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29일 오늘의 역사
2020년 코로나 9개월 만에 전 세계 사망자 100만명 넘다
2015년 원로가수 남백송 별세
원로가수 남백송(본명 김지환·80)씨가 지난 29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밀양 출신으로 1954년 19세에 데뷔해 아리랑레코드, 도미도레코드 전속 가수를 거친 남백송은 ‘전화통신’, ‘방앗간 처녀’, ‘죄 많은 인생’, ‘이별의 삼등열차’ 등의 히트곡을 불렀다. 1930년대 노래 ‘처녀총각’을 재취입해 널리 알린 가수이다.
특히 KBS1 ‘가요무대’의 최다 출연 기록을 갖고 있으며 최근까지 백년설 선생기념사업회를 맡아 가요계 발전에 이바지해 왔다. 2009년 신곡 ‘아 인생’을 발표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해오기도 했다
2014년 아슈라프 가니 아마드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취임, 13년만의 정권교체
2010년 할리우드 스타 토니 커티스 별세
1950년대를 풍미한 할리우드 미남 스타 토니 커티스(85)가 2010년 9월 29일 네바다주 자택에서 별세했다. 커티스는 1959년 마릴린 먼로와 공연한 코미디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로 유명세를 탔고, ‘성공의 달콤한 향기’(1957), ‘흑과 백(1958)’ 등 총 12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반항하는 사람(1958)’으로 아카데미상 후보, 시드니 포이티어와 함께 열연한 ‘흑과 백’(1958)으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배우 제이미 리 커티스가 그의 딸이다.
2010년 골디락스(Goldilocks) 행성 ‘글리제(Gliese) 581g’ 발견
글리제 581g. 중심별(항성)로부터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생명체가 살기에 알맞은 이른바 ‘골디락스 영역(Goldilocks Zone)’에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 발견됐다
미국 산타크루즈 캘리포니아대학 연구진은 지구로부터 약 20광년 떨어진 천칭자리의 적색왜성 ‘글리제 581’ 주위에서 발견된 행성 ‘글리제 581g’가 액체 상태의 물이 존재하기에 매우 적합한 거리에 있음을 확인했다고 천체물리학 저널 최신호에 발표했다.
2009년 개신교 원로 김준곤 목사 별세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설립한 개신교 원로 김준곤(84) 목사가 2009년 9월 29일 오전 11시11분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 김 목사의 생전 뜻에 따라 이날 오후 안구적출수술이 실시됐으며, 그의 각막은 시각장애인 2명에게 이식 했다.
1925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48년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광주 숭일중·고교 교목을 역임했다. 57년 미국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이곳에서 CCC 설립자인 빌 브라이트 박사와 교유하며 미국 외에서는 처음으로 58년 한국CCC를 만들었다. 김 목사는 2003년까지 대표를 역임했고 이후 이사장을 맡으며 청년층 복음화에 앞장섰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민족 복음화’란 구호를 내걸고 출범한 한국CCC는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대학생 선교단체로 꼽힌다. 지난 50년간 30여만명의 회원을 배출했으며, 지금도 전국 330개 대학에서 1만65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하용조(온누리교회)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김인중(안산동산교회) 목사와 정정섭(기아대책회장) 두상달(기아대책이사장) 박세환(향군회장) 장로 등이 대표적인 한국CCC 출신 인사로 꼽힌다.
김준곤 목사는 개신교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던 인물로도 평가된다. 그는 66년 3월 김종필 공화당 의장, 김영삼 민중당 원내총무, 김활란 박사, 노기남 대주교 등을 초청해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했으며, 7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부흥성회인 ‘엑스플로 74’를 개최해 사회의 관심을 모았다. 5박6일 동안 계속된 ‘엑스플로 74’는 연인원 32만3400여명이 참가해 광장을 가득 메우는 열기를 보였다. 헌혈과 장기기증에 관심이 많았던 김 목사는 1993년 CCC 여름 수련회에서 1500여명의 학생이 각막을 기증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국민훈장 모란장(2002년)을 받았으며 ‘예수칼럼’ ‘김준곤 문설집’ ‘영원한 첫사랑과 생명언어’ 등의 저서를 남겼다.
2009년 인도네시아 강진 피해
2009년 9월 29일과 30일 남태평양과 인도양에서 잇따라 규모 7.9~8.0의 강진이 발생, 쓰나미와 지진 피해를 입혔다.
인도네시아 서(西)수마트라 주도(州都) 파당 인근에서는 30일 오후 5시16분 (한국 시각 오후 7시16분)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파당 북서쪽에서 53㎞ 떨어진 해저 87㎞ 지점에서 발생했다. 태평양쓰나미경보센터는 지진 발생 직후 인도네시아·인도·말레이시아·태국에 쓰나미 경보를 내렸다가 1시간30분 후 해제했으나 지진으로 파당의 건물과 다리가 무너지고 화재가 발생해 적어도 75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매몰됐다.
남태평양 중부 사모아제도에서는 29일 오전 6시48분(한국 시각 30일 오전 2시48분) 규모 8.0의 강진으로 인한 쓰나미(지진해일)가 발생해 120여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다쳤다. 외교통상부는 한국인 2명이 사망하고 1명이 실종된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숨진 사람은 현지 원양어선협회장인 이인생(62)씨와 교민 신미자(여·45)씨이며, 신씨의 둘째 딸 우모양은 실종됐다. 사모아의 쓰나미로 인근 남태평양 국가는 물론 미국 서부 해안과 일본에까지 쓰나미 경보가 발령됐다. 버락 오바마(Obama) 미국 대통령은 사모아제도 동부의 미국령 사모아를 주요 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복구와 보수를 위한 긴급 연방기금 지원을 승인했다.
2008년 대한민국, 2015년부터 러시아 천연가스 도입 양해각서(MOU) 체결.
2002년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 개막
2002년 9월 29일 부산아시안게임 주경기장 성화대에 불길이 타오르면서, 37억 아시아인의 잔치 제14회 아시안게임이 개막했다. 이날 개막식은 부산시민 등 4만3000여 국내외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회 엠블럼이 그려진 깃발을 든 기수단이 `어서 오이소` 글자를 만들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식전행사로 막이 올랐다.
부산아시안게임 개막식의 주인공은 단연 `코리아`였다. 부산 아시아드 주경기장에 하나로 어우러진 남·북 선수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 박수로 감격을 표시했다. 관중석 곳곳에서 태극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관중석 한편을 차지한 북한 응원단은 인공기를, 부산 시민들로 구성된 부산시민 서포터스들과 조총련계 응원단은 한반도기를 열렬히 흔들며 이들을 맞았다. 공동기수인 황보성일(한국 남자핸드볼)과 리정희(북한 여자축구)가 흰바탕에 파란 색깔의 한반도기를 힘차게 흔들며 600여명의 남북 선수단을 이끌었다.
개막식은 가야국의 왕 김수로가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왕비로 맞은 `2000년 전의 만남`을 주제로 2시간여 동안 진행됐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가 출연하고 수백명의 무희들이 춤을 추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려 아시아인들의 하나됨을 상징한 `아름다운 만남`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는 관중들과 내·외신 기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2000년 포항제철, 민영화 완료.
2000년 신문 시사만화 ‘고바우영감’ 국내 최장기 연재기록(1만4139회) 세우고 연재 중단
김성환 화백이 2000년 9월 29일 ‘고바우 영감’ 신문연재를 접었다. 그간 김화백이 ‘고방우영감’이란 타이틀로 연재한 횟수는 무려 1만4139회. 신문연재만화로는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고바우영감’의 탄생은 1950년 11월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대구에서 발행되던 ‘만화신보’에 연재를 한 것.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 등 매체를 바꿔가면서 50년간 사랑을 받았다.
1932년생으로 경기 개성 출신인 김화백은 경복중 5학년때 18세의 나이로 당시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를 연재, 본격 시사만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대학시절에는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학원’잡지에 연재해 큰 인기를 얻으면서 명성을 얻었다.
‘고바우영감’의 종합일간지 연재는 1955년 2월 동아일보에서 시작됐다. 1970년 3월 연재 5000회를 맞았고 1980년에는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긴뒤 1987년 5월 1만회를 기록했다. 1992년 조선일보에서 정년퇴직한 뒤에는 그해 9월부터 문화일보로 옮겨 연재를 계속해왔다. 김화백은 자유당 말기 경무대의 위세를 풍자한 경무대 똥통으로, 5·16 후에는 엿장수 마음을 그려 한동안 붓은 놓았던 적도 있었다.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마라톤에서 북한 정성옥선수 금메달
1997년 제41차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개막. `핵폐기물 이전` 안전협약 서명
1990년 지역의료보험에 의료비 지원제 도입
1987년 국내전화 1천만회선 돌파
1987년 민주당 김영삼 총재. 김대중 고문, 대통령후보 단일화 실패.
1984년 올림픽 주경기장(서울 잠실) 개장
1984년 북한, 한국에 수재물자 제공
1984년 9월 전국에 대홍수가 있음에 따라, 북한이 북한적십자측을 통해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한국적십자측에서 북측의 수재물자 제의를 수락했다. 처음 북한적십자 측에서는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해 수재민을 위로하고 인수식을 거행하겠다는 등 무리한 요구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우리측에서 요구한 판문점 물자수송에 동의했다.
화물선편은 인천과 북평항에 도착하는 것으로 합의하여 1984년 9월 29일 판문점·인천·북평항(동해항)을 거쳐 수재물자 인수가 시작되었다. 휴전이후 처음으로 북한이 남한에 보낸 쌀자루가 대성동 마을 야적장에 쌓이는 것을 보고, 국민들은 남북한 간 원활한 교류의 단초가 되길 기대했으나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한국적십자는 측은 수재물자 인수를 마치고 트럭 34대분의 카세트라디오·팔목시계 등이 든 답례선물을 전달했다.
1983년 서울,인천 등에 하수도료 첫 부과하기로 발표
서울, 인천, 울산, 경주 등 4개도시 주민들이 10월부터 자기가 사용하는 상수도요금의 평균 32%∼58%에 해당하는 하수도사용료를 부담하게 됐다. 건설부는 1983년 9월 29일부터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도시하수에 의한 환경오염을 막기 위해 하수도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서울은 상수도 요금의 평균 58%, 인천 32%, 울산 44%, 경주 49%의 하수도사용료를 징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각 시-도는 건설부가 정한 평균요율을 기준하여 가정용, 공공용, 산업용 등 업종별 및 사용량 별로 구체적인 하수도사용료, 징수요율을 조례로 정했다. 평균요율을 기준할 때 한달에 25t의 상수도를 쓰는 서울의 가정용 하수도사용료는 한달 약 8백원이었다. 하수도사용료를 징수함에 따라 서울시는 연간 5백50억원, 인천 57억원, 울산 32억원, 경주 4억7천원의 하수도사용료 수입을 얻게되었고, 하수도사용료 수입은 모두 하수도시설 개선에만 사용됐다.
1982년 제일은행 민영화
1981년 농수산부, 5차5개년 농수산부문계획 발표
1980년 제8차 개헌안(제5공화국 헌법) 공고
1978년 소백산천체관측소 준공
1972년 일본-중국 국교정상화
1972년 9월 25일부터 북경에서 시작된 중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이 9월 29일 합의돼 오전 10시20분 인민대회당에서 중일 공동성명 조인식이 거행됐다.
일본측에서는 다나카 수상과 오히라 외무장관이 중국측에서는 주은래 수상과 히붕비 외무장관이 중일 양국어로 기재된 수교문에 각각 서명했다. 이 순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후 계속돼 온 대만과의 외교관계는 끝이 났고 새로운 중일관계가 개막됐다.
공동성명은 전문과 9개항의 본문으로 구성돼 있는데 일본측은 전문에서 `과거 일본이 전쟁을 통해 중국에 중대한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반성한다`고 표명했다.
1971년 인도 오리사주에 태풍 사망 1만 명
1970년 문공부, '오적시'문제삼아 월간 <사상계> 등록취소.
1970년 9월 29일 문화공보부가 월간지 ‘사상계’(思想界)에 “등록 효력을 상실했다”고 통고함으로써 이 잡지가 공식 폐간됐다. 월간지가 자체 인쇄시설을 갖추지 못할 경우 인쇄소의 책임자를 인쇄인으로 등록해야 하는데 사상계가 이 규정을 어겼다는 것이 폐간 이유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1970년 5월호에 게재된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했다는 이유로 사장과 편집인을 구속시켜 발행을 중단시킨 데 이어 명맥만을 유지해오던 사상계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것으로 해석했다.
사상계는 1953년 4월에 장준하가 창간해 1970년 5월의 205호를 마지막호로 폐간될 때까지 주로 비판적 입장을 견지, 발행인이 연행되고 판매 봉쇄, 세무 사찰 등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낸 한국 지성의 산실이었다.
1970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김대중 지명
1970년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김대중씨가 71년 대통령선거의 후보로 지명됐다.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의원의 40대 후보 3명의 경합 끝에 제1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가 추천한 김영삼 후보가 최다 특표자가 됐으나 후보지명의 요건인 과반수를 넘지 못해 2차 투표가 실시됐다. 2차투표 결과 총투표자 8백84명의 과반수인 4백58표를 얻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후보가 됐다. 김영삼씨는 4백10표를 얻었다.
2차투표 직전 이철승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고,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던 비주류계가 이탈해 대세를 뒤집었다. 대통령후보가 된 김대중씨는 후보수락연설을 통해 "앞으로 당이 단결해 선거에서 이겨 정권을 교체하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1969년 경남지구 지하당 사건
1963년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우승(한국,일본,중국,필리핀 참가)
1962년 정부, 인도네시아와 통상협정 조인
1962년 벤 벨라 알제리 초대 총리 취임
1961년 프랑스-튜니지아, 프랑스군의 철수에 조인
1957년 파키스탄 몽고메리서 열차 충돌 사망 250명
1956년 한국참전 16개국 휴전감시위원단 철수결정
1954년 영화인 윤백남씨 사망
우리나라 대중예술을 개척하고 보급시킨 영화인 윤백남씨가 1954년 9월 29일 사망했다. 충남 논산 태생인 윤백남은 경성학당 중학부에 입학, 신(新)학문에 눈뜨게 되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그는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진학, 조선 황실에서 주는 관비장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국비유학생은 정경과목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일제의 방침으로 동경고등상업학교로 옮겨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윤백남은 관심을 문학과 예술로 돌려 일본 현대문학을 섭렵하면서 신파극과 영화에 심취했다. 1912년 일본유학생인 조중환과 극단 ‘문수성’을 창단, 연극활동을 시작했으며, 1922년에는 ‘민중극단’을 설립해 신극운동을 전개하면서 희곡작가로도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문학가로서도 두각을 보여 중국고전 ‘수호지’를 번역하고, 역사소설 ‘대도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활동사진이 보급되자 윤백남은 1923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본격적인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발표하는 등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주요작품으로 영화 ‘운영전’ 소설 ‘흑두건’ 희곡 ‘운명’ ‘야화’ 등이 있다
1950년 시인 김영랑 사망
김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서정시인 김영랑이 1950년 9월 29일 타계했다. 전남 강진의 넉넉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영랑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고 상경해 휘문의숙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만세운동을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이후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서 영랑은 하나의 샘이었다. 김억과 김소월이 그 샘으로 흘러들었고 서정주와 박재삼이 그 샘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시는 `북도에 소월,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섬세하면서도 깨끗한 언어 감각과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잘 다듬어진 시형에 의해 고독한 내면의 세계를 주로 노래했다.
사라져가는 우리의 고유어를 발굴하고 향토어인 전라도 방언을 널리 사용함은 물론 독창적인 조어를 활용하는 등 우리 언어의 미적인 가치를 개발하는데 주력했다. 대표시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마음을 아실 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독을 차고` 등이 있으며, 1935년 `영랑 시집`을 출간했다.
1948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베를린문제를 유엔에 정식 제의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건국(建國) 대사면' 단행
1943년 폴란드 노조 지도자 레흐 바웬사 출생
1938년 뮌헨회담, 주데텐란트 獨양도 합의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자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안전보장을 호소했다. 9월 15일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향후 1주일간 무력 침공을 자제하겠다는 언질만 받아냈다.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체임벌린은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와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체코를 독일에 넘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소리만 했을 뿐 영·불의 합의를 따라야 했다. 힘 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2일의 두 번째 회동에서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즉시’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체코와 영·불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함대까지 동원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최후 통첩을 보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영·불은 꼬리를 내리며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29일 당사국인 체코를 제외시킨 채 뮌헨에 모인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는 밤샘 협상 끝에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영국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함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1935년 조선육상경기협회, 제1회 전국육상경기선수권대회 개최
1923년 국제연맹 위임으로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 개시
1927년 네덜란드의 생리학자 에인트호벤 사망 - 심장의 전기적 성질을 발견한 공로로 1924년 노벨 의학상 수상
1925년 프랑스의 정치가 부르주아 사망 - 국제연맹 결성 추진으로 1920년 노벨 평화상 수상
1913년 디젤엔진 발명가 루돌프 디젤 사망
1912년 발칸동맹 성립
1911년 이탈리아가 터키 침략 트리폴리전쟁 시작됨
1902년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 사망
1901년 미국 핵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태어남
1900년 전신-우편업무 관청 `통신원` 창설
1899년 볼펜 발명(1944년)한 헝가리 출신 아르헨티나 기자 라슬로 비로 태어남,
1896년 (조선 고종 33) 황토현-동대문, 대광통교-남대문 사이 도시계획
1890년 성공회 선교(조선 고종 27년)
1868년 스페인혁명으로 여왕 이사벨라, 프랑스로 망명
1758년 넬슨 영국 해군제독 출생
1547년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 태어남
1504년 (조선연산 10)갑자사화 발생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복위문제에 얽혀서 일어난 사화.
성종비 윤씨는 평소에 질투가 심한데다 왕비답지 못한 행동을 일삼아 1479년에 폐비(廢妃) 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평소에 어머니인 윤씨 사건에 의혹을 갖고 있던 연산군은 1504년에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그의 어머니가 폐위, 사사된 경위를 알고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죽이고 그들의 소생인 안양군․ 봉안군도 귀양보내어 죽였다.
연산군의 포악한 행위를 꾸짖던 인수대비(仁粹大妃 ; 연산군의 조모)는 병상에서 연산군에게 맞아 죽었다.
그 사건에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을 처형하는 한편, 폐비사건 당시의 대신 들이었던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호온(南孝溫) 등 죽은 사람 까지도 부관참시(剖棺斬屍) 하였다.
또 윤씨를 다시 왕비 자리에 복위시켜 성종묘(成宗廟)에 배사(配祀)코자 하는 일에 반대하던 권달수를 처형하고, 이행을 귀양 보냈다.
이러한 참화가 갑자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자사화라 한다.
1352년 고려, 조일신(趙日新) 난을 일으킴
414(고구려 장수왕 2) 광개토왕비 세움
만주 지안현 통구(지금은 지린성 지안시 대왕진)에 있는 광개토왕의 비석으로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것이다. 원래의 명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婢)이며 우리나라 최대의 비석이다. 중국, 일본에서는 호태왕비(好太王碑)라 부른다.
비석 높이5.34m 너비1.5m로 우리나라 최대, 비석 첫 면 11줄 둘째 면 10줄 셋째 면 14줄 넷째 면 9줄 한 줄 41자로 총 1804자의 글 새겨져 있음, 그 내용은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에 관한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