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한다는 점이 새로운 도전으로 많은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동안 로봇은 우리 삶의 일부분을 차지해왔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필요에 따른 도구로서 역할에 한정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 공연은 로봇이 많은 연주자들을 이끌고 곡을 완성해 가는 지휘자로써의 역할이 부여됐다는 점이 이채롭다.
‘깨어난 초원’, ‘말발굽 소리’
두 곡은 오직 로봇 ‘에버6’의 지휘 아래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한다. 사람 지휘자들의 동작 등을 로봇에 입혀 반복 학습에 의해 완성된 새로운 시도다. 로봇의 팔 동작 등 디테일 한 부분들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곡의 제목처럼 빠르고 경쾌한 연주가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기계적인 로봇의 지휘는 완벽에 가까웠다는 느낌이다. 새로운 도전에 신기하게 바라보던 관객들도 이내 찬사를 보냈다.
그리고 이어진 최수열 지휘자와 이지영의 가야금 협주곡 ‘침향무’.
독자적인 연주와 합주의 경계를 이어가는 가교로써의 역할이 이러하다는 명확한 ‘다름’을 보여주는 듯했다.
‘차가움과 따스함’, 그리고 ‘정확성과 애드립’
로봇과 사람의 지휘에 의해 연주된 음악의 흐름이 그렇게 느껴진다.
로봇이 연주단을 지휘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로봇의 통제권 아래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먼 훗날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하며 나오던 어린 시절의 만화영화처럼 어쩌면 괜한 공포가 떠오르기도 한다.
초창기 컴퓨터 프로그램 바둑을 두며 번번이 지던 때도 그랬다. 그러다 공포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으니 지난 2017년 컴퓨터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과의 승부였다.
“아직은 컴퓨터가 인간을 따라올 수 없다”던 이세돌 기사는 1국 패배 후,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것과 다르게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심스러워 했다.
그의 얼굴에서 당혹감과 공포마저 읽혔다.
이날 로봇 ‘에버6’의 지휘에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이 떠오른 까닭이다.
그리고 이어진 음악적 유희 시리즈 ‘감’
최수열과 ‘에버6’의 공동 지휘 무대다.
독자적인 각 연주자들을 로봇 ‘에버6’가 이끌어 가고 최수열은 그 옆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각 연주자들의 장점을 끌어내야 하는 이 연주에서 로봇의 지휘는 다소 투박하고 불협화음마저 나는 듯 음이 산만하다. 때로는 듣기 거북하다.
그때마다 사람 지휘자 최수열이 지휘봉을 들어 연주자들을 재정비하고 음악을 완성해 다시 로봇에게 지휘권을 넘기곤 했다. 곡이 끝날 때까지 이러한 일은 몇 차례 반복됐다. 즉흥연주에 대해 아직 로봇은 미완의 단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로봇을 어시스트함으로써 상호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간다는 점에서 이채롭게 봤다. 이것이 비단 사람과 로봇간의 관계에 국한 된 것일까! 그동안 명멸했던 수많은 인간관계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관계쉽에 대해서도 가늠해 보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했다.
망상이 현실이 되는 시대
수많은 과학자들이 당시에는 황당한 생각들을 현실로 만들어 왔다. 이것이 사람들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도구로서 역할을 충실해 해내곤 한다.
매번 라면을 끼니로 채우던 청년의 시절. 미끄러지는 젓가락을 보며 끝부분에 쇠톱으로 반쯤 썰어 미끄러짐을 방지했으면 좋겠다는 황당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위와 같은 젓가락이 특허를 내고 시장에 나와 많은 이들로부터 호응 받는 것을 보고는 비단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구나 했다.
그리고 일에 치이던 어느 날, 기초자료와 발로 뛰어 습득한 2차 자료를 토대로 사람의 EQ와 패턴을 컴퓨터에 넣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기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럴 시간에 일이나 하라”는 선배의 핀잔을 들었지만 불과 10여 년도 안 되어 실제로 영국에서 이런 컴퓨터가 나오기도 했다.
가족의 붕괴와 사회현상 등으로 1인 가구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초창기 “취사를 시작하겠다”는 전기밥솥의 알림에 혼자가 아니라고 위안 받고 “빅스비, 뭐해?”하며 말을 걸던 친구의 모습에서 그의 빈자리를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로봇은 인간의 도구로서의 역할에 국한되지 않고 관현악단을 지휘하던 ‘에버6’처럼 사람과의 감정을 교류하는 대등한 입장의 동반자로 나타나지 않을까.
찾기에 지쳐버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에 걸맞게 빈자리를 채워 줄 벗, 그 이상의 파트너. 머지않은 시대에 나타나 우리들에게 위안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과학자들이여, 분발하라! 내가 늙어가노라.