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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사무침의 시 . 설렘의 노래 (2)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박목월
부처님의 향훈이 밴 우리말 불교시들을 훑어 내려가며 가까스로 민족 해방의 문턱에 들어서려는 찰나, 자칫 문 닫고 나설 뻔했던 이민족 핍박의 헛간을 되돌아보니 서로를 노려보는 푸른 넋인 양 몸의 테두리가 어슴푸레함 속에 이지러져 버린 잿빛 고양이들처럼 눈들만 저만치 살아 구석에 떠 있다. 그렇다. 그것은 암컷의 눈, 차마 지울 수도 없고 스스로 감지도 못하는 여자의 눈들이다.
여자는 하늘을 받치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러니 여자라고 해서 남자보다 조금이라도 키높이가 낮추어져 물매가 기울어지면 하늘이 무너져내릴세라. 하니 이 세상 모든 일에 기계적으로 똑 같은 잣대를 대서 집안일이나 바깥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동안 옷도 남녀가 같은 것을 입고 말투마저 중성적으로(실은 전투적이며 남성적으로) 똑 같이 바꿔 맞춰 본 이웃의 큰 나라가 있었다고라. 이런 사회주의 정신에서 나온 실험이랄까 해프닝에서 취할 점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세상만사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가운뎃길이 가장 좋은 거라. 너무 팽팽하게도 느슨하게도 말게, 남녀평등의 본질을 살리면서 양성 각각의 특성을 살뜰히 서로 챙기고 보살핌이이야말로 기계적인 평등보다 한 차원 높은 제대로 된 공평이렷다.
그런데 한국 근대시의 아침인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보면 아직 고개가 절레절레, 형편 무인지경이었다. 여자들에게는 기계적인 평등은 고사하고 요즘에는 상식이 된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아예 멀찌감치 젖혀 두고 있었다. 그건 일반 서민들에게는 물론이고 식자층이나 상류층들에게도 극소수의 선각자들 집안을 빼고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니 우리 근대문학, 근대시가 움트기 시작했을 때 그래도 이름 석 자라도 남긴 여류인사들이 간혹 있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이 살면서 받은 고난과 절망, 세상과의 어긋남과 너무 앞서감, 그리고 품은 한이며 서린 염원을 모르는 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20년대에 활동한 얼마 안 되는 여류인사들, 이른바 유명하고 시끄러웠던[? noisy] 신여성 가운데 나혜석과 김명순, 그리고 김일엽이 있다. 수원의 부잣집에 태어난 나혜석(羅蕙錫 1896 ~ 1948)은 수원 삼일여학교에서 진명여학교에 편입한 후 진명여고보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과 프랑스에 유학하여 일어, 불어, 독어, 영어에도 능숙한 앞서 나간 여성이자 불자였다. 그는 뛰어난 화가이자 소설가며 시인이었지만 임신과 출산으로 여성이 갖는 좌절 및 고난을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든지 자신의 외도 사실을 상세하게 고백하는 등 세상을 경악케 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할까 상궤를 벗어났다고 할까, 그는 이런 이질적인 사상과 당돌하고 확신에 찬 언행으로 말미암아 보수적인 사회의 윤리를 어지럽히는 탕녀로 낙인 찍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희대의 천재요 이단아는 사회에서 매장된 채 파킨슨병에 시달리는 행려병자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평양의 지주이자 관료인 아버지와 산월(山月)이라는 기생이며 소실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김명순(金明淳, 彈實 1896 ~ 1951)은 진명여학교를 마치고 일본에 유학 중 이른바 느닷없는 데이트 성폭행을 당해 인생에 금이 갔다. 상대 범인은 당시 일본군 소위였으며 뒷날 대한민국의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된 이응준(李應俊 1890 ∼ 1985)이었다. 이 일로 소문이 나자 가해자 대신 피해자인 김명순이 여학교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애매한 이유로 졸업생 명부에서 삭제되고 귀국해야 했다. 당시 언론은 오히려 김명순이 이응준을 짝사랑하다가 실연하자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도했고 사람들은 이를 그대로 믿어 왔으니 언론개혁이란 참 오래된 명제인 것 같다. 게다가 같은 유학생인 소설가 김동인(金東仁, 琴童1900 ~ 1951)은 김명순이 본래 문란하고 방탕해서 그리 된 것처럼 홰까닥 아래위를 뒤집은 소설을 지으니 <김연실전>이 그것이다.
귀국한 김명순은 이화학당에서 공부하였고 정식 결혼도 않은 채 잡지, 언론 등에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며 영화와 연극에도 발을 들여놓는 등 여러 선구적인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건강은 악화되었고 무엇보다도 기생의 딸에다 정조관념이 없다는 손가락질이 일평생 가는 곳마다 따라붙어 차츰 활기를 잃고 창작력마저 고갈된 채 세상에 제대로 발을 못 붙이고 방황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못 견디고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이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요 최초로 시집을 낸 여성 시인이며 평론가, 극작가, 기자이면서 5개 국어를 구사한 번역가는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다 쉰다섯에 쓸쓸히 이국땅에서 눈을 감아야 했다.
평안북도 용강에서 목사의 맏딸로 태어나 이화학당을 나온 김일엽(金源珠, 一葉 1896 ~ 1971)도 일본에 유학하였다. 1920년부터 시, 수필, 소설 등 문필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였으며 세상을 이끄는 신여성으로 최초의 여성잡지인 <신여자>를 창간하여 주간이 되었다. 일엽은 이광수의 아내가 된 허영숙을 비롯하여 위의 두 사람과 함께 평소에 자유연애를 두드러지게 주창해 왔다.
그가 회고록 <청춘을 불사르고>에 밝힌 바, 철학자요 불교학자인 백성욱(白性郁 1897 ~ 1981)과 친해져 동거하였으나 백성욱이 고민 끝에 자신은 영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하며 둘 사이의 인연이 다 되었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는 금강산에 입산하고 말아 크게 충격을 받고 낙심한다. 이미 불교도가 된 일엽은 불교에 더욱 심취하면서도 방황하였다. 그러다 연희전문 교사인 이노익과 결혼했으나 몇 해 뒤 이혼하였고 일본인 오타 세이조와 연애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남자의 일본 부모가 극심히 반대하여 결혼을 포기한다. 일엽은 그러다 몇 해 뒤 대처승 하윤실과 재혼했으나 이마저 얼마 후 이혼하고 만다.
일엽이 오타에게서 낳은 아들이 친구 송기수에게 입적된 송영업인데 일본에 유학 가서 화가가 되었다가 파란만장의 역정 끝에 결국 일당(日堂)이라는 법명의 스님이 되어 뒷날 어머니의 시화집을 꾸민다. 일엽은 이렇듯 순탄치 못한 남성 편력과 곱지 않은 세평 끝에 출가하여 만공(宋道巖, 滿空 1871 ~ 1946) 스님이 있던 수덕사에 입산, 수도하는 불제자로 일생을 마친다.
이 해도 생마(生馬) 같아
김일엽
반생에 흘린 세월
되거두진 못하여도
이 후로나 때 붙들어
보람있게 쓰겠더니
이 해도 생마 같아야
나를 차고 닫고녀
그렇지만 그 갑갑한 시절, 이렇게 인습과 외세의 굴레에서 허덕이며 전인미답의 황무지로 빠져 길을 못 찾고 헤매다 죽어간 것이 여성만은 아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변이로 나투게 하여 어떠한 황당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씨를 이어가도록 상당한 희생을 치르는 실험을 하는 것 같다. 오상순(吳相淳, 空超 1894 ~ 1963)도 어찌 보면 이런 실험의 재료가 된 것이 아닐까? 고독과 허무에서 살아남는 실험 말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오상순은 경신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전공한다. 귀국하여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폐허>의 동인으로 활약하며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는데 늘 어둡고 절망적인 시를 썼다. 사춘기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한 영향도 있어 보인다. 아무튼 이후 그는 기독교인으로 잠시 전도사 생활도 했지만 동국대 전신인 불교중앙학림의 영어교사로서 강단에 서면서 영어 경전을 읽고는 불교와 인연이 닿았다. 참선을 하고 금강산을 비롯한 여러 곳의 명찰을 순례하고 스님들 밑에서 정진했다.
1926년에 범어사로 출가했다가 속세로 내려온 그는 가족도, 아무 것도 없는 무소유정처(無所有定處)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아무 것에도 손톱만한 욕심을 내지 않았지만 오로지 담배만 찾고 담배만 권했으니 그야말로 공(空)마저 초월(超越)한 공초(空超, 꽁초) 거사였다. 잘 곳이 없으면 다방 의자에서 밤을 새우고, 밥은 누가 사주면 먹고 아니면 굶었다. 해방이 되고 휴전이 됐으나 마찬가지였다. 친구와 후배의 사랑방을 오가며 신세를 졌다. 종로 안국동 근처 역경원과 선학원, 조계사에서 주로 지냈는데 특히 조계사는 그가 나이 일흔에 폐암이 아니라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잠자리를 마련해 준 곳이다. 절간 방에서도 줄곧 담배를 피웠다는데 그 때문인지 남긴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생의 수수께끼
오상순
읽고 있는 페이지 위에
이름도 모르고 형상도 알 수 없는
하루살이 같은 미물의 벌레 하나
바람에 불려 날아와 앉는 것을
무심히 손가락을 대었더니
어느덧 자취 없이 스러지던 순간의 심상!
때때로 나의 가슴을 오뇌케 하노나---
별의 무리 침묵하고 춤추는
깊은 밤
어둠의 바다 같은 고요한 방에
갓난아가의
어머니 젖꼭지 빠는 소리만
크게 들린다---
하늘이 시키는 일이라고 해도 좋겠고 모든 게 시절 인연이 닿아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지 모르지만 1920년대 중반에 거대하지만 이제는 거의 잊힌 큰 물결이 한국 문단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른바 카프의 물결이다. 교과서에도 제목만 나와 있고 내용은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서 일반인은 이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만 둔다면 우리 문학사에 있어서 가장 큰 운동이었던 이 잃어버린 10년은 뜻 없는 사화산의 커다란 분화구로만 남을 것이다.
‘카프’란 KAPF(에스페란토로 Korea Artista Proleta Federacio의 약자), 곧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이다. 1925년에 결성됐다가 1935년에 해체된 사회주의 문학단체로서 계급의식에 입각한 조직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계급혁명을 목표로 삼았다. 쉽게 말해 문학도 잘못된 세상을 뒤집어엎을 선전선동 수단에 알맞도록 의도적으로 지어져야 한다는 운동단체다.
좋게 말해 그 당시 웬만큼 정의감 있고 희생정신 있으며 의식 있는 문인들, 게다가 겉멋 부리는 강남좌파들까지 거의가 여기에 발을 담그고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데 결과는? 일제의 결사적 탄압에다가 독자들의 외면, 내부 총질까지 겹쳐 10년 만에 해산되니 이른바 전향 작가들은 이윽고 거의가 변절하여 친일 문학가가 되었고 나머지는 해방 전후하여 거개가 월북하고 말았다. 아, 우리 역사가 이렇게 꼬이지만 않았다면, 아니 우리 자신이 좀 더 신중하고 너그러우며 힘을 모았다면 우리는 저 뛰어나고 불행했던 여류문인들은 물론이요 남북에서 삭아간 이 많은 문인들과 그들의 탄생되지 못한 주옥같은 글줄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지금도 한껏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자들은 왜 카프의 글들을 외면했나? 그야 쉽지, 도무지 재미가 없는 것이다. 재미가 있어야, 감동이 돼야 작품을 읽어 보고 또 읽고, 돌려 보고 퍼뜨리고 할 것이 아닌가! 이런 뜻에서 나는 한국의 적지 않은 텔레비전 연속극들이 셰익스피어의 4대 희곡에 결코 못 미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점은 음악도 미술도, 춤이나 연극, 영화도 마찬가지이며 설교나 설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예술이 민중에 영합하여 말초적인 재미나 자극에만 몰두하면 신파나 포르노로 빠지겠지만 문학이 ‘공자왈 맹자왈’만 한다거나 ‘무찌르자 공산당’, 아니면 ‘원쑤를 때려부시자’, ‘제국주의의 각을 뜨자’만 노상 외치면 그게 찌라시 아니고 무엇이랴!
아무튼 이 카프의 문인들이 대의명분과 사회혁명을 외치며 문단을 휘저으니 자의반타의반 여기에 못 끼이고 남은 인사들도 무언가를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일부 인사들이 찾아낸 것이 서구 및 일본문학의 아류에 밀려 죽어가고 있던 우리의 옛 전통문학, 그 중에서도 시조의 되살림이었다. 시조부흥운동!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 ~ 1957)과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 ~ 1950)가 먼저 깃발을 들어 육당은 <백팔번뇌>라는 얼마간 생경한 시조집을 내놓았고 춘원은 나름으로 고시조와는 다른 새로운 시조를 여러 편 꾸며 내었다. 이리하여 어쨌든 시조는 근근히 되살아나 오늘에 이르렀으니 이게 다 이런 선구자들 덕분인가 아니면 카프의 공덕인가?
이들과 함께 국민문학파로 불리며 뒤를 이은 시조시인으로 정인보(鄭寅普, 爲堂 1893 ~ 1950)가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결혼하고 스물한 살에 중국으로 유학하여 상해에서 동양학을 전공하며 여러 독립운동가, 지사, 문인들과 사귀었다. 귀국하여 연희전문, 중앙불교전문 등에서 강단에 섰고 신문에 논설을 썼으며 일제가 뒤튼 우리 역사를 바로잡으려 저술활동을 했다. 광복후 국학대학의 초대학장이 되어 저술활동을 계속하며 정치에도 조금 발을 담갔지만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어 세상을 떴다.
자모사(慈母思)
정인보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 치마 좋다시더니 보공 되고 말아라
1925년에 발표한 40수로 된 연시조 중 제12수이다. ‘바릿밥’이란 여자의 밥그릇에 담긴 밥이며 ‘보공(補空)’이란 관 속에서 주검이 못 움직이게 채워 넣는 옷가지다. 양주동이 <부모은중경>에서 따오고 이흥렬이 작곡한 <어머니 마음>을 연상시킨다. 그는 한시에 능한 한학자였지만 정감 어린 옛말과 고유어를 많이 찾아다 시조를 짓는 데 잘 썼다.
그런데 이 시조부흥운동에 진정한 부흥사가 뒤이어 나타났으니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난 이병기(李秉岐, 嘉藍 1891 ∼ 1968)다. 한성사범을 나와 휘문고보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하여 시조부흥의 이론을 세우면서 현대적 감각을 띤 새로운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하였으며 문헌학자로서 숨어 있던 많은 고전을 학계에 소개하였다. 광복후에는 한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썼으며 전북대학교 문리대 학장과 여러 대학의 강사를 지냈다.
송광사
이병기
보성강 십오리를 거슬러 오르다가
그 강을 다시 건너 산으로 돌아드니
깊은 숲 으늑한 골에 종경소리 들리어라
나무와 바위틈에 물소리 졸졸이고
금벽(金碧)을 뒤에 두고 청심문 높이 서서
이 문을 드는 이로 하여 시름 잊어 하여라
합장배례하고 가부(跏趺)를 겯고 앉아
보조국사의 원불을 우러러보고
이윽고 고요한 밤을 선삼매에 드노라
새벽 예불소리 곤히 든 잠을 깨어
한 옆에 비어 있는 설법당을 돌고 보니
고려판 대반열반경은 홀로 남아 있도다
이병기는 시조형식에 자유로움을 주고 주위에서 흔히 느끼는 감상과 내용을 담자고 했다. 그리고 연작을 많이 쓰는 방식을 제안하며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가람과 더불어 시조부흥과 대중화에 큰 구실을 한 시인이 이은상(李殷相, 鷺山 1903 ~ 1982)과 조운(曺柱鉉, 雲 1900 ~ 1949)이다. 경남 마산 태생인 이은상은 연희전문과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과를 나와 국내의 여러 대학 교수를 거쳤다. <성불사의 밤> <가고파> 같은 시들은 가곡으로 작곡되어 거의 국민가요가 되었다.
성불사의 밤
이은상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 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뎅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망설이고
들릴 젠 또 들리라 소리 나기 기다려져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이와 대조적으로 월북작가 조운의 빼어난 시조들은 얼마 전까지도 해금이 안 된 채 흙 속에 묻혀 있었다.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이복 자형이 소설가 최서해(崔鶴松, 曙海 1901 ~ 1932)다. 목포상업전수학교를 나와 영광중학에서 교편을 잡으며 사회 계몽운동을 하고 1921년부터 민족주의적인 감정의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다. 중앙의 문단과 교류하며 국민문학파로서 시조 부흥운동에 앞장섰는데 어쩐 일인지 1948년 가족을 데리고 월북하였다.
구룡폭포
조운
사람이 몇 생이나 닦아야 물이 되며 몇 겁이나 전화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수렴 진주담과 만폭동 다 고만 두고 구름 비 눈과 서리 곤로봉 새벽 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연주팔담 함께 흘러 구룡연 천척절애에 한번 굴러 보느냐
세상에 늘 그러하게 고정된 진리는 없다고, 시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독자의 의식과 취향이 달라지고 사회환경이 변하면 추앙 받던 거장이 빛이 바래기도 하고 흙 속에 묻혔던 보석이 다시 광채를 발하기도 한다. 이은상과 조운도 비슷한 사례다. 말을 교묘하게 다루고 얽는 솜씨가 뛰어난 이은상은 감각적 시조를 써서 세상에 이름을 얻었으며 행복한 예우와 대접으로 한껏 영예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조가 지니는 참맛인 그윽한 흥취를 되살리는 데는 좀 못 미치지 않았나 싶다.
반면에 조운은 대표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석류>에서도 보듯이 우리말이 지니는 묘미도 중시하면서 정감 어린 시적 정조를 되살리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47년에 <조운시조집>을 내고 월북하는 바람에 냉전의 벽에 갇힌 남쪽에서는 곧 잊혔으며 북쪽에서 한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바깥에 전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조 부흥을 이야기하면서 조종현(趙宗玄, 鐵雲 1906 ~ 1989)을 빼 놓을 수 없다. <태백산맥>의 소설가 조정래(趙廷來 1943 ~)의 아버지이며 그의 아내인 여류시인인 김초혜(金初蕙 1943 ~)의 시아버지다. 한 집안이 쟁쟁한 문학가들이라 고향인 전라남도 고흥에 가족문학관이 섰다.
조종현은 고흥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 선암사로 출가하였다. 전통적인 강원교육을 마치고 중앙불교연구원을 졸업하였다. 1929년부터 동요와 시조를 문단에 발표하기 시작하면서 이병기, 이은상의 뒤를 이어 시조부흥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 해방후 잠시 선암사 부주지를 맡기도 하지만 빨갱이로 몰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휴전 후에는 우여곡절 끝에 벌교 상고에서 ‘스님 선생님’으로 교단에 선다. 60년대부터 불교활동에도 적극 나섰으며 여러 뛰어난 작품들과 함께 이런 말도 남겼다. “불심이 아니면 시심을 가질 수 없고, 시심이 아니면 불심에 접할 수 없다. 시심, 불심은 그저 동심이어야 한다. 신앙과 시, 시와 신앙은 둘일 수 없다. 신앙은 시라야 하고, 시는 신앙이라야 한다.”
의상대 해돋이
조종현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은가
이 시조는 강원도 바닷가 의상대 앞에 시비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조정래는 소설을 썼으니, 그것도 어마어마한 대하소설을 몇 편이나 썼으니 여기서는 젖혀 두고 그 며느리의 시를 하나 찾아 보자.
안부
김초혜
강을 사이에 두고
꽃잎을 띄우네
잘 있으면 된다고
잘 있다고
이때가 꽃이 필 때라고
오늘도 봄은 가고 있다고
무엇이리
말하지 않은 그 말
딸을 시집보내고 염려를 하는 어미의 마음이 봄빛을 무색케 한다. 그리고 한국의 현대시 중에는 이 작품이 그런 것처럼 직접적인 불교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분위기랄까, 은은한 마음자리의 배경이 무척이나 불교적인 것이 많다. 물론 불교적인 소재나 배경을 시문에 깔았더라도 다 불교인의 작품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런 분위기나 소재, 배경 다 빼고 나머지만 가지고 시나 시조를 지을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 상상과 영감의 폭을 상당히 좁혀 놓기 쉬울 것이다. 청록파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박목월(朴泳鍾, 木月 1916 ~ 1978)의 시를 하나 읽어 보자.
불국사
박목월
흰 달빛
자하문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
뜬 구름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이런 식으로 토막글을 줄 바꿔 늘어놓다니! 우리는 눈앞의 종이를 낭비하는 대신 어지러움에 끄달려 가는 속마음을 아꼈다. 짧고 단출한 형식의 시가에 이런 화두 같은 글귀의 기막힌 솜씨를 심심찮게 부려 온 박목월은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경주에서 자랐다. 열여덟 살인 1933년에 동시를 써서 문단에 나왔고 해방후에는 고등학교와 여러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시문학은 토속적이고 서정적인 면에 한 축을 둔 동시에 특히 나이 들어서는 기독교 신앙에도 다른 한 축을 두었다. 한양대 문리대 학장 재직 중 고혈압으로 세상을 떴다.
목월과 비슷한 연배의 여류시인으로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 爾豪愚 1912 ~ 1970)의 누이인 이영도(李永道, 丁芸 1916 ~ 1976)가 있다.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나 스물아홉에 폐결핵으로 남편을 잃고 홀몸이 되었다.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유치환(柳致環, 靑馬 1908 ~ 1967) 시인의 끈질긴 연서 공세를 오래도록 받았다. 나이 예순에 서울에서 뇌일혈로 삶을 마감했다.
연꽃
이영도
사바(娑婆) 고쳐 보면 이리도 고운 것을
유두(流頭) 달빛이 연연히 내리는 이 밤
꽃송이 곱게 떠 오른 연못가로 나오라
일제강점기에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와 자란 다작의 시인으로 조병화(趙炳華, 片雲 1921 ~ 2003)가 있다. 경성사범을 나와 일본 동경사범에서 물리와 화학을 전공했다. 광복 후 고등학교 및 대학 강사 등을 거쳐 1949년부터 경희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9년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낸 그의 시는 독자를 위협하지 않고 편안함과 위안을 주며 쉬운 어휘로 현대 도시인의 고독을 노래하고 도시풍의 현실적 서정시를 선사하였다.
그가 어느 정도 다작이냐 하면 일평생 창작시집 52권, 시선집 28권, 시론집 5권, 화집 5권, 수필집 37권, 번역서 2권, 시 이론서 3권 등 160여권의 책을 냈다. 이만하면 세계 챔피온 급이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어 손수 화집을 낸 것이다. 이 모든 작품들이 수작이기는 어렵겠지만 개중에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여러 편의 시가 있고 이 많은 시편 중에 드물게 불교적인 소재도 등장한다. 이는 산업화 시대의 도시인이 불교와 서로 멀어져 간 하나의 증표 같기도 하다.
해인사
조병화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불교는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인간은 하나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곳에
인간이 있다
조병화의 이런 편안함과는 달리 치열하게 살면서 신랄한 언어로 시를 지은 시인으로 김수영(金洙暎 1921 ~ 1968)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나 선린고등상업을 나왔다. 도쿄 상과대에 입학했다가 학병 징집을 피해 만주로 이주했고 광복으로 귀국하면서 시 창작을 시작했다.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서울에 있다가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징집되어 참전, 탈출하려다 총살당할 뻔했다. 그런데 다시 성공해서 겨우 서울에 오니 이번에는 인민군이라고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거기서 갖은 험한 꼴을 다 보고나서 나중에 남들처럼 석방됐다.
김수영은 일본에 유학했을 때 학교 선배이며 절친인 이종구에게 얹혀 살았는데 이종구가 잘 아는 재원이요 이화여대 영문과생인 김현경(1927 ~)을 소개받아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전쟁 와중에 김수영의 생사가 모호하고 살기가 폭폭해진 가운데 이종구와 김현경이 어쩌다 동거를 하게 되고 나중에 김수영이 살아 돌아와 이들 앞에 나타났으나 처음엔 김현경이 따라 나서기를 거부하다 나중에는 다시 합치는 등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러한 비극적이고 희극적인 갈등과 어려운 가정사에 대한 묘사는 2013년, 김현경이 펴낸 산문집 <김수영의 연인>에 잘 나타나 있어 인간 김수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아무튼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다행히 김수영은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여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마흔여덟 살 때 술자리가 끝나고 귀가하던 집 근처 밤길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허무하게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만다.
그는 일찍 갔지만 시는 남아 한국의 대표적 참여 시인으로 우러름 받는데 처음에는 현대문명과 도시생활을 비판하는 시를 주로 쓰다가 4.19 혁명 후에는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압제에 타협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맞서는 시를 썼다. 불교를 소재나 주제로 쓴 시는 드물지만 그의 시의식은 선적 직관과 해탈을 지향하고 있음이 여러 시편에서 드러난다.
폭포
김수영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이런 참여시와는 딴판으로 순수시로서 이름난 김춘수가 있다. 경상남도 통영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를 나오고 일본으로 가 니혼 대학을 다녔는데 천황과 조선총독부를 비판하다 퇴학당했다. 1946년 귀국하여 통영과 마산에서 교편을 잡고 시를 짓기 시작했고 경북대학교와 영남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장을 지냈다. 등단 이후 허무주의에 기반을 둔 인간의 실존과 존재를 노래했던 순수시인으로 기림 받았지만 군사독재자에게 헌시를 바치고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는 등 엉뚱한 흠집을 남겼다.
아무튼 그는 처음에는 감상적 서정시로 출발하여 이미지즘, 관념시, 존재론적인 시, 사물시, 무의미시 등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주며 시를 통해 해탈에 이르려 한 것 같다는 평이다. 다음 시는 잘 와닿을지 어떠할지 모르겠다. 원효대사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이르기를 ‘진리는 말을 떠나 있는 것이지만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離言眞如 依言眞如)’고 했다는데…
꽃을 위한 서시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朴景利, 今伊 1926 ~ 2008)도 통영 출신이다. 진주공립고등여학교를 졸업한 뒤 1946년 결혼, 서울가정보육사범을 졸업하였다. 황해도 연안여중에 근무하였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행도는 좌익으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죽었다. 1955년부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여든 셋에 서울에서 폐암에 이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동딸 김영주가 김지하(金英一, 芝河 1941 ~)와 혼인하였다. 박경리의 종교는 천주교로 돼 있지만 불심이 깊었던 듯하다. <토지>에도 남해 금산사[보리암]가 등장한다.
금산사
박경리
안개 뚫고
남해 금산사에 오른다
안내인은
경치가 보이지 않는다고
애석해 했지만
내 허약한 몸에
정수리를 쪼개는
햇볕이었다면
비가 쏟아졌다면
어찌 이곳에 올랐으리
벼랑에 선 금산사
거룩한 신심이여
오르내리며 절을 지은
그 넋들은 지금 어디에
수미산에 안좌해 계시는가
소망 여쭙고
내려오는 중생
수많은 중생
싸구려 흰 블라우스에
해맑은 얼굴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백성들
참으로 그들이 희망이로구나
김수영과 더불어 한국시단의 참여시, 저항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신동엽(申東曄, 石林 1930 ~ 1969)이 있다. 나라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지만 이승만의 정책에 항의하는 동맹 휴학으로 퇴학당한다.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고향에 내려갔는데 부여를 점령한 인민군이 부여 민청 선전부장을 시켰다. 그러다가 전세가 바뀌어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가 이듬해에 해체되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너무 굶어 민물 게를 잡아먹는 바람에 디스토마에 걸렸고 이것이 결국 뒷날 시인의 목숨을 앗아갔다.
단국대를 졸업한 뒤 친구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헌책방을 열었는데 이때 이화여고 3년생이던 인병선(印炳善, 秋憬, 1935 ~)을 만나 1957년 인병선이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하고나서 결혼한 뒤 낙향했다. 교사직을 얻었지만 폐결핵으로 각혈하여 그만두고 서울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보낸 뒤 고향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으며 다시 서울에 올라와 4·19 혁명이 일어나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짓기에 몰두할 수 있을 만하자 간암이 악화되어 나이 마흔에 세상을 뜬다.
세 아이를 거느리고 어려움 속에서 남편의 그늘을 벗어나려 애쓰던 인병선은 어느 날 천대받던 무지렁이들이 익혀 내려오던 우리 전통의 짚풀 문화가 급속히 사라지고 있음을 보았다. 여생의 목표를 찾아낸 인병선은 이에 전념하여 이윽고 ‘짚풀생활사박물관장’으로 살아가기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도 더욱 절창으로 읊어지고 있는 신동엽의 대표작 <껍데기는 가라>는 남북으로 분단된 이 겨례의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고 있으며 이 시에 나타난 사상은 ‘중립의 초례청’, 곧 불교의 중도(中道)라 해도 되겠다.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것까지 내논
아사달과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오늘은 이 정도로 하고 뛰어난 시조시인이요 이 시대 마지막 무애(無涯) 도인으로 일컬어지는 조오현(曺五鉉, 霧山 1932 ~ 2018) 스님의 시조로 마무리를 할까 한다. 경상남도 밀양 출생으로 1958년에 입산하여 스님이 되었다. 1968년 시조문학에 <봄>, <관음기>가 추천되어 등단하였다. 신흥사, 낙산사 및 백담사 회주와 설악산, 신흥사 조실을 지냈으며 한글 선시를 개척했고 만해마을과 만해상을 제정하여 문화 창달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득한 성자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 스님은 좋은 시조가 많아 하나만 고르기가 힘들다. 그리고 위에 펼친 여러 시인들의 시를 내키는 대로 뽑고 각 시인의 생애를 몇 줄로 줄여 옮기다 보니, 아! 이분들도 향기로운 부처님의 메아리만 남긴 채 이미 거의가 이 세상을 떠나 있지를 않은가! 게다가 나 자신은 그야말로 천년을 산다고 해도 그 가운데 한 수라도 섣불리 흉내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말이지.
이러니 성자는 과연 하루살이가 아니라 알뜰한 이 세상, 살뜰히 나들이 왔다 아득히 떠나가신 분들일 것이로다. 그리고 내게 이 글을 잇는 다음 기회가 이어진다면 이분들을 뒤이은 다음 세대에서 떠오른 별들을 찾아내어 내 사무침과 설렘을 한 번 더 실어 보내련다. 그 별떨기들이 밝아 올 때까지 때로는 꽃처럼 피어오르고 때로는 낙엽처럼 우수수 흩날리는 아름답고 눈부신 우리말 시편의 숲길을 내쳐 헤매어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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