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나날이 찬미 받으소서.
우리 위하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
(시편68,20).
“찬미 받으소서”라는 형식은 찬양 시편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표현이다(시편103,1;117,1참조).이로써 하느님은 공동체의 찬미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임이 확인된다.“나날이”도 전형적인 찬미의 표현과 함께 쓰이는 용어다.
여기서 하느님은 ‘짐꾼’에 비유된다.이사야서에서도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지고 가시는 분으로 나온다(이사46,3-4참조).하느님께 업혀가는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신(상)들을 지고 가야 하는 바빌론 사람들과 대조를 이룬다(46,7참조).하느님은 백성을 지고 가심으로써 위기 가운데 있는 그들을 구원하신다.그래서 시인의 공동체는 주님을 구세주로 인식한다.주님은 백성의 희망의 원천이고,그들에게 매정하거나 무관심하며 엄격한 임금이 아니시다.“우리를 위하여 짐을 지시는 하느님”의 모습은“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난다.
시편 68편의전체적 의미:시편 68편은 여러 전승이 혼합되어 주제상 연결이 약해 보이고 하느님의 모습도 다양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시인은 찬양받으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준다.첫째로 하느님은 고아들,과부들,외로운 이들,사로잡힌 이들의 편이 되어주신다.하느님은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변호해 주는 분이시다.불쌍하고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를 보살피는 하느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요 과부들의 보호자이시다(6절).또한 하느님은 외로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사로잡힌 이들을 행복으로 이끌어 내는 분이시다(7절).둘째로 하느님은 비를 주시어 땅을 경작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풍요롭게 베푸는분이시다(10-11절).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호의를 베푸신다.셋째로 하느님은 전쟁 때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는 분이시다.하느님이 나가 실 때 땅이 흔들리고(8-9절)군대를 이끈 임금들이 도망가니 규중 여인들도 전리품을 나눈다(12-13절).하느님은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주고 전쟁을 좋아하는 백성들을 흩어버리신다(31절).넷째로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짐을 지는 분이시다(20절).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고 그들에게 권능과 힘을 주신다(36절).이런 하느님이시기에 오늘날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수고하고 계심에 대해 우리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독서를 구약성경 주해 23-2 시편42-89편/바오로딸)
Ⅶ.예수님의 눈길
96.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성경의 신앙을 받아들이시면서 근본적인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곧 하느님께서 아버지시라는 진리입니다(마태11,25참조).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면서,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과 아버지로서 맺으신 관계를 깨달으라고 권유하시며,하느님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감동적인 온유함으로 상기시켜 주셨습니다.“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루카12,6).“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주신다”(마태6,26).
97. 주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다른 이들에게 권유하실 수 있었습니다.주님께서는 언제나 자연과 관계를 이루시면서 큰 사랑과 경탄으로 자연에 관심을 기울이셨기 때문입니다.당신께서 사시던 지역의 구석구석을 다니시다가 잠시 머무시면서 당신의 아버지께서 심어 놓으신 아름다움을 음미하시고는,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메시지를 이해하도록 당신 제자들에게 권유하셨습니다.“눈을 들어 저 밭을 보아라.곡식이 다 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요한4,35).“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겨자씨는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자라면 어떤 풀보다도 커져 나무가 된다”(마태13,31-32).
98.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기에 다른 이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8,27)그분께서는 세상과 떨어져 사는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하지도 않으시고 삶의 즐거운 면을 적대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보라,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하고 말한다”(마태11,19참조).예수님께서는 육신과 물질과 세상 현실을 경멸하는 사상들과는 매우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그럼에도 그러한 불건전한 이원론은 역사를 통하여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 복음마저 왜곡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에 당신 손으로 날마다 장인의 기술을 발휘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일,전혀 경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일로 보내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마르6,3)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시어 우리가 성숙하는 데에 노동이 특별한 가치가 있도록 하셨습니다.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 냄으로써,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
99.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에 따르면,한 처음부터 계셨던 그리스도의 신비에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1,16).요한 복음의 머리글(1,1-18)은 그리스도의 창조 활동이 하느님의 말씀logos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그러나 이 머리글은 놀랍게도 이 말씀이“사람이 되셨다.”(요한1,14)라고 말합니다.삼위일체의 한 위격께서는 피조 세계에 오셔서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운명을 이 세상과 함께하셨습니다.그리스도의 신비는 세상의 시작에서부터,특히 강생을 통하여 자연계 전체에서 감추어진 방식으로 이루어져 자연계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100.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과,예수님께서 이 세상과 맺으신 구체적인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영광스럽게 되시어 당신의 보편적 주권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도 보여 줍니다.“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1,19-20).이는 성자께서 만물을 성부께 데려가실 때,세상의 마지막 때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그렇게“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것입니다”(1코린15,28).이리하여 이 세상의 피조물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의 형태로만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습니다.부활하신 분께서 이 모든 피조물을 신비롭게 간직하시며 그들의 목적인 충만으로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셨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개정판)
“마르틴 루터도 기독교 신앙을 사탄과의 싸움으로 보고 마녀 사냥의 정당성을 확신한 사람이었다.비록 대다수 종교개혁자가 새로운 신 개념을 제시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종교개혁이 당시 유럽인의 사탄 세력에 대한 불안감 해소를 위해 감행한 하나의 시도였음을 알아야 한다.사실 16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 변화의 거대한 물결을 그저‘종교개혁’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화된 생각이다.
당시의 종교 변화의 물결은 개혁이란 말이 함축하는 것보다 더 심대하고 광범위한 사건과 내용들을 담고 있다.가톨릭과 프레테스탄트 개혁 사상가 모두 그들에게 밀닥친 새로운 종교 의식을 명료히 표현하고자 노력했으나,어느 누구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사실 왜 당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지가 추정하듯 교회의 타락 때문도 아니었고,종교적 열정의 쇠퇴에 대한 위기 의식 때문도 아니었다.다만 서구 유럽 사회를 현대주의 문턱으로 끌어당긴 거대한 종교 변화의 물결은 기존 종교 세력의 타락에 눈을 뜬 새로운 종교적 열정의 비판 의식, 개혁 사상가들에게 끼친 중세 가톨릭 신학의 영향,독일과 스위스에서 시작된 민족주의와 도시 사회의 등장,16세기에 일어난 일반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각성과 새로운 경건주의 신앙의 수용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시 유럽인들의 종교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개인주의 사고와 내면적 진리의 추구 등에 기인했던 것으로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의 역사Ⅱ 494-495쪽/카렌 암스트롱 著/동연)
하루 종일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내 눈과
내 귀는 오직 당신이 오실
그 길로 열어졌습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하루/김용택)
늘 행복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