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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뭘 할지 꿈꾸다
권경자(대구, rudwk48@hanmail.net)
지난가을, 햇볕이 좋은 날 냉장고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수삼을 말리기로 했다. 탁자를 베란다에 내놓고 그 위에 썰어놓은 수삼을 펴 놓았다. 인삼 향이 제법 향기롭게 퍼져 반짝이는 가을 햇살을 가득 모아들였다. 매년 이런 계절이 되면 엄마는 햇살을 그냥 보내기 아깝다고 애호박이며 가지, 무를 썰어서 말리고 고춧잎이며 산나물을 삶아 채반에 널어두곤 했었다.
해가 진 후 어느 정도 꾸덕해졌으려니 하고 인삼을 잡는 순간 물컹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가. 더구나 꿈틀하는 움직임까지 느껴졌다. 너무 놀라 순식간에 베란다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방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겠지 하고….
다음 날 아침 조심스레 내다보았더니 아무것도 없다. 다시 저녁이 되어 캄캄해지고 난 다음 마음을 진정시키고 확인해 보기로 했다. 화분에서 지렁이가 그것도 겨우 몸길이가 1~2cm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놈들이 기어 나와 탁자로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다시 보면 움직이긴 했다. 지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고 중앙이 불룩한 것이 모양도 다르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생물체였다. 날이 밝자 다시 화분 속으로 들어가 버렸는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인삼 향기가 그들을 불러낸 모양이다. 화분에는 식물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화분 속 흙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다.
봄이다. 도대체 이 많은 생명체가 어디서 온 것일까? 매년 맞는 봄이지만 올해는 좀 더 유별나게 느껴진다. 풀꽃 하나, 싹트는 잎 하나하나에 그 속에 살아있는 생명체가 보인다. 다 살아있었구나. 그 긴 겨울의 침묵을 견디고 용케도 살아있구나. 한꺼번에 살아난 언덕의 풀들과 잎이 돋아 난 나무와 꽃들의 속삭임으로 온통 공기 속이 와글와글 시끌시끌하다. 환희다. 기쁨이다. 어지러워 현기증이 날 정도다. 며칠 사이에 벚꽃봉오리가 터지고 눈송이처럼 날리는 꽃잎들이 밟힐까 옮기는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도대체 나무들은 연초록 초록의 물감을 얼마나 많이 풀어 놓은 것일까? 매일 잎 색깔이 바뀌고 크기도 달라진다. 경이다. 생명이다.(...)
당신의 미소는 나비처럼
『일 포스티노(Il Postino)』 감상 노트
김숙 (kol1443@hanmail.net)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작품 제목 중에 「달은 가장 오래된 TV」가 있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백학기는 세상에서 이렇게 멋진 은유의 제목을 본 적이 없다. 라고 감탄했다. 그것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달을 TV처럼 바라보며 “이미지를 투영하고 이야기를 상상했던 모습을 텔레비전 시청에 빗댄 것”이다. 백 감독의 시나리오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동기 삼아 영화 『일 포스티노 (Il Postino, 1994, 이탈리아)』를 소개했다. 패랭이꽃밭 위로 번지는 희고 노란 나비 떼를 바라보다가 그날 그 메타포(Metaphor) 현장이 떠올랐다.
“당신의 미소는 나비처럼 날개를 펼치는군요.”
조금은 어눌하고 순박한 청년 마리오의 일생일대 프러포즈 메시지다. 그는 이탈리아 칼라 디 소토라는 외딴섬에서 고기잡이 부친과 살고 있다. 영화는 이 섬에서 시작된다. 섬사람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어민이다. 수도 시설이 갖춰지지 않아 물 공급선이 한 달에 한 번씩 오는 극심한 식수 부족 마을이기도 하다. 정치인들은 물탱크 대신 수도를 설치해주겠다고 공약했지만, 번번이 공약(空約)이 되었다. 마리오는 부친처럼 어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단꿈이 깨기도 전에 새벽부터 일을 시작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배를 타면 배 알레르기로 인해 감기가 든다고 엉뚱한 핑계를 댔다. 미국에 있는 친구들의 편지를 들먹거리기며 꾀를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성년이 되었으니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권한다.
그 무렵 칠레 정부에서 추방당한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이 섬마을로 망명해 온다. 그가 섬에 머물게 되자 팬들로부터 우편물이 답지했고 우체국은 ‘자전거를 가진 우체부를 고용한다’라는 광고를 냈다. 지나가다 광고를 본 마리오가 채용을 희망한다.(...)
아들, 그리고 아버지
남혜정(southhj11@hanmail.net)
“아이코, 어떻게 아들을 S대에 보냈어요? 그 어려운 데를….”
시어머님께서 상견례 때 친정엄마께 처음 하신 말씀이다. 그것으로 엄마는 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시어머님은 남편을 S대에 보내지 못한 것을 내내 속상해하셨다. 그걸 누구보다 남편이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Y대를 졸업한 남편은 S대를 나온 남동생과 만나기만 하면 은근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논쟁을 벌였다. 내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데 매형이란 이유로 S대를 KO패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S대 못 보낸 어머님의 한을 이렇게라도 풀어주려는 걸까. 하긴 남편은 얼마나 어머님 가슴에 못 박힌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들었을까.
남편과 오빠는 동갑이다. 그래서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낸다. 친하다는 것은 술 동무란 이야기다. 만나면 당연지사 술잔을 돌리게 되고, 꼭 나오는 이야기가 어린 시절 아버지 얘기다.
“야, 너! 장인어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 줄 모르지? 너어, 빡빡머리에 회초리로 맞아봤어? 야, 맞은 데 맞고 또 맞고 하면 금방 빨갛게 퉁퉁 부어올라. 얼마나 따갑고 아픈지. 머리통이 이만해져!”
오빠는 아직도 머리가 아픈 것처럼 윗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빠가 중학교 2학년 때 복장 불량으로 교무실에 불려갔다. 교복을 풀어헤치고, 모자도 삐딱하게 쓰고, 머리카락이 길다는 이유였다. 오빠는 그날 수업에 빠지고 밤늦게 들어왔다. 학생주임 선생님이 머리카락 중앙을 밀어 오빠 머리엔 긴 고속도로가 생겼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회초리를 들었다. 그것이 못내 아픈, 아니 자랑스럽게 견뎌낸 기억으로 남아있나 보다.
아물지 않은 상처인 듯 오빠가 흥분해서 말하자 남편이 말을 이어받았다.
“야,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아버지는 어땠는지 아냐? 너 전깃줄로 맞아본 적 없지? 전깃줄로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줄이 다리에 착착 감기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
남편은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말하듯 여러 번 나에게 했던 얘기를 풀어놓았다. “야, 졌다 졌어. 난 그런 적은 없는데.”(...)
건망증
박인목 (impark1@hanmail.net)
어제 출근하면서 핸드폰을 놓고 갔다. 사무실 근처까지 가서야 호주머니에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감했다. 집에까지 다시 갔다 오려면 왕복 한 시간은 더 소요될 터이다. 잠깐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으나, 핸드폰 없이 하루를 보낼 자신이 서지 않았다. 별도리 없이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아파트 마당에 차를 주차해 놓고 집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의아한 눈초리의 집사람한테 자초지종 설명도 생략한 채 여기저기를 뒤져봐도 없다. 집 전화기로 전화를 걸어 봐도 수신음이 들리지 않는다. 무음으로 해 놨었나? 이불 속까지 뒤져봐도 묘연하다. 어제 퇴근할 때 사무실에 두고 왔던가…? 그럴 리는 없었다. 어젯밤에 분명 핸드폰으로 부산 사는 동생과 통화를 했으니까.
소지품 하나도 간수 못 한다는 마누라쟁이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거의 포기한 상태로 차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운전석에 앉으며 조수석을 흘끔 봤더니 시트 코너에 그것이 반쯤 끼어 있는 것 아닌가. 아까 출근하면서 전화를 받고 거기다 두었던 일이 이제야 생각났다.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늙었구나’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지각이라고 나무랄 사람은 없으나, 이런 일로 사무실에 늦게 들어서는 기분은 좀 눈치가 보인다.
퇴근 시간에도 사건은 계속이었다. 갑자기 거래처 방문 건 때문에 서둘러 사무실을 나서야 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조금 아까 사무실을 나서며 컴퓨터를 끄고 나왔는지가 아리송했다. 캐비닛도 잠그지 않았던 것 같았고…. 차를 갓길에 세워놓고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에게 컴퓨터와 캐비닛을 부탁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그 직원이 ‘컴퓨터도 꺼져있고, 캐비닛도 잠겨 있다’는 말을 기대하였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실망스러웠다. 오늘은 아침부터 진이 빠진 가운데 건망증으로 하루를 보낸 셈이다. (...)
해는 지는데
선수원
한 줌의 햇살도 귀한 겨울에 햇볕이 사그라지는 늦은 오후에야 남편과 나는 산책길에 나선다. 이는 따사로운 햇볕의 덕은 볼 수 없지만, 석양을 만날 수 있고, 또 보고 싶어서다. 언젠가부터 저물어가는 해에 마음을 뺏기곤 한다. 아마도 나이 탓이려니 싶다. 석양을 바라보는 나의 감정에 자연스레 노을빛이 스며든다.
우리는 사람들이 거의 다시지 않는 논사잇길을 지나 중도방죽으로 가는 코스를 정해 놓고 있다. 바닷물을 막아 조성한 드넓은 간척지 논은 벼가 자라나는 내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풍요로움을 안겨준다. 남편은 대하소설 『토지』의 대지주 윤 씨 부인처럼 이 논들을 다 사들여 벌교의 대지주 선 씨 부인을 만들어 주겠노라며 한 번씩 호기를 부린다. 그래도 나는 남편의 허세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먹지 않아도 배부른 포만감으로 나의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갑자기 검은 무리가 휙 하니 머리 위를 지나간다. 꽤나 많은 수의 떼까마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빈 들녘의 하늘을 거침없이 날고 있다. 칼칼한 겨울바람도 함께 쌩쌩 내달린다. 새의 무리는 우리 두 사람을 관객으로 알아 신이 났는지, 허공을 휘돌아 논바닥으로 미끄러지듯 휘어지다 날쌔게 하늘로 솟구치는 힘찬 율동을 한참이나 보여준다. 단체로 파닥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끼룩끼룩, 짹짹’ 그들끼리의 수다는 적막한 공간을 생동감 넘치게 흔들어 놓는다.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새떼의 힘찬 군무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 창백한 햇볕은 그나마 힘이 점점 빠져 가는 듯하다. (...)
유리그릇
신희수(djsh56@hanmail.net)
“지난번 검사한 결과가 나왔는데 바이러스가 검출되어서 다음 주에 오셔야겠어요.”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또 바이러스네.’ 괜찮으면 연락이 없을 터였다. 약속된 날에 갔더니 이번엔 입원할 정도는 아니니까 새로운 약을 주시며 3주 있다 보자고 하셨다. 간호사가 거대바이러스라 불리는 균이 나왔다고 했다. “네?”그랬더니 간호사는 번역이 그렇다며 놀라지 말라고 했다.
이식을 위한 검사로 신장내과에 입원했을 때 맞은편에 바이러스로 입원을 하신 분이 계셨다. 그분은 이식수술을 하신 분이셨는데 화분 분갈이하다가 흙 속의 바이러스가 침투해서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남편과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집에 있는 화분을 다 치워버렸다. 베란다엔 휑하니 빈 곳만 자리하고 있다.
흙을 만지지도 않고 돌아다니지도 않는데 바이러스라는 것은 종종 나를 괴롭혔다. 입원도 하고 약도 먹었는데, 요즈음은 조용해서 안정을 찾는 줄 알았다. 바이러스로 치료받은 기억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다시 또 꿈틀하나 보다.
3주 후 만난 주치의 선생님은 “환자분은 참 어려운 분이에요. 유리 같아요”라며 안타깝게 쳐다보셨다. 여러 진료과를 다니기 때문에 식구들이 나에게 부르는 말을 의사 선생님이 하셔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바이러스가 음성이네. 이 정도 먹고 음성이면 안 되는데…’하며 중얼거리셨다. 난 바이러스가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좋은 결과인 줄 알았다. “왜 이렇게 약해요? 건강한 사람은 이 정도로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아요.” 내가 자체 면역력이 너무 약해서 약을 쓰기가 어렵단다.(...)
나비야 훨훨
윤원영
화창한 봄이 되니 텃밭의 유채꽃이 만발하여 너울너울 노란 물결을 일으키며 춤을 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흰나비, 노랑나비, 얼룩나비 색색의 나비들이 꽃 속을 드나들며 덩달아 춤을 추면서 꽃 잔치를 벌인다. 눈보라 치던 추운 겨울철에는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 별안간 나타나 봄소식을 알려주는지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애벌레는 다 자라면 겨울에 얼어 죽지 않으려고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내어 몸뚱이를 뗑뗑 감아 따뜻하게 옷을 만들어 입고 번데기로 변하여 나뭇가지에 숨어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어낸다. 따스한 봄이 오면 번데기를 뚫고 나와 훨훨 날아다니니 참으로 나비란 인간 못지않게 현명한 존재라 아니할 수 없다.
나비는 어쩌면 온갖 곤충 중에도 인간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것 같다. 어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 하고 두 팔을 벌려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을 추면 온 가족이 손뼉을 치며 웃음바다가 된다. 가수 현철이 구수한 목소리로 불러 아줌마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사랑은 나비인가봐>는 내가 즐겨 부르는 노래방 노래의 애창곡 중 으뜸으로 꼽히는 곡이다. ‘고요한 내 가슴에 나비처럼 날아와서 사랑을 심어놓고 나비처럼 날아간 사람∼’
이 노래는 나비를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심어주는 사랑의 전령사로 표현하고 있다. 무명가수이던 김흥국은 <호랑나비> 노래 하나로 스타덤에 올라 이렇다 할 히트곡이 없이 유명가수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노래 솜씨보다는 더부룩한 수염에 벙거지 모자를 쓰고 쓰러지듯 넘어지듯 코믹하게 춤을 추는 모습에 더 호감이 가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랑나비> 한 마리가 김흥국을 유명가수로 떠오르게 하였고 뭇사람들을 웃음과 기쁨으로 몰아가고 있으니 대단하지 않은가? (...)
꿩 대신 닭
이수중 (tnwnd321@naver.com)
나는 가끔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한다. 지구의 공전이 한 치의 오차만 생겨도 계절의 변화는 물론이고 태양계의 다른 행성들과의 충돌로 지구는 폭발될 수밖에 없을 텐데 정교한 순행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계절마다 나름의 멋과 운치가 있지만 나는 겨울이 참 좋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신록과 녹음과 단풍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천연색 사진이었다면 겨울은 추억이 묻어나는 흑백사진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때로는 봄의 소생을 준비하는 대지에 눈이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눈은 나에게 아주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눈이 내리면 어둠도 사라진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은 멀리 떠난 옛사랑을 불러오고, 깜박이는 가로등 불빛 먼 곳으로부터 눈물이 글썽할 정도로 반가운 사람이 올 것도 같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때론 동심으로 돌아가 눈싸움과 눈썰매를 타던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눈 내리는 겨울밤은 차곡차곡 쌓아둔 옛 추억의 노트를 넘기게 한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좋다. 겨울은 내 추억의 보고이다.
나는 강원도의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살아왔다. 농촌의 생활은 쉴 틈 없이 바쁘고 고달프다. 농사철에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한다. 그러나 겨울철, 동토의 계절은 한가롭다. 농번기에 허리가 끊어질 정도의 고통스러운 농사일에서 해방되어, 여유롭게 휴식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년의 농사를 위해 새끼도 꼬고, 멍석, 가마니, 삼태기 등을 만들며 여유를 즐긴다.(...)
그림 같은 청계마을
정문자
마산역에서 목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내가 내릴 곳은 하동이다. 무궁화호는 아무리 작은 간이역이라도 내려주고 태워준다. 마치 후덕한 외할아버지 같다. 오늘은 보고 싶은 동생을 찾아가는 즐거운 여행길이다.
몇 년 전 인애가 하동으로 떠났지만, 시장에 매인 몸이라 이제야 걸음을 하게 되었다. 점이네(인애)가 가까이 있을 때는 도움을 많이 받았다. 틈틈이 와서 대신 장을 봐주는가 하면 청소하고 반찬도 만들어놓았다. 덕분에 늦게 돌아와도 걱정 없이 아이들 챙겨 먹일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웃에서 친자매처럼 지냈으나 살던 집이 재개발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3평 슬레이트집 보상금은 쥐꼬리만 했다. 그나마 목돈을 쥔 김에 딸애 결혼식을 치렀다. 장래를 약속했으나 식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혼자남은 인애는 고심 끝에 하동에서 홀로 사는 이모 집으로 가게 된 것이다. 코스모스축제로 유명한 북천역을 지나 1시간여 만에 하동역에 닿았다. 기다리던 인애가 달려와 “언니!” 부르며 두 손을 꼭 잡는다. 손끝으로 반가운 마음이 진하게 전해온다. “잘 있었니? 보고 싶었다.” 몇 년 만의 해후인가, 그새 더 건강해진 인애를 꼭 껴안았다.
우리는 하동군 마을을 누비는 행복 버스에 올랐다. 싹싹한 도우미가 할머니 짐도 들어주고 정이 넘쳤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에 내렸다. 장터에서 재첩국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인애가 사는 청계마을로 향했다. 집 앞에는 잘 익은 대봉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산자락 작은마을이지만 유독 감나무가 많았다. 전에는 감나무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저녁은 그야말로 시골밥상이었다. 애호박을 볶고, 파전을 부치고, 참게찜 등 푸짐하게 차려 모처럼 배불리 먹었다. (...)
유년의 장마
최금옥 (dhr6611@hanmail.net)
제주도를 시작으로 장마전선이 북상한다고 한다. 무더위도 예년에 비해 맹위를 떨칠 것이고 장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열대야가 먼저 온다는 소식이다. 더운 것보다 차라리 장마가 오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이제 예사가 되어버린 요즘은 봄가을이 실종상태다. 봄인가 싶으면 어느새 선뜻 여름이 눈앞에 있다. 몇만 년의 계절의 순환이 사라질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면 꿉꿉한 날이 이어질 테고 어쩌면 큰비에 농작물이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여차하면 채소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니 미리 김치를 담아 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장마는 요즈음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태양의 열기가 한층 높아져 땅 위의 모든 식물이 제 몸 불리기에 한창일 무렵이면 비가 부슬부슬 쉴새 없이 한 달 내내 내렸다. 어릴 적 기억 속에 장마는 적어도 그랬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를 잡으려 손바닥을 하늘로 뻗으면 간질간질한 촉감이 좋아 친구들과 빗속을 뛰어다녔다. 촉촉이 젖어 집에 돌아오면 말리기도 힘든 옷 버렸다며 엄마에게 혼이 났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고 가슴이 따뜻해진다.
어려서 무엇을 알았겠는가. 장마철이면 어른들에겐 농사 걱정, 비가 새는 지붕 걱정 내가 모르는 일들이 무수히 많았을 테지만 비만 오면 괜스레 신이 났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엄마가 만들어 주시던 찐빵도 맛있었고 사금파리를 부엌 살림살이로 둔갑시켰다. 개망초 꽃을 계란 후라이라며 사금파리 접시에 다소곳이 올려 서로 먹는 척 오물거리던 계란 후라이, 경숙이와 명자랑 소꿉놀이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지금 아이들은 겪어보지 못하는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던 기억이 지금도 너무 또렷하다. (...)
아들과 카디프에서의 추억
최윤실 (myungsim9443@naver.com)
영국 웨일스의 수도 카디프에 유학 중인 아들이 많이 다쳤다는 연락이 왔다. 아버지도 수술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바이에 있는 누나에게 연락한 것 같았다. 딸은 런던에서 유학하는 친구들에게 부탁했지만, 치료 기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연락한다고 했다. 남편과 나는 급하게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다. 급히 나오다 보니 작은 가방을 빼놓고 왔다. 현관을 열고 보니 바로 병풍 옆에 있는 가방을 들면서, 병풍을 바라보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남편과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네덜란드 스키폴공항에서 갈아타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였다. 아들은 카디프 대학교에서 비즈니스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카디프는 웨일스의 수도다. 과거에는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석탄 수출항으로 웨일스의 광산과 연결된 철도로 많은 이득을 본 도시이다. 오늘날은 항구가 없어지고 상업과 행정의 도시이다. 카디프 공항에 도착하니, 선배와 같이 나온 아들은 다리에 깁스하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운동 중에 착지를 잘못하여 발목의 뼈가 으스러졌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응급으로 수술을 하여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을 한 상태였다. 그래도 두 달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밤중에 도착한 집은 땅콩집이라고 하는 똑같은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세련되지 않은 붉은 2층 벽돌집들이 있는 동네는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들은 집을 독채로 빌려서 한국인 한 명과 영국 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우리가 갔을 때는 같이 있던 학생들은 고향으로 가고 없었다. 작은 마당도 있는 집이다. 아들은 참을성도 많고 자상한 성격이라서 주위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아들은 선배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영국은 병원비와 수술비가 모두 무료다. 급한 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므로 위급한 환자가 아니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의료가 무료이기 때문에 발전은 없다고 한다. 의사들은 의학이 선진국인 미국으로 많이 간다고 했다. 아들이 수술한 병원을 찾았을 때 내 느낌은 낙후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국가에서 하는 무료 진료를 하는 대학병원인데 우리나라 병원과 모든 면에서 비교가 되었다. (...)
000 청장에게 책과 서신 보내기
한용유 (hyu1232000@hanmail.net)
지난 7월 28일 나의 졸저 수상록과 아래 편지를 등기 속달로 부쳤다. 000 소장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인터넷으로 현 00소장임을 확인하고 인사 겸 보냈다.
000 소장님께
삼복더위에 소장님의 건승을 축원합니다.
저는 1985년 6월 말 00교도소에서 정년퇴직한 한용유입니다. 찾아뵈옵 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귀가 어두워 대화에 지장이 있을 것 같고 또한 소장 님의 공무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서면으로 결례를 합니다.
아뢰올 말씀은 저가 이번에 수상록이란 이름으로 책을 한 권 냈는데 이 글과 함께 부칩니다. 부록의 회상록에 재직 시의 체험들을 올렸습니다. 소 장님께서 읽어보시고 혹 누가 되는 점은 없는지 살펴보신 후 후배에게나 재소자에게 읽을거리가 된다면 필요한 부수를 알려주십시오. 제가 기증할 까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별지 “주운 돈 이야기”와 같이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아왔 으며 이승을 떠나기 전에 갚고 가기로 작정하고 적금을 넣어 황소 한 마리 값 500만 원을 준비했습니다. 불우한 재소자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고 저의 양심에 속죄가 된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구금과 질병으로 이중 고통 을 받고 있는 재소자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거절하지 않으시면 예금통장 계좌번호를 알려 주시면 송금하겠습니다.
제가 퇴직한 지가 만 30년이 지났습니다. 교도소 홈페이지에서 의무기 술직 채용 공고를 보고 놀랐습니다. 제가 근무할 30년 전에는 교도소 의무 관으로 지원하는 분이 드물어 애를 많이 먹었습니다. 저가 방사선사 면허 가 있어 환자 여과작업을 하느라 의료법 위반을 많이 했습니다. 이제는 의 무관이 상근하니 소장님께서 걱정을 많이 덜게 되어 다행입니다.
끝으로 장마와 더위에 더욱 강건하시고 영광이 있기를 빌면서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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