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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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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게시판 스크랩 삼척(공양왕릉)
貫默(徐一洙) 추천 0 조회 90 10.06.07 11: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척(공양왕릉) 

 

 

삼척(三陟) / 공양왕릉(恭讓王陵) 

 

 

                                          삼척(三陟)  공양왕릉(恭讓王陵)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위치하며,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 공양왕릉은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고 있는데,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4년(1392) 7월에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어 감시하다가, 다시 왕과 맏아들 왕석(王奭)과 둘째 아들 왕우(王瑀)를 간성으로 옮겼으나, 역시 불안하여 태조3년(1394) 3월14일에 3부자를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한달 뒤인 4월17일에 그들을 모두 죽였다.

 

공양왕이 이곳에 귀향와서 죽어 묻혔던 것으로 전해지나, 그후 경기도 고양시 식사리[속칭 언침] 대자산으로 옮겨갔다고도 한다. 현재 그곳에는 공양왕릉과 왕비릉이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3년(1421) 1월13일에 공양왕의 왕녀[단양군 이성범의 처]가 임금에게 상소하여, 아버지를 공양왕으로,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하고 공양왕릉을 정릉(定陵)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헌종3년(1837)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개축하였으며, 1977년 당시 삼척군수와 근덕 면장의 노력으로 묘소들이 개축, 보수되어 새롭게 단장되었다. 이 능(陵)에서는 근덕면 봉찬회에서 매년 제사 지내고 있다.    <안내판에서>

 

  

                                    ~~~~~~~~~~~~~~~~~~~~~~~~~~~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공양왕릉은 강원도 삼척시와 경기도 고양시 두 곳에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데, 문헌의 기록이 부족하여 어느 쪽이 왕릉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고양시의 능은 조선 왕조가 인정하고, 삼척시의 능은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나 둘 다 조선시대 문헌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삼척시 왕릉에 대한 기록은 현종3년(1662) 삼척부사 허목의『척주지』와 철종6년(1855) 김구혁의『척주선생안』이 있다. 그리고 공양왕릉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공양왕과 관련된 지명이 전해지는데 임금이 유배된 곳이라 하여 궁촌, 마을 뒷길 고돌산에서 살해되었다고 하여 살해재, 왕자 석이 살았다는 궁터, 말을 매던 마리방 등이 그것이다. 
<문화재청>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삼척의 공양왕릉은 1995년 9월18일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봉분이 모두 4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었는데, 가장 남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 오른쪽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제향(祭享)  <자료사진>

 

이 능(陵)에서는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봉찬회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공양왕의 봉제(奉祭) / 공양왕과 왕비 두 분의 제물 <자료:강원데일리안>

 

공양왕(1345~1394)의 봉제(奉祭)는 1394년 음력 4월17일 살해된 날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

 

능의 규모는 지름이 13m 정도이며, 능 앞에는 길이 107cm, 너비 63cm의 자그마한 상석(床石)이 1개가 있습니다.

 

          

                                  공양왕릉(恭讓王陵)과 왕자의 무덤(완쪽 위)

 

                       

                                                       능 앞의 상석(床石)

 

                        

 

          

 

오른쪽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그 옆의 무덤은 왕자의 무덤, 제일 왼쪽의 석축이 없는 무덤이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전합니다. 

 

          

 

오른쪽에 석축을 돌린 큰 무덤이 보이고, 그 옆쪽에 작은 무덤이 2기 보입니다. 이 분묘들이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공양왕의 무덤이고 그 옆과 바로 앞에있는 2기는 왕자의 무덤,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주위 산들의 능선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봉분의 곡선

 

          

                    왼쪽의 것은 왕자의 무덤, 오른쪽 위의 것은 시녀 또는 말의 무덤 

 

                       

                                                   무덤에서 내려다 본 입구

 

 

 

 

참고자료

 

▶ 삼척 공양왕릉(三陟, 恭讓王陵)에 관한 이야기

 

 종목 : 강원도기념물 71호

 명칭 : 공양왕릉(恭讓王陵)

 분류 : 묘

 수량 : 일원 3,203㎡

 지정일 : 1995.09.18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삼척시

  

강원도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된 이 무덤은 일명 궁촌왕릉(宮村王陵)으로 불리고 있으며, 궁촌리 추천 고돌재(고돌치)의 동편에 위치한다. 삼척에서 남으로 약 16km 정도 가면 동막리를 지나 '사래재'라는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면서 바다 쪽을 건너다보면 큰 소나무가 외로이 서 있고 그곳에 석축굽을 돌린 큰 무덤이 보이고 그 옆과 앞에 작은 무덤이 2기 보인다. 이 분묘들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과 그의 아들 왕석, 왕우 등 3부자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공양왕 4년 7월에 이성계가 즉위하고 8월에 전왕을 폐하여 공양군으로 봉하고 강원도 원주로 보내어 감시하다가 다시 왕과 장자인 왕석과 차자인 왕우의 3부자를 간성으로 옮겼으나, 역시 불안하여 태조 3년(1394) 3월 14일에 그 3부자를 삼척군 근덕면 궁촌리로 귀양지를 옮겼다가 한달 뒤인 4월 17일에 그들을 모두 죽였다.

 

현재 궁촌 뒷재인 '사랫재'(살해재의 음전으로 추측)와 '마리방'(말을 기르던 곳)이란 지명, 그리고 '궁촌'이라는 마을명과 '궁터'라는 지명 등은 공양왕 및 그의 자식들과 깊이 관련된 지명으로 추측된다. 공양왕이 이곳에 귀양와서 죽어 묻혔던 것으로 전해지나, 그 후 경기도 고양군 식사리(속칭 언침) 대자산으로 이묘해 갔다고도 한다. 현재 그곳에는 공양왕릉과 왕비릉이 사적 제1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 3년(1421) 1월 13일에 공양왕의 왕녀(단양군 이성범의 처)가 임금에게 상소하여 아버지를 공양왕으로 어머니를 왕비로 추봉하고 공양왕릉을 정릉(定陵)으로 정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헌종 3년(1837) 정유년 가을에 삼척 부사 이규헌이 개축하였으며, 1977년 당시 삼척 군수와 근덕면장의 노력으로 묘소들이 개축·보수되어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이 묘소의 제향은 근덕면 봉찬회에서 매년3월에 택일하여 봉제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恭讓王)은 1392년 7월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그해 8월 공양군으로 강등된 채 강원도 원주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옮겨 집니다.

조선왕조 개국 1년 후인 1394년 3월 14일 공양왕은 왕세자 석(奭)과 둘째왕자 우(瑀)와 함께 삼척(궁촌리)으로 옮겨지고, 이 때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과 동해안 염장관(소금생산 감독관) 박중질(朴仲質) 등과 함께 삼척 울진지역의 인사들이 공양왕 복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양왕을 추앙하는 고려의 유생들과 군사들이 각지에서 궁촌리로 모여 들었고, 그 세력은 점점 커졌으나 거사를 일으키기 전에 관군에 의해 진압되고, 공양왕은 삼척으로 유배온지 한달 뒤인 4월 17일 두 아들과 함께 역모죄로 살해됩니다. 왕명을 받든 사형집행 파견관은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晉)과 형조의랑 함부림(咸傅霖)이었으며, 처형방법은 교살(絞殺) 즉 목을 졸라 죽였고, 처형장소는 근덕면 궁촌리 입구의 살해재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형집행 후 시신을 어디에 묻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현전하는 공양왕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리와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두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기념물 제71호인 삼척의 공양왕릉에는 왕자 왕석과 왕우 그리고 시녀의 무덤이 함께 있고, 사적 제191호인 고양시의 왕릉엔 왕비의 무덤이 같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실묘일까요.

 

삼척 공양왕릉에 관한 고증자료는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주지]의 문헌기록과 오랜 세월 민간에서 전승되어온 전설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덕면 궁촌리는 고려 공양왕이 천궁하였기 때문에 궁촌이라 이름한다. 또 북방에 고들치가 있는데 이곳에 공양왕릉이 있으며, 지금도 마을사람들에게 공양왕릉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왕이 살 때에는 구리재가 있어 동문을 세우고, 사라치에 살문을 세웠다고 한다』

 

『가래, 오늘의 추촌 즉 궁촌에 옛무덤이 있는데 왕릉이라고 하며, 오늘도 밭이랑 사이를 가리켜 궁터라고 한다. 부로들이 전하기를 고려 공양왕이 원주로 추방되고 후에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옮겨 태조 3년에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 왕이 거쳐하던 곳이 백성들의 집과 같았고, 왕이 돌아감에 그 장례 또한 백성들과 같았다. 그 땅에 산지기 한 사람 있을 뿐이다』

 

이 후 1837년 가을에 삼척부사 이규헌이 새로이 봉토를 한 기록이 보이고, 1942년 근덕면장 김기덕이 개축했으며, 1977년 6월 면장 최문갑이 다시 봉축하고 매년 음력 4월 17일 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삼척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양왕 3부자가 살해된 곳이 궁촌 입구의 "사라치(沙羅峙)"인데 공양왕이 처형된 후 사라치는 "살해재(殺害峙)" "사랫재"라는 지명으로 바뀌었으며, 당시 공양왕의 추종자들이 모두 잡혀 고돌산(古突山) 골짜기에서 살해되었는데 앞 개울물이 한 달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합니다. 그후에도 조선왕조에서는 이들 시신이 있는 일대에 자객을 매복시켜 시신을 거두려는 왕씨일족과 추종자들을 죽였다 하여 살해재로 불리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후 마을사람들에 의해 공양왕 3부자의 시신이 거두어 졌다 합니다. 마을사람들이 공양왕의 시신을 메고 매장하러 가다가 행상꾼들의 발이 붙어 그 자리에 매장한 것이 지금의 고돌치 왕릉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공양왕릉 앞에 집을 짓게 되면 그날 밤 태풍이 불어 반드시 무너지고 만다는 속신에 따라 지금까지도 공양왕릉 앞에는 집을 짓지 않고 있으며, "왕릉 곁에 암장하게 되면 시체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다" "음력 8월 초하루에 벌초를 하면 어부들이 큰 횡재가 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철도개설을 핑계로 왕릉 앞의 비석과 석물을 모두 연못에 넣고 산을 깎아 메우며 능 부근에서 멸치를 말렸는데 모두 피부병에 걸려 죽었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궁촌이라는 지명은 임금이 계신 마을이라는 데에서 유래했으며, 공양왕 3부자가 거주했던 곳은 노곡면 상마읍의 "궁터"이며, 원평마을과 인접한 초곡리의 매리방은 원래 [말이방]으로 공양왕이 궁촌에 와 있을 때 마방(馬房)을 설치하였던 곳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경기도 고양시의 공양왕릉에 관한 자료는 어떨까요. 조선왕조실록에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태종대에 들어 왕조의 기반이 다져지자 고려의 역대 왕릉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태종16년 8월에 공양군을 공양왕으로 복위시킴과 동시에 왕릉에 제사를 지내게 합니다. 그러나 왕릉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종 19년에 경기도 안성군의 청룡사에 모시고 있던 공양왕의 초상화를 고양현의 묘 옆 암자로 옮겼다는 기록이 보이고, 중종 13년의 기록에는 공양왕릉이 고양군에 있다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러나 실제 공양왕의 시신이 매장했다는 사료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실묘일까요. 영월의 장릉도 유배왔던 단종의 무덤으로 지역주민의 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해 온 세력은 언제나 집권층이었다는 것과 오히려 민간의 구비전승 속에서 역사적 진실이 잘 남아있는 사례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어느 왕릉이 실묘인지 짐작되리라 봅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들어 처음으로 베풀어진 국행수륙제가 삼척의 삼화사에서 올려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륙재(水陸齋)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불교의식입니다. 이성계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왕위에 오른지 3일만에 사헌부의 주청을 받아들여 고려왕조의 왕씨일족을 강화도와 거제도의 두 섬으로 유배시켰다가 태조3년(1394)왕씨일족을 바다에 던져 무참히 살해한 것이 마음에 걸려 수륙제를 거행합니다. 왕씨일족이 살해된 지역의 사찰인 강화의 관음굴, 거창의 견암사, 삼척의 삼화사에서 수륙재를 베풀어 이들을 천도하도록 하였습니다.(태조실록, 양촌집)   <자료: 삼척시청> 

 

▶ 여러 곳의 공양왕릉(三陟恭讓王陵) 비교

 

공양왕릉은 고양 원당(고능:高陵)과 삼척 궁촌리, 고성 어철리 등 세 곳에 전해오고 있는 데 고양 원당의 묘소는 역사기록이 전해오고 있으나 나머지 두 곳은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여러 곳이 거론되는 이유는 공양왕의 재위 시기가 조선 건국과 맞물려 있어 문헌이 빈약하므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까닭이겠습니다. 1662년(현종 3)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이곳 삼척에 있는 무덤이 공양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고양 공양왕릉(高陽 恭讓王陵) <자료사진>

 

경기도 고양군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하며, 사적 제191호인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재위 : 1389~1392)과 왕비 순비의 능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양왕은 재위 4년 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에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봉하여졌고, 삼척에 옮겨져 그곳에서 태조3년(1394) 5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뒤 태종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봉릉(封陵)이라 하였습니다. 능은 왕과 왕비의 쌍릉형식으로 되어 있고, 능 앞의 석물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이 놓여있고 장명등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가 1필이 있습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 보이며, 왕릉 중간에 조선 고종 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비가 서있습니다.

 

 

고성 어철리 공양왕릉


            고성산 자락에 모셔진 함씨 시조묘와 뒤쪽의 공양왕 묘소  <자료:강원데일리안>

 

고성군 간성읍 어철리 임야 93번지에는 지금도 고 함부열의 묘소에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 비서실장쯤 되는 분이 함부열인데, 이 분이 고려34대 마지막 왕이신 공양왕의 유해를 삼척 궁촌리 살해 재에서 수습해 이 곳 어철리 야산에 가묘로 묻어놓고, 그 후손에게는 조선시대 흉흉했던 삼족을 멸하는 멸문의 법을 피하기 위한 문단속을 하며, 지금까지 제의를 올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몇 년 전부터는 왕씨 문중에서 이 사실을 알고 매년 9월 제례에 손길을 보내고 있고요. 저는 몇 년 전 그 19대 손인 함덕엽님을 만나 그 분의 함씨 족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승자만의 역사가 되는 현실을 안타까워 한 적이 있습니다.

 

고양 원당의 공양왕 무덤과 삼척 궁촌리의 공양왕 무덤 그리고 고성 어철리 야산에 쓸쓸이 묻혀있는 공양왕 무덤, ‘사라치’란 불교용어로 종지부를 찍은 곳이란 뜻인데, 고려 마지막 종지부를 찍은 곳은 어디인가요?

 

고양 원당에서 시작되어 원주 부론면 손곡리 배양산에 유배되어 고려의 마지막을 지켜보다 삼척 궁촌리 살해재에서 살해되어 고성 어철리 야산에 지금까지 가묘로 비참하게 누워있는 사라치의 비극-공양왕의 무덤.

 

적어도 제가 장편 연작시를 쓰기 위해 발로 뛰어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고양 원당의 공양왕릉에는 사랑했던 부인인 순비의 유해가 묻혀있고, 삼척 궁촌리 공양왕릉에는 두 아들이 그를 추종하던 신하와 함께 피로 묻혀있어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여러 경로로 추적하여 확인한 제 소견인데, 여러분 한번 그 순례를 해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역사를 왜곡하거나 승자만의 역사를 진실로 위장하는 학계에 일침을 가하고자 시도하는 현장역사의 한 단면이기 때문입니다. 초당의 허난설헌과 사천 애일당의 허균이 아직도 제 터를 찾지 못해 지금까지 스승 손곡 이달을 찾아다니듯 말이죠. [정근풍 컬럼니스트]  <자료:강원데일리언>

 

 

▶ 공양왕(恭讓王)

 

1345(충목왕 1)∼1394(태조 3)

고려 제34대왕

재위 1389∼1392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요(瑤). 신종의 7대손으로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국대비 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는 창성군(昌成君) 진의 딸 순비 노씨(順妃盧氏)이다.

 

1389년 이성계(李成桂), 심덕부(沈德符) 등에 의하여 창왕이 폐위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이성계일파의 압력과 간섭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왕을 강릉에서, 창왕을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재위 3년동안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몇 차례 제도를 개편했는데, 이것은 이성계 등 신진 사대부들이 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관제에 있어서 전리사(典理司), 판도사(版圖司), 예의사(禮儀司), 군부사(軍簿司), 전법사(典法司), 전공사(典工司) 등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6조로 개편하고, 첨설직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진흥을 위하여 개성의 오부와 동북면과 서북면의 부·주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하였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목적으로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게 했고, 출가하여 승려가 된 이들을 찾아내어 본업에 복귀시켰다. 그리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의 불교계파를 없애 군대에 편입시킴과 동시에 절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지방 관청에 소속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1390년 도선(道詵)의 비록(秘錄)에 의하여 한양으로 천도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 안종원(安宗源) 등으로 개성을 지키게 하고 백관을 분사(分司)하게 하였으나, 이듬해 민심의 동요로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 풍저창(豊儲倉)을 서강(西江)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으며, 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조준(趙浚)의 건의로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개혁, 신흥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하였다.

 

또한,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하였다. 1391년 이성계일파에 반대하던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정치무대는 이성계의 독무대가 되었다. 얼마없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에 의하여 이성계가 왕으로 추대됨으로써 공양왕은 폐위되고 고려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1394년 삼척부(三陟府)로 옮겨졌다가 살해되었다.

 

능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에 있는 고릉(高陵)인데,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에도 공양왕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 불안했던 왕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 16년에 이르러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참고문헌)高麗史,高麗史節要,太祖實錄,     [전도일 기자/강원 데일리안 편집국장]

 

 

2007.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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