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사십시오
요한복음 2:13~22
반갑습니다. 여러분, 8월 18일 성령강림 후 열 번째 주일입니다. 빛 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빛으로 인도하시길 축원합니다.
요즘은 인공이 빛이 많아서 밤이 되어도 환합니다만 아직도 시골이나 인공의 빛이 드문 곳은 밤이 되면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옵니다. 지난 휴가 때, 캄보디아 남부 ‘캄포트’에 갔다가 밤늦게 프놈펜 시내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초행길인데다가 가로등도 없고 비포장도로이다 보니 어디가 길인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합니다. 오로지 자동차 전조등과 구글 지도만 의지해서 운전합니다. 길은 좁고 중앙선도 없는데 맞은 편에서는 차가 수시로 넘어옵니다. 결국, 제법 운전을 잘하는 것 같은 차를 앞세우고 후미등만 바라보며 열심히 따라가며 운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인생길에서 나를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빛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리고 주님이 나의 빛의 되어주시지만, 나도 그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구나. 주님께서 빛을 내게 비춰주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셔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구나.’
■ ‘빛’과 ‘어둠’
요한복음 1장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안에는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 빛이 어두운 세상에 왔는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세례 요한을 통해서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게 하십니다. 창세기 1장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됩니다. 창조 전의 세상에 대해 성경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라 표현하고 있고,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행위는 “빛이 있으라!” 즉, ‘빛’을 창조하신 일입니다.
성경에서 ‘어둠’과 ‘빛’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타락 이후 ‘에덴의 동쪽’에 살아가는 인간은 늘 어둠의 위협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덴의 동쪽’은 이 세상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조 전 ‘흑암이 깊었던’이 세상은 본질에서 ‘어둠’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따라 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내 어두워집니다. 이 세상이 어둠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뭔가를 해야’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어둠과 빛’의 상징은 단순히 자연의 어둠과 빛이 아니라 상징적인 ‘어둠과 빛’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선언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내는 물건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빛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자연이 주는 어둠은 쉼의 시간이고, 누군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새벽이 오지만, 역사의 어둠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어둠을 물리치기 위한 거룩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 성전정화사건의 결과
예수님을 예의주시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반드시 죽여야만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사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늘 말씀을 읽었으니 힌트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은 사복음에 모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그 시기가 언제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언제였나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1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이 가까워질 때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눈에 비친 것이 있었습니다. 14절에 “소를 파는 사람, 양을 파는 사람, 비둘기파는 사람, 돈 바꾸는 사람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엎어버리고 돈을 다 쏟아버렸습니다. 오늘날 법적으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고발하여 사회법정에 넘긴다면, ‘폭력적 1인시위로 타인의 재산을 손궤함’이라는 판결과 벌금을 받겠지요. 예수님의 이런 행위는 그 당시 죄목으로 ‘신성모독죄’였으며, 결국 이 일은 산헤드린의 재판을 통해서 ‘십자가형’이라는 판결을 받습니다.
■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무조건 사랑하면 된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고, 무조건 참고,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달라는 대로 주고, 무조건 덮어주고,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고, 반대하지 말고, 대항하지 말고,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기독교”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참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사랑의 종교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참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사랑이야, 순종이야, 참는 자가 복이 있어, 용서해야 해”라는 식으로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왜곡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고 착각함으로 죄 된 길을 걸어가면서도 회개할 기회조차도 박탈당하겠지요. 무조건 사랑하고 용납해야 한다는 식의 왜곡된 사랑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무릎을 꿇고 ‘신사참배’를 했던 교회도, 과거 군부독재에 아부하며 그들의 안녕을 빌어주던 ‘국가 조찬기도회’ 같은 것도 모두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왜곡된 사랑은 괴물을 키웁니다. 한국의 역사는 불의한 지도자들을 무조건 사랑하고 감싸줌으로써 지금까지도 온 국민이 큰 고통을 당하는 역사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갖게 하고, 아이들이 해야 할 것 부모들이 다 해주고, 아이들이 잘못해도 꾸짖지 않는 것, 무조건 “오냐 오냐!”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거짓된 것을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랑, 잘못된 것을 꾸짖는 사랑, 세상의 악한 것을 향하여 분노할 수 있고 화내고 야단칠 수 있는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래서 진짜 사랑하면, 때론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 예루살렘 성전 정화사건
다시 예수님의 성전정화 사건을 살펴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예수님, 장사꾼, 제자들, 유대인입니다. 본문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각지에서 몰려온 순례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누가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을 이런 지경으로 만든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눈엣가시 같은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폈을 것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재구성해보면 이렇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담을 넘은 절기’라는 뜻을 가진 유월절은 출애굽과 관련이 있는 절기요, 유대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명절입니다. 출애굽 하여 약속의 땅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를 하고 하나님을 떠나 산 결과 어둠의 세월을 살아갑니다. 분단에 이어 아시리아와 바빌론에 의해 멸망 당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이다 디아스포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갑니다. 이렇게 흩어져 살아가던 이들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인사사고가 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려옵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수요가 필요하고, 수요가 필요하면 공급이 이뤄집니다. 사람들이 성전으로 몰려오니까 이 수요와 공급의 중심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그런데 절기를 지키러 오는 이들은 절대로 빈손으로 오지 않습니다. 법으로 바쳐야 할 재물도 있고, 재물을 바칠만한 능력이 없으면 최소한 성전세라도 바쳐야 합니다. 당시 통용되던 동전에는 로마황제 가이사 흉상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그래서 성전에 바치는 동전에는 가이사 흉상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내거나 연보를 하려면 환전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환전상은 환전하면서 일정 정도의 차액을 얻습니다. 환전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장사하는 모든 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냥 장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자리에 따라 구전이 오갔겠지요. 좋은 자리는 ‘권리금’도 있었을 것이고, 권리금을 받은 이들은 그 이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순례자들에게 과도하게 재물의 값을 비싸게 받을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시죠? 예수님께서 그런 곳에 들어가 그 꼴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장사의 소굴이 되어버린 상황을 보신 것이죠. 그야말로 앞이 깜깜한 상황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 야훼를 버리고 혼합종교화되어 우상숭배를 한 결과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고,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정신을 못차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었으니 희망이 없는 것이죠. 이때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두르며 ‘폭력적인 1인 시위’를 한 것입니다. 이 행위는 깜깜한 밤에 촛불을 밝히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 광복의 의미
지난 15일 광복 74주년을 보냈습니다. ‘光復(광복)’이 무엇입니까? ‘빛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빛이 돌아오기 전에는 ‘어둠‘이 있었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그 어둠의 세월 속에서 빛을 비춘 이들은 누구입니까? 독립운동가들입니다. 그 어둠의 세월이 영원하길 바랐던 이들은 친일파와 일본 제국주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빛’과 관련된 말씀이 많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아무리 깜깜한 어둠이라도 작은 빛이라도 있으면 어둠을 몰아낼 수 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빛난다.”
“나는 빛이다.
어둠은 어디서 만들어집니까?
창세기에서 땅이 혼하고 어둠이 깊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심으로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세상은 원래, 깜깜한 곳이라는 의미기도 합니다. 에덴의 동쪽이라고 불리는 이 세상은 그 본래의 세상으로 가려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으라!“하신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같은 일이 없다면 그냥 어둠의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작은 초도 빛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합니까?
우리도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려면 수고가 있어야 하고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양초처럼 자신을 녹이고 태우는 고생을 해야 빛을 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어둔 세상을 밝히고 빛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었습니다. 74년 전 우리 민족의 광복도 그냥 온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힘쓴 많은 분의 수고 속에서 피어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냥 깜깜 한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스위치를 키 든지, 촛불을 키든지 뭔가 행동을 해야 합니다. 자연의 어둠은 기다리면 새벽이 오지만, 역사의 어둠은 결코 그냥 오지 않습니다. 역사의 어둠은 그 어둠을 이기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야만 밝아집니다. 어둠이 덮여오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나 유관순처럼 혹은 독립군처럼 가족도 재산도 목숨도 버릴 수도 없는 일입니다.
단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빛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왜곡된 사랑말고 참사랑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빛이 되는 방법이고 행동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이 처한 삶의 정황이 다양하기에 제가 일일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와 직장과 사회에서 빛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여러분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고, 믿고 계시는 빛이 되는 일, 가만히 있지 마시고, 졸지 말고 그 일을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하지 않고 가만히 있거나 졸고 있으면 어둠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빛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