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끝
1882년 8월, 캔버스에 유채
테오에게...
이번 주에는 숲에서 제법 큰 습작 두 점을 그렸다. 그 중 땅이 파헤쳐진 장면을 그린 작품은 상당히 괜찮다고 생각한다. 억수 같은 비가 내린 뒤에 볼 수 있는 흰색, 검은색, 갈색의 모래벌판. 여기저기서 반짝이는 흙덩이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림을 그리며 잠시 앉아 있는데 천둥이 치면서 오랫동안 엄청난 소낙비가 쏟아졌다.
그래도 그곳에서 떠나지 않고 큰나무 아래로 몸을 피했다. 비가 그치고 까마귀가 다시 날아다니자, 기다렸던 걸 다행으로 여기게 되었다. 비 내린 숲의 흙이 찬란한 검은색을 띠었기 때문이다. 비가 오기 전에 시야를 낮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가 그쳤을 때는 진흙탕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새로운 형식이 탄생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모험 덕분이지. 그러니 아무래도 평범한 작업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겠지. 모베와 그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흙덩어리를 그리면서 원근감을 살리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했다. 오늘 그림을 작업실로 가져올 수 있었다.
숲에서 습작한 다른 그림은, 마른 나뭇잎이 널려 있는 땅 위에 우뚝 솟은 커다란 초록의 너도밤나무 줄기와 흰옷을 입은 작은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걸 그릴 때 아주 어려웠던 점은, 일정하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는 나무줄기 사이에 적절한 공간을 주면서, 원근법에 따라 변하는 줄기의 형태와 굵기를 그려내는 동시에 그림을 밝게 하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숲에서 숨쉬고, 걸어다니고, 나무 냄새를 맡고 있는 느낌이 들도록 그리기가 어려웠다는 말이다.
비가 내렸지만 기름 먹인 종이에 그것을 다시 그리기도 했다. 원하는 만큼 잘 그리려면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겠지만 결국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자연 안에 모두 들어 있다. 온 세상이 비에 젖어 있는 장면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비가 오기 전에도, 비가 올 때도, 그리고 비가 온 후에도. 비 내리는 날에는 꼭 그림을 그려야겠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어제 그린 습작을 작업실에 걸었다. 이 그림에 대해 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계획한 대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많은 물품을 사야 할 것 같다. 돈은 대부분 그런 걸 구입하는 데 썼다. 지난 2주 동안 아침 일찍부터 한밤중까지 그림을 그렸는데, 작업을 계속하려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 같다. 아무래도 그림을 팔아야 하겠다.
네가 작품을 보면 비용이 더 들어도 계속하라고 말할 거다.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는 즐겁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든다면 내 포부나 기질대로 그리는 것이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데생에 시간을 쏟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작업을 하면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두 가지 생각 때문에 고민 중이다. 생각보다 일찍 유화를 시작했는데, 정석대로라면 여기에 노력을 쏟아야겠지. 그러나 고백하자면 별로 확신이 없다. 여하튼 지금은 목탄화를 연습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충분히 작업을 해왔지만, 좀더 해야 할 듯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화 습작을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쉬지 않고 계속 작업해 왔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먹거나 마시는 시간까지도 아낄 정도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습작은 대개 작은 인물화다. 꽤 큰 그림도 하나 그렸는데, 이미 두 번이나 물감을 문질러 긁어냈다. 너무 성급하다 싶을지도 모르지만, 계속해서 모든 걸 시험해 봐야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한다 해도 더 나은 그림을 위해서라면 그렇게 하자고 결심했다.
지금 그리고 있는 풍경화에는 인물이 없다. 세심함이 요구되는, 배경 그리는 연습이지. 사실 인물의 톤이나 그림의 전체적인 느낌은 배경이 어떻게 그려졌냐에 달려 있다.
유화를 그리면서 얻게 되는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은 데생에 쏟는 것과 같은 정도의 노력으로, 더 유쾌한 인상을 주는 그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동시에 그 그림이 데생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점에 있다. 한마디로 유화는 데생보다 더 많은 보상을 준다. 그러나 그전에, 정확한 비례에 맞춰 데생하고 대상을 자신 있게 적절히 배치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만일 여기서 실수하면 그후의 모든 것은 허사가 된다.
숲속에 서 있는 흰옷 입은 소녀
1882년 8월, 캔버스에 유채
가을이 기다려진다. 그때가 되면 물감이나 다른 화구가 필요하다. 아름답게 뻗은 초록의 너도밤나무 줄기와 그 주위에 흩어진 노란잎들이 만들어내는 대비 효과가 무척 마음에 든다. 인물도 예외는 아니다.
최근에 제라르 빌더스가 쓴 다소 우울한 분위기의 '편지와 일기'를 읽었다. 그는 내가 그림을 시작할 무렵에 죽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내게 나이가 들어서 그림을 시작하게 된 걸 아쉽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빌더스는 아주 불행하게 살았고 오해도 받곤 했지만, 병적으로 우울한 성격이라는 큰 결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 일찍 싹을 틔운 풀이 모진 서리를 견디지 못하고 뿌리까지 얼어서 시들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초기에는 모든 게 순조로웠지. 그는 온실 속의 꽃처럼 선생의 지도 아래 재능을 꽃피웠고 빠른 성장을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고독을 견뎌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암스테르담에서 지내게 되었고, 결국은 극도로 낙심한 채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폐병인지 다른 병 때문인지 사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삶에서 이런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리고 있을 동안에도 권태를 느꼈는데, 그럴 때에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불평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고, 자신이 넌더리를 내고 싫어하는 오락을 계속했다. 그의 삶에서 공감하는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밀레나 루소, 도비니의 전기를 읽는 쪽이 더 유익한 것 같다. 빌더스의 책이 우리를 슬프게 만드는 것과는 달리, 상시에가 밀레에 대해 쓴 책을 읽으면 용기를 얻게 된다.
밀레의 편지에도 늘 그가 봉착한 여러 문제가 보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러저러한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일을 해 나갔고,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냈다. 반면 빌더스의 편지를 보면 "이번 주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망쳐버렸다. 이런저런 콘서트나 놀이에 참석한 뒤에는 전보다 더 비참한 기분으로 돌아왔다"는 식의 글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밀레의 감동적인 면은 "그럼에도 나는 이런저런 일을 꼭 해야 한다"는 분명한 태도다. 발더스는 아주 재치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구입할 형편이 안 되는 고급 시가나 양복 재단사의 요금청구서 때문에 우스꽝스러운 한숨을 내쉬면서도 해결 방법은 찾지 못한다. 그가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초조감을 어찌나 재치있게 묘사하는지, 그걸 읽는 사람은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건 아무리 재치있게 전달된다 해도 짜증만 날 뿐이다. 오히려 "그러나 아이들에게 먹일 수프가 필요하다"는 밀레의 개인적인 고충에 더 공감하고 존경심을 갖게 된다. 그는 고급 시가나 오락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빌더스가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은 너무 낭만적이다. 그는 끝내 말도 안되는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낭만적인 환상에서 벗어난 후에 그림을 시작하게 된 건 정말 다행이다. 물론 그동안 놓친 시간을 만회하려면 끊임없이 그림을 그려야 하겠지. 그리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이 꼭 필요하고 즐거운 일이 되려면, 무악한 환상에서 깨끗이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이따금 너에게 습작이라도 몇 점 보내겠지만, 지금 작업을 작업하고 있는 유화가 너에게 보낼 만한 수준이 되고, 그것에 대해 의논할 정도가 되려면 거의 1년이 걸릴 것 같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그림이 쓸모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날이 온다는 사실은 보장하마. 처음에는 별 볼일 없던 것이 나중에 성공할 수도 있는 법이다.
무엇보다 내가 돈 버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그 목적에 빨리 도달하는 지름길이 아니겠니. 참되고 가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게 가장 기본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려면 작품이 팔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할 것이 아니라, 작품에 정말 훌륭한 어떤 것이 들어 있어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네가 유화 쪽이 더 유망하다고 본다면, 유화 작업을 계속해야겠지. 그러나 오랫동안 유화를 팔 가능성이 없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해야 한다. 데생을 계속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느리지만 실속 있게 실력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요즘 작업하는 유화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가 그림의 매매에 미치는 영향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여하튼 유화 작업이 데생 습작보다 더 재미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유화가 무미건조하지 않아서 보기에 더 좋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는 건 아니다. 나의 목표는 더 엄밀하고 강렬한 표현을 하는 것이다.
네가 작은 숲이나 산, 바다 풍경을 그리라고 한다면, 더 크고 더 진지한 것을 그리려는 내 방식과 일치하지 않지만,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내 그림이 붓, 물감, 캔버스를 소모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저 돈을 낭비하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쓴 돈을 그림이 보상해줄 수 있는지 하는 것뿐이다.
대답이 긍정적이라면, 용기를 갖고 더 힘든 일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부지런히 작업하고, 더 시간을 들여 완성하고,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지. 두 달 안에 너에게 그림 한 점을 보내마. 그러면 알게 되겠지. 대부분의 화가들이 이런 식으로 더 위대한 경지에 올랐다고 믿는다.
나는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에 원칙부터 틀린 그림, 거짓된 그림, 왜곡된 그림을 그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더 차원이 높고 더 훌륭한 그림을 그리려면 훨씬 더 많은 습작을 해야 한다. 습작은 데생으로 하는 게 좋을까, 유화로 그리는 게 나을까?
유화가 팔리지 않을 것 같다면 목탄이나 다른 것으로 데생을 하는 게 낫겠지. 그러나 혹시라도 유화를 그리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유화를 계속하고 싶다. 특히 요즘은 유화가 점점 나아지고 있고, 예상하지 않았던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단지 팔릴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다른 식으로 배울 수 있는 일에 물감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우리 두 사람 가운데 누구도 불필요한 낭비를 하는 건 원하지 않지만, 유화가 보기에 더 좋다는 건 당연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돈을 다 써버린 건 아니지만,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오늘이 20일인데. 이번 달에는 여느 때보다 생활비 지출이 적었지만, 그 대신 유화도구를 사는 데 돈을 많이 썼다. 물론 이건 한 번 사면 오랫동안 쓸 수 있다. 그래도 너무 비싸다. 네가 이른 시일에 얼마라도 보내줬으면 한다.
유화 작업이 아주 즐거운 것은 보기에 좋아서만이 아니라, 명암 • 형식 • 재료 등 늘 나를 고심하게 하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유화라는 매체를 통해 그런 문제를 다룰 수 있거든. 게다가 유화 작업을 한 후 목탄 작업을 하면 새롭게 얻는 것도 많다.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처음 몇 번 해본 걸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뻔뻔스러운 착각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코르 숙부가 내 말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다.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과거에는 어떤 그림의 가치나 매매 가능성에 대해 자신 있게 말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림의 가격보다는 자연을 탐구하는 일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되었거든.
분명한 건 유화로 습작한 것이 흑백으로 데생한 그림이나 네가 최근에 받아본 수채화보다 더 흥미 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유화에 우선순위를 주는 게 이익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네가 결정하는 게 낫겠다. 경제적인 성공을 가늠하는 일은 네가 더 나을 테고, 사실 난 전적으로 네 판단을 신뢰하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습작 몇 점을 받게 되더라도, 그림이 팔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네 제안이나 의견을 듣기 위해서라는 걸 잊지 마라. 어떤 경우에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너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림을 보내는 것이다.
너는 작은 데생을 수채화로 완성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고 했지만, 유화 작업을 하는 것이 전보다 더 나은 수채화를 그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내 그림이 그리 잘된 것 같지 않다면 거리낌 없이 충고를 해다오. 망설임 없이 네 충고를 받아들이겠다. 물론 잘못을 고쳐 나가는 일은 그걸 지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나는 충고를 듣고도 묵살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를테면, 모베가 1월에 지적해준 것을 이제서야 겨우 참고하게 되었다. 대지를 그릴 때, 그의 습작을 놓고 나눈 대화를 생각하며 작업을 하기도 했다.
1882년 8월 20일
첫댓글
비용 많이 들더라도 유화로 습작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