 낙동강이 집 앞으로 흐르는 이곳은 시를 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구상 시인은 관수재에서 많은 문우들과 교분을 쌓으며 연작시 '강' 을 쓰게 된다.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석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 구상 시 ‘강’ 중에서
성자 같은 삶을 살았던 구상 시인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된 데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2004년 5월 11일 아내와 두 아들이 먼저 가서 기다리는 하늘나라로 구름을 타고 가듯 떠나갔다.
시인 구상은 남한과 북한에서 필화를 경험한 유일한 문인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부르주아적이며 퇴폐주의, 반역사적, 반인민적인 반동시인이 된다. 당시 필화의 원인이 되었던, “안개를 생식하는 짐승이 된다”는 내용에 대해 관념적이며 비과학적이라며 비판을 받는다. 독재적인 북한의 정치에 염증을 느껴 월남한 그는 65년8월에 희곡 "수치"를 드라마센터의 무대에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한 당국에 의해 공연보류조치를 당한다. "우리의 영웅이신 김일성 장군께서" 라는 등장인물 중 빨치산 군관의 대사가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상투어로 쓰이고 있는 인민들의 말을 인용한 것조차 남한에서는 용인할 수 없는 시대였다. 문학작품에 사실성을 불어넣고 공산당을 비판하기 위한 연극이었는데도 공연은 취소되었다.
구상 시인은 사람을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인맥이 상당히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문단이나 예술계는 말할 것도 없이 다양한 사람들과 교분을 가졌다. 이런 인물 중에 화가 이중섭과의 우정은 많이 알려졌다.
이중섭은 왜관의 관수재(觀水齋)에서 구상 시인과 함께 기거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이중섭은 일본에서 살고 있던 가족을 그리워했다. 관수재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구상 시인의 가족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당시 구상 시인에게 그려준 ‘천도복숭아’ 그림은 삶이 어렵거나 아플 때에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왜관 낙동강에서 (구상문학관 사진자료 인용)
구상 시인은 유신치하의 정치적 암흑기에 문인들을 위해 증언한 것이 일화로 남아 있다. 1974년은 암흑기의 정점이었다. 유신이 발효되고 한국적민주주의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문인들에게도 족쇄를 채우기 시작한다.
소설가 이호철, 문학평론가 김우종, 임헌영 등을 ‘문학인 간첩단’으로 조작한다.
구상 시인의 법정증언이 필요했다. 그런데 구상 시인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증언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상 시인은 재판정에 증인으로 출두한다. 이들의 무죄를 특유한 어조로 설득력있게 증언해 주었다. 후배 문인들이 감격한 것은 물론이다.
구상 시인에게 정계입문 제의가 많았다. 그러나 그는 일거에 거절했다. 5·16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을 맡아 달라고 요청한다. 이를 거절하고 경향신문 동경지국장으로 떠난 일화는 유명하다.
구상 시인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속이깊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박삼중 스님은 사형수 돕기에 적극적인 분이다.
이런 일에 함께 했던 구상 시인은 사형수 한 명을 양아들로 삼는다. 구상 시인은 그의 구명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다. 사형수인 양아들은 석방된다. 한 때 그는 화가 이중섭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이중섭의 작품을 세상에 알린것도 그였다. 우리가 흔히 걸레스님이라 불렀던 중광과의 인연에도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다. 중광 스님은 세상에 이런저런 물의를 일으키고 다녔다. 어느 날 박삼중 스님이 그와 인연을 끊어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구상 시인은 이를 거절하며 다음처럼 말했다고 한다. “스님, 저는 이미 중광이라는 한 사람을 알았습니다.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릴 겁니다. 모두들 그에게 돌팔매질을 하여도 나는 참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구상 시인을 성자 같다고 하는 이유를 이런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가 소리 소문없이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한 일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구상 시인은 역사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였기에 일제하에서는 저항의식이 있었으며, 6,25전쟁의 벌판에서는 역사의식에 따라 행동했다 . 전쟁 후에는 다시 반독재 투쟁을 한다.
그는 자유를 찾아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이다. 고귀한 자유를 위해 민간인으로서 전쟁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승만 정권이 자유를 억압하고 독재정치에 환멸을 느끼면 투쟁을 하기도 했다. 펜으로 이승만에게 도전장을 낸다. 1953년에 펴낸 <민주고발>이라는 사회평론집이 있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한 이 책은 곧 바로 판매금지령이 내려진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곳은 감옥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무기를 북한으로 밀송하려 했다는 구실을 만들어 그를 구속한다. 친구가 일본으로 미제 진공관을 보낸것이 화근이었다. 이를 근거로 북한으로 무기를 보냈다고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이런 사실조차 모르고 구속된 구상 시인에게 검찰은 15년 형을 구형한다. 구상 시인은 최후 진술에서 “조국을 배반한 죄목을 쓰고 감옥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사형이 아니면 무죄를 달라” 고 호소했다. 재판장은 다행히 구상 시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의 감옥생활은 8개월로 끝이났다. 이 역시 필화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사건 후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오직 문인으로 살겠다는 결심을 한다. 사회적 직책을 맡지 않고, 후학을 양성하는 처사같은 삶을 선택한다. 서강대학교, 서울대학교, 중앙대학교, 하와이대학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쳤다. 학교에서 제공하는 보직을 사양했음은 물론이다. 서라벌 예술대학이 설립될 때 초대 학장자리를 거절했으며,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가 국민대총장 자리를 제의했을 때도 거절했다. 당시 김성곤씨는 국민대 이사장이었다.
이뿐이 아니다.
그는 정계입문과 주변의 온갖 유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 뿌리치고 가난한 시인의 길을 걷다가 웃으며 세상을 떠나갔다. 올곧은 삶과 구도자적 자세로 자신의 길을 걸었다. 만면의 미소와 따뜻한 성품의 구상 시인이 있음으로 우리 시단이 빛나는 것이다.
칠곡의 산채정식 명소 <연화정>
구상 시인에게 정계 입문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은 해공 신익희 선생이었다.
1950년대 중반 구상 시인은 <민주고발>사건 등으로 유명인사가 된다.
해공은 그에게 민국당 선전부장으로 일할것을 권한다. 그러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번째로 정계 입문을 권유한 사람은 장면 총리였다. 4,19 직후에 경북 칠곡군 민의원 후보로 공천한다. 이 역시 거절한다. 다시 참의원 선거에 출마를 권유받는다. 이를 거절하기 위해 제주도로 피신한다. 당시 승려였던 고은 시인과 40일간을 지내다 서울로 돌아오기도 한다.
다음으로 정치 입문을 권한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고문으로 내정해 놓는다. 5,16 직후이기에 박정희 소장의 위상을 알 만하지 않는가.
그러나 구상 시인을 끝내 설득하지 못한다.
박 전 대통령과 인연은 이용문 장군의 소개로 맺어지게 된다.
구상, 박정희, 이용문 이들은 5ㆍ16 이전부터 막역한 관계였다.
구상 시인은 1949년 육군 정보국에 근무한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 이던 이용문 장군과 친하게 된 구상 시인은 그와 친해져 밤낮 술자리를 함께 한다. 이 무렵 이용문 장군이 구상 시인을 박정희에게 소개한다. 이내 그들의 관계는 자주 만나는 동지의 인연으로 발전한다. 의기투합해 자주 어울려 다니곤 했다.
이용문 장군은 비행기 사고로 1953년 6월 어느날 세상을 떠났다. 이날은 대구에서 그들이 함께 만나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이런 인연이 있었기에 구상 시인은 서슬퍼런 일명 '박통 시대‘에도 박 전 대통령을 ‘박 첨지’라고 불렀다. 친구로서 관(官)에 나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에도 박정희는 정계입문 유혹을 계속하지만 구상은 끝까지 거절한다. 5공 때는 민정당 10인 발기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거절한다. 총재, 고문, 전국구 의원 등의 제의가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어느것 한 가지 응하지 않았다.
구상 시인은 개인적으로 아픔이 많은 시인이었다.
두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기 때문이다. 큰아들 구홍 (1997년), 둘째 아들 구성( 1987년)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 그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아내도 1994년 세상을 떠난다. 남한에 남아 있는 가족으로 소설을 쓰는 딸 ‘구자명’ 씨와 작은 아들이 낳은 손녀가 있을 뿐이었다.
송림사5층전탑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구상 시인의 시‘꽃자리’ 전문
담배 많이 피우기로 소문났던 시인이 있었다. 공초 오상순 시인이다. 호가 공초인데 담배를 얼마나 많이 피우던지 ‘꽁초’라고 불릴 정도였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말은 공초 오상순 시인이 지인들을 만나면 자주하던 인사말 이었다고 전한다.
아마 구상 시인도 오상순 시인의 인사말을 썼을 것이다. 첫 머리 시가 주는 이미지는 긍정의 언어이다. '반갑고 기쁘고 고맙다' 에는 삶의 긍정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다. 그의 시어에는 생명의 소중함이 담뿍 베어있다.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성경 말씀의 인용도 했다.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우리는 바로 이 꽃자리를 찾아 일상의 삶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구상 시인의 첫 시집 ‘구상’(1951)이다.
‘초토의 시’는 1956년에 발행한 시집에 수록되어 시집의 제목이 되었다.
이 시에서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전쟁의 비극을 그리고 있다. ‘초토가 된’ 우리땅을 점령한 자본주의적 상황을 표현한다.
그의 언어는 모더니즘 시인들과는 달랐다. 부정과 비판같은 시어가 보이지 않는다.
제목인 초토(焦土)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불에 탄 흙과, 건축물들이 흔적 없이 사라진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의 시 <초토의 시1>을 읽어본다.
하꼬방 유리 딱지에 애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 마냥 걸려 있다.
내려 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소녀)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구상 시인의 시‘초토의시1’ 전문
잿더미 속의 전쟁의 참화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개나리와 소녀의 미소 속에는 밝고 희망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전쟁의 비극성을 대조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림자’를 통해 시적화자의 심적변화를
읽을 수 있다.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속에 인간애와 상실감이 스며있는 ‘초토의 시’는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려는 소망과 의지가 담겨 있다.
전쟁 때 구상 시인( 구상문학관 사진 자료 인용)
‘초토의 시1’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 땅의 풍경을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따뜻하게 보듬고 있다. 이 시에서도 초토의 살벌함과 상황의 위기는 드러난다. 하지만 어린이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황폐한 전후의 세상에서도 밝은해를 잃어 버리지 않는다.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이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 리면
가로막히고,
무주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람 속에 깃들어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가고,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 놓아 버린다.
--구상 시인의 시 ‘초토의시8’
적군 묘지(敵軍墓地)에서 전문
전쟁터에서 쓴 시이지만 증오가 없고 미움이 보이지 않는다.
서로 싸우던 적은 이제 저주나 말살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승화해야 하는 내 형제들이다.
구상 시인이 우는 것은 원한 때문이 아니다. 이념의 허상과 투쟁욕이 낳은 국토분단과 동족상쟁의 비참한 현실을 슬퍼하는 것이다. 구상 시인이 종교적이며 형제애를 지니고 크게는 인류애를 지닌 시인임을 보여준다.
이 시는 <초토의 시 8> 라는 연작시 15편 중의 한 편이다, 6,25 전쟁 때에 사망한 `적군 묘지'에서 형제애를 지니고 서있는 작가의 연민의 정이 살아온다.
다부동전적기념관
적의 무덤 앞에서 비애와 연민은 제4연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무덤속의 적군 병사들처럼 작가 자신의 고향이 그곳에서 삼십 리 저 편이다.
이제 6,25전쟁이 얼마나 참혹하였는지 알 수 있는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
유학산 기슭의 다부동이다.
왜관에서 다부동전적지로 가는 길은 고개를 굽이굽이 넘어 가야 한다.
왜관읍에서 908번 지방도를 타고 20분쯤 가면 다부원에 닿는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의 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낙동강 방어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였다. 다부동이 함락되면 지형적으로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했다. 대구가 북한군의 지상화포의 사정권이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 지역이었다. 북한군은 다부동 인근에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국군 제1사단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이 전부였다.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내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한다. 그러나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 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은 함락된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한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유학산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정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이곳에서 산야를 내려다 본다. 믿을수 없이 평화롭다. 그러나 이 혈전에서 북한군은 17,500여명, 국군과 미군도 10,000여명이 전사했다.
이곳에서 죽어간 젊은이들의 원혼이 아직도 이곳을 떠도는 듯 흰 구름이 넘실거린다.
조지훈 시인의 시 ‘다부원에서’를 읽으면 그 현장이 선연하다.
다부동 전경
한 달 농성 끝에 나와 보는 다부원은
얇은 가을 구름이 산마루에 뿌려져 있다.
피아 공방의 포화가
한 달을 내리 울부짖던 곳
아아 다부원은 이렇게도
대구에서 가까운 자리에 있었고나.
조그만 마을 하나를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한 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사람들아 묻지를 말아라
이 황폐한 풍경이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고개 들어 하늘에 외치던 그 자세대로
머리만 남아 있는 군마의 시체
스스로의 뉘우침에 흐느껴 우는 듯
길 옆에 쓰러진 괴뢰군 전사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조지훈 시인의 시 ‘다부원에서’ 전문
조지훈 시인은 전투가 끝난 한 달 뒤에 다부원을 찾는다.
치열했던 전투 당시의 상황을 상상한다.
지금은 너무나 조용하고 아름다우며 평화로운 동네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의 시 '다부원에서'를 읽으면 포연이 휩쓸고 간 장면이 선연하다. 전투가 남긴 다부원 현장의 처참함과 가슴속의 상처가 시속에 살아서 꿈틀 거린다. 조지훈 시인은 6·25 전쟁 기간 동안, ‘종군문인단’에 참여하여 실제로 다부원에서의 전투의 참상을 경험한다.
우리 민족의 최대의 비극은 6,25 전쟁이다. 문인들은 전쟁의 비극에 몸서리치며 자신의 감정을
창작에 몰입시킨다. 다수의 전쟁문학 및 전후문학이 탄생한다.
소설과 시를 통해 작가들에 의한 시각이 다양하다.
적대적 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 또는 인간애를 표현한 작품이 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역시 그런 예가 된다. 관용과 연민은 읽는 이들 역시 공유한다. 이것은 6·25 동란이 동족끼리의 전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족의 형제들은 서로의 목숨을 겨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런데 하늘 한 번 처다보고 산야를 바라보면 죄의식으로 한숨이 나왔을 것이다. 서로가 형제라는 자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분단과 갈등 속에서도 싹트고 있던 동족으로서의 연민이 스멀거리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분단민족의 고난을 실감한다. 이 분단은 민족을 갈라놓았으며 증오와 죽음을 휘몰고 온 족쇄였기 때문이다.
관념적이지만 서정석인 이 시를 읽다보면, 격정적이고 비장한 가슴이 어루만져진다.
송림사
우리민족이 저지른 죄를 어찌 할 것인가. 송림사는 이런 죄를 용서 받는 곳이다.
다부원 가까이에 송림사가 있다고 하는것은 큰 위안이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에 있는 송림사는 신라시대 전탑으로도 유명한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때 진나라 사신이 불서 2,700권과 불사리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함께 동행한 이가
명관스님이다, 책과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절이 송림사다. 신라의 호국안민을 위해 보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전탑이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중수한다. 그러나 1235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전탑만 남고 송림사는 폐허화된다. 가까스로 중창했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58년(철종9) 영추(永樞)가 재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정된 지세에 세워진 대웅전·명부전·요사채 등이 우람한 가람을 형성한다. 대웅전 앞의 5층전탑은 보물 제18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59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많은 유물이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송림사5층 전탑 높이가 16.13m이다. 지금도 5층건물 높이인데, 신라시대 사람들이 보았을 탑의
위상은 대단했을 것이다.
현재까지 금동상륜부가 남아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탑이다.
탑의 형태는 경주분황사 모전석탑의 수법과 흡사하다.
하늘은 맑고 푸르다. 가을소리 같은 산사의 풍경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 삶과 목숨을 바쳤던 순교지를 찾아 나선다. 한티성지이다.
한티성지 가는길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길로 정해질 정도이다.
한티는 깊은 산골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칠곡군 동명면 득명리 5번지 이다.
이곳을 찾기 위해 왜관에서 대구광역시까지 갔다가 다시 휘돌아 왔다. 약 100 리 이상을 돌아온 것이다. 칠곡에서 발행한 지도의 지형과 지물을 잘 못 확인한 결과였다.
한티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다. 몇 번이고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이 산줄기는 팔공 산괴의 맥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해발 600m를 넘는 이 지역은 임진왜란 때도 피난지였으니 역사가 아주 깊다. 천주교 박해 때는 교인들이 몸을 숨긴 곳이며, 처형을 당한 곳이다. 가슴이 아픈것은 이 때 처형당한 사람들의 유해가 묻혀있는 장소이다. 이런 사연을 가진 한티는 천주교의 완벽한 순교성지이다.
한티성지
팔공산괴는 태백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아우른다.
장엄한 산세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다. 이런 산줄기들이 모여 병풍처럼 대구의 북쪽을 막고있다.
한티는 가산과 팔공산 사이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7km 떨어진 곳에 가산이 솟아있다. 이곳에 가산산성이 축성되었다. 가산은 칠곡의 주산이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이었다.
난이 일어나면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해의 은둔지였다. 천주교 박해를 피해 고향땅을 떠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긴 곳이다. 산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교우촌을 형성했다. 이 초가집 마당을 걸으면서 그 당시를 상상해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이 느껴지며 현실에 감사하게 된다.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1801) 이후였다. 유교전통이 매우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다른곳 보다 늦었다. 박해를 피해 서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이 경상도 몇곳에 은둔지를 삼아 살게 된다.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피난하며 신자촌을 이루고 살아간다.
얼마동안은 외부와 격리된 이런 곳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 조정의 명령없이 지방관에 의한 국지적인 박해가 저질러졌다. 을해박해였다.
청송 노래산, 진보 머루산, 안동 우련밭, 영양 곧은정 등지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된다.
정해박해(1827)때에는 상주 지역의 많은 신자들이 체포된다.
체포된 신자들은 굶주림과 온갖 고문의 역경 중에도 배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옥사하지 않은 신자들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수감된다. 이 무렵 그들의 가족들은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한티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이것이 한티에 마을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1839년 4월 정해박해 때에 체포된 신자들이 처형되기 한 해 전인 1838년 김현상 요아킴 가정을 비롯한 신자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850년대 말에는 큰 신자촌이 되었다.
경신박해(1860)때에 한티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박해가 끝나자 다시 모여들었다.
1862년 장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서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신박해로 김현상의 후손들이 대구로 떠난 후 조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신앙생활을 하였다.
1861년 병인박해 때 경북 문경 서태순 베드로가 잡혀 상주 감영에 끌려갔다가 순교한다. 조카 서상돈이 그의 시신을 이곳 한티에 안장한다. 1867년 한티에 은거하던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대구에 갔다가 체포된다. 서울로 압송되어 절두산에서 순교한다.
이무렵 독일인 옵페르트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일어난다. 조선 조정의 천주교박해는 더욱 심해진다. 1868년 봄 한티에 포졸들이 몰려와 재판과정도 없이 배교하지 않는 조가롤로를 비롯한 30여명의 신자들을 현장에서 처형한다. 포졸들은 달아나던 신자들을 추격하여 잔인하게 학살한다.
한티는 불바다가 된다. 동네는 모두 불에 타고 말았다. 돌무더기 무덤은 이 때 만들어진 것이리라. 현재 한티 순교성지에는 모두 37기의 묘가 있다. 순교자 묘의 대부분인 33기는 무명순교자의 묘지이다 십자가 앞에서 한참을 서성여 본다. 가슴이 답답해 진다.
한티성지 순교자 묘역
박해의 먹장구름이 지나간 뒤 한티에 살던 박만수 요셉은 생존한 사람들과 함께 공소재건에 나선다. 먼저 순교자들이 살던 마을 지금의 순교자묘역이 있는 대형 십자가 뒤편은순교자들이 살던 마을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피가 서린 거룩한 곳이므로 우리 같은 죄인이 밟을 수 없다'하여 마을을 옮긴다. 옮긴곳이 현재 초가집이 서 있는 곳이다. 이곳이 바람맞이 땅이다. 이곳에서 바람을 맞이한다. 자유의 신선한 바람이다.
자유는 참으로 소중하다. 특히 신앙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이 산속까지 숨어 지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이곳에서는 낙동강이 보이자 않는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으면 자유의 푸른 강물이 일렁인다. 나는 다시 구상 시인을 이곳에서 생각해 본다.
그는 신앙의 자유와 문학의 자유가 그리워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 아닌가.
이곳 한티에서 순교했던 사람들의 삶과 구상 시인의 삶을 비교하면서
처연한 가슴을 쓸어내린다.
자유의 강물은 끝없이 흘러야 한다. 구상 시인의 삶과 문학은 자유와 평등 봉사에 있었다.
그는 시를 이런 도구로 사용한 사람이다. 그래서 연작시를 썼다. 끝으로 그가 성인처럼 살려고 했던 이야기를 하려한다.
한국문학에서 연작시를 개척한 사람은 구상 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년대의 연작시 <초토의 시>와 60년대의 연작시 <밭 일기>를 통해 연작시의 전형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70년대에 구상 시인 연작시의 소재는 ‘강’이었다. 왜관의 집 앞이 바로 낙동강이다. 서울에서는 여의도에 살았기에 늘 한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그의 거주지와 문학의 중심에는 늘 강이 흘러 갔다. 강은 그에게 시적 상상력을 제공했다. 70년대에 발표하였던 강을 소재로 한 시들은 80년대에는 <그리스도 폴의 江>을 연작시로 재창작 된다.
메모해 왔던 구상문학관에서 낙동강을 향해 앉아 있던 <그리스도 폴의 강> 시를 읽는다.
오늘 마주하는 이 강은
어제의 그 강이 아니다.
내일 맞이할 강은
오늘의 이 강이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 강과
새 사람을 만나면서
옛 강과 옛 사람을 만나는
착각을 한다.
-- 구상 시 ‘그리스도 폴의 강 24’ 시비에서
구상 시인 시비
연작시에 들인 그의 공은 크다.
‘그리스도폴’이라는 성인을 통한 자신의 삶을 구도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함이다.
그리스도폴은 가톨릭 ‘14성인’ 중의 한 사람이다. 힘이 장사였던 그는 3세기에 순교한 성인이다. 그리스도폴은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향락에 빠진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선교사를 만나 감동을 받고 사람들을 자신의 등에 업고 강을 건네주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폴은 자신보다 더 힘센 사람을 만나면,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선언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듣는다.
매일 예수를 기다리며 강을 건너주는 봉사를 하며 살아간다.
어느날 밤에 한 아이가 다가와 강을 건너 달라고 한다.
그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는데 강 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이를 견디기 어려운 폴은 아이에게 묻는다. “너는 누구인데 이렇게 무겁냐?” '당신은 이 세상 전체보다도 훨씬 더 무거운 존재, 예수 그리스도를 어깨에 메고 있다.' 아이는 대답한다. 예수는 그 자리에서 세례를 베푼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크리스토포루스가 된다. ‘포루스(phorus)’는 “지탱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크리스토포루스는 ‘그리스도를 어깨에 멘 사람’이라는 뜻이다. 크리스토포루스라는 이름이 훗날 그리스도폴로 정착된다.
구상 시인은 그리스도폴의 젊은 날의 방탕한 생활과 예수를 만난 이후 변한 구도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강’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구도의 원천으로 보았을 것이다.
구상 시인에게 강은 실천적인 삶의 현장이었다. 자신의 구세주를 기다리며 봉사하는 구도의 공간이었다. 그는 강을 보면서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고자 했다. 강을 통해 새 세상과 새 날을 맞이하려고 했다. ‘관수재’라는 말의 뜻 그대로 “강물을 바라보는 집”이다.
신앙의 본질을 깨달으며 성인의 삶을 본받으려 한 작품이 <그리스도 폴 강>의 연작시이다.
이제 ‘그리스도폴’을 닮으려 했던 구상 시인의 삶과 문학의 기행을 마친다.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 마지막 구절이 가슴을 흔든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첫댓글 나도 생전 구상선생을 뵌 일이 있었다
소설가 한무숙선생 사후 부군되시는 고 김진흥(전 신탁은행장/대우증권 사장)님께서
부인의 작품을 정리하여 문집으로 발간하는 자리에 친구 이창훈을 따라 간 때 였다
신라호텔의 부속건물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구상 선생께서 평소 친지처럼 좋은 사이였던
한무숙 선생 내외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하는 자리였다
이제는 세분 모두 타계하셨으니 그 곳에서도 역시 돈독하게 정 이어 가실 것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