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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인도네시아 축구장서 팬들 난동..174여명 사망
인도네시아에서 충격적인 축구장 난동이 발생해 174여명이 사망했다.
이번 사태는 인도네시아 동부 자바에서 열린 프로축구 경기 과정에서 발생했다.
오랜 라이벌 간 경기에서 홈 팀이 패하자 이에 분노한 팬들이 갑자기 경기장으로 난입하기 시작하자 출동한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경찰의 과잉 진압을 피해 도망치려던 군중들이 울타리와 관중석 등에서 뒤엉키면서 참사가 벌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사망자 대부분은 인파에 깔리거나 질식하여 사망하였다
2022년 북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 2발 발사
2021년 국군의 날 기념행사 역대 최초로 경북 포항에서 해병대 주관 실시
2019년 화성 연쇄살인범 이춘재 자백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이춘재(56) 씨는 화성사건을 포함해 모두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강간미수 등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는 군대에서 전역한 1986년 1월부터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해 검거된 1994년 1월까지 8년 사이에 40여건에 이르는 강력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토록 꼬리가 길었음에도 이 씨는 화성사건의 7차 사건과 9차 사건 사이(8차 사건은 모방범죄)인 1989년 9월 26일 벌인 강도미수 건으로 경찰에 붙잡혀 200일 동안 구금됐던 사실을 제외하면 단 한 차례도 검거되지 않았다.
이 씨가 번번이 수사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6차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족적과 이 씨의 것이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 사건의 증거물에서 확보한 범인의 체액을 분석해 범인의 혈액형을 B형으로 판단했지만, 이 씨는 O형인 탓에 또다시 자유의 몸이 됐다..
마지막 피해자인 이 피해자는 이 씨의 처제로 그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 자신의 집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둔기로 수차례 때려 살해했다.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이 씨는 범행을 저지르고 밤을 새워 증거물을 치웠다"며 "현장 감식 과정에서 가까스로 화장실 문고리와 세탁기 밑 장판에서 피해자의 혈흔을 발견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씨의 혐의를 밝혀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메덕 호텔 32층에서 노천음악회 향해 총기난사 사망 58명 부상 5백명 이상 부상, 범인 페덕은 범행직후 자살
2012년 영국 진보적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폐렴으로 세상 떠남(95세)
2010년 부산 해운대 38층 오피스텔 화재
부산 해운대구 우동 마린시티(옛 수영만매립지) 내 주거용 오피스텔 ‘우신골든스위트(38층)’에서 2010년 10월 1일 화재가 발생했다. 오전 11시 30분쯤 건물 4층에서 발생한 불은 20여분 만에 건물 외벽을 타고 38층까지 솟았다. 화재발생 1시간 30분 쯤 발화지점의 불길은 진화되었으나, 잔불이 다시 옮겨 붙어 16시가 되서야 진화되었다.
이날 화재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초기 대응에 소극적이었고, 건물 관리실에서 적극적 화재 진압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또한 화재 대피 안내방송이나 화재경보기의 경보음도 울리지 않는 등 관리에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이번 화재는 건물 외벽이 외관을 살리기 위해 강화유리뿐 아니라 인화성 페인트와 필름을 담고 있는 가연성 알루미늄 패널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고층건물에서 건축물 아래와 윗부분의 내부와 외부 온도·기압 차이로 인해 건물 내부 공기가 굴뚝과 같은 긴 통로를 따라 쭉 밀고 올라가는 ‘굴뚝효과(stack effect)’로 인해 불길이 급속도로 번졌다.
2009년 북한 주민 11명 동해상에서 귀순
2009년 10월 1일 북한 주민 11명이 동해상에서 귀순했다. 어린이 2명을 포함해 남성 5명, 여성 6명으로 이뤄진 이들은 1일 오후 6시30분쯤 해군과 해경에 귀순의사를 밝히고 강원도 주문항 인근으로 안내됐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군 육상레이더 기지에서 이날 오후 3시48분쯤 이들의 접근 사실을 포착, 해경에 통보했으며 해경은 곧바로 북한 선박에 접근해 귀순의사를 파악하고 강원도 주문진항 인근으로 안전하게 유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마선(傳馬船.소형 고기잡이 배)이라 불리는 목선은 북측 경비정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동해 먼 바다로 항해한 뒤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우리측 동해안으로 접근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주민 11명은 국정원, 국방부, 해경 등 합동 조사반에 의해 귀순 경위 등을 검증했다. 이들은 이날 우리 측으로 넘어온 뒤 일차적으로 귀순의사를 밝혔지만, 관계기관들은 합동조사를 통해 귀순 의사를 재확인하는 한편 정확한 귀순 경위를 파악했다.
한편 당국의 발표와 주민 진술이 엇갈려 군의 경계태세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주민 노모(30)씨는 “오후 5시51분쯤 주문진항 북방 1㎞ 해안에서 이상한 선박을 목격한 뒤 6시1분 114 안내를 받아 해경에 신고했다”며 “오후 6시20분쯤 해경 경비정이 나타나 선박을 수색하고 이어 해군이 출동했다”고 말했다
2007년 파키스탄에 무샤라프 재집권 반대 자살폭탄테러 사망 16명
2005년 청계천 복원공사 2년 3개월만에 완공, 개통
2005년 인도네시아 발리 폭탄테러 26명 사망
2000년 제27회 시드니 올림픽 폐막
제27회 시드니올림픽이 2000년 10월1일 11만7000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쉬운 막을 내렸다. 남자 마라톤 시상식이 끝난 뒤 열린 폐막식은 그리스를 시작으로 각국 올림픽위원회의 깃발이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시드니 시장이 올림픽기를 아테네 시장에게 넘긴 뒤, 17일간 주경기장인 스타디움 오스트레일리아를 밝히던 성화가 서서히 꺼졌다.
1956년 멜버른 대회 이후 44년 만에 남반구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은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이 여전히 스포츠 강국임을 입증한 무대였다. 뉴 밀레니엄 첫 올림픽에 걸맞게 남북한 동시 입장과 동티모르 출전 등 스포츠를 통한 화합에도 기여했다.
미국과 러시아, 중국이 각각 금메달 39-32-28로 1위-2위-3위를 차지했고 한국은 금메달 8개, 은메달 9개, 동메달 11개로 종합 12위에 머물러 당초 목표에 미달했다. 북한 역시 기대했던 역도-유도-체조 등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 1980년 모스크바 대회 이후 20년 만에 노골드의 수모를 당했다.
2000년 전자서명법, 미국에서 정식 발효
수천년동안 사용된 종이와 잉크 대신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전자우편에 서명한 것도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갖게 하는 ‘전자서명법’이 2000년 10월 1일부터 미국에서 정식으로 발효됐다.
외신들은 전자서명이 법적인 구속력을 갖게 되면서 온라인을 통해 전자서명을 하는 것이 웹사이트에서 책이나 음반구입뿐만 아니라 주택-자동차 매매를 위한 계약을 체결하거나 변호사를 고용하는 등의 업무에도 앞으로 빠르게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자서명법의 발효는 또 각종 거래계약의 절차를 단순화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눈덩이처럼 규모가 커지고 있는 전자상거래의 폭발적인 성장을 초래할 전망이다. 특히 지난 수년간 보험, 은행, 증권 등 금융산업 종사자들은 전자서명이 법적 구속력을 갖게 될 경우 자신들의 업무가 엄청나게 줄어들며 효율성이 증대될 것이라는 전제아래 관련법의 시행을 강력히 촉구해 왔었다.
1998년 정부기록보존소, 구월산유격대 기록 공개
6.25 전쟁당시 비정규 유격부대의 조직 편제와 활동상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평가되는 구월산유격대에 대한 자료가 정부기록물 정리과정에서 처음으로 발굴돼 1998년 10월 1일 공개됐다.
정부기록보존소가 공개한 문서는 부대편성표 1권과 부대원명부 3권 등 모두 4권으로 돼있다. 문서에는 미극동군사령부가 대북첩보 공작에 활용하기 위해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활약하던 유격대를 통합, 창설한 극동군사령부 연락파견대(제8240부대)의 연대편제표와 부대규모, 지휘관 명단과 함께 구월산 부대원 등 유격대원 3천3백29명의 신상명세서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또 낙하산과 소총이 어우러져 있는 유격대원 표식과 독수리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는 모양으로 된 낙하산침투 공로기장 등 침투방식에 따라 다른 공로기장의 실물이 첨부돼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구월산 유격부대는 1950년 12월7일 황해도 은율군 장연에서 김종벽(金宗璧)대위를 부대장으로 창설한 연풍부대를 모태로 6.25 직후부터 반공유격활동을 전개하다 1951년 3월초 구월부대로 개편됐다.
1998년 제3차 북미 미사일 회담(뉴욕, ~10.2)
1997년 훈민정음과 조선왕조실록,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 최덕근 영사 피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 총영사관의 최덕근(54)영사가 1996년 10월 1일 오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 자신의 아파트 3층 계단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흉기로 습격당해 현장에서 사망했다.
우리 외교관이 해외에서 살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북한이 1996년 9월 27일 강릉 해안 무장간첩 소탕작전을 ‘학살’이라고 비난하면서 “백배 천배로 보복하겠다”고 위협한 후 발생해 북한의 소행 여부가 주목됐다.
최 영사는 이날 블라디보스토크의 한국 식당 코리아 하우스에서 한국에서 온 방문객과 현지 대학관계자와 저녁식사를 마친 뒤 귀가도중 살해됐다. 그는 러시아 전문가로 러시아어에 능통해 1993년부터 1995년 12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근무하다 1996년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다. 특히 북한 문제가 전공으로 북한의 납치·테러 등에 대비한 현지 교민 보호업무 등을 주로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블라디보스토크 현지에서는 치안상태가 불안할 뿐 아니라 우리 외교관 등에 대한 북한 요원들의 위협이 적지 않게 발생해 그는 현지 경찰과 정보기관과의 연락 업무도 담당했다. 점잖은 성격에 꼼꼼한 일 처리 솜씨를 평가받았다
1994년 KBS 1TV 광고 폐지, 시청료징수 시작
1994년 팔라우, 미국으로부터 독립
1990년 한국-소련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합의
1987년 우리나라, 세계저작권조약(UCC) 가입
우리나라가 1987년 10월 1일 세계저작권조약(UCC : Universal Copyright Convention)에 가입했다. 이 조약은 문학, 음악, 미술 및 지적인 작품을 포함한 저작물에 관해 저자와 저작권을 가진 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국제조약이다.
1952년 유네스코 제창에 의해 성립돼 1955년 정식 발효된 UCC는 `저작권은 작품이 완성되면서 발생한다`는 베른조약과 `저작권은 납본 등의 절차에 의해 발생한다`는 범미조약간의 이견을 조정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탄생했다.
세계저작권조약은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 외국인이라도 자기나라에서 보호받는 것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 보호하고 조약가입 이전에 나온 저작물에 대해서는 보호의무가 없는 불소급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저작권은 복제에 의한 저작물 판매나 배포, 즉 출판 또는 발행을 못하도록 보호하는 권리로 이전성(移轉性)도 포함하고 있다. 1차 저작물은 원저작자가 저작권자가 되며, 개작·편집·번역 등에 의한 저작물은 2차 저작물을 작성한 자가 저작권자가 된다.
1985년 KBS TV 음성다중방송 실시
1985년 이스라엘 튀니스의 PLO본부 공습 사망 170여명
1982년 CD(콤팩트 디스크) 플레이어 발매 시작
1982년 서독하원, 슈미트수상 불신임안 가결. 새수상에 헬무트 콜 기민당수 선출
1981년 동서독, 대규모 간첩교환
1980년 중국항공기, 미국-중공(시애틀~북경)간 첫 취항
1978년 투발루,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8년 국기강하식 개시
1975년 무하마드 알리, 조 프레이저에게 14라운드 TKO 승
1973년 유엔정치위, 남북한 무조건 동시초청안 가결
1972년 「문학사상」 창간
1971년 `퇴폐풍조` 단속 (장발족 일제단속)
1971년 10월 1일 윤주영 문화공보부장관이 1일부터 내무, 법무, 보건사회, 문화공보부가 합동 단속으로 풍속사범을 단속한다고 발표했다.
1일부터 8일까지를 제1차 단속기간으로 정한 정부는 1.장발, 히피성향, 보디페인팅 2.음화, 음서, 백색음란,도색영화 3.비밀댄스홀, 카바레 등의 아르바이트행위를 집중 단속했다.
장발 단속 등의 풍속사범 단속은 1982년 1월 전두환 대통령이 야간통금 해제와 교복자율화를 발표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1969년 영-불 공동 개발한 여객기 `콩코드` 세계최초로 초음속 비행
영국과 프랑스가 공동개발한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1호`가 1969년 10월 1일 9분동안 마하1을 넘은 비행을 기록, 3월 2일 첫 비행이래 처음으로 음속을 넘어섰다. 45번째 비행만이었다.
1970년 11월4일 1백2번째 시험비행에서 마하 2(시속 2천1백55km)의 굉속으로 53분간 수항하는 기록을 세웠다. 영국과 프랑스의 화합을 상징하는 `콩코드` 프로젝트 출범 18년 만의 개가였다. 이제까지 더글러스 DC8 여객기가 강하비행중 음속을 돌파한 적은 있어도 수평비행에서 마하1을 기록한 여객기는 콩코드가 세계최초였다. 소련의 초음속 여객기 Tu144는 이미 비행테스트를 개시했지만 아직 음속을 넘지는 못했다.
초음속여객기는 미국에서도 국가적 사업으로 콩코드보다 크고 더 빠른 보잉2707 여객기 개발이 진행됐지만 1972년 봄에야 비행에 성공했다. 콩코드는 1976년 1월 21일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1965년 합동통신 국내 최초로 해외송신 개시
1965년 인도네시아 1965대학살 시작됨 희생자 공식발표 8만 7천명, 실제로는 10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
1964년 세계최초 고속전철 신칸센(新幹線) 개통
일본 국철이 5년반의 기간동안 3천8백억엔의 비용을 들여 건설한 동해도 신칸센이 1964년 10월 1일 개통됐다. 신칸센은 세계최초로 개발된 고속전철로 동경올림픽에 맞춰 도쿄에서 오사카간 운행을 개시했다.
신칸센은 전후 급속하게 증가해가는 동해도 본선의 수송량을 분산할 목적으로 구상돼 1957년 일본국유철도간선조사회가 설치된 후 본격적으로 심의에 들어가 1958년 국무회의에서 건설을 결정했다.
처음에는 시속 200Km로 운행했으나 1997년부터 신차종 `JR 500`을 투입해 시속 300Km로 운행하고 있다. 신칸센은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도카이도선(東海道線) 이외에 1972년 3월에 개통한 산요선(山陽線), 1982년 6월에 개통한 도호쿠선(東北線)이 있다
1963년 한국신문연구소 발족
1963년 알제리아 벨라대통령, 모든 프랑스인소유토지의 국유화 선언
1962년 한국-파나마, 국교 수립 발표
1962년 네덜란드, 34년간의 서부 뉴기니아 통치 종식
1962년 동경서 한국 등 21개국 참가 아시아반공대회 개막
1962년 사이프라스와 문화교류협정 체결
1962년 한국-가봉, 국교수립
1961년 미 프로야구 선수 로저 매리스, 연간 61홈런 신기록 수립
1960년 나이지리아, 영국으로부터 독립
1960년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소파상 받음
1959년 세계은행총회, 제2세계은행 설립 가결
1958년 한국-태국, 국교수립
1958년 미국 항공우주국(NASA) 발족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1958년 7월 29일에 서명한 `국가항공우주법`에 의해 1958년 10월 1일 NASA(미국 항공우주국)가 발족했다. NASA의 모체는 지난 43년간 항공기술 연구를 지도해 온 NACA(미국 항공자문위원회)였다. NASA가 발족된 이날 해군조사연구소로부터 뱅가드 계획과 스탭 150명, 또 육군으로부터 달 탐사기, 공군으로부터 로케트 엔진계획이 각각 NASA에 이관됐다. 미국은 이로써 소련과의 본격적인 우주개발 경쟁에 뛰어들었다. NASA는 우주개발과 군사활동을 분리, 평화적 국가프로젝트를 실행하기 위한 독립기관으로 만들어져 `아폴로계획` `스페이스 셔틀계획`을 추진했다.
1957년 일본, 유엔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선출
1956년 제1회 국군의 날
정부가 국군의날을 10월1일로 정한 것은 1956년 9월21일이다
그 이전까지 각 각 치르던 각군의 기념일을 단일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자 대통령령으로 지정한 것이다
10월1일은 6.25전쟁때 3사단 23연대가 강원도 양양지역에서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이다
국군의날 지정과정에서 보듯 이날은 국군창설일은 아니지만 기념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국군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미군정하의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정식 발족되면서 시작된다
발족 후 곧바로 경비대 가운데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편입된다
다음해인 1949년 4월15일에는 진해에서 해군 예하부대의 하나로 해병대를 창설했으며 그해 10월1일 육군항공대에서 공군이 독립해 3군체제가 정립되었다
국군의 날은 국군의 위용과 전투력을 과시하고 장병들의 사기를 고양하는 뜻깊은 날이다
1955년 해방10주년기념 산업박람회 개최
1953년 미국의 화가 존 마린 사망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
6ㆍ25 휴전협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이승만 대통령의 고민도 한층 깊어졌다. 휴전회담을 깨고 북진통일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휴전반대를 무기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미국으로부터 분명한 안보공약을 얻어낼 것인지... 단독으로 북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이승만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안전보장이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미국도 안보공약의 필요성은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전쟁위험이 상존하는 이 지역에 발이 묶일 것을 경계했다.
그들 손에는 3장의 카드가 놓여있었다. 이승만을 축출하는 안과 유엔사령부 철수안은 채찍이었고 휴전협정을 준수한다는 조건하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안은 당근이었다. 그들은 당근을 선택했다.
이즈음 미국의 기대를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이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자신의 협상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이승만의 고단수 전략이었다. 당황한 미국은 특사를 파견해 의견을 좁혀나갔다.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는 덜레스 미 국무장관까지 달려와 최종안을 조율했다.
마침내 1953년 10월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미 워싱턴에서 조인됐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200만달러 상당의 경제원조를 제공받고 한국군 20개 사단병력을 증강한다는 계획을 승인받은데 비해 미국이 얻은 것은 이승만이 작성한 ‘휴전 불방해’ 친서 한 장 뿐이었다.
1951년 대한신문 발족
1950년 유엔군, 38선 돌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1월에 공산당 세력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가 총통직을 사임하고, 곧이어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베이징과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까지 점령함으로써 일본 패망 후 본격화됐던 국ㆍ공내전도 막을 내렸다. 공산당이 새로운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각계대표를 소집, 9월21일부터 열흘간 베이징에서 인민정치협상회의를 열어 국기ㆍ국가를 제정하고 신정부의 요직을 구성했다. 마오쩌둥,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핵심인사였다.
구름 한점없이 쾌청했던 1949년 10월1일, 천안문 누상(樓上)에는 마오쩌둥의 거대한 사진이 걸려있었고 군중들로 가득한 광장 곳곳에는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오후 3시, 마오쩌둥이 누상위로 오르자 오성홍기가 게양되고 의용군행진곡이 광장에 울려퍼졌다. 이윽고 마오쩌둥이 입을 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늘 여기에 수립됐다.” 새로운 정치실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49년 유엔총회, 한국단독초청안 가결
1948년 한글전용법 국회 통과
1947년 방송호출부호 HAKA Z까지로 변경
1946년 대구 10.1 사건(대구 10월항쟁) 발생
미군정의 실정과 식량난, 좌익의 극좌주의적 모험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 해방공간에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대구폭동사건이 1946년 10월 1일부터 시작됐다.
이날 전평의 9월 총파업 지시로 전평 경북도평의회는 파업을 알리는 현판을 걸려고 했다. 경찰의 해산으로 이날은 무사히 지나갔으나 다음날 노동자 피살 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대구는 물론 경북 전역이 술렁거렸다.
경북대를 비롯한 학생시위대가 대구경찰서 앞에서 연좌데모를 시작하면서 시위대가 1만여명으로까지 확대됐다. 다급해진 한 경찰이 방아쇠를 당기자 그것을 신호로 착각한 경찰이 발포를 시작했다. 18명이 현장에서 쓰러지자 피를 본 시위대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가족들을 구타하는 등 시위가 격렬해지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구를 벗어나 영천, 의성, 군위, 왜관 등으로 이동하며 무장투쟁을 선도했다. 아비규환이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폭동참가자가 2백30만명, 살해된 사람수가 수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구에서 사망한 경찰관 만 54명이고, 부상자만 2만여명에 달했다.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 판결(독일 전범 12명에게 교수형 판결)
1945년 조선체육회 발족(회장 이병학)
1942년 조선청년특별연성령 공포(17세~21세까지 훈련 실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발생
1942년 10월 1일 이극로ㆍ최현배ㆍ이희승ㆍ정인승 등 조선어학회 핵심 회원 11명이 갑자기 들이닥친 일제 경찰에 체포돼 서울 종로경찰서와 경기도 경찰부 유치장에 수감됐다. 왜 잡혀 왔는지 영문도 모른채 이들은 하루밤을 지낸 후 다음날 저녁 열차에 태워져 함경남도 홍원경찰서로 압송됐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고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달 21일 이병기ㆍ김선기 등이 서울에서 검거됐고 부산 동래에서 김법린이 체포되는 등 탄압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어 안재홍ㆍ이인ㆍ이은상 등이 추가로 붙잡히는 등 조선어학회 관계자의 검거 선풍은 해를 넘겨 4월초까지 계속됐다. 당시 대표적인 조선어 연구자와 후원자 33명을 수인(囚人)으로 만든 발단은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해 여름 함흥 영생고등여학교의 한 학생이 기차 안에서 불온언동으로 심문을 받았는데 일제 경찰은 이를 꼬투리로 이 학교 교사였던 정태진을 체포했다.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아보던 정태진이 고문에 못이겨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위 자백하는 바람에 불똥은 조선어학회 회원 전체로 번진 것이다.
일제 경찰은 조선어학회가 조선어사전 편찬을 통해 조선인의 민족정신을 높임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중봉기를 통한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라고 몰고 갔다. 끝없이 지연되는 수사와 심문 끝에 조선어학회 관계자들에 대한 예심은 2년 만인 1944년 9월말에야 끝났다.
그러나 가혹한 고문과 추위, 굶주림에 못이겨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원 중 12명이 재판에 회부돼 1심에서 이극로(징역 6년), 최현배(징역 4년), 이희승(징역 2년6개월), 정인승 정태진(이상 징역 2년) 등 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 프랑코, 스페인 국가주석 취임
1935년 철도박물관 개설
1935년 일제 조선인에 대해 징용 실시, 1945년까지 45만 명 끌어감
1935년 경성중앙전화국 최초로 자동전화교환기 설치 9,038명 가입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 준공
1926년 나운규감독 영화 `아리랑` 단성사에서 개봉
초기 한국 영화 걸작 `아리랑`은 1926년 4월말 안암골(지금의 서울 안암동)에서 첫 촬영에 들어갔다. 당시 안암골은 기껏 초가집 십여 채만 있는 산골이었다. 풍년 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찍기 위해 엑스트라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 무려 800명이나 몰려들었다.
추운 날씨에 고생을 덜기 위해 술을 대접했는데, 취한 엑스트라들이 싸움을 벌여 난장판이 됐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자 나운규는 극장 직원들에게 고깔을 씌우고 징과 북을 두들겨가며 춤추게 했다. 이를 보고 모두들 함께 춤추기 시작했고 나운규는 이 장면을 찍어 영화에 삽입할 수 있었다.
`아리랑`은 촬영 기간 4개월에 제작비 1200원을 들여 천신만고 끝에 촬영을 끝내고 1926년 10월 1일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꽤 인기를 끌었지만 처음부터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말인가"하는 가사가 문제되어 전단 1만장이 압수되기도 했다. 당시 단성사는 하루에 한번, 오후 7시에 영화를 틀었는데 `아리랑`은 5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어 지방에서 수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며 장장 5년간에 걸쳐 최고 흥행작으로 손꼽힐 정도로 빅히트를 기록했다.
나운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까지 맡은 연출 데뷔작 `아리랑`은 한국 영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전까지의 감상적 신파 영화와는 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피폐한 농촌 삶을 사실적으로 다뤄냈고 사이 사이에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았다. 영화 미학적으로도 서구 몽타주 이론을 적극 소화해 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에는 한국영화 제작이 3편에 불과했지만,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되어 다음해에는 무려 14편이나 만들어졌다.
1925년 페르시아의 카쟐왕조 멸망
1924년 미국의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 출생
1923년 영국의회, 자치령 제국의 외국과의 조약체결권을 승인
1922년 경성시립도서관 개관
1920년 총독부, 전 사법관에 법복 착용을 지시
1918년 조선 식산(殖産)은행 설립
1917년 면(面)제 시행
1914년 최남선, 대중계몽잡지 `청춘` 창간
1910년 조선총독부 설치, 초대 총독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임명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가 1945년 패망할 때까지 무력(군대와 경찰)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식민통치를 수행하고 민족운동 탄압과 수탈을 총지휘한 최고의 식민지배 통치기구였다. 조선총독부는 다른 식민지 사회와 달리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한 총독을 정점으로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식민지 조선사회에 이식함으로써 민족차별을 구조화하고 관료제의 비대한 발달을 초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중에 일본 내각은 한국에 대한 단독 보호를 결정하였다. 그리고 한국의 주권을 탈취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일제는 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시켜 군사상으로 필요한 지점을 일본군이 강점하는 한편, 한국의 치안을 일본군이 맡는 군사경찰을 시행하였다.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 후 통감부가 설치되고, 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다
통감부가 한국민족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일본 군대와 헌병을 증강하여 군사적 지배를 강화해나갔다.
1907년 7월 고종 양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체결, 군대 해산, 그리고 10월의 경찰권 장악 등을 거쳐 1909년 7월 6일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실행에 관한 건」을 의결하고, 천황의 재가를 받았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공포한 일제는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1908년 포드자동차 `T카` 생산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포드자동차의 `T카`가 1908년 10월 1일부터 생산되기 시작했다. `T카`는 당시 미국에서 대당 1천달러 이하의 차가 전무한 상황에서 대당 850달러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판매해 자동차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T카`는 가격이 저렴할 뿐만아니라 견고성과 실용성에서도 뛰어났다. `T카`의 또다른 특징은 간결한 설계와 튼튼한 차체구조였다. 4기통 20마력이라는 당시로서는 힘 좋은 엔진을 탑재했다. 운전조작이 용이하고 설계가 표준화되어 있어 초보자라도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었다.
1908년 학회령 실시(한일학회의 단속강화)
1907년 기상관측 시작
1904년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출생
1903년 미국 프로야구 제1회 월드시리즈 개막
1884년 독일-소련-오스트리아 3제(帝), 폴란드에서 회담. 독일-소련 밀약 성립
1882년 게룬 국제금은양본위회의 개최
1791년 러시아의 소설가 악사코프 출생
1728년 미국 정치가 로버트 리빙스턴 사망
1924년 지미 카터 미대통령 태어남
168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6세 출생
1593년 임진왜란으로 피란간 선조 한성으로 환도
1542년 서애 유성룡 출생
1105년 고려, 숙종 사망, 예종 즉위
331년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페르시아 대왕 다리우스 3세의 최후 결전-가우가멜라 전투
6년 신라, 일식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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