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사랑교회 제39차 전도모임 후기
1. 일시: 2016년 9월 25일(주일) 오후 1시 20분~2시 10분
2. 장소: 교회 앞(대전시 서구 대덕대로 162번길 29, 4층)
3. 참석자: 김규태 목사, 엄민옥 사모, 이운자 권사(총3명)
4. 소감
오늘은 약간 흐린 날씨 가운데 전도하였습니다. 날씨 관계로 슬러시는 준비하지 않았고 강냉이와 전도지만 나누며 전도하였습니다.
오늘은 청년들도 많이 오지 못하였고 피곤하기도 하여서 전도하는 것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시간이라도 길거리에 서 있다가 들어오자는 마음으로 전도현장에 나갔습니다.
몸은 좀 피곤하였지만, 전도하면서 그래도 전도현장에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빌라델비아교회의 사자에게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능력으로 따지자면 정말 저와 우리교인들처럼 작은 능력을 가진 자들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진실로 주님께서 주의 종과 교회를 붙들어주시지 아니하시면 우리교회는 세워질 수 없는 교회입니다. 목사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순종하는 마음으로 길거리에라도 나가 전도지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오늘 주일 오전예배는 성결교단이 정한 순교자 기념교회로 지켰습니다. 교회 입구 게시판에 부착해 놓은 순교자 이판일 장로님과 임자진리교회 이야기를 성도들과 나누면서 순교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함께 은혜를 나누기 위해 한국성결신문에 게재되었던 이판일 장로님 순교일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여기 한국 남단 서해 고도 임자면 진리, 평화롭던 이 마을에도 6. 25 남침의 혹독한 박해의 파도는 여지없이 밀어 닥쳤다. 섬마을 복음화를 위하여 세우진 진리교회의 충성된 성도들은 공산폭도들의 유혹과 핍박 속에서도 더욱 믿음을 굳게 지켰다.
석 달에 걸친 공산치하에서 이판일 장로와 그 가족 12명을 비롯하여 교우 48명이 붙잡혀 칼과 창에 찔려 쓰러지고 더러는 손발이 묶여 바닷물에 던져지고 또는 총에 맞고 혹은 갯벌 백사장 구덩이에 생매장 되었다. 교단이 이 장한 가족의 순교신앙을 기리기 위해 이 탑을 세워 만대에 전한다.”
이 글은 전남 신안군 진리교회 앞마당에 세운 48인의 순교자 기념탑 봉헌 문입니다. 높이 9미터, 모퉁이 직경 2미터의 십자가형으로 이루진 이 탑의 중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십자가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고, 네 모퉁이에는 남녀노소의 순교를 뜻하는 4개의 작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습니다. 또 대리석 정면에는 봉헌 문이, 양 측면에는 48명의 순교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순교자 이판일은 1897년 1월 17일, 전라남도 임자진리에서 부친 이화국과 모친 남경엽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향리에 있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부친의 가업인 농사를 지었고, 13세에 임소애와 결혼하였습니다.
이판일의 젊은 시절은 일제에게 국권을 상실한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어느 날, 이판일은 마을 아이들과 아낙네들 30여명이 어울려 노래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환한 얼굴의 중년부인이 서서 고운 음성으로 힘차고 구성진 노래를 하여 모인 무리들이 예수를 믿도록 감동시키는 광경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중년부인은 오늘날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었던 경성성서학원 신학생 문준경 전도사였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경성신학교에 입학하여 첫 실습시간에 복음의 불모지였던 임자도에서 노방전도를 통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 어느 날 오후, 이판일이 글을 읽는데 문준경 전도사가 방문하였습니다. 문준경 전도사는 이판일에게 성경책을 전달하였고, 이후 진솔한 대화를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판일은 문준경 전도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였습니다.
문전도사는 신앙생활의 필수지침을 알려주었습니다. 이판일은 즉석에서 주초를 끊어버리기로 결단하고 담뱃대를 부러뜨려 아궁이에 던져버렸습니다. 또 대대로 내려오던 조상제사를 철폐하여 제사기물 또한 아궁이에 던져 넣고 불태워버렸습니다. 그 주일에 이판일과 그의 아우 아판성의 온 가족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1933년 봄, 교회가 부흥하여 대지 80여 평을 매입하여 목조로 20여 평의 교회당 건물을 신축하고 진리교회의 간판을 붙였습니다. 또 1934년 2월 2일에 당시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의 집례로 이판일은 5명의 여자들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세례 받은 날 5명의 여자들과 함께 집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 이판일은 1946년 7월에, 진리교회 최초의 장로로 장립을 받게 됩니다.
이판일 형제는 교회부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전도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었고, 걸어올 수 없는 노인은 직접 등에 업고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판일 장로에게는 매일 교회 안팎을 깨끗이 청소하고, 교회 초가지붕에 이엉을 손수 엮어 얹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 집 지붕에 이엉을 엮어 얹었고, 교회 담벼락을 먼저 바른 후에 자기네 담벼락을 바르곤 하였습니다. 이판일은 아침 일찍 우물물을 길어다가 교역자 사택의 물두멍에 식수를 채운 후에야 자기네 식수를 길었고, 교역자의 식량은 좋은 곡식을 골라 정성껏 자루에 담아가져왔습니다.
진리교회가 날로 부흥하는 중에 1950년 6. 25 전쟁으로 9월 24일 공산치하가 되어 교회 간판은 땅바닥에 나뒹굴어졌고, 교회 출입문은 대못으로 봉쇄되어,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을 금함”이라는 붉은 글씨의 경고문이 붙었습니다. 이판일 형제와 성도들은 밀실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어 목포 정치보위소로 압송되었습니다. 갖은 고문을 당한 뒤, 이판일 형제는 목포에 있던 장남 이인재의 집에서 며칠을 보낸 뒤, 장남 이인재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임자도로의 귀향을 서둘렀습니다.
1950년 10월 4일 저녁, 48명의 교인이 삼일저녁 밀실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찬송을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공산당들이 총과 몽둥이, 죽창을 들고 예배장소로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교인들을 밖으로 끌고나가 무릎을 꿇린 후에, ‘예수 믿지 않겠다고 손들고 나오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손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없자 공산주의자들은 성도들을 포승줄로 포박하여 형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3km나 되는 험난한 새벽길을 더듬으며 처형장 백산(白山)에 당도하였습니다. 공산당들은 성도들의 포승줄을 풀고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로 성도들을 밀어 넣었습니다. 이판일 장로는 폭도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였습니다.
“여보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부탁하네. 우리들은 아무래도 좋지만 내 어머니만큼은 다른 방법으로 가시게 해주게.”
이 때 노모가 대답하였습니다.
“애들아, 예수 믿는 사람답게 당당히 죽자!”
노모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폭도들은 “그래, 어디 당당하게 죽어봐라, 이 늙은이야!”라며 노모를 죽창으로 미친 듯이 찔렀습니다. 이 장로 가족들이 피투성이가 된 노모를 감싸 안았는데, 5살짜리 어린 손자가 “왜 우리 할머니를 찌르는 거야!”라며 절규하자, 폭도들은 그 어린 아이를 발로 찬 후 인정사정없이 죽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판일 장로는 무릎을 꿇고 최후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부족한 종과 우리 모두의 영혼을 받아주소서! 또한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옆에 있던 폭도는 “죽을 놈이 무슨 기도야”라며 몽둥이로 이 장로의 뒷머리를 쳐서 구덩이로 굴러 떨어드렸습니다. 그날, 이판일 장로를 비롯한 48인의 영혼들이 주님의 품에 안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날은 1950년 10월 5일이었는데, 놀랍게도 이판일 장로는 문준경 전도사와 같은 날에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5일 뒤인 1950년 10월 30일, 국군의 수복으로 고향에 돌아온 이판일 장로의 장남 이인재는 원수들을 모조리 잡아 야산공터 처형장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가족의 한을 풀기 위해 방아쇠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아버지의 음성이 귓가에 쟁쟁해 멈칫했습니다. “아들아, 내가 그들을 용서했으니 너도 그들을 용서하거라!” 이판일 장로의 장남 이인재는 온 몸에 힘이 빠져 절도하였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이인재는 정벌부대장에게 부탁하여 폭도들의 처리권을 위임받게 됩니다. 이인재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들의 결박을 풀어주며 “당신들이 죽인 내 아버지가 당신들을 용서하셨으니 나도 당신들을 용서합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하여 6. 25 전쟁으로 마을에 불어 닥친 무서운 보복살인이 그치게 되었고, 폭도들은 교인이 되었으며, 마을은 완전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장남 이인재는 아버지 이판일 장로가 경작하던 땅 1,000평을 팔아 아담한 순교기념교회를 세웠고, 목사가 되어 고향이었던 임자진리교회에서 34년 간 시무한 후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습니다. (이상 출처 2008. 12. 12. 한국성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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