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곳은 '고요의 바다'라 불렸어.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며 이승에서의 기억들을 지우게 되지. 기억을 지운다는 거. 추억이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건 간에 나를 온전히 지운 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겠고 애자에겐 더 힘든 일이었어. 그래도 하나 둘 지워 내야 했어. 물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잊힌 기억들이 솟아났고 하나 둘 지워 내야 했어. 아쉽고 아까운 것도 너무 아름다웠던 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도 몸서리치게 떠오르고... 지워낸다는 것은 고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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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떡볶이였어. 빨간색 고추장 소스에 넉넉히 담긴 떡과 어묵. 넉넉지 않은 학생 주머니치곤 제법 근사한 메뉴였어. 마침 디제이 박스에선 '스테어 웨이 투 헤븐'이 흘러나왔어. 래드제프린의 호소력 짙은 보이스에 잔잔한 연주. 말없이 떡을 하나 포크에 찍어 들고 음악에 귀 기울다 살짝 고개를 들고 바라보다 눈이 마주쳤어. 또 활짝 웃어 주었어. 마치 어금니 보여 주러 온 사람처럼 말 없이.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어. 경수라 했어. 조금 가무잡잡 한 얼굴에 선한 인상이었어. 저 아이는 자기 걸 가진 게 있었을까? 뜬금없는 생각이 들었어. 달변은 아니지만 자기소개를 또렷하게 했어. 형편은 어렵지만 꼭 대학을 가서 성공한 삶을 살겠다 했어. 성적이 상위권이라 할 땐 약간 우쭐해 하기도 했어. 자석처럼 끌렸다 했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오늘 아니면 못 만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대. 딱히 이유는 없었대.
짐 리브스의 중저음 목소리가 흘러 났어. 닮았다 싶었어. 그의 목소리도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어. 울림이 있었고 확신에 차 있었고 꿈을 이야기할 땐 마치 그 꿈속에 들어간 듯했어. 어쩌면 그가 나를 그 꿈속으로 데려갈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어. 웃어 주었어. 거울이 있어 내 모습을 봤으면 가장 행복란 모습일 거라 생각했어.
나나 무수꾸리가 흘러나왔어. 아일랜드계의 특유의 맑고 강인하면서도 차분한 음색. 내 목소리도 저렇게 들렸으면 좋겠다 싶었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빠져 들었어. 마치 운명처럼... 해이 쥬드를 뒤로 하곤 아쉽게 해어 졌어. 따로 약속하진 않았어. 우리에겐 버스 정류장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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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된 엄마는 언제부턴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어. 점점 악착 같아 지고 자신이 아니면 애자를 놓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 쉬흔을 바라 보는 나이에 어디서 저런 힘이 나는지 의문일 정도였어. 얼나 되지 않는 밑천으로 시장통 한편에 작은 점포를 마련하곤 억척 같이 일 했어. 음식 솜씨는 있던 터라 순댓국밥 집을 차렸는데 생각보다 잘 됐어. 시장 사람들은 또순이라 불렀어.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던 그녀가 자기 삶을 살기 시작했어. 그건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 하려는 태도의 문제란 걸 깨달은 거지. 악착같아 지기로 했어. 아니 억지로 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했어. 마치 복어가 배를 쑤욱 내밀고 겁 많은 개가 요란히 짖는 것처럼. 이제 누구라도 건드리지 않았어. 너 죽고 나죽자로 덤비니 아예 설설 기기 시작했어. 장사도 잘되고 돈도 제법 모았다고 소문 나니 아무도 덤비지 않았어. 오히려 대단하다고 했어. 가끔 술먹고 히야까시 하는 사내들이 귀찮기는 했지만 그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어.
엄마의 억척 덕분에 애자는 자존감 있는 아이로 자랐어. 다 엄마 덕이란 걸 잘 알았어. 공부도 제법 했어. 상위권은 아니지만 쳐지진 않았어. 경수를 만나고 더욱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 그런 딸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 엄마에게 처음으로 자기 몫으로 가져 본 게 애자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