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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율곡마을 정립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2020. 12.5, 05;00 平昌歷史硏究者 高 柱 浩
2020. 12. 3일 평창군 용평면 사무소 2층 대회의실에서 “평창 율곡마을 역사정립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코로라 관계로 외부인 방청없이 발표자와 관계자 10여명으로만 진행하여 낯 싱거운 점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코로라의 여파로 지역주민등 참관자는 50여명 이하로 제한하기에 50여명이 참관한다고 이 문화제가 활짝 꽃 피는 상태는 아니다,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리어지고 또한 이 문화제의 칼라가 어떤 색인가를 창출해야되는 매우 중요한 관건사항으로 앞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참석자가 없는 것이나 50여명 참석한다고 하는 것이나 이것으로 충족상태라고는 볼 수 없으며 우선은 취지문의 본인의 논문의 근본적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간 평창문화원에서 실시한 몇 번의 판관대 세미나에 잉태지 설화가 주제어가 되어 이를 조명하기엔 판관대 본연의 역사가 아니고 잉태지라 함은 다만 판관대의 역사에 빗대어 생겨난 설화이기에 이것으로만 판관대 역사를 도출하기엔 역부족이었고 또한 이 세미나들에 참가한 연구자인 박도식, 장정용 교수는 강릉대와 관동대 출신의 교수들로 남을 감찰하는 것은 아니지만 장교수는 관동대 출신에 박교수는 공고 출신으로 많은 노력으로 교수직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그려지는바 그들이 강릉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슬 것이다.
그것은 강릉에 소재해 있는 오죽헌이 여러 사료들이 역사적 증거도 없는 것도 많으며 율곡연구회의 이야기 속에는 서로 상반되어 자체적 모순에 빠지는 논지도 있지만 이것을 밝히어 판관대를 새롭게 조명해야 함에도 과연 이 두 학자는 이러한 사안에 있어서 이를 바로 세우기엔 강릉에서 교수직을 하는 편견이 따랐다고 보는 것은 필자의 억지 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 하나의 예로 박도식 교수는 모든 것을 몽땅 졎혀두고 신사임당은 결혼에서 서울로 이사가기까지고 삼년상을 치르는 만 2년과 백옥포리 판관대 신혼산림의 18년기간 합이 20년을 아예 오죽헌에서 살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4년간 판관대에서 살았다 하기도 하는 황설수설의 이론으로 평창에서 세미나 하는데 이런 세미나에서도 평창으로선 비용을 주었슬 것이기에 평창에 눈삔돈 만다는 소문은 바로 이런것들 아닌가 합니다. 돈주고 뺨맞고,,,
하지만 지방민들의 세미나에서는 아직 처음이라 그런지 예산도 부족하여 세미나의 이론서인 책자도 프린트하여서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았다. 하지만 50명이 참석하든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판관대의 역사를 바로 규명하는 본인의 논문을 위주로 하는 책자는 앞으로 재 발간되어 여러사람이 함깨 읽어 판관대의 존재이유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함께 해야 한다 물론 본인의 글은 80여 패이지에 9~10만자 쯤으로 읽기는 어려우나 이번 세미나에 참가해주신 세분의 학자님들의 공통된 이야기로 저의 블로그에서 판관대의 바른 이해란 글을 보며 이는 바른 역사이기에 연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또는 보존해야할 부분도 있다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율곡이 지은 선비행장에 지금까지 모든 학자들이 평안도라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의 바른 해석인듯하며 보존이란 국가 데이터 베이스에 수록등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잎으로 본인의 논문은 여러 학자들의 신사임당, 율곡의 연구에 인용되어 판관대를 바로 알려야 하는 필요도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금 초라하게 프린트 몇군으로 나누어 보지만 판관대의 자료서적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오죽헌이나 그외의 학자님들이 이에 논지에 반한다면 댓글을 부탁드리며 언제든지 이해의 답변서나 한점의 논쟁도 하여드리겠습니다.
과연 외부의 학자들만으로 판관대에 역사를 조명하기엔 평창적 이해가 덜 하기에 역부족이었고 지금껏 지방민들의 판관대 유적 조명이 숙원사업이었지만 지방민들 스스로는 판관대를 역사의 장으로 세우지 못하였다.
이제 필자는 평창출신자로서 두고 떠난 고향의 그리움속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저의 평창 역사글 2~3백만자 모두가 그러하듯 판관대가 신사임당의 반평생 살림집이었고 율곡 이이에겐 여섯살 까지 뛰놀던 고향이었다는 사실로 판관대의 바른 평창역사를 정립하였으며 지방민들과 함께 12월 3일 용평면사무소 대 회의실에서 판관대 문화창출의 시작을 알리는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제 평창군 용평면 백옥포리의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결혼후 거처한 살림집으로서 후일 한성으로 이사할때까지 18년간의 반평생을 살아온 곳으로 결혼 12년차에 율곡을 잉태하였으며, 율곡은 부모님을 따라 한성으로 오를때까지 여섯 살때까지 살은 고향으로서 이제 잉태지라는 설화적 내용을 넘어서 이곳 판관대는 율곡과 신사임당의 본가라는 점으로 이제 대한민국이 존경해야 하는 율곡 이이선생의 고향마을이란 역사 유적지로서 새롭게 창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판관대의 바른 역사 조명을 위해 멀리까지 찾아오셔서 저의 논문을 칭찬해주시고 세미나에 판관대의 미래가 밝은 연구발표를 해주신 한국외국어 대학교의 박치완, 이영미 교수님. 그리고 강병수 하빈 연구소장님(전 중앙학연구원 정책실장)님에게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상 마칩니다.
(율곡의 사패지에 관해서 앞으로의 연구방향)
이곳 판관대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을 잉태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고, 이로서 현종은 사방 5리의 사패지를 하사하였습니다.(1655년, 임인년)
이 사패지는 이번 저의 논문에 준비에서 평창군민 신문이 1916년 일제식민시대에 토지조사부 정보공개 신청하여 밝혀진 백옥포리 212번지외 123개 번지에 총 50,830평의 토지가 당시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 (현 오죽현)의 권영달씨 소유로 밝혀졌다.
이는"이씨 분재기"에 신사임당의 어머니 용인 이씨는 율곡 이이에게는 제사를 지내는 봉사조로 재산을 분배하였으며, 오죽헌 묘에 벌초를 하는 봉사조로 대릴사위인 넷째딸의 부군 권화의 아들 권처균에게는 배사조로 오죽현을 물려었기에 이후 오죽헌은 안동 권씨의 소유로 내려왔기 때문에 토지대장에 소유주는 권영달로 되어 있다..
(* 권화가 데릴사위라는 점은 율곡 이이선생이 지은 권화의 묘비문인 『습독관 권공 권공 묘지명(習讀官權公墓誌銘)』 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술외 역주, 국역 율곡전서 (Ⅶ) 296쪽)
이러한 5만여 평의 방대한 토지는 당시 오죽헌의 이씨분재기에 의한 오죽헌의 모든 재산의 합한 것을 넘는 것으로 사패지임이 증명된다.
이후 일제 식민시대에 우리나라 토지 측량에 처음으로 지번을 갖게 돠었던바 곧바로 5만여평의 토지가 사기로 매매되자 법원에 소송비용으로 강릉의 동척회사란 금고에서 소송비용을 빌려 썼던바 이후 대금반납의 사유로토지는 넘어갔다고 한다, 일제 식민시대에 이와 유사한 소송사건은 정몽주의 사패지에서도(용인 모현면에 충렬서당) 현 분당 뒷산 태전리일대의 960만평 현재로는 수천억원의 땅을 사패지로 하사받았는데 일제 강점기에 연암 이씨네 문중 "고려 문신" 이석형"의 관계로 15년 송사가 있었는바 연일 정씨인 필자의 지인의 증조부님이 땅을 팔아서 송사비용을 마련하였던바 이 땅은 지금 거의 1조원대에 육박하는 땅으로 그 기록은 당시 서울서 재판하였지만 아마 충주지방법원에 보관되고 있다고 하는 바 판관대의 사패지도 지금 법원에 그 기록이 보존키는 희박하겠지만 그 기록이 남아 있다면 당시의 재판의 기록으로 권씨가문과 오죽헌쪽 입장에서 판관대의 사패지란 점의 진술등으로 사패지 확인방법도 연구가 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시 법원 소송에 거의 1조원대의 땅이나 판관대의 5만평 땅이 소송비용이라는데 당시로서는 땅값이 비지 값이었겠지만 한편으론 법이란게 어마어마한,,, 그래서 우리나라엔 법관을 제일로 치는 인식이 잡혔는지도 모를일,,
오죽헌의 연구회의(전신 율곡학회)의 신사임당 연보에서도 사료적으로도 정확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이러한 율곡연구회의 신사임당 연보에서 하나의 주장에 상반되는 욕심도 나타내고 있다.
그 예의 하나로 신사임당은 결혼하고 서울에 올라가 시어머니 홍씨에게 상련례를 치렀다한다. 그리고 부친 신명화공이 돌아가시자 강릉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한다. 또한 맏아들 선은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하면 삼년상 만 2년 사이에 위배되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지금 신사임당과 율곡의 생애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료도 없는데 많은 이야기가 바르지 못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오죽헌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만 모두 발췌하여 본인의 이해력을 피력할 것입니다.
(잉태지를 이해하기 위한 사고의 전환)
잉태지에 대한 논고는 개인적 주관에 의한 글임을 고지하며 서술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에 대해서 몰입하며 따져 볼 수 있지만 좀 더 시각을 넓혀서 이해도 필요합니다.
필자의 세미나 연설문에서 우리는 이순신,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등 무인들만 위인으로 모시는 경향에 이러한 문제는 아산 현충사에다가 이순신을 성웅으로 부각시키자 사람들의 사고는 고정되며 을지문덕등 무인들만 위인이라 생각하게 되며 또한 이에 작용으로 70년대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며 드라마에 무신들의 스토리가 흥행되며 사람들은 위인상에 알반적인 전체를 찾아보지 못하고 무인이라는 국수적인 편향으로 지향하게 됩니다. 즉 이순신의 성역화에 누가 위인이라고 제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로 한 발 더 나아가 무인들만 위인으로 모시는 단편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편향적 생각에서 사고적 전환은 있어야 한다. 그 점은 마치 인상주의, 낭만주의등의 사조(ism)는 그러한 프레임 구조 안의 생각의 고착화를 벗어나 사고와 사유의 다른 해방구를 찾는 방법적 모색을 가져오는 것으로 그 하나의 예로 중세말 렘브란트는 궁정화가로서 왕으로부터 다음 연회때까지 왕비와 왕이 함께 있는 그림을 그려오라는 명령을 받고서 연회장에 들고 간 그림은 왕과 왕비의 인물이 빠진 자연의 풍경만의 있는 그림이였다. 이때까지 그러한 풍경화는 그림으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있슬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의 대노에 렘브란트는 궁정화가에서 쫒겨나고 밥을 굷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까지 모든 그림은 인물이 메인이였고 풍경은 배경의 장식으로만 존재하였는데 렘브란트 사건 후 자연의 풍경으로만도 그림이 될 수 있구나하고 하고 사람들의 사고의 인식력이 더 넓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지금까지의 인식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이즘에 의해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 두가지 예에서 보듯 우리는 현재로서의 인식력만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역사에 오류를 만들 수 있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그렇듯 판관대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오류를 지적하면 여러학자들의 보편적 기록에 하나로 백옥포리 판관대는 강릉에서 서울을 다니기에 중간에 쉬었다 가는 장소로 생각하는바 이는 현재에 영동고속도로 장평 톨게이트에서 2km 정도에 판관대가 위치하기에 중간거점으로 보는 듯 하나 이것은 역사는 과거의 시점으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하나 현재의 시점으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면 본인의 발표 글에서 옛날에 김홍도의 금강사군첩를 인용하여 관동대로의 평창구간의 코스를 밝힌바로는 대화 신리에서 모릿재를 넘어 청심대를 거쳐 진부 길이라 밝히고 있다.
그러면 진부나 대화어디에서도 봉평은 오십여리 먼 외지마을로 강릉서 한양길이 600여리에 강릉서 봉평까지 이백여리 오르고 쉬기위해 왕복 백리길의 봉평 백옥포리로 들어간다면 이는 뭔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표현이다.. 이러한 문제는 학자들이 역사를 과거의 시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오늘의 환경등이 자연히 묻어서 역사적 규명을 그르친 결과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의 환경을 극히 절제하고 과거의 환경을 유추해서 서술해야 한다. 1872년 평창군 오면지도에서 보면 평창에서 정선을 넘는 성마령은 대로라고 표시되어 있지만 대관령은 가마도 겨우 넘는 중로(中路)로 표기하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는 육로가 발달치 않은 상황에 조선시대에는 수군이 육군보다 더 많았다. 그러기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널 때 수심이 조금 깊으면 아녀자들은 멀리 돌아가야 하는 이러한 환경까지 고려하여야 한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않는 상황까지도 그 옛날로 돌아가 이해하며 역사를 조명하여야 바른 역사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잉태지라는 본인의 해석이 요즘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주관적인 면도 있으나 이해 고찰에는 요즘의 우리생각의 인식을 절제하고 사유의 한계의 고정적 관념의 벽을 넘어서 잉태지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해와 인식의 사고의 전환을 가져야 한다는 설명을 하였으며 아래 장에서는 잉태지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를 피력합니다.
(잉태지란 용어는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슬까??)
우리는 임신을 하는 것을 잉태라고 한다. 그러나 윗 장에서 하나의 이해를 위해서는 일상의 고정관념을 넘어서 사고적 전환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였듯이 이 장에서 잉태에 관한 이해로 우리의 일상에 대한 사고는 어떠한 축에의한 한계점이 있기에 이를 넘어서서 새로운 생각으로 돌아가 잉태의 이해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율곡 사후 7~80년후 현종은 율곡의 이야기를 듣고 판관대가 율곡의 잉태지라고 무려 5만여평의 사패지를 하사한다. 물론 사패지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인물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땅이다. 그런데 율곡 이이에게는 판관대에서 잉태하였다고 하며 백옥포리 판관대에 사패지를 내려 주었다. 그러나 탄생지라는 오죽헌은 사패지를 같이 받았어야 무방할텐데 오죽헌엔 사패지를 내리주지 않았다. 그러면 현종은 탄생지도 잉태지와 똑같이 사패지를 내려주었어야 할 것이니 잉태지 이야기를 들을때 탄생지가 어디인지 몰랐다면 다시 알아 오도록하게나 하고 명령을 내렸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에 잉태지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옳은 이해인가??
우리의 사고력에서는 잉태라면 출생이 동반되는 사고로 생각한다. 하지만 잉태와 출생이란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 상대어가 아니라 잉태 그 자체가 하늘에 점지한 출생 즉 생명체로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출생지에서의 출생은 의미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 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관점의 설명을 합니다.
현재로서는 아이를 낳으면 출생신고로 호적에 태어난 날을 기재하며, 태어난 날을 생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출생때 하늘의 정기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동양 사상 즉, 인간도 자연의 귀속체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잉태, 그 자체가 생명의 기원이기에 하늘의 정기를 받는다는 믿음을 가지기에 율곡을 오죽헌에서 출생했다는 것에 출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용꿈을 꾼 것도 출생을 원만하게 치르는 정도의 이해이지 그 용꿈 자체가 하늘의 기운을 받은 것은 아니란 이해이다. 물론 오죽헌에서 신 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 이이를 출산한 기록도 없거니와 또한 만약 판관대에서 출생하였다 하여도 이는 잉태가 하늘이 내리는 출생이고 태어난 날은 출산일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현재의 사고의 개념을 전환시켜볼때 원초적 이해로 이러한 설명이 잉태의 개념이 필자가 주장하는 잉태란 단어의 해석이다.
그러기에 현종은 판관대는 율곡의 잉태지인 하늘이 점지한 고향으로 사패지를 내려주고 이로서 제향을 하고 받들게 되지만 당시에는 잉태지가 출생이란 개념이기에 오죽헌은 출생지라 하는 점은 후일 비약시켯다는 것이 본인의 이해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서서 이해할 수 있는 필자의 주관적 견해임을 전제로 합니다.
이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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