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여섯째 이야기, 인간만사 새옹지마(2)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5)
[삽화-백소(白笑)]
대학에 들어가서 기독학생회라는 곳에 들어가는 것에서부터 고성호의 ‘인간만사 새옹지마’는 시작되었다. 선배들이 시위를 주동하고 그것 때문에 경찰서라는 곳에 들어가 보고, 별 일 없이 훈방된 것도 그것의 연속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같은 써클 친구 중 거의 절반이 써클을 그만두었다. 심하게 구타를 당한 친구들은 아예 학교를 휴학하고 군대를 가기도 했다. 경찰에 불려가는데 적당히 고통을 당하고 나온다는 것은 좀더 큰 일을 예비하는 것과 같았다. 고성호가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었다.
이듬해에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려졌다. 학교마다 학원민주화추진위라는 것이 생겼다. 거기서 총학생회를 만들기 위한 여러 작업을 했다. 공청회도 했고, 서명도 받았다. 써클들도 연합회라는 것을 만들었고, 과 단위의 학생회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복학 조치도 취해져서 이전에 제적당한 사람들이 학교로 다시 왔다. 그런데 그들 중 상당수는 복학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동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런다고 하였다. 아무튼 학교가 뒤숭숭하였고 뭔가 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장 커다란 변화는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이나 기관원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물론 위장해서 숨어 있기는 하겠지만 이전처럼 공공연하게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학내 집회는 언제든지 가능하였다. 학내 집회를 하다 보니 교외 집회를 추진하게 되었다. 여러 대학이 연합해서 시위를 하였다. 고성호도 그런 시위에 여려 차례 참여하였고, 선배들의 지시에 따라 실무준비를 하기 위해 다른 학교 사람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교외 집회는 보장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기습시위를 하게 되었고, 화염병 등을 준비해서 물리력으로 시위의 자유를 쟁취할 수밖에 없었다.
오광주와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봄에 엠티를 갔을 때 둘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청평이었던 것 같다. 공식행사가 끝나고 떠들썩하게 뒤풀이를 하다가 지쳐갈 때쯤 둘이는 강가로 나갔다. 커다란 돌이 있는 곳을 찾아서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광주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에 치를 떨었고, 우리 현대사의 문제점도 많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술, 담배 따위는 이제 신경도 쓰지 않았다. 본인도 담배는 안 피워도 술은 어느 정도 마셨다. 하지만 여전히 신앙의 문제, 계급의 문제 등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다.
고성호와 오광주가 속해 있던 기독학생회는 몇 명씩 소그룹으로 나뉘어 공부를 했다. 일본어를 공부해서 일본책도 읽었다. 일본어는 얼치기로 공부하는 정도였다. 한자 위주로 읽으면서 그냥 조사나 어미를 붙여서 우리말식으로 읽는 것이었다. 워낙 한자가 많기 때문에 한자만 안다면 그 정도 실력으로도 독해가 가능하였다. 일본책에는 유물론으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많았다. 우리나라 책 중 ‘철학에세이’나 ‘노동의 역사’ 등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사적 유물론으로 인간을 이해하고, 역사를 풀어나갔다. 이런 책을 공부할 때 오광주는 표정이 상당히 어두워졌다.
철학에세이에서는 신은 없다고 두 번이나 말하더라구. 그런 책을 굳이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기독학생회에서 말이야. 나는 솔직히 두려워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고. 성호 너한테만 말이지만, 정신적으로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과 땀 흘리며 일을 하는 사람은 원래 나뉘어 있는 게 신의 뜻이 아닐까? 이런 생각하면 내가 부르주아적으로 생각해서 그런가? 아름다운 음악, 미술, 품위 있는 문화 등이 왜 다 지배계급의 허위로만 치부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우리가 책에서 공부하는 대로 세상이 되면 그게 바람직한 세상일까? 정말 모르겠어.
오광주는 상당히 괴로운 듯 말을 이어갔다. 고성호는 한참동안 듣기만 했다. 신이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내용을 공부할 때는 사실 고성호도 얼마간 당혹스러움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 가져온 생각이 거부되는 데 대한 반발감이나 어색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육체노동에 대한 오광주의 생각에 대해서는 반대로 거부감이 들었다. 고성호는 평생 육체노동을 하면서 살아온 부모님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 우리 부모가 신으로부터 그렇게 살라고 예정된 것이라니. 이런 게 바로 계급의 차이인가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삽화-백소(白笑)]
하지만 그런 이야기로 오광주와 논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함께 할 생각을 이야기하자. 고성호는 그때쯤에는 민중이 곧 하나님이고, 민중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리했다. 그러면 굳이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필요하냐는 생각에 대해서는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신이 있느냐 없느냐 같은 이야기는 굉장히 쓸데없는 논란일 뿐이다.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는 그에 대한 태도가 어떠냐에 따라 혁명적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풍조가 있었다. 하지만 고성호는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로 했다.
신돌석씨는 고성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 노동운동을 하기 시작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었다. 지역의 해고자들을 많이 지원해 주는 수녀원이 있었다. 거기서 운영하는 ‘함께 하는 집’에서 해고자들은 모임도 하고, 교육도 받고, 아예 거기서 숙식을 하기도 했다. 지역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거기를 찾았다. 그런 수녀원의 원장님이 신돌석씨를 불러서 하느님을 믿느냐고 하면서 당시의 풍조가 상당히 우려스럽다고 했었다. 신돌석씨는 개신교 신자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면서 대답을 했다. 당시에 교회는 안 다녔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강철 서신’이라는 것이 돌면서 많은 사람들이 동요하던 때였다. 원장 수녀님의 이야기를 가까운 해고자들한테 했을 때 반응이 엇갈렸다. 반공 반북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조철구는 그런 생각에 반론을 폈다. 신앙은 본인이 선택할 문제이고,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구실을 하느냐를 보아야 한다. 종교인들이 반동적인 경우가 많지만, 역사의 진보를 위해 헌신하고 지원한 종교인도 적지 않다. 종교인들을 무조건 반동으로 규정한다면 우리는 아마 고립되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조철구는 말했었다.
지나고 보니 조철구의 말이 맞았다. 원장 수녀님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뒤에도 노동운동가를 위해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 알았던 많은 목사, 신부, 수녀, 스님 등은 거의 모두 이후에도 노동운동과 함께 했고, 민중운동의 후원자였으며, 통일운동, 인권운동, 환경운동 등에 앞장서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리던 해고자들 중 이후에도 계속 운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은 이런 문제로 논란을 일으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언제든 이런 식의 편향된 사고가 운동에 커다란 해악이 될 수 있다고 신돌석씨는 생각했다.
고성호는 오광주에게 자신은 신앙인으로서 역사를 위해, 민중을 위해 살아갈 거라고 했다. 오광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고성호의 팔짱을 꼈다. 언제든 네 옆에 있을게.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네 옆에 서 있을 거야. 고성호는 아무 대답하지 않고 유난히 많게 느껴지는 강가 밤하늘의 별만 세듯 보았다. 지금도 그날 밤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둘이 나가서 이야기를 한참 하고 오는 것을 보고는 써클 내에서 둘은 사귀는 사이로 거의 인정되었다. 당시는 ‘사귄다’는 말을 남녀교제로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연인이라고 인정되었다고나 할까.
2학기가 되고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날에 맞춰 여러 대학이 연대해서 노동운동과 함께 하는 가두집회가 계획되었다. 고성호는 학교 대표로 다른 학교 사람들과 실무 모임을 여러 차례 가졌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 장소를 덮친 정보경찰에 잡혔다.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끌려갔다. 구타는 기본이었고, 물고문도 당했다. 하지만 고문을 당해도 별로 댈 게 없었다. 고성호가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이 다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보다 학내 조직을 캐려고 하는 듯했다. 괴로웠다. 그때 오광주 생각이 났다. 광주를 불어도 별 일 없지 않을까?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고문이 중지되고 풀려났다. 아버지, 어머니가 데리러 왔다. 그 뒤에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아버지, 어머니도 말하지 말라고 각서를 썼다면서 말해주지 않았다. 많이 알려진 고문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학교에서 강제 휴학이 됐고, 군대에 가야 한다고 했단다. 아버지, 어머니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했다. 이번 기회에 군대 갔다 오고 이제 그런 데는 발을 끊으라고 하였다. 고성호는 착잡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도 모른 채 이렇게 군대로 간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같았다.
집에 며칠 있다가 부모님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학교로 갔다. 써클 방에는 가기가 그래서 좀 떨어진 곳 술집에서 친구를 만났다. 짭새들이 여러 사람을 추적하고 있단다. 연합조직을 조작하려고 한다고 들었단다. 고성호는 아마 2학년이라서 나온 것 같지만 좀 이상하기는 하단다. 그러면서 오광주를 조심하란다. 아버지가 안기부 고위직이란다. 그 애도 연행되었는데 바로 나왔단다. 상당히 협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뭔가 심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문당할 때보다 더 아픈 통증이 가슴을 후벼 팠다.
[삽화-백소(白笑)]
고성호는 며칠 뒤 군대에 갔다. 오광주를 찾아서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결국 부르주아는 부르주아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군대 가서 마음 다잡고 제대하면 현장에 들어가자 하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학생운동은 이로써 끝난 것이라고 생각하니 홀가분하면서도 허전하였다. 제적이 아니라서 그런지 교련 이수는 인정되었다. 2개월 단축된 기간을 보내고 제대한 것이 1987년이었다. 복학을 하니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년 후배들이 4학년이 되어 있었는데 이상하게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복학 하고 써클 방에 한번 갔다가 아는 사람도 없고, 별로 환대도 안 하는 것 같아서 더는 가지 않았다. 광주는 무얼할까 궁금했다. 아마 졸업을 했을 텐데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었다. 그러다가 1년 후배 중에 재수를 해서 광주와 고교 동기인 사람을 우연히 마주쳤다. 고성호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카페에 마주 앉았다. 그 친구 말로는 광주는 미국에 갔단다. 그리고 해주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자기 아버지한테 고성호를 풀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 대신 다시 안 만나는 조건으로 미국에 간 것이란다.
그래서 갑자기 풀려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그 뒤로는 현장에 가기 위한 준비를 하려는 마음만 먹었다. 그런데 그것도 잘 안 됐다. 써클 선후배들이 모두 피했다. 녹화사업이 한창이었던 때 군대를 갔다 와서 그런지 프락치 공작 의심을 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광주와 연인으로 이야기됐으니 의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학업을 계속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 대학원에 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마침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집에 경제적 도움이 절실해지기도 했다. 결국 취직을 한 것이 한참 동안 일하게 되는 내의 제조하는 회사였다.
회사에서 고성호는 꽤 인정을 받았다. 자수성가한 창업주의 비서가 되어 회사의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역할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회사내 기밀도 많이 알게 되었고, 사업을 보는 눈도 꽤 넓어졌다. 그러던 차에 회사내에서 노조를 만드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사무직 노조였는데 주도하는 사람이 이전 연합시위할 때 보곤 하던 친구였다. 그것을 와해시킬 공작을 회사 기획실에서 추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고성호는 그 친구를 만나서 정보를 알려 주고 노조에 가입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노조 결성식을 하였다.
그때는 사무직 노조가 넥타이부대로 왕성할 때였다. 우후죽순으로 만들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자수성가한 창업주는 노조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다. 주도한 사람 둘이 해고되었다. 그리고 회사의 강압 때문에 조합원이 하나 둘 탈퇴하면서 노조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회사는 어용노조로 대체하려고 했다. 당시는 아직 복수노조가 인정되지 않을 때라서 따로 노조를 만들지는 못했다. 결국 위원장 등 간부를 회사측 사람으로 채우려고 했다. 어느 날 회장이 고성호를 불렀다. 그리고 제안한 것이 어용노조의 위원장을 하라는 것이었다.
고성호는 회장 개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고운 정 미운 정도 많이 들었다. 함께 해외도 나가고 국내도 이곳저곳을 다닐 정도로 가까웠다. 어쨌든 이 정도 자수성가한 사람이면 뭔가 남다른 데가 있다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회장은 고성호가 노조에 가입한 것을 알고는 그야말로 격노했었다.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냐는 식이었다. 이제 새로이 기회를 줄 테니 자기와 손잡고 해보자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고성호가 그걸 받을 수는 없었다. 안 되겠다고 했다. 그 길로 고성호는 부산으로 전출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 가니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고성호는 거기서 노조 민주화를 생각했다. 학생운동도 하다가 중단되고 현장도 가고 싶었지만 못 갔으니 이제라도 노동운동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산에서 근무하면서 이곳저곳을 다녔다. 노조 만들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을 다시 규합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차에 써클 친구를 통해서 오광주의 연락을 받았다. 부산 해운대에 와 있단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설레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냉정해지자는 생각이 더 많이 마음을 지배했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