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선박회사 운영하다 6ㆍ25전쟁 겪어
후광 김대중 평전/[3장] 사업과 정치활동 그리고 6·25전쟁 2009/07/18 08:00 김삼웅김대중은 이 무렵 회사의 관리문제로 서울에 올라가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을 방문하여 회사관리권이 서울 거주 강 모씨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강씨를 만나 모든 선원을 그대로 고용하겠다는 안을 제시받았다. 회사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 방안을 놓고 사원들과 협의했으나 좌익동맹에 가입한 선원들이 반대하고 자치를 주장하면서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
해방공간은 어수선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안을 둘러싸고 정파 사이에 찬반탁으로 갈리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론으로 우익 노선 사이에서도 점차 간극이 벌어졌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대구항쟁 이후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20일간 경찰서에 유치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김대중의 파란많은 투옥ㆍ연행ㆍ연금의 역사에서 이 때가 두 번째의 투옥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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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정치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데다, 해방공간은 크게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정치적인 계절’이었다. 36년 동안 일제의 압제에 묶여 있다가 해방된 한민족은 자유를 만끽하면서 너도나도 정치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친미와 친소, 애국자와 친일파 등으로 갈려 좌충우돌하는 정치판은 부정적으로 보면 분열이고 혼란상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새나라를 세우기 위한 진통이었다. 뜻 있는 청년이라면 방구석에만 앉아 있을 수 없는 격동기, 젊음의 혈기가 요구되는 시대였다.
김대중은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연안운행의 화물선 1척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의 경험을 살려 선택한 해운사업이었다. 사업관계상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의 장교들과 자주 접촉을 갖게 되고, 이것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국내 정치상황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급속히 힘을 발휘하고, 김구ㆍ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위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김대중에게도 경사와 불상사가 겹쳤다. 1948년 1월 21일 장남 홍일이 태어났다. 결혼 3년만에 태어난 첫 아들은 젊은 부부에게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친구 형의 부탁으로 그의 상경 여비를 도와주었는데, 그가 좌익활동을 이유로 구속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김대중은 자금제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수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즈음 목포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중위는 6ㆍ25전쟁 때 전사하고, 박소위는 해병소장으로 승진하고 예편하여 뒷날 김대중대통령후보 비서실 차장에 임명되었다.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는 김대중 관련 오래된 자료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1948년 5월 25일자로 된 서재필 박사에게 드리는 요청서이다.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고 곧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3천만의 우리 겨레가 가장 존경하는 노혁명가이신 서재필 선생의 건강을 축복하옵고 량하야 선생에게 우리의 간곡한 요청을 드리나이다” 로 시작된‘요청서’는, 근대 조국의 선각자로서 이제 조국강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었으며 민생이 절망에 빠져있으니, 국난극복을 위해 선생께서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나서달라는 내용이다.
말미에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선생을 추대하옵고 선생의 뒤를 따르고저 맹세하나이다.” 로 되어 있다. 소속 정당단체는 ‘민주독립당 김대중’으로 쓰여 있다. 인쇄된 용지에 많은 인사들이 서명한 것으로 보아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 김대중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여, 그가 정부수립 과정에서 서재필 추대에 나섰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김대중은 1949년 봄 해방 뒤 부산에서 건립된 건국대학교(동아대와 합병) 정치과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대학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1950년 초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체가 조직되어 김대중은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운사업이 번창해졌다. 전국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계약하고 있던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 계약이 이루어진 것이 사업 번창의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월 15일이면 6ㆍ25전쟁 발발 열흘 전이다.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이날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했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6·25전쟁이 터졌다.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고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발발 4일 째인 6월 28일 미명, 나는 여전히 서울의 여관방에서 잠을 자다가 밖이 소란스러운 바람에 잠이 깼다. 서울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이 길거리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여관 일대는 삽시간에 혼잡스런 소란에 뒤덮였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이 내가 묶고 있던 여관 근방까지 나타났다. 나는 그제야 사태를 바르게 볼 수 있었다. 당장 서울을 떠나 피난을 해야 할 텐데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고 없었다. 나룻배라도 한 척 구해보면 어떨까 하는 궁리도 했지만 내 수중에는 이미 그럴만한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선은 나하고는 상관없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군사 용어를 빌리자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뜻하지 않게 여관 근처 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한복판에 남자 하나가 끌려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산당의 지도자로 보이는 남자가 그 앞에서 목청을 높였다.
“그러니 이 반동분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러자 선소리에 맞춰 후렴이라도 합창하듯 거기 모여 선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처형하시오!”
재판은 그걸로 끝이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그 남자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는 몰래 숨어서 그걸 지켜보다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석 4)
주석
4) 김대중, 앞의 책, 66~67쪽.
해방공간은 어수선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안을 둘러싸고 정파 사이에 찬반탁으로 갈리고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론으로 우익 노선 사이에서도 점차 간극이 벌어졌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났다. 대구항쟁 이후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20일간 경찰서에 유치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김대중의 파란많은 투옥ㆍ연행ㆍ연금의 역사에서 이 때가 두 번째의 투옥이라 할 수 있겠다.
정치 입문기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이 장인의 권고에 따라 한민당 목포지부에 입당하여 시당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것은 1947년 중반기였다. 김대중은 20대 초반에 건준과 조선신민당에 이어 한민당에 입당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지향성을 보였다.어려서부터 정치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데다, 해방공간은 크게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대단히 ‘정치적인 계절’이었다. 36년 동안 일제의 압제에 묶여 있다가 해방된 한민족은 자유를 만끽하면서 너도나도 정치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친미와 친소, 애국자와 친일파 등으로 갈려 좌충우돌하는 정치판은 부정적으로 보면 분열이고 혼란상이지만,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새나라를 세우기 위한 진통이었다. 뜻 있는 청년이라면 방구석에만 앉아 있을 수 없는 격동기, 젊음의 혈기가 요구되는 시대였다.
김대중은 한민당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연안운행의 화물선 1척을 구입하여 해운업을 시작하였다.
앞서 일했던 선박회사의 경험을 살려 선택한 해운사업이었다. 사업관계상 해안경비대 목포기지 사령부의 장교들과 자주 접촉을 갖게 되고, 이것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상 방위대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국내 정치상황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47년 7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급속히 힘을 발휘하고, 김구ㆍ김규식의 남북협상론은 위축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가 실시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김대중에게도 경사와 불상사가 겹쳤다. 1948년 1월 21일 장남 홍일이 태어났다. 결혼 3년만에 태어난 첫 아들은 젊은 부부에게 큰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친구 형의 부탁으로 그의 상경 여비를 도와주었는데, 그가 좌익활동을 이유로 구속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김대중은 자금제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해군 목포경비부대 정보대장 오세동 중위와 헌병대장 박성철 소위의 신원보증으로 수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즈음 목포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중위는 6ㆍ25전쟁 때 전사하고, 박소위는 해병소장으로 승진하고 예편하여 뒷날 김대중대통령후보 비서실 차장에 임명되었다.
현재 천안 독립기념관에는 김대중 관련 오래된 자료 하나가 보존되어 있다.
1948년 5월 25일자로 된 서재필 박사에게 드리는 요청서이다. 5ㆍ10 총선거가 실시되고 곧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3천만의 우리 겨레가 가장 존경하는 노혁명가이신 서재필 선생의 건강을 축복하옵고 량하야 선생에게 우리의 간곡한 요청을 드리나이다” 로 시작된‘요청서’는, 근대 조국의 선각자로서 이제 조국강토가 분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었으며 민생이 절망에 빠져있으니, 국난극복을 위해 선생께서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나서달라는 내용이다.
말미에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선생을 추대하옵고 선생의 뒤를 따르고저 맹세하나이다.” 로 되어 있다. 소속 정당단체는 ‘민주독립당 김대중’으로 쓰여 있다. 인쇄된 용지에 많은 인사들이 서명한 것으로 보아 서재필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 위해 조직적인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관련 김대중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여, 그가 정부수립 과정에서 서재필 추대에 나섰는지 여부는 명확하지 않다.
김대중은 1949년 봄 해방 뒤 부산에서 건립된 건국대학교(동아대와 합병) 정치과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전쟁으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대학과는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1950년 초 대한청년단 목포해상단체가 조직되어 김대중은 부단장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는 동안 해운사업이 번창해졌다. 전국 양곡 연안수송을 일괄 계약하고 있던 서울 소재 조선상선주식회사의 목포지구 수송을 전담하는 하청 계약이 이루어진 것이 사업 번창의 계기가 되었다.
1950년 6월 15일이면 6ㆍ25전쟁 발발 열흘 전이다.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김대중은 이날 회사 목포출장소장 한도원과 양곡 수송 운임을 수령하기 위해 상경했다. 서울에 머물러 있는 동안 6·25전쟁이 터졌다. 경기여고 뒤쪽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고 공산치하의 서울에서 인민재판의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보게 되었다.
발발 4일 째인 6월 28일 미명, 나는 여전히 서울의 여관방에서 잠을 자다가 밖이 소란스러운 바람에 잠이 깼다. 서울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이 길거리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여관 일대는 삽시간에 혼잡스런 소란에 뒤덮였다.
이윽고 날이 밝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인민군이 내가 묶고 있던 여관 근방까지 나타났다. 나는 그제야 사태를 바르게 볼 수 있었다. 당장 서울을 떠나 피난을 해야 할 텐데 한강 다리는 이미 폭파되고 없었다. 나룻배라도 한 척 구해보면 어떨까 하는 궁리도 했지만 내 수중에는 이미 그럴만한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전선은 나하고는 상관없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군사 용어를 빌리자면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
그런 어느 날 나는 뜻하지 않게 여관 근처 한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을 목격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한복판에 남자 하나가 끌려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공산당의 지도자로 보이는 남자가 그 앞에서 목청을 높였다.
“그러니 이 반동분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러자 선소리에 맞춰 후렴이라도 합창하듯 거기 모여 선 사람들이 일제히 외쳤다.
“처형하시오!”
재판은 그걸로 끝이었다. 몇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그 남자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나는 몰래 숨어서 그걸 지켜보다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주석 4)
주석
4) 김대중, 앞의 책, 66~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